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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충주 목계솔밭 캠핑장 목계나루 답사

by 한국의산천 2020. 7. 29.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목계나루

충주땅 들머리 목계교. 충주 역사여행의 출발점이다. 목계교 옆엔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가 서 있다.

예로부터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내륙항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량했던 남한강 목계나루. 지금은 '목계나루터'라는 입석이 그 옛날의 번창했던 그 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을뿐이다.

 

목계 충주구간의 남한강은 딱히 빼어나거나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시사철 풍광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히는 곳이다.

문막에서 섬강을 따라 남한강이 만나는 법천리에서 목계구간도 일품이다. 탄금대까지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는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며 다니는 볼거리도 많은 곳이다.

 


목계진 / 牧溪津
시대 : 조선/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의 남한강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나루.

강의 진도(津渡)는 그 당시 사람과 말의 왕래나 물자의 운송로로서 그 구실이 매우 컸으며, 특히 목계진은 강 건너 가금면 가흥리에 있었던 가흥창(加興倉)으로부터 원주ㆍ제천ㆍ청풍 등지로 통하는 중요한 나루였다.

 

이곳은 중부내륙의 중심지인 충주에서 남한강 수로를 통하여 서울경강(京江) 의 광나루ㆍ송파ㆍ마포ㆍ동작나루 등과 연결되는 나루의 하나이자 남한강의 내륙 수로로서 사람과 물자의 교역이 이 나루를 통하여 많이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서울까지는 수로로 260리였으며, 조선시대 최대 규모였던 가흥창과 함께 목계진도 그 성쇠를 같이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한강변에 위치한 가흥, 목계, 반천, 금천, 북창, 탄금대 등 충주 인근 지역에 있는 나루들의 역할이 컷다.

이 중 수운의 전성기에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던 나루는 목계이다.

 

▲ 목계나루 碑

 

목계나루
여주에서 산척방면으로 38번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다가 19번 도로로 접어들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새로 길게 지어진 목계대교가 지나는 남한강 상류를 보며 목계교를 건너니 오른쪽으로 목계나루터라는 커다란 입석이 서있다.

 

번창했던 그 예전의 나루 <목계나루터>라는 표석과 그옆에는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가 서있다.

 

남한강의 목계나루는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다.

곡식 사백 가마니를 실은 배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었고, 나루 건너편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가흥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과나무 몇그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이곳에서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 ⓒ 2020 한국의산천

 

목계장터

             - 신  경 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나루에서 20리쯤 떨어진 노은면 연하리에 태를 묻은 신경림 시인에게 목계나루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다. 시인은 광복 이듬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목계나루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가 목계장터를 보곤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목계나루는 제법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시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마침내 ‘목계장터’라는 명시로 열매를 맺는다.

 

 

찬란했던 시절의 영화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강에는 나룻배 한 척 매어 있지 않고 비까지 내리는 쇠잔한 모습의 거리는 스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시인 신경림이 쓴 ‘목계장터’마저 없었더라면 ‘목계’라는 지명이 끈질기게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릴 까닭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목계는 그렇게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시 한편으로, 수석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기기묘묘한 돌이 모여 있는 곳으로, 또 전통 견지낚시를 아끼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울로 기억될 뿐 과거와는 철저하게 단절되어 버린 듯했다.


정약용이 쓴 글 중 한강 가에서 살기 좋은 몇 곳을 꼽은 것이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1690~1752)이 쓴 ‘택리지’를 읽고 쓴 발(跋)이 그것이다.

그 자신도 한강에 잇대어 있는 소내(苕川)에 살지만 그곳은 오로지 풍광만이 아름다울 뿐 생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강에서는 춘천의 천포(泉浦)와 지금의 설악면 일대인 미원(迷源), 그리고 남한강에서는 여주의 백애(白厓)와 충주의 목계를 꼽았다.

 

산이 뒤를 막았는가 하면 앞으로는 여울소리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나루터였기에 장터는 언제나 북적거렸으니 그 아니 좋았겠는가.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목계나루엔 인천항에서 소금, 건어물, 젖갈류, 생활 필수품 등을 싣고 온 황포돛배가 수십 척씩 붐볐다. 이런 물건들은 내륙 지방인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백두대간 너머 경상도의 문경과 상주 각지로 팔려 나갔다.

