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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한 기억보다 서투른 서투른 필기가 낫다

by 한국의산천 2020. 8. 8.

조선왕실의 취향 

"교묘한 기억보다 서투른 서투른 필기가 낫다"

입력 2020.08.08 04:30

 

'벽보왕' 성종과 '메모왕' 세조

 

편집자주

여러분처럼 조선의 왕이나 왕비도 각자 취향이 있었고 거기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로 토요일에 소개합니다.

 

 

백성들 생업의 고단함을 노래한 ‘시경’ 칠월시를 새긴 각석. “구월에는 채마밭을 쌓고 시월에는 곡식을 거둬들이네” 같은 월령가의 형태로 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좌우명(座右銘)’이라는 말이 있으니, 바로 늘 지내는 자리 곁에 새겨 둔다는 말이다. 삶의 신조로 삼고 싶은 유명한 경구들을 좌우명으로 고르는 경우가 많다.

 

조선 국왕들에게도 좌우명이라 할 것이 있었을까? 성종에게는 비슷한 것이 있었다. 성종은 갑작스럽게 사망한 숙부 예종의 뒤를 이어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비록 태어나서부터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 길러진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왕위에 오르자 모범적인 태도로 1일 3강의 경연에 야대까지 행하고, 조회나 제사 등의 스케줄을 빼곡히 채워 수행해 냈다.

그를 더욱더 완벽한 유교적 성군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에 신하들도 동참했다.

 

신하들은 성종에게 좋은 말을 자리 곁에 써 붙여 두고 보시라고 권하고, 자리 주위에 두어 방에 들고 날 때마다 보시라며 병풍, 걸개 따위를 선물했다.

 

 

임금이 편안하게 놀지 말 것을 훈계하는 ‘서경’ 무일편의 글을 쓴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옛 성군의 마음가짐을 담은 유교 경전인 ‘시경’ 빈풍편의 칠월시나 ‘서경’ 무일편의 구절이 주 레퍼토리였다. 칠월시는 고대 중국의 주나라에서 나이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숙부인 주공이 섭정이 되어 성왕을 보필하면서 옛 선조들의 교화를 담아지어 준 시라고 한다.

 

백성이 길쌈하고 사냥하며 농사짓고 집을 지어 해마다 삶을 고되게 지탱해간다는 것을 노래하여 집과 옷과 먹을 것이 모두 쉽게 얻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무일편에서 주공은 더욱 직설적인 화법으로 임금이 편안하게 놀지 말 것을 훈계하였다. “그 뒤로 즉위하는 왕들이 태어나면 편안하였기 때문에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며,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듣지 못하고 오직 즐거움에만 빠졌습니다”라고 역대 왕들이 안일에 빠져간 것을 들어 성왕을 경계하였다.

즉 이들 경전은 통치자가 백성이 생업에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깨달아 나태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조선은 왕위 계승 후보자끼리 자유경쟁을 시키는 나라가 아니었다. 미리 세자를 책봉하여 후계구도를 안정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니 조선의 왕은 대개 ‘태어나면 편안한’ 고귀한 존재로 떠받들려 자라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왕위를 물려받기 전부터 교육에 공을 들여 재목을 키웠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경연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올바른 심성을 기르도록 노력하였다. 그야말로 주입식 성군 교육이었다.

 

아무리 절박한 일이라도 하루도 해이해지지 않고 마음에 새기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목전의 안락함을 외면하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훈계를 알아서 실천할 리 있으랴. 그러니 시선이 닿는 가까운 곳에 써 붙여 두고, 눈에 띌 때마다 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게 했다. 경전에 나오는 글귀를 종이에 써서 벽에 붙이고, 병풍에 써서 거처에 세워 두고, 또 그림으로도 그렸는데, 이러한 ‘빈풍칠월도’나 ‘무일도’ 등의 회화작품은 조선왕조 궁중 감계화의 전통을 이루었다.

 

 

‘시경’ 칠월시의 내용을 그림으로 구성한 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성종 본인 또한 교훈될 만한 글을 아껴서 주위에 써 붙이는 성격이었는데, 보필하던 신하들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성종 초년에 도승지를 역임한 뒤 경상관찰사로 승진한 유지(柳輊)라는 인물이 있었다.

 

유지는 성종 원년부터 7년 3월까지 만 7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승정원에 몸담았던 성종대 최장수 승지였으니 성종의 측근이라 할 것이다. 유지가 경상도에 부임한 뒤에 ‘십점소(十漸疏)’ 병풍을 해다 바친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십점소는 당 태종이 집권한 뒤 점차 마음이 해이해지자 위징이 열 가지 조항을 들어 경계한 글이다. 좋은 글을 써서 보냈는데 탄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탄핵의 이유는 이러하였다.

 

“유지의 마음은 충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환심을 사기 위한 행위입니다. 유지는 일찍이 승정원에 있으면서 전하께서 유희나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심을 익히 보았으므로, 이런 것으로는 전하의 환심을 살 수가 없고 오직 경계가 되는 잠언이라야 맞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물 외의 물건인데도 서슴지 않고 사적으로 바친 것입니다.”

