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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한강을 걷다](25) 목계나루·가흥창·봉황리마애불상군

by 한국의산천 2020. 8. 28.

[한강을 걷다](25) 목계나루·가흥창·봉황리마애불상군

입력 : 2007.01.19 14:55 경향신문 이지누

 

 

비록 목계나루의 영화로움은 사라졌을 지언 정 강은 물안개를 피워놓고 나그네를 맞이했다.

사진의 강 건너 왼쪽이 목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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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6도였다. 사진기를 든 손은 꽁꽁 얼어붙고 연방 콧물을 훌쩍거렸지만 나는 흥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새벽 댓바람부터 목계나루 강변이 물안개를 피워놓고 유혹했기 때문이다.

강을 따라 부유하는 나그네가 반쯤 언 강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물안개를 어찌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겠는가.

동이 터 올 무렵부터 안개는 하얀 나비가 날갯짓이라도 하는 양 너울대며 나에게 스며들었으니 흔쾌히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윽고 벌건 해가 산 너머로 얼굴을 내밀자 물안개의 춤사위는 절정에 달했으니 넋을 놓고 바라 볼 뿐 추위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한 시간 여, 마치 광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안개는 더러 조약돌 위에 서리처럼 얼어붙었는가 하면 무빙(霧氷)이 되어 갈대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것은 목계나루 또한 마찬가지이다.

찬란했던 시절의 영화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강에는 나룻배 한 척 매어 있지 않고 쇠잔한 모습의 거리는 스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시인 신경림이 쓴 ‘목계장터’마저 없었더라면 ‘목계’라는 지명이 끈질기게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릴 까닭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목계는 그렇게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시 한편으로, 수석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기기묘묘한 돌이 모여 있는 곳으로, 또 전통 견지낚시를 아끼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울로 기억될 뿐 과거와는 철저하게 단절되어 버린 듯했다.


정약용이 쓴 글 중 한강 가에서 살기 좋은 몇 곳을 꼽은 것이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1690~1752)이 쓴 ‘택리지’를 읽고 쓴 발(跋)이 그것이다.

그 자신도 한강에 잇대어 있는 소내(苕川)에 살지만 그곳은 오로지 풍광만이 아름다울 뿐 생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강에서는 춘천의 천포(泉浦)와 지금의 설악면 일대인 미원(迷源), 그리고 남한강에서는 여주의 백애(白厓)와 충주의 목계를 꼽았다.

산이 뒤를 막았는가 하면 앞으로는 여울소리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나루터였기에 장터는 언제나 북적거렸으니 그 아니 좋았겠는가.


면암(勉菴) 최익현(1833~1907)은 4살 때인 1836년, 아버지 지헌공(芝軒公)을 따라 한양에서 단양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의 일이 선생의 연보에 남았는데 읽어보니 배로 온 집안 살림을 옮겼다.

평구강(平丘江)을 거슬러 올라와 충주 목계에 짐을 부리고, 80리를 더 간 청풍의 금수산 속에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평구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양정동(養正洞) 일대를 일컬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을 미호(渼湖)라고 불렀던 곳이다. 그러니 평구강은 곧 한강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나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목계에 이삿짐을 부렸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타는 작은 배들은 목계를 거슬러 단양이나 온달성이 있는 영춘까지도 단박에 갈 수 있었지만 짐을 싣는 큰 배들은 목계가 그 종착점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소금을 실은 배들은 온달성 근처인 향산리 늪실마을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군간나루까지 갔다고 하지만 이는 소금을 운반하려 따로 만든 배를 이용했다.

 

봉황리마애불상군의 마애여래좌상(위)과 봉황리마애불상군의 미륵반가사유상과 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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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면암의 일을 예로 든 것은 면암 당대인 조선의 끝자락까지도 목계는 하항(河港)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던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후 1930년쯤, 일제가 이 땅에 신작로를 닦고 철도를 놓으면서 뱃길보다 육로를 이용한 산물의 운반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그 때문이다. 목계가 번성했던 시절을 조금씩 잃어버리기 시작한 즈음이 말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말하는 박가분(朴家粉) 파는 방물장사의 발걸음도 끊어지고, 강에서 건져 낸 민물새우 찌개가 끓어 넘치던 토방 툇마루도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뿐 아니다. 상선(商船)의 선주들이나 나룻배 관리인들이 해마다 정월 열 나흗날, 강변에서 지내던 용왕제, 4월이나 7월 백중을 앞두고 벌어지던 별신굿, 1월이나 2월에 걸쳐 벌어지던 귀줄다리기와 같은 민속놀이 또한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남은 것은 부흥당(富興堂) 당고사이며 근래에 들어 귀줄다리기를 복원하여 마을 축제로 삼고 있을 뿐이다.