 

당시 뱃일하는 인부만도 500여 명이나 되었다 하니, 나루와 이어진 목계장터는 언제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두 옛 일에 불과하다. 위용을 자랑하던 조창은 모두 허물어졌고, 주변엔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다.

 

강나루의 흔적마저도 모래를 퍼내고 강 언덕에 축대를 쌓으면서 형편없이 변했다. 또 늘상 인파로 북적거렸을 목계장터는 지금은 매운탕집과 수석 가게들만이 한적한 풍경화를 연출할 뿐이다.

 

<다시쓰는 택리지>를 읽으며

1권 후반부에 (344-347쪽)에 "남한강변의 나루들"에서 목계 장터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후기 5대 하항중의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때 호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서 100요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교회,목계반점,목계슈퍼 등 상호만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다시쓰는 택리지 중에서 -

 

정약용이 쓴 글 중 한강 가에서 살기 좋은 몇 곳을 꼽은 것이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이 쓴 <택리지>를 읽고 쓴 발(跋)이 그것이다. 그 자신도 한강에 잇대어 있는 소내(苕川)에 살지만 그곳은 오로지 풍광만이 아름다울 뿐 생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강에서는 춘천의 천포(泉浦)와 지금의 설악면 일대인 미원(迷源), 그리고 남한강에서는 여주의 백애(白厓)와 충주의 목계를 꼽았다.

 

산이 뒤를 막았는가 하면 앞으로는 여울소리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나루터였기에 장터는 언제나 북적거렸으니 그 아니 좋았겠는가.

 

전해 오는 이야기

막흐래기

목계에서 선창벼루를 지나가면 소태면 양촌부락이 나오고 다시 강변을따라 내려가면 <막흐래기>라는 마을이 있으며 그 앞의 강물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곳인데 소위<막희락탄 (莫喜樂灘)>이다.

 

옛날 내륙의 삼대하항이라면 경기도 양평, 여주 그리고 목계를 지칭 했었다. 그중 대형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종착항으로 목계나루가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고한다.

옛날 충청북도는 물론 경상북도나 강원도 일부까지도 한양에 가려면 충주지방을 거쳐야 했는데 말이나 당나귀 등을 이용한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어렵고 거의가 목계에 와서 배를 타고 갔던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내륙과 경인지방과의 교역물품도 이곳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출입하던 배들은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나룻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배였다고 하는데 서울쪽으로 가는 배는 강 가운데를 운행하고 목계쪽으로 오는 배는 강가를 통해하도록 되어 있어서 많은 배들이 규칙적으로 운행되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큰 문제는 가끔 부딪치는 여울 때문인데 여울을 잘못 운행하다가 큰 사고가 나게 마련이어서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막흐래기 앞에 있는 막희라기 여울이 가장 유명했다고 하는데 각 여울마다 끌패라고 해서 배를 끌어 넘겨주고 임금을 받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이곳 막흐레기 여울에 있는 끌패들이 제일 많고 벌이도 제일 잘됐다고 한다.

 

막흐래기란 뜻은 한자로 말막자, 기쁠희자, 즐거운락자를 써서 莫喜樂인데 글자대로 풀이한다면 희희낙낙하지 말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이 여울이 너무도 어려운 장소이니 희희낙낙하다가는 큰일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옛날 목계항의<도선별장>은 막흐래기 나루의 사고가 안 나도록 하는데 항시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신라와 고구려를 지난 남한강 물줄기는 장미산성을 크게 휘돌아 흐르며 목계나루로 이어진다.

목계나루는 강물이 말라붙은 갈수기에도 언제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가항종점(可航終点)이었다.

조선 시대에 재정 확보를 위해 거둔 쌀과 베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인 가흥창(可興倉)도 이 곳에 있었다.

 

생선이 있으면 파리가 날아들고 나락이 쌓여 있으면 쥐가 들끓듯이 이곳 가흥참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산부사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을 지나며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경상도 백성들이 세곡을 바치는데 따른 고통과 부패한 가흥참 관리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읽어 볼 만하다.

 

우뚝이 솟은 저 계립령은

예로부터 남북의 한계가 되었는데

북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탐하여

남인들의 기름과 피를 달게 여기네

우마차로 험난한 산길을 통해라

들판에는 장정 남자가 전혀 없네

밤이면 강가에서 서로 베고 자노니

아전들은 어찌 그리도 탐획한고

시장에선 생선을 가늘게 회치고

모점에는 술이 뜨물처럼 하얀데

돈 거두어 노는 계집 불러오니

머리꾸미개에 연지를 발랐네.

