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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내 나라여 영원하라

by 한국의산천 2019. 5. 25.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내 나라여 영원하라"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5.22 03:01

 

[166]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16)스스로 부활한 대한국인(大韓國人)

   

 박종인의 땅의 歷史 
 

  1910년 8월 22일 대한국(大韓國) 황제 순종이 대일본 천황 메이지(明治)에게 대한국 통치권을 이양했다. 대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대일본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전권을 위임받아 '일한합병조약'에 서명했다.


전문 8조 가운데 1조와 2조는 양국 황제의 통치권 일체 양여 및 수락을 규정했다.

3조는 한국 황제(순종), 태황제(고종), 황태자 가족의 신분 보장 및 경제적 지원, 4조는 기타 황족의 대접, 5조는 병합에 공을 세운 자에 대한 포상을 규정했다. 나라 판매 계약서 8개 조항 가운데 2개가 나라를 판 황제 가족 지원이고 1개 조항이 그 판매 실무자 포상 조항이라는 뜻이다.


한 달 보름 뒤 축하 파티가 남산에서 열렸다. 조약 5조에 근거해 병합에 공을 세운 자에 대한 포상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날 병합에 으뜸으로 공을 세운 자들은 '조선귀족(朝鮮貴族)'이라는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모두 76명이었다. 거부한 사람은 8명밖에 없었다.


조선귀족 수작식

'어제 오전 10시 30분 전 친위부장관 이병무씨가 구한국 육군 부장 정장을 입고 총독부에 먼저 올랐다. 이씨가 찬란한 금빛 광채를 사방에 떨치며 의기양양하게 1등으로 현관에 마차를 옆으로 대고 이어 정1품 보국 민영소와 전 탁지부대신 고영희와 이재완, 윤택영, 전 내부대신 박제순과 이재극과 전 법부대신 이하영씨 등이 바퀴 소리 요란하게 앞다퉈 총독 관저에 들어왔다.(중략) 전 총리대신 이완용과 전 농상공부대신 조중응과 전 내각 서기관장 한창수씨 등이 마차를 함께 타고 오전 10시 50분에 도착했다.


전 탁지부대신 임선준과 전 학부대신 이재곤과 전 시종원경 윤덕영과 전 궁내부대신 민병석씨 등이 잇달아 마차 수십 대를 경쟁하듯 타고 오니 그 위세가 대단했다.

조선 옛 가마를 타고 황급히 오는 사람도 있었다.(중략) 차려입은 모습은 각양각색이었으나 얼굴에 번뜩이는 희열(喜悅)은 일장 가관이었다.'(1910년 10월 8일 '매일신보') 또 뜻밖에 귀족이 된 사람은 대주연을 벌이고 밤새워 축의를 표했으며(10월 11일 같은 신문), 황실 종친인 청풍군 이해승(후작)은 조상 묘에 가서 수작 사실을 고유했다. (이용창,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수작 경위와 수작자 행태') 세계 각국의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양계초·梁啓超,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합병'에 공헌한 한국인 76명에 대한 귀족 작위 수작식 풍경을 전한 1910년 10월 8일 '매일신보'. '얼굴에 희열이 번뜩였다'고 했다.
 
멸망한 '선비의 나라'

500년 동안 성리학 이외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권력이었다.

조선은 '15세기와 18세기 사상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그리기가 곤란할 정도로 진전을 볼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다.(모리스 쿠랑, '조선 서지학', 1896)

일본인 눈에는 '주자 외에는 영웅호걸을 아는 자가 없는 나라'였다.(혼마 규스케, '조선잡기', 1894)

'상업은 도둑질하는 근본'(1518년 5월 28일 '중종실록' 등)이라며 500년 동안 경제를 억압한 끝에 조선은 '너무도 가난해 비싼 술로 일반 대중을 부패시킬 위험이 덜한 나라'가 되어버렸다.(G. 길모어, '서울에서 본 조선', 1892)

명종, 선조 때 거듭 일본에서 진상하는 철포(鐵砲)를 무시한 끝에 문약(文弱)한 권력층은 백성과 국토를 도탄에 빠뜨렸다. 몇 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역대 권력자들은 학문과 경제와 강병과 부국의 기회를 보지 않았다.