병풍 같은 것들은 신하들이 만들어 바치는 경우도 많았지만, 성종 스스로도 통치에 보탬이 될 것 같은 글을 곁에 걸어두고 보았다.

 

‘성종실록’에는 이런 일화들이 많은데, 교훈적인 상소를 받자 감동한 성종이 바로 상소문을 장황(粧䌙)해 올리라고 하면서, 상소를 올린 대간에게는 “늘 자리 곁에 두고 드나들 때마다 보고 반성하겠으며, 경들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잊지 않겠다”면서 크게 칭찬하고, 쌀쌀하니 몸을 덥히라며 술까지 내려 주었다.

 

또, 경연에서 “시작이 없는 경우는 없지만 마무리를 잘하는 일은 드물다(靡不有初鮮克有終)”는 경구를 판에 써서 자리 곁에 두라는 권유를 받자, 이미 침실에 판을 설치해 두었으며, 옛 사람의 경계하는 말을 병풍에 써서 보고 있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성종의 재위 26년간 늘 이런 식이었으니, 치도를 열심히 강구하던 성종의 침전 환경이 어떠했을는지 매우 상상해 볼 만하다. 이것저것 붙이고 걸어 놓았을 테니 고즈넉한 여백의 미 따위는 없었으리라.

 

 

습자용 분판. 먹이 흡수되지 않도록 만들어, 글씨를 쓴 뒤 물걸레로 닦아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한편, 만기(萬機)를 보살피는 국왕의 격무 중에 기억을 돕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졌던 왕도 있었다. 조선왕조 최고의 모범생 아버지와 형을 두었던 세조 임금에게는 자신의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한 나름의 비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집무실 화이트보드 활용이었다.

 

세조가 쓴 물건은 ‘분판’이라고 하는 것으로, 판자에 방수성의 분을 개어 발라 잘 말려서, 위에 먹으로 메모를 한 다음 물걸레로 닦아내는 것이다. 흔히 서당에서 글씨 연습용으로 사용되었던 물건이다.

 

세조는 이 노하우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승정원 승지들을 불러다 분판 활용을 강력히 추천했다.

세조는 분판을 자리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바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은 옻나무 재배 ‧ 가축 사육 ‧ 뽕나무 재배 등 10여 가지를 써 놓고, 승정원에 보여 주면서 산업을 권장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내 기사판(記事板)이다. 교묘한 기억보다 서투른 필기가 나은 법이다(巧記不如拙書). 정원에도 이 물건이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사실 세조가 이렇게 신하들을 불러다 필기 습관을 추천한 까닭이 있었다.

승정원에 갓 들어온 동부승지 김수녕이 분판을 들고 메모(備忘)를 하다가 선배 승지로부터 “암기를 할 일이지 무엇하러 이런 판을 쓰고 있느냐”고 무안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왕이 나서서 분판 사용을 추천하니 도리어 선배의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당시 문과에 급제한 엘리트라면 암송에 익숙했을 테니 간단한 사항은 바로 외워 나오는 것이 마땅했겠으나, 생각의 실마리조차 놓칠까 하여 늘 메모하는 습관을 가진 임금 밑에서 일하다 혹 지시사항을 흘려버리기라도 한다면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대비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조가 말했듯이, 교묘한 기억보다 서투른 필기가 낫겠다.

 

박경지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삼국지(이문열)
1권 서사

 티끌 자옥한 이 땅 일을 한바탕 긴 봄꿈이라 이를 수 있다면, 그 한바탕 꿈을 꾸미고 보태 이야기함 또한 부질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같은 냇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고, 때의 흐름은 다만 나아갈 뿐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새삼 지나간 날 스러진 삶을 돌이켜 길게 적어 나감도, 마찬가지로 헛되이 값진 종이를 버려 남의 눈만 어지럽히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하되 꿈속에 있으면서 그게 꿈인 줄 어떻게 알며, 흐름 속에 함께 흐르며 어떻게 그 흐름을 느끼겠는가. 꿈이 꿈인 줄 알려면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하고, 흐름이 흐름인 줄 알려면 그 흐름에서 벗어나야 한다. 때로 땅 끝에 미치는 큰 앎과 하늘가에 이르는 높은 깨달음이 더러 깨어나고 또 벗어나되, 그 같은 일이 어찌 여느 우리에게까지도 한결같을 수가 있으랴. 놀이에 빠져 해가 져야 돌아갈 집을 생각하는 어린아이처럼, 티끌과 먼지 속을 어지러이 해배다가 때가 와서야 놀람과 슬픔 속에 다시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인 것을. 죽어서 오히려 깨어난 삶과 흘러가버려 멈춘 때의 흐름에 견주어 보아야만 겨우 이 한 살이가 흐르는 꿈임을 가늠할 뿐인 것을.

또 일찍 옛사람은 말하였다.

