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뜨개질하고, 오목 두고, 달고나 커피 한잔… 코로나가 시간을 뒤로 돌렸다
Chosun.com 박근희 기자 입력 2020.04.04 03:00
느려진 일상… 아날로그의 부활
텐트 대신 트렁크를 침실로 개조한 RV 차량에서 차박(차에서 숙박)하고 눈을 뜨니 수평선 너머 해돋이가 시작됐다. / 박근희 기자
브레이크가 걸렸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숨 가쁘게 살아온 일상을 '일단 멈춤' 상태로 만들었다.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집에서 노트북과 스마트폰으로 온라인 강의를 듣고, 인터넷과 앱으로 생필품을 주문해 배송받는다.
디지털이 코로나 사태 속 생존 수단이 됐다면 일상의 호흡은 1970~80년대 아날로그 풍경처럼 조금 느려졌다.
방방곡곡 여행 가는 대신 폐철길 따라 걷고, 자전거를 탄다.
사람들이 모이는 숙소를 피해 나 홀로 외딴곳에서 '자발적 격리 캠핑'을 하는 이들도 늘었다.
외식보단 직접 요리를 해 먹고, 손바느질로 면 마스크를 만들며 자급자족하는 일상. 추억의 간식 '달고나'도 때아닌 유행이다.
2020년 봄은 시나브로 아날로그 라이프로 물들고 있다.
뜨개질, 악기 연주, 자전거 타기… 아날로그 취미의 재발견
코로나 사태 두 달 경과. 마스크를 직접 만들고, 뜨개질을 시작하고, 굳게 닫아두었던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서울 하계동에 사는 이현미(41)씨 가족은 코로나 사태 이후 시곗바늘을 뒤로 수천 바퀴 돌린 것처럼 살고 있다.
이씨는 "집콕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 내 어머니처럼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외식을 줄이고 삼시 세끼 집밥을 직접 해 먹는 것은 기본. "손을 놀리지 않으면 자꾸 습관적으로 스마트폰 속 뉴스만 보고 있더라"는 이씨는 구석에 잠자고 있던 손뜨개 재료를 꺼내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이것저것 뜨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두고 손뜨개, 퀼트 등 고전 취미를 즐기는 사람도 많아졌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자발적 격리 생활자'들은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묵혀뒀던 악기를 연주하고 '오목'이나 보드게임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이씨 집 거실의 장식용 초 받침, 식탁의자 덮개, 주방의 각양각색 수세미 등은 모두 '코로나 사태가 낳은' 작품들이다.
심심풀이 삼아 만든 수세미는 가까운 이웃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이씨의 남편 박신섭(44)씨는 굳게 닫아두었던 피아노 뚜껑을 열고 피아노 연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초등학생 두 아들 서호(9)·주원(12)군은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묵직한 바둑판을 들고 나와 오목을 두거나 보드 게임을 하는 게 취미가 됐다.
남편 박씨는 "자발적 격리를 실천하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한동안 가구처럼 덩그러니 있던 피아노를 다시 치게 됐다"며 "요즘 퇴근 후 집에 들어서면 어린 시절 집 풍경이 슬며시 오버랩되는 것 같다"고 했다.
코로나 피해 집콕만 했다간 도로 '코로나 블루(코로나 확산으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를 경험할 것 같아 기분 전환을 위해 바깥 활동도 하기 시작했다.
신발끈을 동여매고, 마스크를 챙겨 쓴 뒤 집 밖으로 나선다.
바깥 활동이래야 집 근처 '경춘선 숲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 전부다.
작년 5월 전 구간 개통한 경춘선 숲길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아오면 당분간 슬기롭게 집콕 생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단다.
코로나 사태 속 찬란한 봄을 알리는 조용한 몸부림일까? 경춘선 폐철길 따라 벚꽃이 예년보다 일찍 만개했다.