누구 탓인가. 그 자신 선비였던 유학자 이기(李沂)는 "농사꾼도 못 되고 상인과 공인도 못 되고 선비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들은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 1908) 선비연하며 지식을 독점해 권력을 확장한 권력자들이 역적(逆賊)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전쟁 한번 치르지 못하고 나라가 망했다. 


▲ 1945년 11월 3일 중국 중경 임시정부청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임정 요인들.

3·1운동 이후 사람들은 '왕국'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인 '민국'을 염원했고, 그 대한민국 부활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저 소시민적인 행복을 추구해도 될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제공
 
일본의 굴기, 조선의 무지

일본 지식인과 권력자는 정확하게 조선 권력자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철포를 받아들였고(1543), 유럽과 교류를 했고(1641,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권력자는 학문을 장려했으며(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난가쿠·蘭學'), 그리하여 19세기 중반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 구체제를 타도하고 근대화를 준비할 수 있었다. 식물학자인 전 천황 아키히토는 이렇게 말했다. '교사 한 명 없이 유럽에서 온 책들에 의지해 유아기 단계의 일본 과학을 발전시킨 선인들에게 감사한다.'(아키히토,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일본 과학', 1992) 조선은 그 일본에 12차례나 통신사를 보냈으니, 본 바가 있을 것이다.


1980년 북한 조선중앙TV가 '광주인민항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에 관한 프로그램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동독에서 탈출한 김책공대 대학생 장영철은 이렇게 기억한다. '"판잣집만 있다더니 웬 고층건물이 그리 많은 거이가?" "하루 죽 한 끼를 먹는데 저럴 수가, 도대체 뭔 죽을 먹길래…" 위로 쳐들고 힘 있게 흔드는 대학생들 팔목에는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시계가 있었다.'(장영철,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 1997) 남한 풍경은 북한을 조금씩 바꿔 놓았다.

조선 통신사들은 오사카와 에도에 번쩍이는 번영의 풍경을 목격했고, 목격담을 기록했다. 하지만 조선은 불변이었다.


1890년 메이지 정권이 반포한 '교육칙어'는 '의용(義勇)으로 봉공(奉公)하여 천양무궁(天壤無窮)한 황운(皇運)을 지켜야 한다'고 규정했다. 교육칙어는 일본 군국화의 근원이다. 강한 놈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시작한 근대화가 어느덧 황민을 총동원해 약한 놈을 탐하게 하는 무력으로 변한 것이다. 조선 지식인들이 뒤늦게 잠에서 깨어났지만, 늦었다. 중환자실로 문병 왔던 일본은 조선에 붙어 있던 산소호흡기를 뜯어버렸다.



3·1운동과 대한민국

1910년 11월 3일 총독부는 양반, 유생, 노인 9811명과 효자, 절부, 과부, 고아 등 8만3922명에게 은사금을 지급했다. 효자, 절부에게는 10원을 주었고 양반, 유생 가운데 모범 노인에게는 최고 200원까지 하사했다.(총독부, '경성부사'2)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김창숙, '벽옹칠십삼년회상기')


▲ 경북 안동 임청각에 있는 텅 빈 사당. 석주 이상룡은 만주로 떠나며 사당에 있는 위패를 모두 묻어버렸다(왼쪽 위). 중국 연변 용정(龍井)에 있는 '3·13반일의사릉'(왼쪽 아래). 2007년 러시아 우수리스크 야산에서 최재형의 노제를 올리는 손자 최발렌친. 안중근을 후원했던 연해주 한인의 대부 최재형은 1920년 재판 없이 총살됐다.
 
9년 뒤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기미만세운동이 시작됐다. 민족 대표 33인은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으로, 유림은 없었다. 사람들은 울고 있던 선비 김창숙을 보고 "나라를 망칠 때는 온갖 죄악 다 지어놓고 통곡은 무슨 통곡이냐"라고 거칠게 비난했다.(김창숙, '벽옹일대기', '기미유림단사건에 관한 추억의 감상') 사람들은 더 이상 고종을 찾지 않았다. 순종을 찾지도 않았다. 대한제국이나 조선의 부활을 외치지도 않았다. 이듬해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설립된 임시정부 헌장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였다. 나라와 백성으로 하여금 사경을 헤매게 한 500년 왕조를 철폐하고, 사람들은 사람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을 세웠다.


