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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한강을 걷다](42)동작·노량·용산·마포

by 한국의산천 2020. 8. 26.

[한강을 걷다](42)동작·노량·용산·마포

경향신문 이지누 입력 : 2007.06.01 15:11

 

여전히 강의 이쪽과 저쪽은 매력적이다. 강의 중류(中流)를 흐르는 배에서 고개만 돌린 채 바라보는 양안(兩岸) 또한 그렇지만 아예 강을 건너 바라보는 저쪽의 유혹은 강을 걷는 내내 떨쳐버리지 못하는 강렬한 것이다.

즉금당처(卽今當處)의 차안(此岸)에 대한 인식에 집중해야 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늘 피안에 대한 유혹을 경계삼아야 하는 것, 그것은 강을 따라 걷는 나그네가 떨치지 못하는 업(業)이며 언제나 생각의 속도보다 한발 앞서 자라나는 번뇌이기도 하다.

서울을 흐르는 한강에서의 그것은 더욱 심하다. 다리가 흔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한강대교 모습. 사육신 묘 일대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며 앞의 굴뚝은 노량진배지이며 오른쪽 끝 기와지붕이 용양봉저정으로 짐작된다. 배수지와 용양봉저정 사이 길은 상도동으로 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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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리가 흔하지 않을 때는 어땠을까. 간서치(看書痴), 스스로를 책만 읽는 바보라고 했던 청장관(靑莊館) 이덕무(1741~1793)가 12살 때부터 20살까지 마포에 살았다.

그 아홉해 동안 용산강 근처의 삼촌 집에서 1년 남짓, 그 나머지 세월은 주로 마포강 근처의 외가붙이들 집에 머물렀으며 따로 집을 마련하여 1년 남짓을 살기도 했다. 당시 강 건너에는 조카인 심계(心溪) 이광석이 살았는데 그에게 보낸 편지의 글 한줄에 마음이 짠하다. “강 하나 사이건만 멀기가 마치 하늘 끝과 같구려”라니 말이다.


이덕무의 그 글 한줄은 형이상과 이하가 혼재된 것이었지 싶다. 그가 마포강 근처에 살 때의 곤궁함은 여동생이 죽고 난 다음 쓴 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흉년 들어 먹을 것이 없는 데다가 어머니는 병까지 많으셨고 강가로 옮겨 갈 적에는 을병년(乙丙年)이라, 쑥으로 빚은 보리떡과 나물죽이 입과 목구멍을 찔렀다. 콩나물에 막장이요. 등불은 죽에 얼비치고, 비린내 나는 초라한 반찬은 하인이 배에서 주워 온 물고기라, 모여 앉아 자주 이를 먹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아버지께서 멀리 계시다가 오랜만에 돌아오시곤 하면, 갑자기 언짢아 하실까 염려되어 전에 굶주리던 일을 말하지 아니하고 한없이 기뻐하며 다시 떠나실까 두려워 옷깃을 잡고 주위를 맴돌았다”라고 했으니 서얼의 신분으로 마포 강가에 살던 그의 모습이 너무도 선연해 처음 이 글을 읽을 때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을병년은 1755~1756년을 말한다. 그의 나이 15~16세 때인 것이다. 가난의 경지가 그 지경이었으니 강 건너에 가고 싶어도 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꼿꼿한 학문의 심지를 자랑하던 조카인 심계와 더불어 경·사·문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조차 접은 채 편지로만 왕래를 했으니 그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다리라도 있으면 훌쩍 다녀왔을 테지만 말이다. 책 살 돈이 없어 빌린 책을 베끼기를 거듭했으며 끼니 걱정은 물론 불을 땔 장작까지도 얻어야 할 형편에 강 한번 건너는 것이 어찌 마음먹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이덕무는 초정(楚亭) 박제가(1750~1805)와 같은 벗들과 함께 뚝섬에서 배를 띄워 용문산 아래에 살던 현천(玄川) 원중거(1719~1790)의 집에 다녀온 적이 있다. 배를 띄운 날은 1776년 3월25일이었으며 일행은 마중을 나온 현천과 함께 봉은사 매화료(梅化寮)에서 하루를 묵었다. 당시의 모습은 ‘협주기’에 고스란히 남았으며, 그때는 이덕무가 증광초시(增廣初試)에 합격하고 난 이태 후였다. 그러니 아마도 벗들이 책을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지금의 인사동인 대사동에 지은 청장서옥(靑莊書屋)에 머물 때였을 것이다.

