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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홍천 백우산 '용소계곡'

by 한국의산천 2022. 7. 7.

[라이프] 길, 책을 만나다 

⑥ '걷기,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여정' - 홍천, '용소계곡 숲길'

박대영 기자  이메일 보내기 

작성 2021.09.09 15:20 

수정 2021.09.0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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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계곡의 명물인 '큰 너래소'

마치 섬인 듯 산 위로 구름이 걸려 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비를 함께 맞는 것

산으로 가는 날, 비가 왔다.

목적지에 가까워질 즈음 기다렸다는 듯 비가 토닥토닥 차창을 두드렸다. 

일기예보를 챙겨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예보의 정확성이 그날만큼은 남달랐다. 

이를 어쩐다? 산으로 가는 길이기에 걱정이 없는 게 아니지만, 어쩌랴! 왔으니 그냥 가는 수밖에... 

한편으론 비를 맞으며 걷는 낭만을 꿈꾸게도 된다. 

사실 세찬 비를 맞으며 길을 걸어본 적도 오래된 일이니 지금쯤 추억 하나 다시 쟁여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일행들이 있으니 외롭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게 짧은 결심을 하고 일행들과 멀찍이 떨어져 걸어가는 와중에 시골 골목길을 막 벗어난 차 한 대가 내 곁에 와 멈춘다. 

우산도 없이 비닐 조각 하나를 망토처럼 두른 채로 걸어가는 낯선 내 모습이 의심스러웠나 보다. 아니면 안타까웠던지... 마을의 터줏대감 같으신 어른께서 창문 틈으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신다. 백우산을 간다는 대답에 '아이고야. 이리 비가 오는데 산을...?' 여간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니다. 나야 뭐... 눈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그래도 뭔가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표정으로 '용소계곡까지 가느냐'는 질문과 함께 '백우산 만만하게 보지 말고 잘 다녀오라'는 당부와 인사를 건네신다.
 

비에 젖은 숲은 더욱 푸르다.

익명으로 사는 데 익숙한 도시인에게 시골 분들의 남다른 관심은 가끔은 낯설고 어색한 경험일 수가 있다. 하지만, 나야 뭐 원래가 촌놈이니 그 관심과 배려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흔히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데 있어 미덕으로 치는 원칙이 있다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일 것이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그것이 서로를 불편하지 않게 하면서도 배려하는 방법이기도 한 까닭이다. 하지만 늘 그 '적당한'의 모호함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적당함이란 말 속에는 다들 자기만의 기준과 아집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던 '순수의 시대'에 걸맞는 현대판이 산을 오르고 길을 걷는 것이라고. 그 행위만이 어떤 다른 수단의 도움 없이 오로지 몸이라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하고, 단순하면서도 정직한 움직임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잃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 역시 '순정'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관계의 답 역시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의 순정을 믿어 주는 것. 그것이 성가신 참견이 아니라면 그 마음의 순수함을 인정하는 것. 시골 어르신의 마음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비가 오는 날, 누군가를 돕는 것은 우산을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했었다. 돕는 것은 관심과 걱정이다. 게다가 지금 나는 산으로 순수(?)를 찾아 떠나는 사람이 아니던가.

산으로 가는 길 곳곳에 잣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하다.

나를 찾는 방법은
나를 잃는 것

백우산(白羽山, 894m)으로 가는 길의 초입은 풀밭을 헤치며 나아가는 여정이다.

길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님으로써 만들어진다지 않던가. 그렇게 보면 발목을 스치는 풀들의 아우성을 들으며 걷는 한 걸음 역시 땅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흔적이면서 길이 되기도 할 터이다. 빗줄기를 헤치며 나아가는 여정이라 그랬을까. 마음마저 차분해진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묵묵히 걸음에 집중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기야 비 맞은 생쥐 꼴을 해서는 달리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 와중에 퍼뜩 깨닫는 사실 하나. 빗물에 담뿍 젖어서인지 초록의 빛깔이 더욱 선명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색은 더욱 두텁고 깊다. 풀잎이든 나뭇잎이든 손이라도 닿을라치면 금방 푸른 풀물이 배어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나이 먹어 웬 감상이냐고 타박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풀잎에 맺혔던 빗물에도 푸른색이 가득했더랬다.

