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가려’한 곳…고하도 새 길을 따라 걷는다
목포 | 글·사진 김종목 기자
입력 : 2020.06.24 21:55 수정 : 2020.06.24 21:56
ㆍ‘이순신의 요새’ 고하도와 ‘전남 소금강’ 유달산
목포를 천천히 즐기려면 유달산으로 걸어올라야 한다. 해상케이블카는 자연과 건축물을 두루 빨리 조감할 수 있다.
유달산 자락 아래 온금동과 서산동 일대가 보인다.
해안로 가운데쯤 철골 구조만 들어선 공터가 일제강점기 벽돌을 찍어내던 조선내화 목포공장터다.
목포를 천천히 즐기려면 유달산으로 걸어올라야 한다. 해상케이블카는 자연과 건축물을 두루 빨리 조감할 수 있다. 유달산 자락 아래 온금동과 서산동 일대가 보인다. 해안로 가운데쯤 철골 구조만 들어선 공터가 일제강점기 벽돌을 찍어내던 조선내화 목포공장터다.
산 아래 섬이라는 밋밋한 이름, 칼섬·병풍도로도 불린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전쟁을 준비했다.
지난해 말 용오름길과 데크길이 열렸다.
해안에는 일제가 파놓은 방공호가 그대로 남아있다. 또 박정희 정권 때 ‘감화원’이 있던 아픈 곳이기도 하다.
목포 하면 유달산 아닌가. 노적봉과 이난영 노래비도 여전하다. 유선각에 오르면 삼학도가 눈앞이다. 아름다운 곳이다.
일제에 맞선 목포시민의 저항의 역사도 서려있다 … 유람선에 올라 야경을 보며 기원했다. 코로나19가 빨리 지나가라고
“된하늬바람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보니,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했다.” 이순신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10월29일(양력 12월7일)의 기록이다. 이순신이 말한 섬은 지금의 고하도(당시 보화도·寶花島)다. 이순신은 2월16일 진을 옮길 때까지 107일을 고하도에서 머물렀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선을 건조했다. 향토 사학자들은 고하도에서 이뤄진 전력 보강이 이후 이순신 승리의 기반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지난 18·19일 목포 서남쪽으로 2㎞ 떨어진 고하도를 찾았다.
첫날 목포 일대에 굵은 비가 떨어졌다. 비 오는 날 사진 촬영 때문에 걱정하느라 섬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튿날 활짝 개어 다시 가기로 했다. ‘북항 스테이션’에서 출발한 케이블카가 유달산 스테이션을 넘자마자 고하도와 다도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고하도는 용오름길로 유명했다. 지난해 전망대에서 용머리에 이르는 해안 데크길도 개설됐다.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 이 길에선 목포대교와 유달산, 목포항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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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高下島). 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란 뜻이다.
이 건조한 이름의 산을 두고 목포 사람들은 용을 떠올렸다. 용당귀범(龍塘歸帆). 돛단배가 고하도 용머리 앞을 돌아오는 풍경을 뜻한다. 일제강점기 유생 사이 회자된 목포팔경 중 하나다.
춘원 이광수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1931년 5월22일 고하도를 둘러봤다. 그는 목포항에서 배를 타고 가며 본 섬을 ‘좌로 장검을 누여 놓은’ 듯하다고 묘사했다. 당시 이 신문에 충무공유적순례를 연재하던 그는 이순신의 검을 떠올린 듯하다. 본격적인 친일 행각에 나서기 전 일이다.
이 섬은 칼섬이라고도 불렸다. 어떤 이들은 병풍을 연상하며 병풍도라 했다. ‘용섬’도 여러 이름 중 하나다.
목포가 자랑하는 길이다. 고하도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고하도 이충무공유적지에서 용머리까지 산등성을 타고 가는 용오름길(편도 2.8㎞)이다. 다른 하나는 판옥선을 큐브처럼 엇갈려 지은 고하도전망대에서 용머리까지 해안을 따라가는 데크길(편도 1㎞)이다.
목포시는 지난해 11월 이 길을 시민에게 개방했다. 옛날부터 ‘가려(佳麗)’하다는 평을 들은 고하도의 진면목을 용오름길과 데크길에서 확인한다.
