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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신미양요 장엄하였으되 처참하게 희생된 애국자들

by 한국의산천 2019. 7. 24.

[박종인의 땅의 歷史] 장엄하였으되 처참하게 희생된 애국자들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7.24 03:00

 

[174] 전쟁을 하는 두 가지 방법 신미양요와 명량해전①
 

 

 
  앞뒤 말 다 걷어치우고, 전쟁은 이겨야 한다. 1871년 미군과 벌인 신미양요와 1597년 일본군과 싸운 명량해전을 비교해본다. 신미양요는 참패했고 명량해전은 대승을 거뒀다. 이긴 전쟁과 패한 전쟁 이야기다.

 

세상을 바꾼 아편전쟁

1840년 영국이 청나라를 공격한 아편전쟁은 국제 질서를 뒤집은 사건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대량살상무기를 대량생산한 나라였다. 그 군사력에 황제국이 참패한 것이다. 아편을 팔아먹다가 시작한 전쟁이었지만, 도덕은 통하지 않았다. 이긴 놈이 자기를 착한 놈이라 하면 그만이었다. 청나라 황제 천자(天子)가 다스리던 '천하(天下)'는 붕괴되고 아시아는 제국주의 사냥터로 변했다.

 

그 상황을 바라보는 조선과 일본 지도부 시각은 달랐다. 일본 막부 고문인 경제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는 "천지개벽 이래 미증유의 사건"이라며 "그 옛날 십만 몽골 강병을 물리쳤듯, 포대를 쌓고 실탄을 터뜨려야 한다"고 막부에 주장했다.(하정식, '아편전쟁과 조선, 일본', 근대중국연구, 2001)

 

 

▲ 손돌목 돈대

인천광역시 강화도 광성보에 있는 손돌목돈대. 1871년 6월 11일 바로 이 조선군 진지에서 조선군과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 부대가 혈전을 벌였다. 300명이 넘는 조선군이 전사하고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맨손으로 싸운 조선군을 "장엄하게 죽은 애국자들"이라고 했다. 장엄했다. 하지만 처절하고 철저한 패배였다. 전쟁 대비를 소홀히 한 조선은 4년 뒤 일본 군함 운요호에 의해 다시 포격 당했다. /박종인 기자
 
  5년 뒤인 1845년 3월 28일 청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이정응은 조선 조정에 이렇게 보고했다. "無事矣(무사의)." '아무 일 없다'는 뜻이다.(1845년 3월 28일 '승정원일기') 이후 일본 정부와 주요 번(藩)은 군사 근대화에 착수해 1853년 미국 페리 함대가 들어오기 전 이미 용광로를 만들고 철제 무기 제작에 성공했다.

 

신유박해(1801)·기해박해(1839)에 이어 병오박해(1846)와 병인박해(1866)까지, 조선 정부 대책은 천하 질서를 파괴하는 천주교를 틀어막고 그 뿌리인 서양에 나라 문을 잠그는 쇄국이었다. 프랑스 신부를 대거 처형한 1866년 병인박해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 불바다로 만드는 빌미가 됐다.

 

신미양요와 미국의 글로벌 정책

 

1865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종료됐다. 내전이 끝나면 어느 정권이든 관심은 외부다. 1871년 그랜트 정부는 고래잡이와 무역 중개지 확보를 위해 아시아함대를 조선으로 보냈다. 핑계는 1866년 평양에서 벌어진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 방화 사건이지만 속내는 조선의 강제 개방이었다. 그해 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아시아함대가 출항했다. 사령선 콜로라도호를 비롯해 5척으로 구성됐다. 강화도 상륙용 병력은 보병대, 해병대와 포병대, 공병대, 의병대까지 12개 중대 651명이었다.(존 로저스, '조선 요새 함락 보고서', 1871)

 

아편전쟁에서 신미년까지 31년, 게다가 병인양요 경험까지 있으니 조선 군사력은 어마 무시했을 것이다. 나가사키 출항 전 미군 또한 '조선의 어마어마한 화력(splendid armaments of Korea)'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미군 중령 윈필드 슐리, '성조기 아래 45년', 1904, p88)

 

 

 

포연만 자욱했던 염하(鹽河)

 

강화도 덕진진에 있는 경고비.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바다의 문을 굳게 지키니 타국 선박은 삼가 통과하지 말라)'라 적혀 있다.

