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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실패한 혁명가에게 목숨은 허용되지 않았다

by 한국의산천 2019. 5. 10.

[박종인의 땅의 歷史]

실패한 혁명가에게 목숨은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5.08 03:00 | 수정 2019.05.08 13:23

 

 

[164]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⑭ 갑신년 겨울의 녹슨 총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뒤뜰에는 커다란 비석이 있다.

이름하여 '북묘묘정비'다. 1887년에 세운 비석이다. 문체는 웅장하고 글씨는 아름답다.

글쓴이는 조선 왕국 26대 왕 고종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민영환이다. 그때 민영환은 이조참판 겸 친군 전영(親軍前營) 사령관이었다.

비석을 드문드문 읽어본다.

'왕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났다'… '임오년 병란에 관운장이 목숨을 구해주었다'… '관운장을 위해 사당을 짓고 북묘라 이름했다'… '갑신년에 역적들이 난을 일으켰다'… '북묘로 가서 적을 피하니'… '흉도들 목을 베고 적을 물리쳤다'…. 임오년 병란은 '임오군란'(1882), 갑신년 역적은 '갑신정변'(1884) 주동자들이다. 현몽한 관운장이 이들을 물리쳐 비석을 세운다는 말이다. 세상이 근대화로 치닫는 19세기 말 개명천지에 왕이 관우 현몽 따위를 기념하는, 대(大)조선왕국의 최후에 관한 암호들이다.

 

동래 난출사건

1854년 미국에 개항한 일본은 1868년 왕정복고를 선언했다. 그리고 1872년 조선에 근대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1686년 숙종 때 초량에 왜관을 만들며 맺은 계해약조가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초량왜관 앞에 있던 '약조체찰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뛰쳐나온(闌出·난출) 자는 사형(禁標定界之外毋論大小事 闌出越犯者 論以一罪事)'.

조선은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1873년 1월 천황 국서를 소지한 일본 외교관들이 왜관에 도착했다.

왜관을 담당하는 훈도 안동준은 이들과 접촉을 거부했다. 넉 달을 대기하던 외교관들은 5월 27일 새벽 왜관 문을 부수고 집단으로 '난출'을 감행했다.

난출자 56명은 동래부사에게 "국교 수립을 한 목소리로 간절히 아뢰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나왔다"고 했다.(1872년 5월 27일 '東萊府啓錄·동래부계록')

그때 일본은 난출자를 죽인다는 조항이 허세였음을 깨달았다.

9일 동안 왜관 밖을 돌아다닌 그 누구도 죽은 자가 없었던 것이다.

 

 

▲ 조선 멸망의 비밀은 담은 '북묘 묘정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박종인 기자
 
이듬해 5월 도쿄 상인이 왜관에서 물건을 팔다 걸렸다.

동래부사 정현덕이 왜관 앞 게시판에 방을 써붙였다.

'저들 소행을 보니 무법지국(無法之國)이라고 할 만하다.

목을 보존하고 싶다면 각별히 두렵게 생각하라(苟保汝首領 各別念惕 向事).'('을병일기', '조선교제시말' 3권)

 

갓 출범한 메이지 정권을 무법국가라 부르며 목 조심하라는 격문에 강경파들이 전쟁을 주장했다.

그때 2년 동안 미국과 유럽 시찰하고 돌아온 실력자 이와쿠라 도모미와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히로부미가 "실력부터 쌓고 하자"며 정한론을 잠재웠다.

 

고종 친정과 운요호 사건

1873년 음력 11월 4일 밤 고종이 친정을 선언했다.(1873년 11월 5일 '승정원일기')

권력 기반은 처가인 민씨 척족이었다. 이후 고종 정권 고위직은 민씨들로 차곡차곡 채워져 갔다.

동시에 고종은 대원군의 권력 기반을 파괴해나갔다. 고종은 '대원군의 것은 선악을 불문하고 모두 교혁(矯革)했다.'(황현, '매천야록')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이 강화도에 설치한 각 군영도 교혁 대상이었다.

