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가 빚은 술 한잔에 詩 한수 띄워 마시고, 월영교 ‘초승달 배’에 기대어 달빛을 희롱하네
[아무튼, 주말]
선비의 멋과 맛 따라가 본
설 맞이 안동여행
박근희 기자 / 입력 2022.01.29 03:00
종가마다 술독에서 집안의 내림술이 부지런히 익어가고, 골짜기마다 옛 사람들의 풍류가 깃들어 있는 안동은 그저 ‘유서 깊다’는 표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다.
어떤 결핍도, 흉허물도 가려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아한 풍경이 기다리고, 세월이 스민 집마다 닮은 듯 다른 맛과 멋이 마중 나온다.
설을 앞두고 안동을 지키는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옛것 그대로인 듯하나, 시나브로 새로워지고 있는 온고지신(溫故知新) 공간들을 찾았다.
"병 머리에 한지를 대고 이렇게 두 손으로 쓰다듬으면 주름이 예쁘게 지지요. 쓰다듬을수록 예뻐지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겨~" 농암종가의 17대 종부 이원정씨가 큐레이터 출신 며느리의 감각과 아이디어를 보태 탄생시킨 술 '일엽편주'의 마지막 포장 단계인 '병 목'을 매며 말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일엽편주’ 빚는 농암종가
두꺼운 얼음장이 뒤덮은 낙동강은 멈춘 듯했으나 흐르고 있었다. 볕이 파고들어 유리처럼 얇아진 얼음 틈새로 물소리가 요란했다.
도산면 가송길 농암종택. 영남 강호문학(江湖文學)의 대가이자 ‘어부가’를 지은 농암 이현보의 17대 종손이 지키는 종택엔 두 해 전 작은 ‘소란’이 있었다.
종택의 가양주가 ‘일엽편주’란 이름을 달고 조심스레 문지방을 넘어 세상 밖으로 나아간 것이다.
600여 년 전 구름이 달빛을 가려 흐릿한 어느 날 저녁, ‘분강(汾江·안동댐으로 수몰된 옛 분강촌 앞을 흐르던 낙동강)’의 귀먹바위[聾巖]와 자리바위[簟石]에서 즐겼던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의 유상곡수(流觴曲水·물에 띄운 잔이 자기 앞에 닿기 전까지 시를 짓는 것) 풍류를 담았다는 농암가의 술은 안동 종가는 물론 세간의 관심이 되기에 충분했다.
일엽편주에 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이번 설엔 정·재계 유명 인사들까지 주문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래서 그런지 종택 맞은편 술도가는 설을 앞두고 더욱 분주한 모습이었다.
농암종가의 고부가 만들어낸 술 '일엽편주'의 이름은 농암이 지은 '어부가' 한 구절을 따왔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일엽편주는 경주 양동마을에서 시집 왔다고 해 ‘양동댁’이라 불리는 17대 종부 이원정(62)씨와 며느리 권잔디(38)씨 고부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서울 유명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한 감각을 살려 가양주를 브랜드로 만들어보자는 며느리 제안에 시어머니가 흔쾌히 응했다. 며느리는 브랜딩과 유통·판매를 담당하고, 술은 시어머니 이씨가 술도가에서 직접 만든 누룩과 깨끗한 쌀, 물 3가지 재료를 사용해 전통 방식 그대로 직접 빚어낸다.
인근 주민들이 직원처럼 일을 도와주고는 있지만 쌀 씻기부터 포장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병의 목을 매는 일’까지 전 과정이 종부의 정성을 거쳐 완성된다.
누룩이 담긴 무거운 채반을 번쩍 들어 올리는 이씨를 보고 “힘들지 않으시냐” 물으니 이씨의 해사한 웃음이 찬 공기를 녹였다. “요 정도도 못 하면 어에(어떻게) 술을 하니껴.”
종가에서 만들어 즐기던 술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하면서 가장 조심스러워진 사람은 종손 이성원(69)씨다.
품격과 예를 갖추기 위해 일종의 시음회 겸 신고식인 고유(告由)도 정식으로 치렀다.
이성원씨는 무심한 말투로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과 같아 대단히 조심스럽다”고 했지만, 아내이자 종부인 이씨가 빚는 술맛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엽편주’라는 술 이름은 농암의 ‘어부가’의 한 구절. 퇴계가 존경과 애정을 담아 농암에게 친필로 써준 농암의 ‘어부단가 5장’ 중 ‘일엽편주(一葉扁舟)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 두고(하략)’에서 ‘一葉扁舟’를 글자 그대로 집자하고 인쇄해 병 목에 둘렀다.
이름 덕분일까. 시를 녹여낸 술 한잔을 시음(試飮)하는 것이 마치 ‘어부가’ 한 수를 시음(詩吟)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종부 이원정씨는 “일엽편주를 세상에 내놓으며 많이 바빠졌지만, 가족 간에 공통 화제가 생겨 대화가 많이 늘어난 것이 제일 좋다”고 했다. 전통 방식을 고집하다 보니 생산량이 많지 않다. 고택 체험을 하는 숙박객 외에 온라인으로만 한정 수량을 선보인다. 품귀 현상을 빚는 건 어쩔 수 없다.