 

1866년 병인양요 직후 대원군 명으로 세웠다. 덕진진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에 의해 무혈점령됐다.
 
5월 31일 이양선 출현 보고를 받은 조선 정부는 하급 관리 3명을 콜로라도호에 보냈다. 아무런 권한이 없는 이 관리들은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갔다.

 

  6월 1일 조선 정부는 보병부대 증파와 불랑기(佛狼機) 포 30문 등 무기 추가 보급을 결정했다.(1871년 음력 4월 14일 '고종실록')

 

바로 그날 오후(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6월 2일로 기록돼 있다) 모노카시(Monocacy)호와 팔로스(Palos)호가 강화도와 김포 사이 염하(鹽河)에서 수심 측량을 시작했다.

 

염하는 한성으로 이르는 군사적 수로였다. 병인양요 직후 대원군은 이곳에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바다의 문을 굳게 지키니 타국 선박은 삼가 통과하지 말라)'라는 비석을 세워놓았다. 해협 양쪽에는 조선군 부대가 포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왜 포격이 없지?' 하고 의아해하는 순간 포격이 시작됐다. 그처럼 좁은 공간에 그처럼 짧은 시간에 남북전쟁 참전병들이 보지 못했던 대규모 화염과 포연, 화약 냄새가 해협을 뒤덮었다.

 

  팔로스호 함장 블레이크는 "이보다 더한 포격은 없었다(nothing so sharp as this)"고 했다.(윌리엄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한국', 1882, p411)

 

지옥문 앞에서 15분을 헤매다 정신을 차려보니 미군 측 부상자는 단 한 명이었고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다. 배들 또한 피해가 전무했다.

나중에 미군이 조선군 진지에서 발견한 불랑기 포들은 죄다 사격 방향을 바꾸지 못하도록 고정돼 있었다.

 

  심지어 몇몇 대포는 발사 반동(反動)을 막기 위해 나무에 묶여 있었다. 화약도 불이 잘 붙지 않는 저급품이었다. 조선군 무적설은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 신화처럼' 헛소문에 불과했던 것이다.(슐리, p88)

 

미군은 '6월 10일까지 무례한 포격을 사과하고 교역을 허가하라'고 적은 문서를 해변 장대에 걸고 퇴각했다. 부도덕한 통첩에 조선은 협상 불가로 답했다. 6월 9일 총사령관 로저스가 블레이크 중령에게 명령서를 하달했다. "미군을 포격한 조선군 진지를 파괴하고 미군의 보복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22시간 내에 강화도 조선군 진지를 점령할 것."(로저스, 1871년 6월 9일 명령서)

 

포연의 어두운 그림자

병인양요 직후 개화파 김윤식은 "험지에 숨어 정밀한 대포 한 방이면 적선 한 척이 전복되는데, 어찌 군중 힘에 기대겠는가(若據要險放精礮 一番命中則覆一賊 此豈資衆多之力哉)"라고 했다. 김윤식은 "여러 번 서양과 전쟁을 겪은 청나라 학자 위원(魏源)의 생각"이라고 덧붙였다.(김윤식, '운양집'11, '양요 때 누군가 편지에 답하다·洋擾時答某人書')

 

그때 김윤식은 정조릉인 건릉 관리인 건침랑(健寢郞)이었다. 위원이 쓴 '해국도지(海國圖志)'는 이미 국내 지식인들이 애독하던 책이었다. 병술과 무관한 능참봉도 강병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쓰린 전쟁 경험을 조선 정부는 생산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화승총인 재래 조총부대와 대포 부대를 증강했을 뿐이다.

 

처참하되 장엄하던 그날

6월 10일 오전 10시 미군 작전이 개시됐다. 상륙선 2척이 강화도 초지진 500m 인근 해안에 미군 병력을 내려놓았다. 오후 1시 초지진 앞에 도착한 모노카시호가 초지진을 포격했다. '몇 초 만에' 성벽이 파괴됐다. 오후 1시 30분 뻘을 헤치고 미군 상륙부대가 초지진을 점령했다. 조선군은 진지를 버리고 후퇴했다. 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대포는 바다로 굴려버렸다.