1874년 고종은 강화도 해군인 진무영 사령관을 무관에서 문관으로 교체했다.

이듬해 진무영 예산을 궁궐 수비대인 무위소로 옮겼다.

훗날 '대원군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이 군대가 국가에 무슨 해를 끼쳐서 그 장성(長城)을 파괴하는가(壞長城也)?"라고 하였다.'('매천야록')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이듬해 1875년 8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를 포격했다.

조선 해군은 영종진 수병 500명이 패주했고 포로 16명, 전사 35명. 대포 365문과 화승총 130여 정을 약탈당했다.

일본 해군은 부상자가 2명이었다.(국사편찬위, '한국사')

한성 앞바다까지 난출한 일인 난동에도 조선은 아무 대응을 하지 못했다.

차곡차곡 근대화 과정을 밟아온 일본에 조선은 무자비하게 조롱당했다.

결국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왕십리의 반란, 임오군란

국왕 주변에 우글거리는 민씨들은 단군 이래 최악의 탐관오리들이었다.

1882년 세금과 쌀을 다루는 선혜청장 민겸호는 선혜청 예산을 갹출해 칙사 접대용 예산 7000냥과 왕실 혼인비 12만냥에 보탰다.

정작 구식 군대 병사들 월급은 13개월을 밀린 끝에 썩은 쌀로 지급했다.

6월 5일 이를 항의하는 하사관급 4명이 옥에 갇혔다. 병사들은 대개 왕십리와 이태원에 살고 있었고, 급료로 먹고사는 직업군인들이었다.

이튿날 이들이 처형된다는 소문에 왕십리사람들이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입성했다.(김종원, '임오군란 연구')

 

이들이 사대문 안 민씨네 집들을 다 불태우고 궁궐로 가서 민겸호를 죽인 것이다.

고종과 민씨 정권은 청나라 천진에 출장 중이던 어윤중과 김윤식에게 알려 "대원군이 주모자"라고 고변하며 군사를 청했다.

군사를 이끌고 온 영국 유학파 마건충은 7월 13일 대원군을 용산 청군 병영으로 유인해 "황제가 책봉한 국왕에게 반역한 죄인"이라며 천진으로 끌고 갔다.

마건충 옆에 있던 젊은 무관이 대원군을 부축했다.

15일 밤 청군은 왕십리와 이태원을 포위하고 군인 신분증을 가진 자는 모조리 죽이거나 체포했다.

이후 청일전쟁이 터진 1894년까지 조선은 실질적으로 청나라 식민지가 되었다.

왕 노릇을 한 자는 대원군을 부축했던 무관 원세개였다. 2년 뒤 그 꼬라지를 다 본 젊은 혁명가들이 목숨을 걸고 난을 일으키니 이게 갑신정변이다.

내건 기치는 당연히 '반청(反淸) 자주'와 '부패 민씨정권 타도'였다.

 

유대치, 박규수, 북촌 5걸

일본에 요시다 쇼인과 조슈 5걸이 있었다면 이에 버금가는 조선의 개혁 지사들은 유대치와 박규수와 북촌 5걸이다.

유대치는 광교에 살던 역관 겸 의술가였다. 한양 유씨라는 말도 있고 강릉 유씨라는 말도 있다.

역관인 오경석과 교류하며 한역 서양 서적을 통해 개화에 눈을 뜬 사람이었다.

박규수는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였다. 그가 살던 서울 북촌 집은 개화를 꿈꾸는 청년들의 사랑방이었다.(박영효, '갑신정변 회고')

그 사랑방에 유대치의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제자들은 주로 북촌 노론 양반집 자제들이었다.

김옥균이 그랬고 박영효가 그랬다. 옆집에 살던 홍영식도 그랬다.

조선 최초 유학생 유길준 또한 박규수의 제자였다. 서광범은 친척 서재필을 데려와 함께 공부를 했다.

 

 

▲ 1884년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갑신정변 주인공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반청(反淸) 자주와 반(反)부패를 내건 혁명이었지만 여건과 준비 부족으로 4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또 다른 주역 홍영식은 고종을 북묘까지 호위했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난자당해 죽었다.