나라의 주인, 大韓國人

함경북도 경원에 살던 최흥백은 머슴이었다. 1869년 7월 홍수가 나자 그해 가을 최흥백 가족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갔다. '형용할 수 없는 기한(飢寒)을 절규하는' 가난을 이기고 아들 최재형은 큰돈을 벌었다.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그 돈과 지위로 연해주 한인 조직 동의회를 만들었다. 1909년 동의회 참모장 한 명이 최재형 집에서 사격 훈련을 하고 하얼빈으로 떠났다. 그가 안응칠,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이다.


 

◀   중국 연변 통화현 '양정우열사릉원'에 있는 동북연군 부대원 동상.
중국 길림성 통화현 '양정우열사릉원'에 있는 동북연군 부대원 동상. 장총을 멘 이 여자는 조선 사람이다.
 
  1920년 4월 4일 밤 최재형은 연해주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됐다. 최재형은 아이들에게 "너희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며 집에서 끌려 나가 노상에서 총살됐다.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 후손들은 스탈린 치하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2007년 모스크바에 사는 손자 최발렌친이 우수리스크에 와서 노제를 지냈다. 별명은 '페치카(난로)'였다.


  1910년 12월 30일 서울 명동에 살던 소론(少論) 갑부 이회영 형제가 문중 땅 수백만 평을 일시에 다 팔고서 만주로 떠났다. 떠나기 전 이회영이 다른 다섯 형제에게 말했다.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혈투하시던 조상의 후손 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여러 형님과 아우님들은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 땅 판 돈이 1960년대 추산으로 600억원이었다.

  바로 그 무렵 경북 안동에 살던 남인 선비 이상룡 문중 또한 집문서를 팔고서 만주로 떠났다.


99칸 임청각을 팔았다. 사돈인 김동삼 문중도 함께였다. 떠날 때, 독립 없이 집안도 없다며 사당에 있던 조상 위패를 묻어버렸다. 파고다공원에서 통곡했던 김창숙도 합류해 이들과 함께 독립을 기획했다.


  이들 소론과 남인 선비 집단이 천신만고 끝에 만든 조직이 '경학사'였고, 독립운동의 산실 '신흥무관학교'였다. 그때 이상룡이 선언했다. '한 삼태기 흙이 쌓여 태산을 이룬다. 힘을 축적해서 끝장에 대비할 것이다.'('우당 이회영 실기').


  이회영 형제 중 둘째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맏형 건영은 병사했다. 신흥학교장 셋째 철영도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회영은 밀정에게 체포돼 고문사했다. 넷째 이시영은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임정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은 만주에서 죽었다. 김동삼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강산에 뿌리라'는 유언에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삼일운동 때 두만강 건너 조선 사람들이 건설한 신도시 용정(龍井)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총으로 이들을 죽였다. 이들은 용정 외곽 3·13반일열사릉에 잠들어 있다.


  만주에서 활동한 중국 무장조직 동북항일연군에는 조선인이 많았다. 1938년 10월 10일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조선 여군 안순복과 이봉선은 일본군 사격을 저지하고 동료들을 탈출시키고 죽었다. 그 조선 독립군을 기리는 동상이 길림성 통화현 양정우열사릉원에 서 있다.


조국이여 영원하라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광주 수피아여고 2학년 윤형숙이 시위대 앞에 섰다.

일본 헌병이 군도로 그녀 왼팔을 잘라버렸다.

윤형숙은 오른팔로 태극기를 바꿔 쥐고 흔들었다. 체포된 그녀는 고문으로 오른쪽 눈도 잃었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졌다. 1950년 9월 28일 고향 여수에서 교사로 일하던 윤형숙은 퇴각하던 인민군에게 총살됐다.

그저 소시민적(小市民的) 안락을 구해도 무관했을 사람들이, 왜 목숨을 걸었는가.

여수에 있는 윤형숙 무덤 앞 묘지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대한국인이 목숨을 건 나라가 이 대한민국이다. 영원하라.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끝〉


출처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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