백우산은 대중교통을 이용한 접근이 불편해 타 지역 사람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높은 산을 오를 때 느끼는 짜릿함은 없지만 올망졸망한 능선을 오르고 내리는 맛이 있어 지루하지는 않다. 그리고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의 짜릿함이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일뿐이니, 백우산의 높이가 차라리 맞춤하다. 산도 산이지만 백우산이 이름을 얻은 건 아무래도 용소계곡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백우산이 나름 이름을 얻은 건 용소계곡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비를 맞으며 한발 한발 내딛다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이 순간, 문득 자유를 떠올린다.

쏟아지는 비마저도 멈추지 못하는 이 경쾌한 발걸음이 자유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마음이 열리면 그곳에 자유가 있다더니 실상이 그러했다.

산이라는, 그것도 비가 오는 강원도의 어느 산자락을 즐거운 마음으로 걷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더니 딱 그 마음이다.

그래서인지 모든 게 생경하지만, 또 모든 게 익숙하다.

어린 시절 비를 맞으며 천방지축 뛰놀던 그 마음이 이러했을까 싶다. 학교 갈 때 우산이 없어서 맞던 그 비와,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맞던 그 비가 달랐음을 산에서 다시금 깨닫다.

그래서일까. 빗줄기가 굵어지니 차라리 더 자유롭다. 일행들도 눅눅한 습기와 더위에 비옷을 벗어던지고서는 환호작약이다. 그런데도 살면서 비 한번 제대로 맞아볼 생각을 왜 못했을까. 비 한번 맞는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저 헛웃음이 난다. 그래야 한다는 강박으로, 또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아이들의 마음으로 살아도 좋았건만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수많은 이해와 수많은 시선과 수많은 금기는 비를 시원스레 맞을 수 있는 기회조차도 막아버렸던 것이다. 그 이해, 시선, 그리고 금기를 벗어버렸으니 이리도 자유로울 수밖에... 하지 못할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실상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할 일과 못할 일의 경계는 시도 때도 없이 사방에서 출몰하며 우리를 감시한다.

'나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잃는 것'이라 했던 간디의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열려야 했던 것이다. 내가 내 안에만 머물지 않을 때, 내가 어느 것에 묶여 있지 않을 때, 그렇게 나를 잃을 때, 두루 보고 두루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정된 세계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또 알게 하기 때문이다.
 

숲 가득 비와 바람이 연주하는 음악이 흐른다.

그러던 차에 깨닫는 둔탁하면서도 청아한 소리들의 변주.

걷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 옛날 화전을 일구며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쌀과 소금을 지고 넘나들었다던 군넘이 고갯마루에 올라 물끄러미 숲을 바라보다 소리를 깨달은 것이다.

후두둑~ 쏴아~

타악기의 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울림인 듯, 하프 연주자가 현을 뜯어 흩뿌리는 떨림인 듯 적당한 볼륨의 소리가 숲을 맴돌다 슬그머니 내게로 온다. 비와 바람의 합주였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실상은 조악한 불협화음이건만 눈과 귀로 몸으로, 풍경 안에서 듣는 그들의 변주는 그 어떤 훌륭한 협주곡보다도 깊고 그윽하다. 마음을 시큰하게 하는 울림이 있다. 이 바람소리에, 이 빗소리에 누군가는 울컥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저 이 소리의 성찬 안에서 오래토록 머물고 싶어진다.

바로 이 풍경과 이 느낌 때문에 집을 나서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길 위에서건 세상살이에서건 열려야, 열린 마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앎이 실천과 동행하지 않을 때 '한 발 걸음'이라고 했었다. 한 발로 걷는 걸음이 제대로일 리 없기 때문이다. 늘 부족함이 명치끝을 아프게 짓누른다.

고요한 풍경이 그저 아득하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꿈꾸는 일

20여 년 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西安)까지, 약 12,000km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도보로 완주한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대장정에 오른 그는 전직 언론인 출신의 베르나르 올리비에. 그는 1년에 3개월씩, 4년에 걸쳐 수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문화와 척박한 지형을 극복하고 끝내 완주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야 만다. 65세의 나이에 말이다.

그런데 실크로드 도보여행에서 자신의 불행은 그가 가졌던 직업이 기자였다는 사실이라고 회고한다. 의심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만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세상을 바라본 자신의 편협함이 여행의 방해물이었다는 고백이면서 안타까움이었다는 말이다.