농암종택의 솟을대문으로 들어서 길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강각'은 자연을 노래했던 풍류가 그려지는 공간이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유상곡수 풍류의 산실 ‘강각’
농암종택은 아름다운 길로 손꼽히는 35번 국도 청량산 초입에서 우측 샛길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다.
종택 앞 주변으론 낙동강 모래톱이 펼쳐지고 병풍바위도 볼 수 있다. 하늘을 머리에 인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켜켜이 처마가 이어진다.
농암종택은 본래 분촌리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 건설과 함께 수몰 위기에 처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건됐다.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주변 산과 강, 집의 조화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1370년경 농암의 고조부 이헌이 지었다는 ‘긍구당(肯構堂)’을 지나면 ‘명농당’과 ‘분강서원’이 나온다. ‘부모님 살아 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뜻의 애일당(愛日堂)은 농암 가문의 오랜 전통이 녹아있는 곳.
농암이 70세 때 노구의 몸으로 부모님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우며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의 효를 몸소 실천했다는 이곳에 관한 일화는 ‘화산양로연도’ 등 그림과 시로도 전해진다.
애일당 지나 나오는 ‘강각(江閣)’은 농암종택이 자리한 분강촌의 방점을 찍는 곳이다. 농암과 퇴계가 달빛 아래 강을 사이에 두고 술과 시를 나누던 유상곡수의 풍류가 전해지는 곳이자 영남가단의 모태가 된 곳이다.
현재 농암종택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부 개방한다.
부근에 있는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 금난수가 지은 정자다.
청백리의 상징이었던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정자인 묵계리 만휴정과 함께 이병헌·김태리 주연의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다.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이 나룻배를 타던 곳이 고산정, 계곡 위 외나무다리가 있는 곳이 만휴정이다.
두 곳 모두 주변 풍광이 빼어나 선비들이 즐겨 찾았던 정자다. 고산정을 기준으로 도산서원이 자동차로 15분, 이육사 문학관이 20분 거리에 있다.
'고산정'과 함께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배경으로 나왔던 '만휴정'의 외나무다리. 드라마 방영 후 지금도 찾는 이들이 꾸준하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600년 전 요리의 부활
농암종택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안동 시내 방향으로 30여 분 달리면 군자마을이 나온다.
500~600년 전 광산 김씨 농수 김효로가 정착하며 형성된 집성촌인데, 안동부사로 왔던 한강 정구가 “오천 한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한 말에서 시작됐다.
지금의 군자마을 역시 안동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기 전 종택과 누정 20여 채를 옮겨 새롭게 조성한 곳이다.
古 요리서 '수운잡방'이 보물로 지정되기까지 가치를 알린 광산김씨 예안파 설월당 15대 종부 김도은 관장. 수운잡방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수운잡방체험관'을 운영하며 종가의 내림음식 등을 선보인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군자마을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광산 김씨 예안파 설월당 15대 종부인 김도은(63) 관장이 운영하는 수운잡방체험관에서 종부 밥상을 맛보고 군자마을 고택에서 하룻밤 묵는 것이다.
수운잡방체험관은 유학자 김유와 그의 손자 김령이 대를 이어 저술한 음식 조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에 기초한 요리들을 만들어 선보인다.
모두 122항으로 구성된 책에는 술, 김치, 과자 만드는 법 등을 비롯해 안동 오천 지방의 술 빚는 법인 ‘오천양법’ 등 조선 시대 안동 반가의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요리법 등이 여럿 포함돼 있다.
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것이 알려지며 수운잡방체험관에 발걸음 하는 이가 더욱 늘었다. 김 관장은 “수운잡방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 의미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체험관을 열게 됐다”고 했다.
김도은 종부가 만든 안동 종가 음식 '꿩김치'.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탁청정 김유와 계암 김령이 2대에 걸쳐 완성한 요리서 '수운잡방'은 지난해 보물로 지정됐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2018년 이전한 현 수운잡방체험관 부지는 서울 신라호텔 이부진 사장이 기증했다. 여기에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지원하고 종가에서 사비를 들여 비로소 완성했다.
체험관에선 수운잡방 코스 요리(1인 5만원부터)를 낸다. 안동 종가 음식인 시원한 꿩김치와 꿩국, 맨드라미 꽃과 치자 등으로 색을 낸 청포묵 등 12~13가지 요리가 종부의 손을 거쳐 정갈하게 나온다.
경남에서 시집와 ‘안동의 오랜 여행자’처럼 살고 있다는 종부 김도은 관장은 “종가의 내림 음식 레시피를 쉽게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맛이 변형돼 정체성을 잃게 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며 “수운잡방체험관에서만큼은 안동다운 수운잡방의 요리들을 차근차근 되살려볼 예정”이라고 했다. 수운잡방체험관은 소수 예약제로만 운영한다.
