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박경일 기자의 여행
‘찬찬히’ 보아야 예쁘다, 부여도 그렇다
▲ 부여 구간만을 따로 ‘백마강’으로 부르기도 하는 금강의 유장함은 부여가 품고 있는 오랜 시간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른 아침 금강 변에서 열기구가 떠올랐다. 열기구 탑승은 금강과 부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고요하게 둥실 떠올라 고대국가의 흔적이 남은 소도시를 비행하는 맛이 훌륭하다.
1시간 비행에 1명당 18만 원으로 비싼 게 흠이지만 말이다. 부여는 ‘열기구의 메카’다. 전국의 열기구 90%가 부여에 있다.
■ 코로나 시대 부여 여행법
짧은 거리의 한적한 여행지 찾는다면 백제의 고도로
금강 상·하류에 솟은 바위 천정대·자온대, 옛 자취 오롯이
도시재생 옷 입은 규암마을, 과거 풍경 뒤섞여 ‘이채’
탄광으로 호황 누린 만수리선 70년대 더듬는 재미도
금동대향로 놓인 부여박물관, 개관시간에 가면 느긋
연꽃으로 덮인 ‘궁남지’ 이른 아침 풍경 감탄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조명 켜지는 야간이 좋아
전염병 막아냈다는 주암리 은행나무도 찾아가 볼만
크고 작은 감염 확산이 이어지면서 ‘코로나19의 완전 종식’은 요원한 일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위협과 우려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인 것이지요.
코로나로 우리 일상이 달라진 것처럼 여행의 방식도 달라졌고, 달라지고 있습니다.
단거리와 단기일정. 코로나 시대 여행의 확연한 추세입니다. 밀집 관광지를 피해야 하는 것도 필수 수칙이 됐습니다.
결론은 ‘짧은 거리’의 ‘한적한 여행지’를 ‘짧은 일정’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적은 곳은 그만큼 매력이 떨어지는 곳이기 십상입니다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여행에 대한 생각과 시선을 바꾼다면 같은 공간도 의미와 느낌이 얼마든지 달라 보입니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달라진 시선으로 이름난 관광지에 가려진 매혹적인 공간도 발견할 수 있고, 대중적인 여행지를 돌며 느끼지 못했던 소박한 즐거움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행에 가장 적합한 목적지로 충남 부여를 권합니다. 다음은 부여 여행을 추천하는 이유, 그리고 부여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지금, 부여여행을 권하는 이유
▲ 백제대교 인근 부여 규암마을의 도시재생 공간들. 쓰러져가는 건물을 일으켜 커피숍으로, 공방으로 다듬어내고 있다.
여행자에게 부여는 곧 ‘백제’지만, 사실 남아있는 백제의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
여행자에게 ‘신라’인 경주는, 가는 곳마다 유물과 유적이 그득하지만 말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이 있었던 부여. 하지만 그때의 영광은 스러지고 없다.
백마강 전설과 삼천궁녀 이야기로 관광객을 불러모으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 부여는 백제의 영광도, 백마강 유람으로 대표되던 관광지의 모습도 다 잃어버린 특별할 것 없는 소도시다.
부여에서 여행자들이 주로 가는 곳은 궁남지와 낙화암, 국립부여박물관 정도가 고작.
비슷한 처지의 공주와 묶어서 백제를 테마로 일정을 짠다고 해도 동선이 헐겁다. 게다가 부여에는 ‘먼지 앉은 쇠락한 여행지’라는 선입견마저 씌워져 있다.
역사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낡고 오래된 명소 외에는 별 볼 게 없는, 철 지난 여행지쯤으로 치부됐던 것이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부여의 매력은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이다. 이름난 관광지에 가려 몰라본 곳도 있고, 미처 몰랐던 이야기가 스민 공간도 있으며, 도시재생으로 주목받는 공간도 있다.
지워진 단청이 수도의 정신을 더 맑게 드러내는 절집에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도 있고, 좋았던 시절의 유적처럼 다방이 곳곳에 남아있는 쇠락한 시골 마을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는 즐거움도 느껴볼 수 있다. 충청도 사람 특유의 성정처럼 똑 부러지지는 않지만, 부여는 은근한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 소도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다
부여의 매력을 알아차리는 전제는 ‘찬찬히 들여다보면’이다. 여행지를 오래 보게 만든 건 ‘코로나19’다. ‘핫’한 명소를 찾고 수시로 SNS에 업로드를 하느라, 이전에는 ‘따분한 역사책’ 같은 소도시 부여를 찬찬히 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감염병의 창궐은 여행의 의미나 가치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
소비와 욕망, 과시보다 여행이 지닌 휴식과 위안이 부각되면서 작고 소박한 것이 주는 위안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 위안을 느끼며 여행하기에, 부여는 참 좋은 여행지다.