백성들은 심장을 깎는 듯 괴로운데

아전들은 방자히 취해서 떠들어대며

또 두곡(斗斛)의 여분까지 토색을 하니

조사(漕司)는 의당 부끄러울 일이로다

관에서 부과한 건 십분의 일인데

어찌하여 이분 삼분을 바치게 하나

강물은 스스로 도도히 흘러서

밤낮으로 구름과 아지랑이를 뿜어내는데

배 돛대가 협곡 어귀에 그득히

북쪽에서 내려와 다투어 실어가니

남인들의 얼굴 찡그리고 보는 것을

북인들이 누가 능히 알겠는가. [출처: 이지누 한강을 걷다]

 

▲ 목계나루를 배경으로

우리의 문화유산.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끼고 알게 된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정조 때의 문장가)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즉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고 깨달아 앎으로 인해 비로소 실체가 보인다는 뜻.

 

목계 솔밭 캠핑장 가는 길

 

목계솔밭캠핑장 및 수주팔봉 개방 알림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됨에 따라 임시 폐쇄하였던 충주시 목계솔밭캠핑장 및 수주팔봉을 개방합니다.
1. 기간 : 2020.5.6.(수) ~
2. 장소 :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 407일원(목계솔밭공원),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산1번지 일원(수주팔봉)
3. 문의 : 지역개발과 하천시설팀 (850-6133)

 

카라반의 성지로 입소문이 자자한 충주시의 목계솔밭야영장입구 솔밭

 

목계 솔밭 조성유래

조선 헌종 때 목계 촌장의 꿈에 용이 목을 늘이고 한강물을 마시는데 그 꼬리가 강 건너 가흥땅 장미산에 걸치고 앞발이 목계마을 동산을 딛고 있었다. 이에 촌장이 깨달은 바가 있어 제단을 마련하고 기우제를 지냈다. 그랬더니 “저우내에 용이 머물 수 있도록 솔밭을 가꾸도록 하라.”는 노인의 음성이 촌장 귀에 들렸다. 이 무렵 저우내 촌장도 같은 꿈을 꾸었다. 송림을 만들어 놓으면 이곳에 가뭄을 타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꿈이었다. 그래서 두 마을에서는 마을과 강의 중간 지점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자 그 순간부터 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

 

이러한 효험을 맛본 두 마을에서는 서로 솔밭을 관리하려고 하였다. 저우내에서는 자기 마을 땅에 있는 것이니 자기네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고, 목계마을에서는 비록 저우내 땅이지만 자기들이 소나무를 심었으니 자기네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두 마을에서 서로 실력행사를 하다가 목계 사람들이 숫적으로 우세해 저우내 사람들이 패하고 관리권은 목계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목계마을 사람들 손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솔밭이라 하여 ‘목계 솔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출처:디지털 충주문화대전)

 

소나무가 한민족을 상징하는 나무로 자리잡기까지에는 그만의 강인함 때문일것이다

소나무는 해만 충분히 들면 산꼭대기 바위틈에서도 꿋꿋히 살아가는 질긴 생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목계솔밭이 오래도록 보존되길 바란다.

 

목계솔밭 아침풍경보기 >>>

blog.daum.net/koreasan/15607604

 

▲ 목계솔밭캠핑장 전경

넓은 초원과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치와 강바람을 느끼며 각자 자기 취향에 맞는 캠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충주시의 관리시설물이지만 충주시에서는 특별히 캠핑장으로 관리하지 않고 있고 다만 화장실이나 개수대 청소 등 최소한의 관리만 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자유를 추구하는 캠퍼들의 성향에 맞아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캠퍼들 스스로의 자율적인 캠핑장이 형성되어 일년내내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캠프사이트는 별도로 규제하지 않고있으며 선착순 입장하여 장소를 정하고 어느 누구의 간섭 없이 바로 캠핑을 즐길 수 있다.

주변에 앙성온천과 목계나루터 중앙탑등을 둘러볼 수 있으며 강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남한강가의 경치좋은 이곳 목계솔밭 캠핑장이 오래도록 깨끗하게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목계솔밭 캠핑장 풍경 더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5607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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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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