여행이란, 특히 도보여행이란 기존의 가치관이나 지식에서 벗어나, 이전에 알지 못하는 지역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끼어드는 기존의 지식과 편견이 존재하는 사실마저도 왜곡하고 방해했던 것이다. 그곳이, 그곳에 사는 그들이, 그들의 문화와 삶이 어떠하든 있는 그대로 존중할 때라야 단순히 '보는' 관광을 넘어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실체적 여행이 될 수 있다는 자성이기도 하다. 편협한 경험과 지식은 늘 우리의 경험의 폭을 제한하고 말기 때문이다. 열리지 않으면 경험할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데도 말이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지는 일이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中

 

비가 온 탓인지 여린 폭포에 물길이 열린다.

프랑스인인 올리비에가 실크로드를 걸으며 마주치는 문화충격은 우선 이슬람문화다. 실크로드의 여정 대부분이 터키를 시작으로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을 거쳐 마지막 도착지인 중국의 시안에 이르는 여정인 까닭에 그가 걸어야 했던 지역의 대부분이 이슬람 국가였기 때문이다.

보통의 비이슬람권 사람들에게 이슬람은 막연히 두려운 존재다.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모습이 전쟁과 테러, 그리고 부르카가 상징하는 여성차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리비에가 맞닥뜨린 첫 이슬람문화는 다름 아닌 '손님에 대한 환대'였다. 그가 누구든 여행자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대접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의무였던 것이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에게 '환대'란 '손님'인 여행자에게 모든 권리를 갖게 한다는 의미로, 너의 집이 그의 집이며, 너의 음식을 그와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손님을 극진히 대접함으로써 그들은 나중에 알라의 왕국에서 보답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후 올리비에가 달리 묵을 곳이 마땅치 않은 마을에 도착할 때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당연히 그 마을의 촌장 집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그가 놀란 것 중 다른 하나는 거리에서는 부르카로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던 여성들이 집 안에서만큼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집안에서만큼은 간편복은 물론이고, 아버지나 남자 형제와도 격의 없이 지낼 뿐더러, 이교도이면서 외국인인 그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말을 건네는 등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에 올리비에는 '사랑이나 관능을 향한 갈증은 베일 속에 묻힐 수 없다.'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평가를 내린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낯선 곳에서의 낯선 경험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란에서는 장딴지를 남에게 내보이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배변 보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거부감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곳의 화장실에는 빗장조차 없었던 것이다. 다리를 보이는 건 안 되고, 엉덩이를 보이는 건 되는 그 '다름'에 그가 받은 문화충격은 절정을 이룬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낯선 곳에서의 낯선 경험이 아니던가. 우리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30여년의 세월을 몸담았던 직장을 뒤로 하고 은퇴자가 된 올리비에가 실크로드 횡단이라는 어쩌면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이유 역시 낯선 것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예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아직도 만남과 새로운 얼굴,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고집스럽고 본능적인 욕망'이 남아 있다던 그는 '아직도 머나먼 초원과 얼굴에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고 그의 책에 적었다. 그의 여정이 전 3권(*나중에 자신의 고향인 리옹에서 이스탄불까지 약 2,800km을 추가로 걸어 한 권의 책을 더 냈다.)인 <나는 걷는다>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길은 저 숲 너머로 이어진다.


깊은 우물 속 같은
숲의 고요

군넘이 고갯마루에 서면 이쪽이냐 저쪽이냐 어디로 갈 것인지를 표지판이 냉정하게 묻는다. 이쪽은 백우산 정상이고, 저쪽은 용소계곡 방향이다. 우리는 저쪽으로 간다.

홍천군 북서쪽 오지에 속하는 백우산은 주능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큰 두 개의 물줄기를 거느리고 있다. 북쪽으로는 소뿔산, 가마봉, 백암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인 경수천이 흐르고, 그 자락에 용소계곡(龍沼溪谷)이 있다. 백우산 남쪽으로는 홍천강 발원지인 미약골 물줄기와 백암산 가령폭포가 흘려보내는 수하천이 합쳐져 서쪽으로 흐르는 내촌천이 있다.

비는 오락가락하면서도 그칠 기미는 보이질 않는다. 가을장마라더니... 푸짐한 빗줄기에 분위기는 으뜸이다. 아쉬운 점은 가야할 길이 아직도 구만리라는 사실이다. 빽빽한 숲의 틈으로 난 좁은 길은 꼬불꼬불 하염없이 이어진다.