박영효는 훗날 친일파로 돌아섰고 서광범은 미국에서 죽었다. 서재필은 미국인이 되었다.

김옥균은 1894년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한 뒤 고종은 이를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 풍경을 훗날 신채호는 상상력을 발휘해 이렇게 표현했다.

'박규수가 벽장에서 지구본을 꺼내 김옥균에게 보였다.

박규수가 지구본을 한번 돌리고선 가로되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개화를 주장하던 김옥균도 그때까지 중국을 높이는것이 옳다 하는 사상에 속박되어 국가 독립을 부를 일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가 크게 깨닫고 무릎을 치고 일어났다.

박규수의 지구 돌림에 김옥균의 손바닥이 울려 혼(魂)이 돌았다.'(신채호, '용과 용의 대격전' 중 '지동설의 효력')

그리고 신채호가 한 줄 덧붙였다. '이 끝에 갑신정변이 폭발되었더라.'

 

5년을 앞당긴 약속

1883년 미국으로 가는 보빙사의 일원으로 유길준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유길준과 김옥균과 홍영식이 만났다.

홍영식은 보빙부사였고 유길준은 수행원 겸 유학생이었다.

그때 이들은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옥균과 만나 '개혁대의에 관해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었다.'

세 사람은 장차 5년 후 개혁을 위한 모종의 거사를 벌이기로 약속했다.(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전서' 5)

그리고 유길준이 하버드대 진학을 앞둔 1884년 12월 15일 동급생이 '뉴욕 타임스'를 건네줬다.

기사 제목은 '무정부 상태의 조선'이었다. 내용은 동료들의 혁명 실패였다.

왜 5년 뒤 약속을 앞당겼는가. 그해 가을 안남에서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에 조선에 주둔해 있던 청군 1500명이 안남으로 투입됐다. 이 군사력 공백기가 그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고종을 내세워 개혁을 하려 했으나 개혁이 아닌 권력을 끝없이 탐했던 고종에게 더 이상 기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무기고 속의 녹슨 총

  

 

▲ 영국 비밀 유학을 감행했던 조슈 5걸.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다.

흔적 없이 사라진 갑신년 5인방과 비교된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저녁 9시 우정국 개국파티에서 시작된 정변은 6일 오후 7시 30분 북묘 앞에서 끝났다. '3일 천하'도 아닌 46시간 천하였다.

자체 병력은 일본 공사관 병력과 김옥균 주선으로 일본 도야마 육군학교를 다녀온 사관생도들과 평민 수십 명이었다.

서재필도 그중 하나였다. 믿는 바는 오직 하나, 궁궐 수비대였다.

혁명가들 머릿속에는 궁궐 수비대인 친영군의 병력 1000명과 그 동안 고종이 들여왔던 소총이 들어 있었다.

 

고종 부부를 경우궁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창덕궁으로 들어온 일행은 5일 밤 친영군 무기고를 열었다.

김옥균은 경악했다. 총들이 죄다 녹이 슬어 있는 것이다.

'소총을 일일이 꺼내 살펴보니 총과 칼이란 죄다 녹슬어서 처음부터 탄환을 장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각 사관들에게 병정을 데리고 총을 모두 분해하여 소제하게 하였다.'(김옥균, '갑신일록')

그때 청나라 병사 1500명이 궁궐로 진입해 사격을 개시했다.

이때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일본군 철수를 선언하고 일본군이 퇴각했다.

부패 정권이 쌓아놓은 부패의 덫에 혁명가들이 걸려들고 만 것이다.

부패는 혁명가들 예상보다 더 깊고 넓었던 것이다. 혁명은 실패했다.

 

혁명가들의 참혹한 최후

홍영식은 북묘까지 고종을 수행했다가 청나라 부대에 난자당해 죽었다.

갑신정변과 관련돼 체포된 사람은 23명이었다. 20명은 처형되고 2명은 유배형을 받았다.