 

해병대 대위 틸튼은 "사방이 아름다운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나라"라고 했다.(캐롤린 타이슨, '1871년 미 해병대의 조선 상륙작전', p11) 미군은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그날 밤 야영했다.

 

다음 날 오전 7시 미군은 4열 종대로 행군해 2.2㎞ 북쪽 덕진진을 무혈점령 후 광성보로 향했다. 흰 전투복을 입은 조선 병사들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바다에서는 모노카시호 포격이 계속됐다. 상륙부대가 광성보를 향해 곡사포를 쏴댔다. 낮 12시 35분 광성보 성벽이 파괴됐다. 미군이 광성보 내부 손돌목돈대로 진격했다. 순간 조선군 쪽에서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소름 끼치도록 이상한 가락의 전송가가 흘러나왔다."(그리피스, p416) 돈대 내에는 흰옷 입은 조선군이 가득했다. 낮 12시 40분 돈대 돌격령이 떨어졌다.

 

 

손돌목돈대에서 미군이 노획한 어재연 장군 수자기(帥字旗)(왼쪽). 2007년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부터 장기 임대 형식으로 반환돼 강화전쟁박물관에 있다.

강화도 광성보에 있는 신미의총(오른쪽 위). 신미양요 때 전몰한 전사들을 합장한 무덤이다.

오른쪽 아래는 신미양요 때 미군 포격 흔적이 남은 초지진 외곽 소나무. /게티박물관·박종인 기자
 
"호랑이 사냥꾼들(조선군은 대부분 포수 출신이었다)은 돌멩이와 칼, 창, 흙을 던지며 죽을 때까지 싸웠다."(그리피스, p416) "긴 시간이 흐른 줄 알았더니 학살의 시간은 순간이었다. 진지 내 백병전에서 조선군이 대다수 전사했고 바다로 뛰어든 병사도 많았다."(슐리, p94) 전투 종료 후 손돌목돈대 안과 밖에는 조선군 전사자 243명 시신이 연기를 날리며 쌓여 있었다. 바다에는 100여 시신이 떠 있었다. 아홉 겹 솜으로 누빈 방탄복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미군 전사자는 3명이었고 부상병은 10명이었다.(그리피스, p417)

 

미군은 손돌목돈대에 휘날리던 사령관 어재연의 장군기 수자기(帥字旗)를 비롯해 부대기 50점, 무기 481점을 노획했다. 무기는 화승총이 절대다수였다. 미군은 광성보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다음 날 작약도로 퇴각했다. 22시간을 예정했던 미군 작전은 48시간 만에 종료됐다.

 

장엄했으되 너무도 처참했던

훗날 작전에 참가했던 슐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군은 필사적인 용기로 싸웠다. 그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영웅적으로 죽어갔다. 그 어떤 나라 사내들도 이들처럼 가족과 국가를 위해 싸우지 못했을 것이다."(슐리, p95) 그리피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만일 조선군이 성벽 아래로 제대로 총을 쐈다면 푸른 제복의 미군은 궤멸됐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군의 화승총은 격발이 너무 더뎠다." 장엄했으되 너무나도 처참했다. 세상천지가 바뀐 지 30년이 지났고 서양 화력(火力)을 경험한 것도 여러 해 전이었지만 조선군은 여전히 함포 사격은 물론 곡사포와 대포 사격에 대비하지 않았다. 장엄했던 신미년 병사들은 지금 광성보 신미의총에 묻혀 있다.

 

정신 승리

상해에 있던 미국 공사 프레데릭 로우는 7월 6일 미 국무부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 "조선 왕이 진실을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번 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중국 정부에 보고될 것이며, 조선 왕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광성보가 함락된 다음 날 강화도에서 조정에 급히 보  고가 들어왔다. "적병들이 광성진을 습격하여 함락하고 초지포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첨사 이렴이 밤을 이용해 습격하자 놈들이 퇴각했습니다."(1871년 음력 4월 25일 '고종실록') 그날 고종은 대원군 뜻을 받들어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전쟁은 이겨야 이기는 것이다. 정신 승리한 조선 강화도에 4년 뒤 일본 운요호가 포격을 퍼부었다.

 

출처 : chosun.com 

 

 

손석항 돈대(손돌목돈대) 더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