해 질 녘 '부용대'는 사랑이었다. 굽이치는 낙동강과 고즈넉한 하회마을의 풍경, 낙조까지 한번에 만날 수 있는 전망대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부용대' 아래 낙동강에서 바라본 일몰 풍경.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해 질 녘 ‘부용대’
낙동강 12경을 논할 때 해 질 녘 부용대에 어리는 운치를 지나칠 수 없다.
풍산 류씨가 600년간 대대로 살아온 집성촌인 안동 하회마을의 서북쪽 강 건너 풍천면 광덕리 해발 64m에 있는 절벽 부용대는 노을을 감상하기에 최적 장소다.
태백산맥의 맨 끝 부분에 해당하는 곳으로 정상에 서면 하회마을이 발 아래 펼쳐진다.
부용대 아래 S 자 곡선을 그리며 유유히 휘돌아 나가는 낙동강의 물길과 어우러진 낙조를 보며 여행을 마무리하기 아쉽다면 하산 후 강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절벽 아래로 내려가 볼 것.
갈대숲과 낙동강을 물들이는 또 다른 낙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부용대에 오르는 오솔길 초입에서 부용대까지는 ‘450걸음’ 정도만 걸으면 된다. 차로 15분 거리에 병산서원이 있다.
초승달 모양의 '문 보트'를 타면 강 위에 두둥실 떠다니며 월영교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옛사람들의 풍류가 부럽지 않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겨울 저녁 달빛을 희롱하는 낭만은 월영교에 있다.
조명이 켜질 무렵 개목나루로 가면 초승달 모양의 ‘문보트’를 탈 수 있다. 초승달에 기대듯 앉아 낙동강 물길을 조용히 떠다니면 마음의 물결도 덩달아 잔잔해지는 기분이다.
조이 스틱으로 운전도 가능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멍’만 하고 있어도 좋다.
문보트를 개발해 운영하는 송진호 글로벌코리아 대표는 “현재 동절기 임시 휴장 중이기는 하나 이용을 원하는 이들의 문의가 많아 평일은 예약 후 오후 5~6시, 주말은 오후 2~8시에 한해 현장 선착순 탑승 가능하다”고 했다.
[ 선지국밥, ‘B급 구르메 돈가스’… 안동에 먹을 게 어디 찜닭뿐인겨~ ]
현지인이 즐겨 찾는 골목 맛집
안동에는 서민 음식도 다양하다. 단골이 많은 '신라국밥'의 돼지국밥엔 주인의 푸짐한 인심이 담겨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안동 찜닭, 안동 헛제삿밥, 안동 간고등어, 안동 국시…. 안동에는 ‘안동’이라는 지명이 붙은 음식이 유난히 많다. 그만큼 다양한 음식이 발달해 있고 모두 ‘안동식’으로 즐길 수 있다는 뜻.
종가나 반가 음식 말고도 골목 구석구석 서민들이 편안하게 즐겨 찾는 맛집은 따로 있다.
안동 중앙신시장 안 먹자골목에 있는 옥야식당은 반백 년을 이어온 명불허전 국밥집이다.
명성답게 전국에서 국밥 마니아들의 ‘순례’가 이어지는 곳. ‘시영식육공판장’과 함께 있어 ‘안동 시영할매 선지국밥’이라고도 한다. 양지, 사태, 선지 등을 커다란 솥에 넣고 팔팔 끓여 내는 선지 국밥(8000원)은 소고기와 무, 대파가 들어가 육개장 같기도 하다. 투박한 듯 푸짐하게 썰어 넣은 재료 덕분에 느끼는 시장 인심은 덤. 대체로 오후 7시쯤이면 문을 닫는다.
푸짐한 것으로 치자면 태화동 신라국밥도 둘째라면 서럽다.
돼지국밥(특대 1만원·중 8000원·소 7000원·미니 6000원)으로 단골이 많은 집. ‘시인이 운영하는 국밥집’으로 유명하다. ‘건더기’ 양을 선택해 주문할 수 있다. ‘소’만 주문해도 고기 양이 많아 건져 먹는 재미가 있다. 국물 맛도 깔끔하다. 토·일요일은 재료 준비로 쉰다. 주인은 “20여 년 지치지 않고 문 열 수 있었던 건 쉬는 날을 지켰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북문동 ‘태사길’ 진성식당은 수제돈가스(9000원)로 ‘B급 구르메(싸고 서민적이면서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란 별칭을 얻은 곳. 안동의 명물 식당으로 통한다. 23년 전 구시장 ‘찜닭골목’ 근처 건물 지하의 작은 식당에서 시작해 지금은 웅부공원 근처 2층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다. 확장 이전해서도 맛과 양에는 변함 없다. 철판치즈돈가스와 해물 볶음을 올린 해물매운돈가스가 인기다. 주인은 “물가 상승으로 구정 전후 부득이 가격 변동이 있을 예정이니 참고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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