 

가파른 계단으로 부흥당에 오르니 누군가가 치성을 드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주신(主神)인 서낭각시의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당집 앞에서 바라보는 목계강의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목계를 떠나 물길과 같이 흘러간 곳은 조세를 모아놓던 가흥창지(可興倉址)였지만 말 그대로 터만 남았을 뿐 그 무엇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려 때는 덕흥창(德興倉), 조선초기에는 경원창(慶原倉)이라고도 불렀던 가흥창은 처음에는 창고도 없이 노적을 했다.

태종 5년인 1405년부터 경상도의 세곡을 육로로 운반하여 노적을 하자 들끓는 도적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낙동강으로 상주까지 운반된 경상도의 세곡이 새재를 넘어 가흥창으로 모였던 것이다. 그후, 중종 16년인 1521년에 폐허가 된 절터 자리에 70칸 규모의 창고를 지었다지만 지금은 발부리에 걸리는 몇 조각 사금파리만 뒹굴고 사과나무가 무성할 뿐이다. 목사들의 선정비 대 여섯 기가 쓸쓸한 거리를 지키고 있는 창지에 서서 목계나루와 가흥창 앞강에 정박해 있던 상선들과 수참선(水站船)이 빚어놓은 풍광을 상상해봤지만 역부족이다.

생선이 있으면 파리가 날아들고 나락이 쌓여 있으면 쥐가 들끓듯이 이곳 가흥참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산부사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을 지나며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경상도 백성들이 세곡을 바치는데 따른 고통과 부패한 가흥참 관리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읽어 볼 만하다.


“우뚝이 솟은 저 계립령은/예로부터 남북의 한계가 되었는데/북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탐하여/남인들의 기름과 피를 달게 여기네/우마차로 험난한 산길을 통해라/들판에는 장정 남자가 전혀 없네/밤이면 강가에서 서로 베고 자노니/아전들은 어찌 그리도 탐획한고/시장에선 생선을 가늘게 회치고/모점에는 술이 뜨물처럼 하얀데/돈 거두어 노는 계집 불러오니/머리꾸미개에 연지를 발랐네./백성들은 심장을 깎는 듯 괴로운데/아전들은 방자히 취해서 떠들어대며/또 두곡(斗斛)의 여분까지 토색을 하니/조사(漕司)는 의당 부끄러울 일이로다/관에서 부과한 건 십분의 일인데/어찌하여 이분 삼분을 바치게 하나/강물은 스스로 도도히 흘러서/밤낮으로 구름과 아지랑이를 뿜어내는데/배 돛대가 협곡 어귀에 그득히/북쪽에서 내려와 다투어 실어가니/남인들의 얼굴 찡그리고 보는 것을/북인들이 누가 능히 알겠는가.”


휘휘, 발길을 돌려 가금면 봉황리의 햇골산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산 중턱의 작은 바위에 찬란한 불보살 9구가 베풀어져 있기 때문이다.

두 군데에 나누어진 불상들은 한 곳에 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한 불보살 8구, 또 다른 곳에 한 구의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묘한 것은 그 불보살들의 생김새이다.

충주에 들어서면서부터 끈질기게 달라붙는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삼국의 흔적들이 이제 막 충주를 벗어나려 하는 이곳까지도 이어지는 것이다. 두 곳에 새겨진 불상 전체를 아울러 하나의 더미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따로 나누어 봐야 하는데 양쪽 모두 독특한 양식이 눈길을 붙든다.

 

목계나루에 세워진 시인 신경림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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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존으로 앉아계신 마애여래좌상의 상호는 사각형의 각진 모습으로 한눈에도 투박해 보이며 눈두덩은 부은 것처럼 보인다.

