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수 해변 앉아 귤 주스 마시는 이곳, 화성입니다
아는 도시, 뜻밖의 풍경
경기도 화성 항구 로드
박근희 기자 입력 2021.05.29 03:00
드넓은 바다 위 섬을 배경으로 하얀 요트가 살랑살랑 떠다녔다. 요트의 세일(돛)을 내리고 바람을 따라가며 느리게 만난 풍경의 잔상들은 꽤 오래도록 눈가에 머물렀다. 바닷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물이 빠지면서 드러난 길을 따라 고립됐던 섬으로 들어갈 땐, 섬으로부터 입도(入島)를 허락받은 듯 근사한 기분마저 들었다. 반대로 다시 물이 차올라 섬을 재빨리 빠져나가야 할 땐 ‘섬 탈출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해 질 녘 아름다운 일몰이 이어져 바라만 보아도 몸살이 날 것만 같은 봄의 끝자락. 해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서울 도심에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화성(華城·경기도 화성시)의 서쪽 해변으로 달려갔다. 요즘 인스타그램 등에서 ‘이국 감성’이라고 꼽는 서해의 항구 중 세 곳이 화성에 있다.
야자수 덕분에 서해의 일몰 명소로 떠오른 백미리 '야자수 마을'의 야외석.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하얀 요트가 줄지어 있어 이국적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전곡항에선 '바다 요트 투어' 체험을 할 수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전곡항 앞바다 요트 투어
흔들리는 건 요트일까, 내 마음일까? 봄바람에 떠밀려 걷잡을 수 없이 하늘거리던 마음의 풍향계가 향한 곳은 화성의 첫 번째 항 전곡항이다. 전곡항은 하얀 요트들의 ‘주차장’이다. 굳이 ‘서해안 최대 요트 정박지’ ‘서해 해양 레포츠의 메카’와 같은 수식을 붙이지 않더라도 밀물과 썰물에 관계없이 해상·육상 200여 척의 요트와 보트가 수시로 드나들거나 정박해 있어 그 자체로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진다.
서해 대표 축제 중 하나인 ‘화성뱃놀이 축제’가 열리는 것도 ‘바람 좋은' 이맘때다. 코로나 사태로 작년에 이어 올해 축제도 쉬어 가지만 조용하고 여유로운 바다에서 요트 체험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이미 눈치 빠른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중.
2009년부터 전곡항에서 요트 체험을 진행해오고 있는 ‘화성요트’(031-356-8862) 백은정(56) 실장은 “코로나 사태 후 학교 등 단체 요트 체험은 여전히 못 하지만 가족이나 커플, 친구끼리 오는 개인 요트 체험은 꾸준히 느는 추세”라고 했다. 요트·보트·유람선 체험은 매표소인 ‘전곡항 여행스테이션’과 ‘전곡항 관광안내소’를 통하면 쉽다. 체험비는 최소 4인 탑승, 90분에 1인 3만원 선이다. 요트 한 대당 한 팀을 기준으로 하는 ‘프라이빗 투어’도 있다.
요트를 타고 전곡항 앞바다로 나갔다. 오른쪽으로는 안산의 '누에섬'이, 왼쪽으로는 제부도가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갈매기가 다가왔다가 날아갔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매표를 하고 요트에 오르면 시동을 걸어 ‘전곡항 마리나’를 서서히 벗어난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면 오른쪽으로는 안산의 누에섬과 탄도항이, 왼쪽으로는 제부도가, 눈앞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항구에서 5㎞쯤 나간 지점에서 요트의 시동을 끈다. 둘둘 말려 있던 돛을 펼쳐 내리는 순간 본격적인 요트 여행이 시작된다. 이때부터는 무동력 상태로 바람에 기대어 간다. 그야말로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명대사처럼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기세다.
이따금 주변에 해양 경비정이나 유람선, 어선이 지나가며 물결을 일으키면 요트는 더욱 살랑거린다. 처음엔 묘한 공포심이 들었다가 나중엔 배가 지나가 물결이 일기를 기다린다. 업체에 따라 요트 체험 코스나 진행 방식에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무동력 상태일 때 요트 운전 체험을 진행하거나 갈매기에게 ‘새우깡’ 주기 체험(각자 준비)을 한다.
요트 체험과 관계없이 전곡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곡항 마리나 클럽하우스 전망대는 무료 개방한다. 사진 촬영 명소로 급부상한 안산의 탄도항과 중생대 퇴적암층 ‘대부광산퇴적암층'이 전곡항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모두 간 김에 들러보면 좋다.
◇‘모세의 기적’ 건너 만나는 원시적 풍광
제부도의 바닷길이 열리는 시간이라면 제부도로 내달린다. 전곡항에서 제부도까지는 차로 불과 15~20분 거리다. 썰물 때면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이 드러나는 한국판 ‘모세의 기적’ 명소 중 하나. 하루 두 차례 육지인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와 제부도를 잇는 2.3㎞ 바닷길이 열리면 연륙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제부도까지 편히 가볼 수 있다.