올봄 꽃 여행은 산책길에서 대신하기로 했다. 이씨는 "바쁜 일상에 잊고 살았던 취미 활동을 다시 시작한 계기도, 가족들과 돈독해진 계기도 아이러니하게도 결국엔 다 코로나 때문이었다"며 "악몽과 같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잠시나마 모든 것의 전원을 끄고 아날로그 생활을 하며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두 달 넘게 이어지는 '코로나 사태'는 일상의 템포를 '조금 느리게'로 바꾸고 있다. 아날로그 여행지인 서울 노원구 '화랑대철도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주부 이현미씨와 이씨의 아들 박서호군.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달고나·김밥, 코로나 속 세대공감 음식
"400번 저어야 맛볼 수 있다"는 '수제 달고나 커피'가 코로나 사태 속 때아닌 화제다.
이달 3일 기준 인스타그램에만 게시물 11만5000개가 올라와 있다. 달고나 커피가 등장한 지는 꽤 됐으나 코로나 사태로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단순 노동하며 시간 보내기 좋은 DIY 음료'로 재소환됐다.
커피 가루와 설탕, 뜨거운 물을 섞어 수백 번 휘저은 뒤 달고나처럼 점성이 생기면 이를 우유 위에 얹어 타 먹는다.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만들기 쉬워 '달고나'를 아는 세대뿐 아니라 초등학생들에게까지 대유행이다.
주부 김민정(45·서울 우면동)씨는 "요즘 아이가 타 준 달고나 커피를 매일 한 잔씩 하고 있다"며 "엄마·아빠가 어린 시절 먹었던 달고나 맛이 궁금하다고 해 달고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달고나 세트까지 샀다"고 했다.
'달고나 커피'에 이어 달고나 만들기 세트는 코로나 사태 속 '세대공감' 유행 아이템으로 등극했다.
1970~80년대 '학교 앞 뽑기집'에서나 보던 달고나 세트는 달고나 커피의 인기에 힘입어 덩달아 유행 아이템으로 등극했다.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3월 한 달간 달고나 세트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997% 증가했다.
식소다(173%), 뽑기 틀(537%), 동국자(341%)를 비롯해 고체 연료(188%), 미니 화로(112%) 등 관련 제품 판매량도 늘었다.
심리·정신건강의학과 전문가들은 "달고나가 코로나 사태에 유행 아이템이 된 것은 '킬링 타임' 놀이에 적중했을 뿐 아니라 세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라고 봤다.
김밥도 마찬가지다. 몇 천원 정도면 간단히 사 먹을 수 있는 김밥을 직접 싸 먹는 집도 늘었다.
분당에 사는 김영애(62)씨네 가족은 지난 주말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김씨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외출이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들이랑 함께할 만한 것을 찾다가 이맘때 김밥 싸서 소풍 갔던 게 생각나 김밥을 싸 먹게 됐다"고 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김밥용 재료 대신 김밥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를 따로 준비했다.
김씨는 "옛날엔 다 하나하나 준비해서 싸 먹어 집집마다 김밥 맛이 달랐다"며 "아들, 손자, 며느리, 딸까지 함께 모여 모처럼 옛날얘기를 나누며 즐겁게 지내니 코로나가 얼씬도 못 하는 것 같았다"며 웃었다.
다시 캠핑, 대신 '차박'으로
사람들이 밀집된 공간 이용을 자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날로그 여행의 대명사인 캠핑 장비를 다시 꺼낸 이들도 적지 않다.
붐이 일었다가 미세먼지로 한동안 주춤했던 캠핑이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꺼림칙한 숙소 대신 캠핑 장비 챙겨, 되도록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자발적 고립' 여행을 떠난다. 잠시 집콕 대신 '자연 콕' 하겠다는 이들이다.
야영 생활을 하는 캠핑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차박캠핑(이하 차박)을 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본지에 '차박'이 소개됐을 때(2018년 5월 11일 자) 회원 수 3만6500명이던 네이버 커뮤니티 '차박캠핑클럽'은 회원이 9만5000여 명으로 늘었다.