양 손이 취한 수인은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어 눈의 표현이나 수인 모두 고대 삼국에서 유행했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머리를 둘러싼 두광 안에는 다섯 구의 화불이 표현되었는데 단(壇)에 걸터앉아 있는 듯 교각상(交脚像)을 취한 이들 또한 눈두덩이 부은 것이나 투박하며 강렬한 인상을 풍기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오른쪽으로 20m 남짓하게 떨어진 암벽에 8구의 불보살이 베풀어졌는데, 이곳은 다시 두 군데로 나누어서 봐야 한다.

왼쪽에는 시무외 여원인을 한 여래좌상과 차를 공양하는 듯 한쪽 무릎을 꿇은 공양상이 있다. 다시 그 오른쪽으로 6구의 보살이 새겨졌는데, 이곳에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상호는 깨져버려 짐작을 할 수조차 없지만 오른쪽 볼 가까이에 오른손으로 턱을 괸 사유형(思惟形)이다.

다른 것 모두 제쳐두더라도 반가사유상이 조성되기 시작했던 즈음은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이며, 이들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대좌의 양식이 남한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궁금하다.


또한 6구에 달하는 보살들의 배치가 독특하다. 미륵반가사유상의 오른쪽 협시보살은 양쪽에 가려서 아예 허리 아랫부분은 표현되지도 않았다. 중첩되며 원근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나라 안에 새겨진 마애불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며 인도나 중국에서 흔히 보는 것이다. 또한 반가사유상 주위에 새겨진 보살들은 모두 갸름하며 조금 전에 봤던 여래좌상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러니 이들이 새겨진 시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마애불이 새겨졌을 즈음은 신라가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마애불을 매만진 손길에서는 고구려를 닮은 북방계열의 맛이 물씬 풍기는가 하면 백제의 아름다운 조형성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고대 중원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삼국이 첨예하게 부딪쳤음에도 어느 하나만이 불거진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깊이 스며든 흔적이니까 말이다.

<이지누>


[한강을 걷다]가흥창은 아무 흔적없고 불상 9구 남아 그나마 위안

입력 : 2007.01.19 14:55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강을 끼고 있는 마을에 선비들이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물길이 확보되어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1796년 4월16일 가흥 앞강에 배를 띄웠는데 그 까닭을 말하기를 “험준한 산길 싫증이 나서(久厭山谿險)/편리한 뱃길로 바꾸기로 했다네(翻思水路便)”로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런 것이다.

물길이 발달했을 때의 목계는 강원도와 경상도 내륙의 산물이 모여들어 한양으로 향하고 서해에서 싣고 오는 새우젓이나 소금을 나누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더구나 강을 끼고 형성된 넓은 백사장은 장이 서기에 안성맞춤이었으니 크게 발전했던 곳이다.


가흥창이 있었던 곳은 목계교를 지나 38번 국도로 채 2㎞를 가지 않아 만나는 3거리 근처이다. 599번 지방도로와 갈라지는 3거리의 오른쪽 가흥마을의 과수원 일대가 창고 자였다. 그러나 아무런 흔적이 없어 허망하다.

가흥창은 좌수참(左水站)이었으며 수참이란 것은 해운 이외에 배가 통행할 만한 강가에 창을 설치하여 조운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다. 고려 때 정몽주가 처음 건의하여 설치했다고 한다.


햇골산은 가흥창지에서 다시 1.5㎞ 남짓 가다가 봉황자연휴양림이라는 팻말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마을길을 2㎞ 정도 들어가면 능암교를 건너게 되는데 다리 끝에서 오른쪽 둑길로 올라서서 300m 가면 된다. 승용차도 갈 수 있으며 주차장이 있다.

중원 봉황리마애불상군은 그동안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가 소홀하다가 뒤늦은 2004년에 보물 140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은 조선 말 이병연이 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與勝覽)’ 충주조에 가금면 봉황리에 높이 1장(丈)의 미륵불이 있다는 것만 있을 뿐 다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전체 9구나 되는 불상이 새겨져 있는 것도 드물 뿐 아니라 오른쪽의 미륵반가사유상과 함께 새겨진 불보살들의 대좌가 역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미륵반가사유상은 상호가 깨져서 아쉽지만 턱을 괸 손가락의 섬세한 표현이 잘 남아 있어 위안을 삼을 수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나들목으로 나가 38번 국도를 따라 목계 방향으로 가면 봉황리마애불상군부터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이지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