한국 초기 가톨릭교 신자였던 이벽(李檗)·권철신 등이 최초로 가톨릭 교리를 강론하던 가톨릭교 성지.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놓여 있다. 어느 때인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았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암자가 바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천진암이다.
▲ 백년 성당 건립 예정지 올라가는 길
▲ 1779년(정조 3) 학자 권철신(權哲身)은 경기 여주군 금사면(金沙面)에 있던 주어사(走魚寺)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의하던 중, 정약용 (丁若鏞) 등과 함께 강학회(講學會)라는 학문강의 모임을 가졌다.
결국 천진암 강학회는
서학(西學)을 서교(西敎)로, 천주학을 천주교 로, 즉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변환시킨 일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천진암은 경기 광주시 퇴촌면 (退村面) 우산리(牛山里)에 있는 사찰터로서, 현재는 이벽·권철신·권일신형제와 이승훈·정약종의 묘소가
이장되어 있으며 성역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 입구의 성당에서는 아침미사가 봉헌되고있다.
▲ 100년 성당 건립 예정지로 올라가는 길 양옆의 무궁화와 파란 하늘.
▲ 대형 십자가 앞에서 나는 이곳 Daum의 Bloger인 임마꿀라따 수녀님의 언제나 건강하심을 위해서 잠시 기도를 했다.
▲ 백년 성당 건립 예정지
이곳 3만여평의 대지를 조성해 ‘천진암 대성당’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는 공사기간이 무려 100년이나 되는 대역사. 오는 2079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 현재 이곳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인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의 묘가 모셔져 있다.
▲ 다산 정약용의 바로 위의 형 정약종의 묘소
▲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는다.
하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바로 이곳 천진암에서 이미 교회사가 시작됐다.
당시 천진암 주어사에서는 당대의 석학 녹암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일신 형제와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들은 광암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강학회가 끝날 무렵 이벽이 지은 '천주 공경가'와 정약종이 지은
'십계명가'는 이러한 강학회의 결실을 잘 드러내 준다.
이 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가장 먼저
이벽은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재의 정약현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 일신 형제들에게 전교한다. 또 그해 가을에는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키고 수도 한 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다.
한국 교회의 발상지로서 천진암은 교회사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지난 1960년에 와서야 이곳 지명들이 문헌에 근거해 밝혀졌고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답사를 통해
한국 천주교의 요람으로 천진암의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이곳 휴게실에서는 휴식을 취하며 차를 셀프로 타마시면 된다.
▲ 프랑스 촬영팀이 와서 성지를 구석 구석 열심히 찍고 있다.
▲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시는 수원 카돌릭 대학교 교수 신부님 (우측)
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광주 인터체인지에서 45번 국도를 타고 팔당댐 쪽으로 3km쯤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해 88번 지방도를 타고 퇴촌면을 지나 5km쯤 가면 다시 삼거리. 이곳서 ‘천진암’ 이정표를 따라 7km쯤 직진하면 계곡 끝에 커다란 십자가가 보인다. 입구서 가파른 아스팔트 길이 100m쯤 오르면 대성당 부지가 보인다. 이어 천진암터 오르는 숲 속으로 들어서면 곧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비’가 반기고, 곧 강학당터, 샘터, 천진암터, 5위 묘역 등이 나타난다.
다음 코스 클릭■☞ 정약용 생가'MTB등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긋불긋 단풍산행지 (0) | 2005.08.23 |
---|---|
운길산 수종사 (0) | 2005.08.21 |
정약용 생가 둘러보기 (0) | 2005.08.21 |
영흥도의 저녁바다 (0) | 2005.08.18 |
노을 월곳 (0) | 2005.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