인적 드문 좁은 길을 제 땅인 양 차지하고 있던 풀들이 무심한 행인의 발밑에서 소리도 없이 스러지고, 비 맞은 이파리들이 저도 놀라 토닥토닥 아우성을 내지른다. 그런데도 오래된 숲은 고요하다. 아! 소리가 있어도 고요할 수 있구나. 깊은 숲은 그 자체로 고요의 땅이었다. 깊은 우물 같은 고요... 걷는 이조차 소리 낼 수 없는 고요다. 행여 작은 소리 하나 떨궜다가 우물에 빠진 소리의 울림으로 돌아온다면, 그가 먼저 놀랄 것이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것은 지나온 길을 다지는 일이면서 가야 할 그곳을 꿈꾸는 일이다.

이제 길과 나 둘 뿐이다.
헤어질 이유가 없다.

올리비에는 '도보여행의 결과는 정직하다'고 했었다. 오로지 몸이라는 수단을 통해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올리비에의 표현에 따르면 '몸 전체를 던지는 일'이다. 그것이 여러 달을 쉼 없이 걸어야 하는 여정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 스스로 심한 이질에 걸려 프랑스로 후송된 경험까지 있었으니 그 절실함이야 오죽할 것인가. 게다가 그는 홀로 미지의 곳을 걷고 있는 중이 아니던가.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욕구가 걷고 또 걷는 행위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나를 앞으로 떠미는 이 통제되지 않은 충동은 내가 애써 숨기려 하는 어떤 두려움과 뒤섞여 있다. 끝까지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수전노가 동전을 긁어모으듯 1km라도 더 모아두는 것이다.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는 한 그리고 배낭을 짊어질 힘이 남아 있는 한, 목표에 이르길 갈망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中
 

길을 걸으며 꿈을 꾸고 고독을 느끼며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걸은 보람을 찾다.

예순을 넘긴 중늙은이의 몸으로 미지의 땅에서 겪어야 할 수많은 난관과 두려움을 감수하며 12,000km라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긴 여정을 떠나게 한 그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던 것일까?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의 땅을, 그것도 황무지와 사막의 땅을 기어이 걷게 한 그의 열정의 바탕은 단순하지만 중요한 것이었다. 바로 '침대 위에서 죽지 않기 위함'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침대 위에서 뒹굴며 사는 인생이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증표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자신만의 도약을 꿈꾸는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삶의 끝이야 이미 정해져 있다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만도 없지 않은가. 그 방법이 걷기였던 셈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삐걱거리기만 하던 무릎도 멀쩡해지는 마법이 펼쳐지는 곳, 그곳은 길이었다. 그러니 걷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여행은, 또 걷기는 자신을 버리고,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포장하는 모든 요란한 옷들을 벗어 던져버리는 의식이기도 했었다. 그가 가야 할 곳은 걸어온 곳이 아니라 걸어가야 할, 미지의 그 곳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다시 뛰어올라야 했고, 계곡 나아가야 했다.
 
'지평선 너머로 길게 이어진 길은 날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저 길은 나를 마음대로 부릴 것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이제 길과 나 둘 뿐이다. 헤어질 이유가 없다.(......) 길은 앞으로 계속 가고자 하는 욕망을 주었다. 더 멀리 가는 것, 나를 더욱 버리는 것, 내 단출한 보따리를 가볍게 하는 것. 준비하며 지혜롭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中

길을 걸으며 꿈을 꾸고 고독을 느끼며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걸은 보람을 찾는 것,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이면서 걷는 이유였다. 비록 세상이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생각이 허락하는 속도로 느리게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걸을 누군가를 기다리며 작은 다리 하나가 계곡을 잇고 있다.

변방(邊方),
'자기(自)라는 이유(由)'로 살 수 있는 곳

산 아래 어느 민박집 처마를 빌려 점심 겸 간식을 먹었다.