 


사육신묘의 성삼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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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대사동에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혹은 대문을 마주하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살았다. 혹, 단양의 사인암에 은거했던 단릉(丹陵) 이윤영의 절친한 벗 능호관(凌壺觀) 이인상을 기억하는가. 그와 원중거는 더 없이 가까운 사이였으며 대문을 마주 보고 살았지만 “해진 뒤에는 서로 오가지 말자(日昏勿相來)”는 약속을 했다고 이덕무가 ‘사소절(士小節)’ 근신(謹愼)편에서 전하고 있다. 이는 불유절(不踰節), 분수를 지키며, 불호압(不好狎), 지나치게 친한 것을 삼가며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는 것이다.


아! 그런 것인가. 내키는 대로 건널 수 있는 강이거나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형이하의 골목 모두 형이상으로 다스리며 스스로 거리를 가져야 하는 것 말이다. 이것 또한 강을 걸으며 배우는 것 중 하나이리라. 세상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거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건만 그 거리를 견디지 못하고 다가가려는 것은 욕심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강에 걸린 다리는 욕심의 소통구조를 지닌 통로인 셈이다. 세상 일 중에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갈 때 가고 멈출 때 멈추는 것(行行止止)”이라고 했거늘 그것이 어디 몸만을 두고 이르는 말이겠는가. 생각이나 마음 또한 그래야 하는 것이거늘….


그러나 겨울이면 강물이 꽁꽁 어는 법, 계곡(谿谷) 장유는 어느 해 겨울, 동작나루에서 썰매(雪馬)를 타고 노량으로 향했다. 생전 처음 타 보는 썰매의 속도를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그의 모습이 우습다. 그는 썰매를 타고 난 다음 “갈기도 없거늘 어찌 말이라 칭했으며 / 얼음 위를 달리거늘 눈 설(雪) 자는 왜 붙였나. / 빙판에선 안성맞춤 힘은 전혀 들지 않지만 / 한 번 속력 내면 제어하기 힘들다오. / 바람을 몰고 가니 고삐 재갈 필요 없고 / 떠서 날아가니 바퀴 자국 남지 않네. / 총을 쏘아도 이보다는 느릴 걸 / 화살정도는 견주기를 포기해야 하리 / 천둥이 울리듯 다리는 온통 들썩들썩 / 번개가 내려치듯 눈앞은 아찔아찔 / 물속의 규룡 깜짝 놀라 / 지레 치솟을까 겁이 덜컥 나는구나.…”라고 말하고 있으니 어지간히도 놀랐나 보다.


노량에는 선조 당시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1539~1609)가 살았다. 그는 만년인 1600년부터 노량 강가에 머물렀는데 그 무렵 지은 글을 모아 ‘노량록(露梁錄)’을 남겼다. 그곳에 ‘이수정기(二水亭記)’가 있다. 이수정은 노량에서 10리가량 떨어진 양화진(楊花津)의 남쪽에 있었다는데 그는 기문을 지어 주고 난 다음, 장유와는 달리 얼음이 두껍게 어는 겨울에 썰매를 타고 가서 정자에서 하루를 묵으며 노닐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날 본 아름다운 정경으로 부(賦)를 짓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때가 1605년 아계의 나이가 67세였다. 그러나 문집에는 이수정에 대한 부가 남지 않았으니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1609년 숨을 거두고 만 것이리라.