<그대는 저 물과 달을 아는가. 흐르는 물은 이와 같아도 아직 흘러 다해 버린 적이 없으며, 차고 이지러지는 달 저와 같아도 그 참 크기는 줄어 작아짐도 커서 늘어남도 없었다. 무릇 바뀌고 달라지는 쪽으로 보면 하늘과 땅이 모든 것이 짧은 사이도 그대로일 수가 없지만, 그 바뀌고 달라지지 않는 쪽으로 보면 나와 남이 모두 바뀌고 달라짐이 없다.>

그게 글 잘하는 이의 한갓 말장난이 아닐진대, 오직 그 바뀌고 달라짐에 치우쳐 우리 삶의 짧고 덧없음만 내세울 수는 없으니라. 더욱이 수풀 위를 떼지어 나는 하루살이에게는 짧은 한낮도 즈믄 해에 값하고, 수레바퀴 자국 속에 사는 미꾸라지에게는 한말 물도 네 바다(四海)에 갈음한다. 우리 또한 그와 같아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인 이 땅, 끝 모를 하늘에 견주면 수레바퀴 자국이나 다름없고, 그 속을 앉고 서서 보낸 예순 해 또한 다함없는 때의 흐름에 견주면 짧은 한낮에 지나지 않으나, 차마 그 모두를 없음이요 비었음이요 헛됨이라 잘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이에 이웃나라 솥밭(鼎足)처럼 셋으로 나뉘어 서고, 빼어나고 꽃다운 이 구름처럼 일어, 서로 다투고 겨루던 일 다시 한마당 이야기로 피려니와, 아득히 돌아보면 예와 이제가 다름이 무엇이랴. 살아간 때와 곳이 다르고, 이름과 옳다고 믿는 바가 다르며, 몸을 둠과 뜻을 폄에 크기와 깊이가 달라도, 기뻐하고 슬퍼하고 성내고 즐거워함에서 그들은 우리였고, 어렵게 나서 갖가지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이윽고는 죽은 데서 마찬가지로 우리였다. 듣기에 사람이 거울을 지님은 옷과 갓을 바로 하기 위함이요, 옛일을 돌이켜 봄은 이 오늘과 앞일을 미루어 살피고자 함이라 했으니, 그런 그들의 옳고 그름, 이기고 짐, 일어나고 쓰러짐을 다시 한번 돌이켜봄도 또한 뜻이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굳이 이야기에 앞서 예부터 있어 온 노래 하나를 여기에 옮기는 것은 뜻이 달라도 옛사람을 본뜬 그 멋이 자못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 서사

臨江仙 (임강선 : 장강을 내려다보는 세속을 초월한 사람)

                                - 지은이 楊愼(양신)

 

滾滾長江東逝水,(곤곤장강동서수) 동쪽으로 흐르는 도도한 장강의 물결에
​浪花淘盡英雄 (낭화도진영웅)  숱한 영웅들은 물거품 속에 사라지고
是非成敗轉頭空 (시비성패전두공) 시비와 승패는 돌아보니 허무하기 짝이 없네.
青山依舊在 (청산의구재)  청산은 변함이 없는데
幾度夕陽紅 (기도석양홍) 지는 붉은 노을은 몇번이더냐.
 
白髮漁樵江渚上 (백발어초강저상) 강에서 고기잡는 늙은이들은
慣看秋月春風 (관간추월춘풍) 가을달과 봄바람을 구경하면서
一壺濁酒喜相逢 (일호탁주희상봉) 서로 만나 반가워 탁주 한 병 놓고
古今多少事 (고금다소사) 고금의 수많은 일들을
都付笑談中 (도부소담중) 웃음속의 담소에 담았다네
 
서사(序辭) 이문열 역
굽이쳐 동으로 흐르는 장강의 물
그 물결에 일리듯 옛 영웅 모두 사라졌네
옳고 그름 이기고 짐 모두 헛되어라
푸른 산은 예와 다름없건만
저녁해 붉기 몇 번이던가
강가의 머리센 고기잡이와 나무꾼 늙은이
가을달 봄바람이야 새삼스러우랴
한병 흐린 술로 기쁘게 서로 만나
예와 이제 크고 작은 일
웃으며 나누는 얘기에 모두 붙여보네
臨江仙 (임강선 : 장강을 내려다보는 세속을 초월한 사람)
지은이 양신(楊愼.1488~1559)
중국 명대(明代)의 문학가ㆍ학자. 자는 용수(用修), 호는 승암(升庵). 사천(四川) 신도(新都) 사람으로 1511년(正德 6) 진사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한림수찬(翰林修撰)을 제수받았다.
가정제(嘉靖帝: 世宗) 때 경연강관(經筵講官)이라는 직책을 맡았으나, 1524년 2번에 걸쳐 <의대례(議大禮)>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가정제의 심기를 거슬려 황제 앞에서 곤장을 맞고 거의 죽을 뻔했다. 이후 운남(雲南) 영창(永昌)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시문은 맑고 아름답다. 초기 시는 육조시대의 화려한 풍격을 지녔으나, 만년에는 소박한 풍격으로 바뀌었다. 학식이 해박하여 사학·금석학·민간문학·사곡(詞曲) 등에 조예가 깊었다. 윈난에 관한 견문과 연구는 귀중한 자료로 전한다. 주요 저서에는《단연총록(丹鉛總錄)》,《승암집(升菴集)》 등 100여 종에 달한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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