낯선 이들의 느닷없는 들이닥침이 조용한 민박집의 일상에 큰 불편이자 방해였을 테지만 선선히 처마 밑 평상을 내어주신 친절이 고맙다. 그분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이 우중(雨中)에 어디 가서 밥 한술이라도 먹을 수 있었을까.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따뜻한 배려다. 소찬이지만 즐거운 마음까지 비벼 허기를 면한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내가 알 바가 아니라는 양 그저 하염없다.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배부른 용트림이 자자할 무렵, 산의 영역이 끝났음을 고하기라도 하는 양 길의 끝에서 계곡 물소리가 요란하다. 용이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잠시 쉬어가려 내려앉은 곳이라는 뜻을 가진 용소계곡(龍沼溪谷)이다. 백암산에서 발원해 가령폭포를 지나온 물길은 약 12km 길이의 용소계곡을 지나 홍천강으로 흘러든다. 그러니 계곡과 동행하는 숲길도 딱 그만큼이다.

용소계곡의 숲길은 널다랗다. 지나온 길에 비하면 그야말로 신작로다. 유유자적, 천천히 감상하듯 걸어도 충분하다. 길도 좋고 허기까지 면하니 몸 안의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듯 활개를 친다. 보이는 풍경이며, 들려오는 소리며, 빗방울이 핥고 지나는 간지러움까지 느껴질 지경이다. 그러니 물소리야 오죽하랴. 계곡을 따라 낮게 흐르는 소리는 매끄러우면서도 투박하다. 계곡 상류의 여린 물줄기가 그렇듯 흐르는 리듬조차 소박하고 차분하다.
 

용소계곡의 명물인 '큰 너래소'다.

사실 이곳 홍천은 내가 머지않은 때에 터를 잡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곳이다. 기왕이면 이곳 용소계곡과 지척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으니 발품을 열심히 팔아야 할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니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별을 헤며 막걸리 잔을 들어 먼 길 찾아온 벗과 풍류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설레니 이를 어쩐다?

헤벌쭉 웃음을 흘리며 걷다가 만나는 너럭바위. 계곡을 세차게 흐르던 계곡물도 쉬어갈 참인가 보다. 

이런 깊은 산중에 담(潭)이 있었다니, 이름하야 '너래소'다. 오늘이야 비가 왔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물놀이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을, 딱 그런 곳이다. 나 역시 옷을 훌훌 벗고 비와 땀에 젖은 몸일랑 헹구고 싶은 마음 굴뚝같으나 아서라, 오늘은 아니다. 그저 손 한번 담가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전국 시대 초나라의 굴원은 그의 시 <어부>에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했으니 이 맑은 물에 무턱대고 몸을 드밀기는 저어하다. 손이 깨닫는 시원함으로도 충분하다.
 

자유는 자기라는 이유로 걸어가는 것이다.

요즘 들어 마음에 두는 단어가 있다 그 단어는 '변방(邊方)'이다. 중앙에서 멀리 밀려난 자리인 가장자리를 뜻하는 그 말이다. 모두가 가운데, 더 나은 자리,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시대에 변방이 가당키나 할까마는 나이를 먹어 가는지 변방이라는 가장자리가 어쩌면 가장 편한 자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살아온 여정 자체가 변방에서 변죽만 울리고 있는 중이라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신영복 선생은 변방이야말로 '자유로운 공간'이라 했었다. 나 역시 선생의 성찰에 공감이 된다. 변방을 자처하면 굳이 비굴해질 이유도 없고, 더 나은 것을 탐하지 않으니 누군가와 다툴 일도 드물고, 게다가 주목받지 않는 가장자리의 여유조차 누릴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자유가 아닌가 말이다. 선생의 말대로 '자기(自)라는 이유(由)'로 살 수 있는 공간이 변방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변방이야말로 노장 사상의 핵심인 상선약수(上善若水)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앞을 다투지 않고, 낮은 곳을 자처하니 변방과 물은 동격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다만 물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데 반해 변방은 그러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변방에 머문다 함은 번잡한 중앙을 포기한 탓에 고요히 머무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 고요함이 스스로를 숙성하고, 그 숙성의 시간은 창조의 시간으로 변화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작은 것이나마 열매를 맺어 주변과 나눌 수 있다면 물의 발뒤꿈치쯤에는 도달하지 않을까.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산을 떠나 계곡을 굽이쳐 내달리는 물이 결국 바다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은 없지만 오늘따라 계곡을 흐르는 물을 보노라니 그 목적지가 굳이 바다이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 참고로, 용소계곡은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없어 도보 탐방만 가능한 곳이다. 그러니 이 머물고픈 어느 계곡, 변방의 물이 궁금하거든 반드시 걸어서 올 일이다.