부여는 여행하기에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다양한 매력을 가진 여행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백제는 든든한 밑 재료이고 도시재생의 공간과 소박한 농촌 마을이 몇 큰 술 섞는 부재료이며 노거수와 절집 등 소소한 공간이 조미료처럼 배열된 썩 훌륭한 여행지다. 하나하나는 화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섞어서 조리하면 근사한 조화를 이룬다.
부여의 강점 중 하나는, 그럼에도 여행자들이 몰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적당한 이격이 유지될 만큼의 여행자들이 있는데 지금은 그 수가 더 줄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부여를 찾는 이들은 대개 비슷한 취향의 여행자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국립부여박물관이나 궁남지, 정림사지 등 대표적인 관광지 주차장이 무료다.
박물관과 궁남지는 입장료가 아예 없고, 정림사지도 오후 6시 이후는 무료개방된다.
아득바득 입장료와 주차료를 받아내려는 지자체들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이건 돈 몇 푼이 아니라 외지인에 대한 태도와 환대의 문제다.
▲ 부여 궁남지의 연못 가운데 지은 정자 포룡정.
궁남지는 백제 무왕 때 만든 별궁의 정원으로, 신라의 인공호수 월지(안압지)보다 40여 년 먼저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조경이다.
# 하늘이 재상을 임명하다
먼저 부여에서 여행자의 동선이 닿지 않았던 곳부터 가보자. 백제의 뚜렷한 자취가 새겨져 있지만 그동안 눈길을 못 받은 곳이 부여읍의 ‘천정대(天政臺)’다.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 쪽에서 금강 상류 강 건너를 바라보면 야트막한 산자락에 바위가 희게 드러난 자리가 있는데, 그 바위가 바로 천정대다.
천정대의 이름과 내력은 삼국유사에 전한다. “나라에서 재상감을 의논할 때 후보자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 속에 넣고 봉해서 천정대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뒤 상자를 가져다 열어보고 그 이름 위에 인(印)이 찍힌 흔적이 있는 사람이 재상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하늘이 국무총리를 점지해준 셈이다.
본래 천정대는 바위를 부르는 이름이었는데 부여군은 금강 변을 잇는 도보 코스인 ‘백마강길’을 천정대 앞까지 끌어오면서 육각 정자를 짓고 정자에 ‘천정대’란 현판을 걸었다. 혹여 ‘점지의 소원’이 있다면 그곳을 찾아 빌어보면 어떨까. 하늘이 마땅한 재상감의 이름에다 도장을 찍어줬다니, 점지의 소원쯤은 가볍게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부여읍을 끼고 있는 금강의 상류에 천정대가 있다면, 하류에는 ‘자온대(自溫臺)’가 있다. 자온대는 부여읍의 중심으로 건너가는 백제대교 옆 강물 위로 솟은 20m 높이의 바위다.
자온대의 이름도 삼국유사에 나온다. 백제 왕이 강 건너 사찰에 예불하러 갈 때 먼저 이 바위에 올라 쉬어갔단다. 왕이 도착하면 바위가 스스로 따뜻해졌다고 해서 ‘스스로 자(自)’에 ‘따뜻할 온(溫)’ 자를 써 이름 붙였다는데, 임금이 당도하기 전에 신하들이 불을 지펴 바위를 데웠을 것이란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자온대 위에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 정자 수북정(水北亭)이 점잖게 올라앉아 있다. 조선 광해군 때 양주 목사를 지내던 김흥국이 인조반정을 피해 낙향해 지었다는 정자다. 발아래로 금강을 가로질러 건너는 백제대교가 영 거슬리지만, 다리가 놓이기 전 수북정이 있는 강변 풍경은 ‘부여 팔경’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빼어났다. 그때의 경관이 옛사람들이 지은 여러 편의 시와 그림으로 남아있다.
# 백제 말고 근대의 풍경을 보다
자온대는 부여 주민들에게 ‘엿바위’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엿바위라니 엿처럼 끈적한 바위이거나 엿가락처럼 생긴 바위인가 싶었는데, 뜻밖에 ‘엿’은 ‘엿보다’에서 나온 말이다.
