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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나를 매국노라 불러도 좋다, 나라가 살아야 복수도 할 수 있는 것"

by 한국의산천 2019. 12. 18.

한번도 점령당하지 않고 깨지지 않은 남한산성  



예전에 자주 다녔던 길이

요즘은 낯설구나


낮은데로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살자꾸나 ....


  

신생의 길은 죽음 속으로 뻗어 있었다.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에서 투항했다.


▲ 칸에게 치욕과 수모를 당한 너무 작은 서문 (2007년 여름 촬영) ⓒ 한국의산천  

 

살을 에는듯한 북풍한설 몰아치는 정월. 城안의 말 먹이는 동이난지 오래며, 한마리 두마리 허연 콧바람을 내뿜으며 허덕이다 쓰러지고, 성을 지키는 병졸은 가마때기 한장 없이 눈보라를 맞으며 통나무 쓰러지듯 하나 둘 스러져갔다. 지금으로부터 372년전 이곳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1월30일, 왕은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흰말을 타고는 이곳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가야 했다. 서문은 작고 낮아서 말을 타고서는 도저히 지나 갈 수 없는 문이다. 또한 서문을 지나서 내려가는 길은 좁고 매우 가파른 길이기에 말을 타고 내려 갈수없는 곳이다. (몇해전 제가 이곳 남한산성을 한바퀴 돌때 유심히 관찰했던 곳입니다) 

 

  삼전도에 다다라 칸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칸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상이 파할 무렵 칸은 두 마리의 개에게 상에 차려져 있던 고기를 베어서 던져 주었다고 하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밭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왕에게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칸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해거름이었다. 

 

소파진(所波津)으로 한강을 건넌 왕을 향해 사로잡힌 백성들은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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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땅 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 지인께서 보내준 김훈 장편소설 <남한산성> ⓒ 2007 한국의산천

이 책을 받고 읽은지 12년이 지났네   

엊그제 같은데  

어허

그간 내가 무릉도원에 있었나?


봄이 오고 있었다. 어김없이 봄은 다시 오고 있었다. 송파강의 얼음이 녹으면서 강물이 풀렸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인조는 도성으로 환궁했다.

건너왔던 강들을 건너 제 나라로 돌아가는 청태종과 인질로 끌려가는 세자를 임금은 배웅했다.

목을 맸던 김상헌은 죽지 못했다. 얼음에 갇혔던 강물이 버려진 주검들을 삼켰고, 망가진 달구지들과 화포들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성안의 대장간 화덕에도 불이 지펴졌다. 임금의 교지를 품고 멀리 삼도를 돌았던 대장장이가 돌아온 것이다.

날쇠는 뒷마당에 묻어 두었던 장독의 똥물을 건져 밭에 뿌렸다. 난리 통에도 똥물은 잘 곰삭아 있었다.


얼음 위로 어가행렬을 건네고, 김상헌의 칼을 맞았던 사공의 주검이 겨우내 하얀 눈을 봉분으로 뒤집어쓰고 있다가 풀린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김상헌의 부탁으로 사공의 딸은 날쇠가 거두었다. 성으로 다시 들어오던 그날, 사공의 딸 나루가 초경을 했다. 먼 상류 쪽에서 강물은 산자락을 돌아서 흘러오고 있었다.

  

‘남한산성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을 그렇게 썼다가 지웠다. - 김훈 著 남한산성 중에서


"나를 매국노라 불러도 좋다, 나라가 살아야 복수도 할 수 있는 것"

이한수 기자 입력 2019.11.30 03:00 
 

병자호란 초기 청군과 담판하며 남한산성으로 대피할 시간 벌어
'매국노' '간신' 비난 들으면서도 조선의 영토와 국권 보전시켜

  


최명길 평전

한명기 지음|보리|668쪽|3만3000원


383년 전 그 겨울로 돌아가본다. 1636년 12월 13일 청나라 군사가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튿날 오후 3시 임금(인조)과 신료들은 강화도로 피신하기 위해 창경궁을 나섰다. 남대문쯤 갔을 때 청군 선봉이 벌써 무악재에 이르렀다는 전갈이 왔다. 강화도로 갈 길이 막혔다. 하루 전만 해도 결전을 벌이자고 기세등등하던 신하들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이 나섰다.


"신이 단기로 적장을 찾아가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묻겠습니다. 오랑캐가 신의 말을 듣지 않고 죽인다면 신은 말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요, 다행히 서로 이야기가 되면 잠시라도 칼날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서울 가까운 곳에서 방어할 만한 땅은 남한산성만 한 데가 없으니, 전하께서는 빨리 달려 산성에 들어가 일의 추이를 보소서."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벌어 그나마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게 한 이는 최명길이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담판이었다. 그는 이미 그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산성 내에서 벌어진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소설 및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상헌(1570~1652)과 최명길이 벌인 논전이 핵심이다. 최명길이 청에 화친을 요청하는 국서를 쓰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국서를 찢으며 통곡했다. 최명길은 "국가가 보전된 다음에야 와신상담도 할 수 있는 법"이라고 반박하며 다시 국서를 썼다.