관광객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주로 고하도를 찾는다. 2012년 북항~고하도 간 총연장 4.129㎞의 목포대교가 완공된 뒤엔 시내버스로 갈 수 있다. 목포시 공공형 버스인 낭만버스 33번이 삼학도에서 목포역을 거쳐 고하도 케이블카 승강장까지 간다. 배차 간격은 3시간.
조선시대 일본을 쫓으려 만든 기지였던 이 섬에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승강장 왼편 해안에 일제가 파놓은 방공호가 뚜렷하게 남았다. 1938년 불량소년 교화를 내세우며 감화원을 지었다. 강점기 학대와 폭력이 발생했다거나 상급학교로 진학했다거나 하는 구전이 동시에 내려온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는 현대로 이어졌다. 문화관광해설사 곽순임씨는 “감화원에서 탈출하려고 헤엄쳐 나오다 여러 명이 죽었다”고 했다. 1962년 6월18일 사건을 말하는 듯했다. 그해 6월20일자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18일 밤 12시쯤 경찰이 고하도에서 탈출한 ‘국립 감화원’ 아이 3명을 구조한다. 아이들은 감화원의 ‘린치’ 때문에 도망쳤다고 말한다. 후속 보도는 찾을 수 없다. 대도라 불린 조세형도 이곳 감화원에서 지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구악 일소를 명분으로 내걸며 부랑아도 그 대상으로 삼았다. 그 부랑아 일군이 고하도 감화원으로도 왔다. 배를 감추기 알맞았던 이곳은 폭력을 은폐하기도 좋은 장소였다.
그간 목포 야경 하면 육지에서 바라보던 유달산 야간조명이나 바다분수였다. 지난 12일 취항한 삼학도크루즈는 바다에서 목포 주요 경관을 일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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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항구다>라는 영화 제목을 빌리면 ‘목포는 유달산’이다. 어느 지역의 대표 상징이 되면 되레 찾지 않게 된다. 유달산은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처럼 국립공원 규모 산이 아니라 등산객이 굳이 찾는 곳도 아니다. 여행객이라면 걸어올라야 하는 수고도 필요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사람들이 케이블카에서 유달산을 조감하는 걸로 끝내는 듯하다.
케이블카는 자력으로 멈출 수도, 지켜보고 싶은 장소에 머물 수도 없다. 도시 발전을 이루고, 수탈과 착취를 당했던 일제강점기 역사가 곳곳에 오롯이 새겨진 유달산은 걸어오르며 봐야 한다.
목포팔경은 유달산을 두고 ‘유산기암’(儒山奇巖)이라고 했다. 금강산에 빗대 전남의 ‘소금강’이란 말도 나왔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목포의 거리는 잊을지라도 저 신비한 유달산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산기암의 시작은 유달산 능선 아래 자락 노적봉이다. 이순신이 이 거석을 짚과 섶으로 위장해 군량미처럼 보이게 해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곡식을 한데 수북이 쌓아뒀다는 뜻의 노적(露積)을 붙인 노적봉, 노적산은 전국에 산재했다. 유달산 노적봉 전설과 비슷한 이야기도 이어진다. 안내 표지판은 ‘노적봉의 기를 받으면 건강에 좋다고 해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고 소개했다.
노적봉에서 유달산 정상을 향해 오르면 이순신상을 먼저 만난다. 멀지 않은 곳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가 일제 검열에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1935년 일이다.
산등성을 오르면 강점기 역사도 거슬러 올라간다. 오포대는 1909년 설치됐다. 목포부청 직원이 정오가 되면 오포(午砲)를 터뜨렸다. 이 소리에 목포 사람들은 “오포 텄다.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을 주고받았다. 포가 사이렌으로 대체됐을 때도 “오포 분다”라고 했다.
당시 통감부는 오포 시간을 양국 간 시차를 무시하고 일본 정오(한국 오전 11시)에 맞췄다. 전쟁 도구를 생활 도구로 이용한 것을 두고 일제강점기 강압적인 사회상을 보는 이들도 있다. 서울, 평양, 개성, 전주, 수원 등 조선시대 주요 도성은 종소리를 울려 시간을 알렸다.