강변에 솟은 바위가 부소산성을 엿보는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여 사람들은 바위 인근 마을을 ‘엿바위 마을’이라고 불렀다. 행정지명은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인데, 규암이란 이름도 엿보는 바위란 뜻으로 ‘엿볼 규(窺)’에 ‘바위 암(巖)’ 자를 쓴다.
엿바위 마을, 그러니까 규암마을은 1968년 백제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나루터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여기 규암 나루에서 강경, 군산으로 쌀이며 농산물이 실려 나갔다. 인근 홍산장과 은산장, 그리고 강경포구를 잇는 물류유통의 중심지가 된 규암리는 한때 부여읍 시장에 맞먹는 위세를 자랑했다.
우체국과 면사무소, 주재소가 들어섰고 유랑 악단의 쇼와 서부극 따위의 외화를 교차 상영하던 극장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지금 규암리는 어정쩡하다. 쇠락한 옛 풍경과 근래 지은 오피스텔 등이 구분 없이 뒤섞여있다. 규암리에는 도시재생 사업이 한창이다. 빛바랜 일본식 가옥에 감각적인 느낌의 가게가 하나둘 문을 열고 있다.
80년 된 ‘임 씨네 담배가게’의 뼈대를 책방으로 꾸민 ‘세간 책방’, 그리고 흥청거리던 요정이었던 폐가의 상량문과 서까래, 벽체만 남기고 양철로 감싸서 만든 좌식 카페 ‘수월옥’이 대표적이다.
거대한 단위농협창고도 이제 막 공사를 마치고 카페로 거듭나려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다. 손이 닿아 변모한 곳뿐만 아니라, 아직도 쇠락한 채 곳곳에 남아있는 풍경도 인상적이다. 창고로 쓰다가 버려진, 한 눈에도 극장이었음을 알아챌 수 있는 건물이 주는 늙어가는 것들의 쓸쓸함의 감상은 소도시 여행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 해가 지고 난 뒤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푸른 어둠을 배경으로 은은한 조명을 받은 석탑이 떠오른다. 여름에 정림사지는 오후 10시까지 문을 연다.
# 쇠락한 마을과 늙은 나무
한때 번성의 시기를 보내다가 쇠락해 늙어가는 곳이 부여에 또 있다. 외산면 소재지인 만수리다. 만수리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생을 마감하고, 이육사가 만주로 가기 전에 머물렀던 절집 무량사가 있어 절집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드문드문 닿는 곳이다.
절집 아랫마을 만수리는 1970년 대보탄광을 위시해 일대에 탄광이 개발되면서 돈이 넘쳐나는 호황을 누렸다. 그야말로 흥청거리던 시절이었다.
1995년 탄광이 일제히 문을 닫으면서 마을은 급속도로 쇠락했지만, 좋았던 시절의 흔적은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녹슨 철문과 한쪽이 무너진 시멘트 담장,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벽과 40년은 족히 됐을 법한 간판….
만수리에는 유독 다방이 많다. 다방 혹은 다실에서는 아직도 믹스 커피와 쌍화차를 판다. 동네 할머니들의 수다방이 된 만수다방은 폐업한 거나 다름없고,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초원다방과 현대다실은 촬영용 세트장과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낡았다. 이렇게 쇠락한 소도시를 기웃거리며 오래전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부여를 여행하는 재미 중 하나다.
여기까지 간 길이라면 한 곳을 더 가보자. 부여읍에서 만수리나 무량사로 간다면 내산면 주암리 녹간마을을 들러보자.
녹간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다.
수령 1000년을 헤아리는데 어찌나 거대한지 귀기(鬼氣)마저 느껴질 정도다. 이만한 나무라면 다 있는 전설 하나 깃들지 않았을 리 없다.
백제와 신라가 망할 때, 그리고 고려가 망할 때 은행나무 둥치를 칡넝쿨이 감아 올라가는 흉사를 겪었다는 얘기도 있고, 나무를 벤 이가 급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가장 솔깃했던 이야기는 신령한 나무의 기운 덕에 전염병이 돌 때 이 마을만 화를 면했다는 얘기였다.
내로라하는 영험한 노거수에 깃들어 있는 전설은 저마다 다양하지만, 나무가 마을의 전염병을 구제했다는 얘기는 여기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코로나19의 종식을 위해 노거수의 기운이라도 받고 싶은 심경이다.