 

 

용양봉저정
 
아계가 머물던 노량에서 강을 건너면 용산이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면 마포이다. 이덕무는 용산강의 풍경을 “배에 가득한 황해 소금 / 내일이면 충주에 간다네. … 아이들은 물고기 낚아오고 / 제 아비는 벼 팔아와 / 생선국에 쌀밥 지어 / 울타리 꽃 속에 오순도손 이야기 한다오”라고 노래했다. 또 다산(茶山) 정약용은 “둥둥둥 북을 치며 장사꾼의 상선이 / 새벽에 돛을 달고 동녘으로 향하누나”라고 했으니 그들보다 윗세대인 점필재 김종직이나 백사 이항복(1556~1618)이 노래한 용산과는 그 정경이 너무도 다르다.


그들은 모두 용산 호당(湖堂), 곧 독서당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더구나 사가정(四佳亭) 서거정이 말하는 용산과 마포의 차이는 자못 흥미롭다. “용산은 참으로 경치 좋은 곳이요. / 마포는 가장 청정하고 그윽하거니 / 강 머리서 취하기에 좋을 뿐이지 / 원래 택반(澤畔)의 읊는 곳 아니다마다”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다산이나 이덕무의 시절에는 용산에 독서당이 없기도 했을뿐더러 시대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도 했을 것이다.


이덕무는 마포를 마호(麻湖) 혹은 삼호(三湖)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산해가 글을 배운 그의 막내삼촌이자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의 6대손인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이 살았다. 당대의 성리학자인 율곡(栗谷) 이이나 남명(南冥) 조식(1501~1572)과 교유를 했지만 그는 성리학자가 아니었으며 양반이라는 신분조차도 마다했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경전(經傳)과 백가(百家)를 두루 섭렵했으며 천문, 지리, 의약과 상수학(象數學)에 능통했으니 뭐라 딱히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더구나 양반이라는 신분으로 오히려 장사에 종사한 최초의 양반 상인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의 집은 마포 강가에서도 가장 빈민들이 모여 사는 동막(東幕)에 있었으며 토굴과도 같은 흙집을 짓고 그 위를 평평하게 한 다음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의 호 토정은 그렇게 흙집을 짓고 살던 그가 자호(自號)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적당량의 욕심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안으로는 신령스럽고 굳세기를, 그리고 밖으로는 부(富)하고 귀(貴)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경계한 것은 욕심의 지나침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내세울 것은 욕심이 아니라 오히려 절제와 신념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또한 살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피지기(避知己)를 꼽았다. 산수와 전야(田野)를 벗 삼되 사람을 너무 가까이 두고 기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벗을 사귀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앞서 이야기한 원중거와 이인상의 관계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말일 것이다.


거리를 지킨다는 것과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오늘 강은 나에게 열심히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실 오늘은 강의 풍경이 마뜩지 않아 강에게로 향한 눈을 감았다. 그러면 뭣하나. 오히려 그 강에 살던 사람의 아름다운 내면풍경이 안화(眼花)가 되어 어지럽게 날리는 것을…. 때로 강 곁을 걸으며 강과 거리를 두는 것, 그것은 강을 더욱 크게 받아들이는 방법이리라. 다리 그늘에서 일어서며 토정의 아름다운 글 한줄을 되뇌며 엉덩이를 털고 그만 책을 덮었다. “너희들이 어찌 길 다니는 것이 괴롭다고 여겨 글을 외고 읽기를 포기할 것이냐(爾輩豈以道路之苦 而廢誦讀乎).”


〈이지누〉

 

여의도

정치, 금융, 방송의 중심지인 이곳은 과거 조선시대에는 양화도, 나의주 등으로 불렸고 가축이 달아날 곳이 없어 양과 말 등을 기르는 목장으로 사용됐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최초의 비행장이 건설돼 1960년대까지 비행장이었다. 이후 개발이 본격화됐고 마포대교, 국회의사당, KBS, 한국증권거래소가 지어지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곳은 한강에 위치한 모래섬, 여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