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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B등산여행

왕건도 점령 못한 철옹성, 그 안을 가득 채운 신록 보은 삼년산성

by 한국의산천 2020. 6. 12.

왕건도 점령 못한 철옹성, 그 안을 가득 채운 신록

보은 | 글·사진 김종목 기자

입력 : 2020.06.10 20:48 수정 : 2020.06.10 20:53

 

ㆍ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옆…충북 보은 ‘삼년산성’을 걷다

삼년산성은 당대 첨단의 성곽이었다. 내외벽 사이 공간도 돌을 쌓아 올린 내외협축 공법은 산성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등성이에 건설된 성곽을 따라 난 산책로에서 성안의 계곡과 성 밖의 보은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은 서문지의 반원형으로 돌출된 치성에서 바라본 성안 계곡과 연못, 남문지(오른쪽)와 남문치성 등성.


삼년산성은 당대 첨단의 성곽이었다. 내외벽 사이 공간도 돌을 쌓아 올린 내외협축 공법은 산성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등성이에 건설된 성곽을 따라 난 산책로에서 성안의 계곡과 성 밖의 보은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은 서문지의 반원형으로 돌출된 치성에서 바라본 성안 계곡과 연못, 남문지(오른쪽)와 남문치성 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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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드문 풀이 무성한 무덤 곁
오랜 세월 버틴 요새의 성돌…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산성은
역사적 상상력에 불을 지핀다


삼년산성 주 출입문(추정)인 서문지(西門址)로 들어서니 암각자(岩刻字)가 먼저 들어온다. 이 ‘바위에 새긴 글자’는 ‘아미지(蛾眉池)’ ‘옥필(玉筆)’ ‘유사암(有似巖)’이다. 안내판은 ‘신라의 명필가 김생이 썼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전한다. 여느 전설이 그렇듯 진위는 알 수 없다. 그 암각자 울타리 옆엔 ‘보은군 문화관광과 문화재계’ 명의의 팻말이 박혔다. 분묘 이전 안내다. 산성 보존·관리를 위해 이전 조치가 필요하니 협조해달라고 적었다.


서문지에서 남문지(南門址)를 거쳐 남동치성(南東稚城)에 이르는 길에 무덤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초를 안 한 봉분엔 풀이 무성하다. 사적에 왜 무덤이 들어왔을까. 언제부터 무덤이 생겼을까. 궁금했다. 보은군 문화관광과는 추가 복원 사업 준비 단계로 2014년 전수조사했다. 지금 대략 30기가 남았다.

 

김윤수 주무관은 “2015년 한 분이 이장해 나가시면서 70년 전 여기 모셨다는 소릴 들었다”고 했다. 1940년대다. 삼년산성이 들어선 보은읍 어암리 오정산(325m)은 군 소유 산림이다. 사적 지정(1973년) 전 삼년산성 존재도 잘 모를 때, 동네 야산이라 묻은 듯하다. 20년이 지나면 법정 지상권인 분묘 기지권이 생긴다.

 


①북문지 쪽 내벽 높이도 7~8m다. 외벽 높이는 20m 안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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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새’는 조상을 모실 법한 적지로 보인다. 무덤 주변 오랜 세월을 버텨낸 성돌을 보며 든 생각이다. 묘 주변에 돌담을 쌓아 울타리를 만드는 제주의 ‘산담’이 떠오르기도 한다. 무덤들 주인과 후손에겐 산성 자체가 거대한 산담일 것 같다.

 

삼년산성은 별 존재감이 없었다.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이들이 찾거나 말거나 했다. 1927년 7월25일자 동아일보 ‘순회탐방 삼백팔십삼 삼남의 명승’ 기획의 ‘보은 속리산’ 편을 보면, ‘선경인 속리산에 가려면 보은읍으로 삼년산성을 바라보고 지나가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1973년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려진다.

 

‘삼국통일의 전초기지 삼년산성 확인’이라는 경향신문 1973년 1월30일자 보도다. 1980년대 이후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답사에 들어갔다. 2000년대 이후 본격적인 학술 연구가 시작됐다.

 


②산성 안 사찰은 보은사다. 본당 곁 미륵전에 있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312호 고려 석조 여래입상도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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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을 포함한 ‘중부내륙 옛 산성군(덕주·미륵·삼년·상당·온달·장미·충주 산성)’이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선정됐다.

 

유적 여행지를 두고 일종의 좌표를 찍어주는 유홍준 명지대 명예교수가 2015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8> 충북 보은 편에 삼년산성을 다뤘다. 2019년 한국관광공사의 ‘걷기 여행길’에 뽑혔다. 김 주무관은 “지금도 법주사의 연계 코스 중 하나로 삼아 오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학술 연구자나 산성 마니아들이 삼년산성을 주목적지로 정해 찾곤 한다.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다. 삼년(三年)이라는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공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음. 일선 땅 장정 3000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굴산성(屈山城) 개축함.’ 각각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470년과 486년 1월의 기록이다. 축성·개축 연대가 명시돼 가치가 높다. 이 짧은 두 기록을 두고 역사 연구자들은 5세기 삼국시대의 지정학과 외교학에 관한 ‘역사적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백제 영향권 지대에 만들어졌다. 백제가 왜 신라의 군사시설 건설을 그냥 두고 봤을까. 구체적 이유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흔히들 ‘고구려의 군사 거점에 대한 백제와 신라의 공동 대응’ 측면에서 해석한다. 백제가 고구려 전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신라에 성곽 축성을 먼저 요청했거나 신라의 축성을 묵인 또는 협조했다는 해석이 따라 나온다.