'제부도 인증 샷'의 배경지로 인기인 매바위는 선캄브리아시대 지질학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해식기둥이다. 물이 빠지면 섬이었던 바위까지 걸어가 볼 수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하루에 두 차례 바닷길이 열리면 연륙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편히 가볼 수 있는 제부도.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제부도에 입도해 우측길 따라 북쪽으로 가면 ‘빨간 등대’가 있는 제부항과 만난다. 바닷길이 열린 시간대라면 왼쪽인 남쪽 길을 따라 ‘매바위 해안길’로 향한다.
밀물 때 섬이었던 매바위 앞으로 길이 펼쳐져 걸어들어가 볼 수 있는 행운이 기다린다. 물이 빠지며 맨살을 훤히 드러낸 원시적 자태의 매바위는 풍광이 아름다워 요즘 젊은 층 사이에서 ‘인생 샷 성지’로 떠올랐다. 20m 높이의 기암괴석이 매의 부리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매바위는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어 ‘삼 형제 촛대바위’라고도 불린다.
사진 한 장 달랑 찍고 가기엔 지질학적 의미가 크다. 매바위는 시스택(해식기둥)으로 선캄브리아시대 변성암(규암, 편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파른 면에서는 층리, 사층리, 절리, 광맥 등 다양한 지질 구조를 관찰할 수 있다. 밀물이 시작돼 접근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부지런히 매바위 부근에서 ‘탈출’해야 한다.
'제부도 아트파크'에선 11월까지 '제부도 예술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컨테이너 공간 곳곳을 야외 조각품, 드로잉 벽화 등으로 장식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제부도 전체 해안선 길이는 4.3㎞로 해안선을 걸어서 섬 한 바퀴를 돌아도 2시간 남짓 걸린다. 한 바퀴 완주가 부담스럽다면 ‘제비꼬리 길’을 걸어볼 만하다. 바다로 난 해안데크 산책로와 제부도를 조망할 수 있는 탑재산 트레킹 코스를 합하면 총 2㎞쯤 된다. 섬 곳곳을 장식한 이색 조형물과 작품 감상은 덤이다.
11월까지 제부도 아트파크에선 ‘제부도 예술섬 프로젝트’를 연다. 거창한 전시는 아니지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컨테이너 공간 곳곳을 야외 조각품, 드로잉 벽화 등으로 꾸몄다. 2층 전망대는 바다를 보며 ‘멍 때리기’ 좋다.
◇서해에 제주도가? 바닷가 ‘야자수마을’
화성에서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일몰 감상 포인트로 사진 동호인들이 조용히 찾는 ‘백미리 어촌체험마을’ 부근 백미항은 ‘감투섬’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11월까지 화성시가 이 일대를 오토캠핑장, 머드·염전 체험장 등으로 꾸미는 ‘백미리힐링마당’ 조성 사업때문에 현재 다소 어수선하다. 사업과는 관계없이 갯벌에선 365일 어촌계에서 진행하는 갯벌체험을 해볼 수 있다.
'야자수 마을'의 온실 식물원에는 야자수를 비롯해 동백나무, 귤나무 등이 자란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야자수로 꾸민 인근의 야자수마을은 화성의 서쪽 해변을 색다르게 즐기는 공간이다. 마치 제주도로 순간 이동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온실 식물원과 카페, 베이커리 그리고 횟집이 한데 모여 있다. 약 3300㎡(1000평) 규모의 야자수 마을 식물원 카페 입구엔 커다란 돌하르방이 맞는다. 내부는 야자수와 귤·동백나무 등으로 가득하다. 50년 수령의 야자수도 있다. 이곳 박재천 대표가 10년 전 지인에게 선물 받은 야자수 몇 그루를 재미 삼아 키우다 오늘에 이르렀다.
식물원 내부도 특별하지만, 바다와 나란히 놓인 야외석이 인기다. 야자수 사이에서 일몰을 감상하며 귤주스(입장료 포함 9000원) 한잔 하고 있노라면 당분간 ‘제주 앓이’는 잠재울 수 있을 터. 온실 형태의 투박한 식물원 외관에 비해 베이커리의 빵과 카페 메뉴가 꽤 다양하다. 음료 가격에 입장료가 포함돼 있어 메뉴 가격은 전반적으로 높은 편. 식물원을 이용하지 않고 음료만 마시고 갈 경우 음료 가격을 30% 할인해준다.
피란민들이 일군 '공생염전'은 전통 방식으로 천일염을 생산한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제부도에서 백미항 가는 길 중간쯤 매화리 마을 안쪽 공생염전은 6·25 때 피란민들이 바닷물을 막아 만든 염전이다. ‘함께 만든 소금을 공평하게 나누며 살자’는 뜻을 담아 ‘공생염전’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제 7곳 정도 남은 염전에선 반세기 넘도록 전통 방식 그대로 깨끗한 천일염을 생산해낸다. 푸른 하늘을 담아낸 염전이 마치 거울 같다.