한 명은 고문사했다. 홍영식, 박영효의 형 영교와 다른 행동대원은 살갗과 뼈와 살을 조금씩 도려내는 능지처참형을 받았다.

 

집은 부수고 연못을 만들었다. 김옥균 친부 김병태는 1894년 4월 교수형을 당했다.

친어머니는 딸과 함께 약을 먹고 자살했다. 홍영식 아버지 전 영의정 홍순목은 손자, 며느리와 함께 약을 먹고 자살했다.

홍영식의 집은 우정국 거사 때 민씨 거물 민영익을 살려준 대가로 미국 의사 알렌에 의해 병원으로 바뀌었다.

서광범의 아버지 전 이조참판 서상익은 감옥에서 죽었다. 서재필의 아버지 서광언과 어머니는 자살했다.

박영효 아버지 박원양은 손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굶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훗날 어윤중과 김윤식은 박원양 시신을 묻어주고서 100일이 넘도록 한성 밖 성곽 아래에서 용서를 빌어야 했다.

이들의 자살은 사회적 타살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박은숙,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1885년 귀국한 유길준은 '그저 망연할 뿐이었다.'(윤효정, '풍운한말비사') 급진 개화파는 그때 완전히 도륙됐다.

 

정변 보름 전까지 거사를 상의했던 스승 유대치는 제자 오세창을 데리고 종적을 감췄다.

한양 유씨라고도 하고 강릉 유씨라고도 했다. 전남 장성 송산마을에 있는 한 묘 옆에는 '백의 유대치 월헌 홍규(白衣 劉大致 月軒 洪奎)'라는 비석이 서 있다.

마을 원로 유관종(79)은 "우리 할아버지 어릴 때도 있었던 '삼일천하 할아버지'의 묘"라고 기억했다.

 

홍영식을 제외한 혁명가 4명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서재필과 서광범은 훗날 미국으로 갔다. 망명객도 고종은 놔두지 않았다.

이미 정변 진압 직후 고종은 "간담이 떨려 생각조차 할 수 없으니 처분하라"고 명했다.(1884년 10월 21일 '고종실록')

 

도해포적사(渡海捕賊使) 지운영

1885년 11월 이조참판 민병석은 통리군국사무아문 주사 출신 사내 지운영을 자객으로 보냈다.

그가 소지한 문서에는 '도해포적사(渡海捕賊使)'라는 직함과 고종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를 눈치챈 김옥균이 고종에게 항의 상소문을 올렸다.

 

반말로 옮겨본다.

'이 같은 경솔한 일로 국체를 손상시키고 성덕을 더럽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간사한 무리를 없애지 않는다면 망국의 군주를 면치 못하겠기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행한 일이다.'

1886년 6월 10일 지운영은 왕명 사칭죄로 유배형을 받았다가 6개월 뒤 석방됐다.

 

김옥균 처형 기념 사면령

김옥균은 결국 1894년 음력 2월 22일(양력 3월 38일) 고종의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죽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3월 9일 서울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됐다.

4월 26일 김옥균 친부 김병태가 충청 감영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동학혁명기록’上, ‘甲午實記’ 1894년 4월 26일)

친어머니는 딸과 함께 약을 먹고 자살했다.

 

다음날 고종은 “역적의 괴수를 추륙(追戮)하여 귀신과 사람의 분이   풀렸다”며 이를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내렸다.(1894년 4월 27일 ‘고종실록’)

 

고종은 1887년 갑신정변 때 피란했던 북묘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북묘는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가 피란지 장호원에서 만난 무당 박창렬, 일명 진령군이 살던 사당이다.

그 사당으로 피신해 살았다고 비석을 세웠다. 무당에 기대 살던 왕과 왕비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하기로 하자.

 

출처 :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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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역적 김옥균 시신을 즉시 능지처사하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역적 김옥균 시신을 즉시 능지처사하라"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8.19 03:14 | 수정 2020.08.19 11:13 [225] 조선형벌잔혹사 ③/끝 최후의 능지처사 - 김옥균 영조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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