# 거리 두기 시대, 부여를 여행하는 법
이번에는 거리 두기의 시대에 대표적인 백제의 명소를 여행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다. 먼저 부여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의 목록을 순서대로 꼽아보자.
첫 번째가 국립부여박물관이다.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박물관 제2전시실의 독립 전시공간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백제금동대향로를 코앞에 놓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제 막 백련이 꽃망울을 열기 시작한 궁남지.
그리고 세 번째는 굵은 붓질의 느낌으로 서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이런 곳들은 사실 사람들이 그리 몰리지 않는 곳이어서 그다지 걱정할 건 없지만, 그래도 시간을 앞당기거나 늦춰 한적한 시간에 맞춰 간다면 훨씬 더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다. 굳이 코로나19의 위협이 없다 해도 마찬가지다. 붐비는 시간대를 피하자는 것이지만 실은 ‘가장 좋은 시간’을 골라 가자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국립부여박물관은 개관 시간인 오전 9시에 딱 맞춰 가는 게 좋겠다. ‘생활 속 거리 두기’의 실천으로 국립박물관들은 시간별로 한정된 인원만 관람예약을 받고, 현장에서 입장하는 관람객도 한도 인원을 조정하고 있다. 하지만 개관 시간에 맞춰 가면 아무런 불편이 없다. 관람객이 거의 없는 시간대이니 백제금동대향로를 마치 제 것처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에는 금동대향로 못잖은 감탄을 부르는 유물인 국보 ‘왕흥사지 사리기’가 별도의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깜짝 놀랄 정도로 현대적인 미감을 드러내는 유물인데, 아쉽게도 박물관에 전시된 사리기는 재현품이다. 진품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라 10월이나 돼야 돌아오니 지금은 건너뛰어도 좋다.
백제금동대향로의 감동이 마음에 남는다면 향로 발굴 현장인 능산리고분까지 여정을 이어도 좋겠다. 고분군에 가면 고분보다 고분 옆 절터인 능산리 사지를 찾자. 금동향로가 나온 건 사라진 절터의 법당 자리 옆 공방 터다. 향로가 발굴된 자리에는 발굴 당시 향로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놓고 유리 덮개를 씌웠다. 1500년 전의 유물이 땅속에 갇혀있다가 빛으로 나온 순간의 감동을 짐작해보라는 취지다.
궁남지는 박물관이 열기 전에 되도록 이른 시간에 찾는 것이 좋겠다. 이른 아침 햇살이 번지기 시작할 무렵의 궁남지 연꽃이 아름답기도 하고, 그 시간에 궁남지 수면이 거울처럼 잔잔해 버드나무 늘어선 물가의 풍경을 거울처럼 찍어낸다. 눈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사진으로 담으면 궁남지의 이른 아침과 낮의 풍경은 같은 곳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르다.
궁남지 바로 옆에는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이 있다. 다들 거기 그게 있는지 몰라 서 무심히 지나치고 만다. 동상은 나당연합군과 맞선 계백 장군과 백제 결사대의 원혼을 위령하기 위해 2002년 세운 조형물인데, 8.8m 높이의 계백 장군을 비롯해 기마병과 보병의 조각상에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은은한 조명이 켜지는 밤 시간대에 가서 볼 것을 추천한다.
정림사지는 10월 말까지 야간관람을 위해 오후 10시까지 문을 연다. 밤 시간대에는 입장료도 무료다. 이즈음 최고의 시간은 오후 8시 무렵이다.
석탑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비껴 서면 석탑 뒤로 해가 지고 난 뒤 푸르게 빛나는 하늘이 걸린다. 주변 풍경이 하나둘 지워지고, 어둠 속에서 은은한 불빛을 받은 석탑과 마주 서면, 마치 1500년 전 저물 무렵의 백제의 어디쯤에 와 있는 듯하다.
■ 백제를 실감하는 방법
부여가 따분한 역사 도시처럼 느껴지는 건 역사가 케케묵은 박제쯤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제문화단지에 가보자.
문화단지 전시실 관람로 바닥 유리판 아래에 1995년 궁남지에서 발견된 백제인의 발자국을 재현한 모형이 있다. 200㎜쯤 되는 백제인의 발자국이 보여주는 건 ‘실감’이다.
부여 = 글·사진 박경일 / 문화부 /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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