그 겨울 남한산성에 우리가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마초와 식량은 떨어졌다. 병사들은 굶어 죽은 말을 삶아 먹었다. 얼어 죽는 병사가 속출했다. 청군은 홍이포를 늘어놓고 대포를 쏘아댔다. 기다려도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산성 내 조선 군사들은 상황을 이렇게 만든 조정에 대한 분노로 반란이라도 일으킬 태세였다. 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와서 항복을 종용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상헌(김윤석·왼쪽)과 최명길(이병헌)은 척화와 화친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훗날 둘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시(詩)를 읊었다. 김상헌은 “어찌 바지와 저고리를 바꿔 입겠는가”라고 했고, 최명길은 “끓는 물도 얼음도 다 같은 물이다”라고 했다. /CJ엔터테인먼트
 

최명길이 또 나섰다. "약한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어떤 수단이라도 쓸 수밖에 없다." 청군 진영을 몇 차례 오가며 항복 조건을 타협했다. 인조가 가장 염려했던 것은 심양(당시 청의 수도)으로 자신을 압송해가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최명길의 요청을 수락했다. "약속을 지킬 테니 조선은 안심하고 신복(臣服)하라." 인조가 삼궤구고두 의식을 치르고 국권과 영토를 보전한 것은 사실 행운이었다. "조선은 영토를 넘겨주지 않았고, 훗날 청군이 북경(명나라 수도)을 점령한 이후 자행했던 것처럼 관민들이 체발을 강요당하지도 않았다. 또 몹시 우려했던 것처럼 인조 자신이 심양으로 끌려가는 사태도 빚어지지 않았다."(363쪽)


병자호란 직후 최명길은 '매국노'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 '진회(금나라와 화친을 체결한 송나라 재상)보다 더한 간신'으로 비난받았다. 소위 '깨끗한 선비'들은 오랑캐에 짓밟힌 '더러운 조정'에 나갈 수 없다고 나랏일을 저버렸다.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바로 낙향했다. 이식(1584~1647)이 훗날 진실을 말했다. "김상헌이 남한산성에서 곧바로 귀향한 것은 지조 높은 행동이었지만, 그 또한 최명길이 열었던 문을 통해 나갔다."


김상헌도 훗날 최명길의 진심을 깨닫는다. 1640년 10월 김상헌은 '반청 혐의자'로 체포돼 심양 감옥으로 압송됐다. 최명길도 명나라에 비밀 사신을 보낸 사실이 발각돼 심양 감옥에 갇혔다. 김상헌은 "이제 같은 감옥의 죄수가 되어 백 년의 의혹을 풀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배 선비들은 최명길을 '소인'으로 낙인찍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은 "최명길은 이익만 알고 의리를 잊은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후 조선 역사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병자호란 때 나라가 망했어야 한다고 자조하는 분도 많다. 차라리 장엄한 패배를 맞았다면 치욕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영토와 국권이 청나라에 넘어갔다면, 지금 우리는 한국어를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죽창을 들자고 분노하는 일은 술 취한 필부(匹夫)라도 할 수 있다. 상대를 '매국노'라 심판하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저자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 조야를 막론하고 '비판자' '심판자'가 넘쳐나고 있을 때 최명길은 나라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최명길이 보여준 책임감과 희생정신, 유연함과 포용력, 그리고 전략적 사고는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저자의 전작 '역사평설 병자호란'과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쓴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을 함께 읽으면 당대 역사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추억의 남한산성



텅 빈 묘당에 말들이 남았다. 말들은 내행전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린 대신들의 등 위에서 부딪혔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길을 말하면, 예조판서 김상헌은 그 길에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 있음을 말했고,

영의정 김류의 말은 시종일관 두리뭉실하고 갈팡질팡했다.


묘당 안에서 늙은 신료들의 말은 살점이 없는 뼈다귀들처럼 부딪치며 울었고, 울다가 부러졌고, 산산조각이 나서 길을 잃곤 했다.

길을 잃어버린 말들이 행궁 아래 마을로 내려오면, 백성들의 입에서 떠돌다가 얼어붙은 성벽에 부딪혀 갈래갈래 찢겼다.


더러는 관리들의 입을 타고 가파른 산등성이에 붙은 성첩으로 오르기도 했다.


서장대 밖 멀리 삼전도에서 불어온 매서운 바람으로 군병들의 몸이 바싹 얼었지만, 메마르고 갈라진 말들은 병졸들의 마음을 녹이지 못했다.

굳게 닫힌 성안에서 바짝 움츠려든 나라의 운명은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말 속에서 진물이 터지고, 고름이 흘렀다.


겨울 산성은 골바람 속에서 유난히 떨었고, 동지를 지낸 겨울밤은 짧아질 줄 몰랐다. 원병은 오지 않았다. 임금은 구원의 발길조차 미치지 못하는 남한산성에 있었다.











▲ 마침내 최명길의 화청정책이 받아 들여져서 1937년 1월 30일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청나라 칸앞에 무릅을 꿇게된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고 이후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는 약 200여년간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다. 한반도 안에서 성을 쌓거나 성을 보수 할 수 없었으며 군사시설을 만들수도 없었으며 수많은 공물과 여자와 포로를 바치고 살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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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둘이 아닌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서로의 대립각을 세웠다.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입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서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수 없다" 청음 김상헌과 " 굴복을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지천 최명길. 두분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신 두분 말의 표현은 달랐어도 마음에 담은 애국심 그뜻은 같지 않았을까 ?  


마침내 최명길의 화청정책이 받아 들여져서 1937년 1월 30일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청나라 칸앞에 무릅을 꿇게된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고 이후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는 약 200여년간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다. 한반도 안에서 성을 쌓거나 성을 보수 할 수 없었으며 군사시설을 만들수도 없었으며 수많은 공물과 여자와 포로를 바치고 살아야만 했다.


남한산성 더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