 

신라가 백제의 혼란을 틈타 이 접경 지역으로 ‘진출’했다는 해석도 있다. 신라의 북진정책과 백제에 대한 침략 저지라는 분석이 이어 붙는다. ‘고구려 남하 저지’라는 백제·신라의 공동 목표와 결과적인 신라의 삼국통일 전초기지라는 해석엔 이견이 없는 듯했다.

 


③구성곽과 신성곽의 비율은 7 대 3이다. 1500년의 흔적이 성돌에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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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품은 산줄기 위의 성곽
1500년 전 원형 대부분 그대로
예산상 복원은 일단 멈췄지만
한적하고 조용해 떠나기 아쉽다


둘레 1680m, 최고 높이 22m, 폭 8~10m. 이 규모를 오롯이 실감한다. 원형이 보존된 몇 안 되는 산성 중 하나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구성곽과 1980년대 이후 보강한 신성곽의 비율은 대략 7 대 3이라고 한다.

 

신구 성곽은 색깔에나 질감에서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1980년대 서문지 쪽 부분을 새하얀 화강암으로 급하게 복원하면서 졸속 복원이란 욕도 먹었다. 구성곽 돌엔 세월이 짙은 갈색이나 검은색의 더께가 묻었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신성곽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도 많아졌다. 삼년산성을 검색하면 ‘신성곽’ 쪽인 서문지 쪽이 많이 뜬다.


동문지 쪽 성벽은 성 밖에서 보면 최고 높이 22m다. 감히 넘볼 수 없는 물리적 공간감 때문에 적장은 공격도 하기 전 좌절의 심정을 느꼈을 법하다. ‘유럽의 고대 산성 못지않다’ 또는 ‘유럽 산성보다 뛰어나다’는 감탄은 이 규모에서 나온다. 413년 건설에 들어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높이가 12m(외성벽 기준)다.


삼년산성 내벽과 외벽 사이 공간도 돌로 메웠다. 붕괴로 성벽 단면이 드러난 지점에서 겉은 반듯하게 자른 돌로 쌓고, 속은 크고 작은 돌로 촘촘하게 채운 협축공법(夾築工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공법 덕에 오랜 세월을 버텼다.


남문지에 오르면, 눈에 들어오는 건 보은 공설운동장이다. 현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스타디움과 고대 건축물인 산성을 비교할 만하다.


둘레를 걷다보면 적의 동태가 한눈에 들어왔을 법하다. ‘철옹성’으로 불린 이유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삼년산성을 점령하려다 패했다는 역사 기록도 남았다. 난공불락도 아니었다. 822년 김헌창의 난 때 반란군이 삼년산성에서 위공과 제릉이 합세한 장웅의 군대에 패했다. ‘1패’의 역사가 산성 탓만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튼튼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군사 외교와 전투의 역사가 층층이 쌓인 곳에서 꼭 역사를 되뇌고, 산성이란 건축 공간을 굳이 들여다보려 애쓸 필요는 없다. 이 장소는 절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신록은 성안에서 더 빛을 발한다. 성 밖으론 탁 트인 보은 일대가 들어온다. 성안으로 눈을 돌리면 수풀이 무성한 계곡이 사람을 품는 듯하다.

 

삼년산성은 성안에 계곡을 두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로 성곽을 올린 ‘포곡형 산성’이다. 계곡이 내려온 지점 남북 42m, 동서 45m 규모의 연못은 건기엔 마르고, 우기엔 물이 들어차곤 한다. 삼년산성 건축에선 내외벽이 뻥 뚫린 수로도 유명하다. 당대 첨단의 군사기지에서 군인들이 농사를 짓고, 밥을 지어 먹고 살며 전투를 대비했다.


삼년산성 복원 사업은 일단 멈췄다. 예산 문제라고 한다. 어떤 식으로 복원할지, 활용할지를 두고 논의하자는 계획만 세워뒀다. 1980년대 복원에서 교훈을 얻은 듯 무너진 부분을 새 돌로 새로 쌓는 방식의 복원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김 주무관이 전했다. 지금은 산책로 목책 정도만 보수하고 있다. 보은군은 2001년 성곽 주변 등에서 도난당한 삼국시대 토기 등 유물 100여점을 2016년 경찰에서 넘겨받았다. 그 유물도 사무실에 놓여 있다.


시끌벅적한 곳을 내켜 하지 않는 이들이 좋아할 장소다. 3시간을 머무는 동안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은 채 온전하게 그 공간을 누렸다. 성돌 곁으로 난 산등성이 길을 걸어가며 눈길과 마음을 성 안팎 머무는 데 두면 된다. 내가 사는 동네에 있다면 매일 찾을 것 같다. 한때 머무르다 떠나야 하는 여행객으로서 아쉬움을 크게 느꼈다.

 


보은군은 30년 전부터 문화해설사를 뒀다. 금인자씨는 2년 동안 삼년산성에서 일했다. 보은 주민인 그는 코로나19 초기 확산될 때를 빼곤 2년을 매일같이 출근했다. 그는 하루도 지겨운 날이 없다고 한다. “1680m 길이 능선에 1500년 전 원형이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차곡차곡 우물 정자도 쌓아올린 돌에서 그 오래전 기술과 예술적 가치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겨울 눈 쌓인 삼년산성을 최고로 꼽았다.

 

출처 : 경향신문 트래블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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