일제강점기에 만든 유달산 돌계단을 오르면 풍경과 함께 오래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구도심 끄트머리 쪽 섬이 ‘삼학도’다. 한 남자를 사모한 세 여자가 학으로 죽은 자리가 섬이 됐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1932년 지역민들이 성금을 모아 산 중턱에 조성한 유선각에 오르면 목포 일대 전경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목포 문인 차재석(극작가 차범석의 동생)은 이곳 돌비에 “흰 구름이 쉬어가는 곳입니다.
세 마리의 학이 고이 잠든 푸른 바다의 속삭임을 새벽 별과 함께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세 마리 학은 삼학도다. 목포 사람들은 용과 학 같은 성스러운 동물에 빗대 목포의 자연과 역사를 기렸다.
목포 문인들의 문학 사랑과 낭만에 관한 일화도 찾았다. 문인 이창열은 자동차 사고로 숨진 알베르 카뮈의 추도식을 차재석에게 제안했다. 카뮈가 숨지고 보름 뒤인 1960년 1월19일 목포문학회 주최로 ‘카뮈의 밤’이 열렸다.
좀 더 오르면 마당바위다. 어김없이 일제강점기 흔적이 나온다. 일본 유명 승려인 홍법대사와 그를 수행했다는 부동명왕의 상이다. 마당바위에 데크 전망대가 설치됐다. ‘다도’란 말은 이곳에서 실감한다. 왼쪽부터 고하도, 화원반도, 달리도, 외달도, 안좌도, 장좌도, 율도가 들어섰다. 망원경으로 당겨본 목포는 구도심과 신도시, 자연과 인공 건축물이 역동적으로 어우러졌다.
고하도~유달산~입암산 둘레길을 걸으면 목포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입암산 둘레길도 목포팔경 중 하나다. “저녁노을 빛이 드리운 입암산 부근의 아름다운 풍경”이라 입암반조(笠岩返照)라 했다. 입암산은 갓을 쓴 사람 형태의 갓바위로 이어진다. 이곳도 데크가 설치됐다. 대불부두 등 목포항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1989년 2월 부두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저항하며 파업을 벌였다. 목포 시민들은 3·1운동에 참여했고, 4·8만세운동을 진행했다. 목포제유공장 노동자 파업은 1926년 1월 일어났다. 일제 자본이 들어선 자리엔 저항의 역사가 한데 서려 있다.
목포시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24일 현재 0명이다. 앞서 확진 판정을 받은 5명은 완치됐다. 청정지대인데도 코로나19 발생 이후 모든 관광 행사, 일정을 멈췄다. 목포시는 그간 미룬 홍보를 진행하려 기자들을 초청했다. 근대문화거리, 케이블카, 삼학도크루즈와 항구포차를 널리 알리려 했다. 방역대책도 세워뒀다.
케이블카 승강장은 단일화한 출입구 방역대를 거쳐야 들어갔다. 직원들은 케이블카가 도착할 때마다 내부를 소독했다. 가족 단위로 케이블카에 올려보냈다. 혼자 온 사람은 홀로 타고 갔다.
직원들이 마스크를 입에만 걸친 사람에게 주의를 줬다.
최근 문을 연 항구포차는 코로나19 이후 관광을 통한 지역경제 살리기와 안전여행 간 딜레마를 보여주는 듯했다. 3밀을 피해야 하는 시기 밀집된 포차는 아슬해 보였다. 하필 초청 프로그램을 진행할 즈음 대전발 집단감염 소식이 나왔다. 시 관계자는 “포차 개장도 여러 차례 미뤘다. 입점 상인들 고통이 늘어나 더 늦출 수 없었다. 포차 일대 방역대책도 더 만들겠다”고 말했다.
늦은 밤 삼학도크루즈를 타고 고하도, 목포대교, 유달산, 입암산, 목포 구도심, 신도시를 둘러봤다. 배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배 1층 무대에서 극단 사랑채 소속 가수들이 트로트를 불렀다. 한 명이 “아무도 없는 데서 노래합니다”라며 울먹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얼마나 흥이 있고 놀러다니는 거 좋아합니까. (코로나19) 빨리 지나가라고 노래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트래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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