비 개인 하늘 저편, 구름이 산으로 간다.


비가 잦아들자, 계곡 너머 산 위로 구름이 몰려간다.

사람들이 산 아래의 집으로 가듯, 그들도 산 너머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구름의 모습에 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고요하면서도 몽환적인 그들의 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차라리 헛웃음이 난다. 살면서 흔하게 보아온 풍경이건만 지금 여기, 이곳에서의 느낌은 특별하다. 그들은 떠나가는데 뒤늦게 나는 빠져든다. 그러니 이들을 두고 어찌 제 발길만 재촉할 수 있으랴. 배웅은 핑계고 속셈은 오래토록 산으로 가는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좋을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어느 물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앞으로 누군가 떠나갈 일이 있거든 무릇 저 비구름처럼 기척도 없이 우아하게 떠날 일이다.
 

계곡과 길은 오랫동안 동행한다.

행동으로
참여하라

<윌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보도사진 분야의 선구자였으나 경영상의 이유로 폐간된 미국의 주간지 <라이프>의 폐간 직전 상황을 다룬다. 그런데 무심코 보던 영화에서 <라이프>의 모토가 마음을 두드린다. 그 모토는 이렇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 <라이프> 모토

인생이란 어쩌면 단순한 이치 안에서 그 이치를 깨달으며 살아가는 것이건만, 그걸 모르는 우리는 다른 먼 곳에서 헤매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기라도 하는 양 무턱대고 달려가는 중인 것은 아닐까. 그 특별한 것마저도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라면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든 게 아닌가 싶다.
 

계곡 저편 가느다랗게 길이 이어진다.

실크로드를 완주한 올리비에는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킨다고 했었다. 고독 속에 스스로를 감금하며, 수많은 어려움, 시련을 겪은 뒤에야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삶의 진실이란 워낙 날랜 놈이라 결코 잡히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 확신의 결과는 걸어온 느린 길 위에서 고요와 몰입, 영혼의 평화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삶은 지나온 그 여정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갈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행동으로써 참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지난한 실크로드 완주 과정에서 길어낸 지혜였다.

'내게 지혜란,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활기차고 따뜻한 삶이다.(......) 나는 은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내 모든 것을 쏟아 참여하면서 인생을 곱씹어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다. 나는 지혜를 찾았다. 내게 있어 지혜란 잠자코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다.'


길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까?

우리는 흔히들 말한다.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어떤 길을 묻고 있는 것일까. 올리비에에 따르면 끊임없이 참여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다만 참여의 대상과 행동의 방향은 각자 몫일 것이다.

그래서 길을 걷다 보면 '앎의 욕망'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궁금해지는 게 많아지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은 기본이고, 시시때때로 만나는 모든 것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하다못해 여린 잎사귀에 맺힌 이슬을 보고도 그 적절한 표현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면 보잘 것 없는, 또 사소한 그 알고자 하는 욕망들이 작은 변화의 시작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다. 대체로 모든 일은 그 작은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만 안다는 것의 지향점은 영화 <역린>으로 유명해진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뜻을 품은 <중용> 23장의 내용에서 '일'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치환해보면 그 답 비슷한 게 보이지는 않을까.
작은 일(알고자 하는 마음)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알고자 하는 마음)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 <중용> 23장

여행이란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

길의 끝에서 지나온 길을 생각한다.

여행이란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었다. 

떠남은 자기로부터, 자기 공간으로부터 떠나는 것이고, 만남은 떠난 그 자리의 모든 것과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다. 

나 역시 떠나고 돌아오는 여정을 늘 반복하지만 무엇을 만나고 왔는지는 사실상 가물가물하다. 

자기를 온전히 떠난 사람만이 새로운 것들과 만날 수 있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몸만 여기저기를 헤맨 탓이리라.

하지만 더 걷다보면 무언가 얻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기야 그저 그 장소, 그 순간에 머물기만 해도 괜찮은... 그래서 무언가 담기는 게 있거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굳이 알아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을라고... 

혹여 아는 것이 있다면 걷는 걸음 속에서 얼떨결에 발견하게 되리라.
 
'도착하기만을 원한다면
달려가면 된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걸어서 가야 한다.' - 장 자크 루소, <에밀> 中

산과 산 사이, 계곡도 길도 흘러간다.

글 : 박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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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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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호흡 몰아쉬며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 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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