운영자 남후식씨는 "최근 일주일간 하루 평균 500여 명이 새로 회원으로 가입했다"며 "코로나 사태로 누가 다녀갔을지 모르는 여행지의 숙소를 이용하는 대신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며 짧고 간편하게 캠핑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차박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아날로그 여행의 대명사인 캠핑은 코로나 사태 속 '차박 캠핑'으로 변형됐다. / 박근희 기자
차박 명소들은 주말이면 주차도 쉽지 않아졌다.
지난달 30일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 주차장 일대엔 캐러밴을 비롯해 차박캠핑을 즐기려는 차들이 대여섯 대 늘어서 있었다. 아바이마을에서 10여 분 떨어진 '등대해수욕장' 주변도 차박 차량들이 주차장 주변으로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아바이마을에서 만난 이성윤(33)씨는 "주말 내내 집콕 생활을 해오다 친구와 함께 사람이 이동하지 않는 밤 시간대를 이용해 차박하러 왔다"며 "파도 소리 실컷 듣고 해돋이까지 보고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코로나 감염증이 여전히 확산 추세라 이씨 일행은 회, 햄버거 등 음식을 '테이크아웃'해 와 간이 테이블을 펴놓고 먹었다. "'캠핑의 꽃은 요리'라는 말이 있지만, 당분간은 '차박'에 '드라이브 스루용 음식'으로 만족하렵니다." 이씨가 말했다.
코로나 감염증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매년 이맘때 열리던 봄꽃 축제는 취소 소식을 알리고 있다. 벚꽃 비 내리는 길을 느리게 걷기는 포기해야 한다. 대신 올봄엔 벚꽃도 드라이브 스루로 즐기는 분위기다.
대전 동구 등 벚꽃 명소가 있는 지자체에선 아예 '드라이브 스루 벚꽃 감상'을 제안했다.
'드라이브 스루 벚꽃길' 정보도 인터넷에 속속 올라오고 있다. 지난 1일 벚꽃을 감상할 수 있는 '아차산 벚꽃길(광진구 워커힐 길)'에도 드라이브 스루로 벚꽃을 보려는 차량이 이어졌다.
평일 오후라 차량 정체는 없었다.
드라이브 스루로 벚꽃 터널을 지나온 조연정(30)씨는 "속도를 낮추고 벚꽃을 좀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는데 차량 정체가 없어서 벚꽃길 드라이브가 너무 빨리 끝났다"며 아쉬워했다.
조씨 일행은 아차산 주차장에 주차 후 탐방객이 적은 벚꽃길을 따라 느리게 걸으며 벚꽃을 감상했다.
'여행 자제 권고'로 전국 벚꽃 명소를 찾는 대신 집에서 가까운 벚꽃 길을 찾는 게 대세다. 사진은 서울 '광진구 워커힐 길'. / 박근희 기자
아날로그 라이프, 코로나 블루 해소에 도움
코로나가 소환한 아날로그 라이프에 대해 다수의 전문가는 "좋은 신호"라고 평했다. 그동안 디지털 라이프에 지쳐 있던 뇌를 잠시 쉬게 할 기회가 될 수 있다.
김윤석(37) 서울맑은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인지를 잘 못하지만, 스마트폰 등의 영상물은 순간순간 빠르게 바뀌며 시선을 잡아끌고 뇌를 흥분시킨다.
스마트폰 보는 시간이 늘면서 뇌가 더욱 혹사당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다"고 했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영화도 스크린 영화보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영상이 많다 보니 지나치게 시청하면 두뇌 활동에 적신호가 켜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김 원장은 "아날로그적인 시간을 갖다 보면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지루함을 느끼거나 소위 '멍 때릴 때' 뇌는 DMN(Default Mode Network) 상태에 들어간다"며 아날로그 라이프의 긍정적인 측면을 설명했다.