염전이 궁금한 이들을 위해 염전 견학 겸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왔지만, 코로나 대응 상황에 따라 현재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체험은 어려워도 이곳에서 생산한 천일염은 생산량에 따라 현장 구매가 가능하다. 공생염전 12호 대표 이순용씨 부부는 “작년의 장마와 올봄 계속되는 비로 소금 생산량이 예년에 절반도 되지 않는다”며 “한 포대에 만 원 하던 것이 올해는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했다. 염전은 염부들의 생업을 위한 공간인 만큼 조용히 다녀가길 권한다.
궁평항 '피싱피어'. 바다낚시를 즐기는 곳은 산책로로도 애용된다. / 박근희 기자
◇낙조 보고 방조제 드라이브
화성은 무려 152㎞에 이르는 긴 해안선을 품고 있다. 화성 해안선의 남쪽에 있는 궁평항은 어선으로 가득하다. 화성 항구 중 가장 서해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고 낙조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소환되는 곳이기도 하다.
항구 중심의 궁평항수산물직판장은 활기가 넘친다. 서해산 펄 낙지부터 각종 조개, 꽃게뿐 아니라 횟감 등 싱싱한 수산물을 사 ‘양념집’ ‘초장집’에서 상차림비 1인 3000원을 내면 바로 맛볼 수 있다. 회를 썰어 넣은 여름 별미 ‘물회’를 파는 곳도 몇 군데 있다. 그중 B동의 ‘갈매기호'는 20여 가지 재료에 7가지 과일을 갈아 넣어 직접 만들었다는 양념장을 넣어준다. 매장 안쪽에 양념통을 따로 갖췄다.
5월부터 11월까지 판매하는 물회를 찾는 단골이 많다. 활어 물회(2인 3만원부터)는 광어 등 활어와 채소를 수북하게 담아준다. ‘보양 물회’(2~3인 6만원부터)도 있다.
주차장 한쪽 바다와 마주한 20여대의 푸드트럭에선 새우튀김 등 주전부리와 커피 등을 판다. 주차장 건너편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는 ‘피싱피어’는 낚시하는 이들보다 산책하는 이들이 더 많은 풍경이다.
궁평항까지 갔다면 화성방조제 드라이브를 이어가 볼 것. 서신면 궁평리와 우정읍 매향리를 잇는 10㎞ 바다 위 도로 양옆으로 화성호와 칠면초, 함초 등 염생식물이 핀 드넓은 바다 정원이 펼쳐진다. 평일엔 방조제 주차장이나 쉼터 주변에 주차가 쉽다. 차량이 증가하는 주말에는 점심때에 한해 방조제 갓길에 잠시 주정차를 허용한다.
100년 된 한옥을 고쳐 카페로 꾸민 서신면 '카페 물레'. 전곡항과 제부도가 카페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100년 한옥 카페, 욕실 문화 체험 공간도
화성 여행에 즐거움을 더해줄 새로운 공간들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모두 요즘 감각으로 꾸민 곳이다. 제부도 부근 서신면에 작년 말 문을 연 카페 물레는 주인이 부모님이 살던 100년 된 아담한 한옥을 카페로 꾸민 곳이다. 본채는 ‘ㄷ’자 한옥의 기본 골조를 살리고 내부를 새로 단장했다. 마당이 내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블루베리 향 나는 커피 물레(5500원), 에이드를 맛볼 수 있다. 좌식 스타일의 안사랑채에 앉으면 일어나기 싫어진다.
팔탄면에 문 연 복합 문화 공간 '로얄엑스'는 욕실 전문 기업 '로얄 앤 컴퍼니'의 화성센터 직원 체육관 등 활용도가 낮았던 공간을 카페, 베이커리, 라운지 등으로 꾸민 곳이다. / 박근희 기자
팔탄면 복합 문화 공간 '로얄엑스'의 들꽃 산책로. / 박근희 기자
궁평항에서 30분 거리, 39번 국도에서 가까운 팔탄면 로얄엑스는 해안과는 다소 떨어져 있으나 지나치면 아쉬울 공간이다. 50년 전통의 욕실 전문 기업 ‘로얄 앤 컴퍼니’가 연구 센터와 제조 공장 등이 있는 화성센터 중 활용도가 낮았던 직원들의 체육관, 연수 시설 등을 갤러리, 카페, 클럽 라운지 앤 베이커리 등으로 꾸민 욕실 테마 복합 문화공간이다. 지난 1월 일부 시범 운영과 동시에 화성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정식 개관은 오는 31일(예정)이다.
직원들 테니스장을 카페와 베이커리로 고친 공간에선 욕실 도기를 제작했던 틀을 재활용한 테이블, 목욕탕을 연상케 하는 좌석 등이 볼거리다. 벽면엔 수전 등 욕실 제품을 재해석한 작가들의 참신한 작품도 전시한다. 현재 갤러리에선 가정의 달을 맞아 화성시문화재단과 연계한 어린이 미술 전시 ‘퐁당퐁당’전(~6월 20일)을 여는 중. 전시 성격 상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많이 찾는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야외 산책로는 더 더워지기 전에 걸어보자.
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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