연구에 따르면 DMN 상태가 되면 뇌는 일부만 활동하게 되며 불필요한 정보를 정리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김 원장은 "코로나 사태로 스트레스가 높아질 수 있지만 오히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정신 건강을 챙길 기회"라고 했다.
달고나 커피 만들기처럼 아무 생각 없이 휘젓기만 해도 되는 놀이,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할 수 있는 보드 게임이나 윷놀이, 악기 연주, 컬러링 북 색칠하기나 그림 그리기, 음악 감상, 자전거 타기 등은 이 시기를 견디는 약이 된다.
어린 자녀가 있는 집의 경우 종이컵 성 쌓기, 도미노 게임을 해보는 것도 좋다. "코로나가 사라진 먼 훗날 사람들은 확진자 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는 기억할 겁니다." 김 원장의 말처럼 묵혀뒀던 악기, 재료들을 꺼내볼 기회는 많지 않다.
코로나 사태는 분명히 위기 상황이지만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가족과 교감하며 아날로그 라이프에 도전해볼 기회일지도 모른다.
봄꽃 축제 대신 한적한 숲길로
아날로그 풍경 벚꽃 산책로
주식 고수들은 '분산 투자'를 한다. 위험 부담을 낮추는 게 주목적이다.
올해는 위험 부담을 낮추기 위해 벚꽃 구경도 분산 나들이를 해야 할 듯싶다.
봄꽃 축제 명소인 여의도 윤중로 일대, 석촌호수 등은 오는 11일·12일까지 일시적으로 폐쇄한다. 코로나 감염증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나들이객이 일시적으로 몰리면서 밀접 접촉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코로나가 우리를 이길 수 없듯 찬란한 봄날에 집콕 탈출한 나들이객을 막을 수도 없다.
다만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선 나들이도 분산이 필요하다. 멀리 여행 갈 순 없으니 아날로그 풍경 간직한 벚꽃길을 찾았다. 감성 충전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폐철길 공원화 사업으로 숲길로 변신한 서울의 두 폐철길에서도 벚꽃을 만날 수 있다.
서울 마포구 경의선숲길은 일명 '연트럴파크', 경의선 책거리 주변이 벚꽃길의 백미다. 윤중로나 석촌호수보다는 규모가 작고 덜 유명하지만, 벚꽃뿐 아니라 목련, 메타세쿼이아 등 다양한 수종을 감상하며 걷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노원구 경춘선숲길은 작년 5월 전 구간 개통된 숲길 산책로인 만큼 아직 어린 수종이 많다.
녹이 슨 폐철길 구간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아날로그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사진 찍기에 좋다.
숲길의 동쪽 종착지에는 지금은 폐역이 된 서울의 간이역 '구 화랑대역'이 기다린다.
비대칭 박공지붕의 역사(驛舍) 내부는 철도 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코로나 사태로 현재 내부 관람은 불가하다.
폐역사 주변은 '화랑대철도공원'으로 변신했다. 체코와 일본에서 운행됐던 트램은 이국적 풍경을 연출하는 일등공신이다.
서울의 오래된 놀이공원인 '서울어린이대공원'도 아날로그 감성을 만끽할 수 있는 벚꽃 명소지만 현재 휴장 상태다. 비교적 서울의 옛 풍경을 간직한 지역도 눈 돌려볼 만하다. 성동·광진·중랑·동대문구를 연결하는 중랑천은 제방 위로 벚꽃이 만개하고 아래 산책로를 따라 유채, 장미, 창포 등 꽃 군락이 조성돼 있다.
양재천이나 안양천보단 덜 알려진 덕분에 거리를 두고 산책할 수 있다.
차량에 탄 채 벚꽃을 감상하는 '드라이브 스루 벚꽃길'을 찾는다면 종로구 인왕산 길, 광진구 워커힐 길, 강서구 곰달래로, 금천구 벚꽃로 등을 추천한다. 모두 서울시가 선정한 '봄꽃 길 160선'에 이름을 올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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