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 눈 아닌 마음으로 보세요
조선일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19.07.26 03:00
'성심원 60주년' 한센인 보금자리 산청성심원 사진집 '성심원 산마루에…' 펴내
소외·편견 이겨낸 한센인들의 삶… 190점 사진과 詩·수필에 고스란히
'많이도 울고 탄식도 했답니다. (…) 원수인 이놈의 나병. 이놈의 병은 무슨 병이관데 도덕도 예의도 다 끊어야 하나?'(안 율리안나 시 '성심원에 오는 날' 중)
경남 산청엔 한센인 시설 산청성심원이 있다.
1959년 6월 이탈리아 출신 주 꼰스탄시오 신부의 주도로 한센인 40여명이 이주해 세워졌다.
천주교 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는 곳으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설립돼 이름도 성심원으로 지었다.
산청성심원은 설립 60주년을 맞아 사진집 '성심원 산마루에 애기똥풀꽃이 지천이다'(알렙출판사)를 펴냈다.
같은 제목의 사진전시회도 30일까지 서울 명동성당 '갤러리 1898'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회에는 책에서 추린 50여점의 사진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 스페인 출신으로 1980년부터 산청성심원에서 한센인과 장애인을 돌봐온 유의배(오른쪽) 신부가 안 로렌조씨와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알렙출판사
한센병은 이제 국내에선 사라진 병이지만 성심원 설립 당시만 해도 '천형(天刑)'과 같았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새 가족으로 받아들여 인간 존엄을 되찾아준 성심원은 '나그네 천국'이었다.
외진 마을에서 초가와 움막, 천막으로 시작했다. 한때 600여명에 이르렀던 식구는 이젠 고령자 100여명 정도로 줄었다.
산청성심원은 현재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인 성심인애원과 산청인애노인통합지원센터까지 갖춘 사회복지시설로 확대됐다.
책에 수록된 190여 컷 사진과 시(詩), 수필엔 한센인들의 한(恨)과 고통 그리고 기쁨과 행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 제목도 박 소피아의 시 '애기똥풀꽃'에서 따왔다. 노 돈보스코는 '장단 없어도 우리는 광대춤을 추었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곳 성심원에서 우리는 무슨 춤을 추든 어떤 노래를 부르든 자유롭고, 비록 훼손되었지만 우리들의 품위도 지키고 살아갑니다. 이곳 성심원은 우리들의 무도장입니다'라고 노래했다.
생활도 바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오전 6시엔 성당에 모여 묵주신공과 미사를 드리고 낮엔 밭일을 하고 심심풀이 화투를 치고 일찍 잔다(오 말가리다 구술). 남들이 보기엔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 같지만 정작 이곳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목발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나의 하루하루가 잔치 기분이다. 기쁘게 사는 나의 이 삶을 누가 믿어줄 수 있을까!"(김 분도)
▲ 1974년 송 요셉(검은 수도복 입은 사람) 수사가 환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작년 여름부터 지난 2월까지 '행복 사진관' 프로젝트를 통해 전문가들로부터 사진 촬영 방법을 배운 8명이 직접 촬영한 사진들도 수록됐다.
스페인 출신으로 1980년 성심원에 부임해 40년째 생활하는 유의배(73) 신부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시도 실렸다.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얘기 속에 꽃이 되는 그분/
선종하신 분의 얼굴에 얼굴을 맞대고 기도해 주시고/
하늘 옷 입혀 보내시는 그 정성/우리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신 사랑(…)'
(양 레지나 시 '하느님의 대리자, 유의배 신부님')
유의배 신부는 좌담에서 한센인들에게 이런 당부를 전한다.
"나 자신을 불쌍하다 하지 말고 육신에도 마음속에도 예수님의 모습을 간직하려고 하세요.
서로 공경하며, 나 자신이 예수임 을 잊지 마세요." 이런 당부 덕분인지 김 마리아는 소식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쁘게 살면서 기도하는 일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기쁜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더 바란다면 욕심이 많은 것이겠죠"라고 적었다.
산청성심원 통합원장 김재섭 신부는 "이 사진집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아야 사진 안에 들어있는 영적인 교감이 잘 보일 것"이라고 했다.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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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구니의 '작은 장례식'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입력 2019.07.26 03:00
한국 비구니계 원로 광우 스님, 사찰 다비식 대신 병원서 장례
"난 대단치 않아, 그냥 벽제로…"
◀ 광우 스님의 영결식 안내 팸플릿에 실린 사진.
편안한 표정으로 합장한 그는 “나도 모르게 자꾸 합장이 된다”고 했다. /정각사
'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가 갈 뿐'이란 임종 게를 남기고 지난주 입적(入寂)한 광우(光雨) 스님의 '작은 장례식'이 불교계에서 화제다.
광우 스님은 한국 현대 불교의 대표적 비구니다. 1939년 만 14세에 직지사로 출가한 스님은 최초로 비구니 강원(講院)을 입학·졸업, 동국대를 입학·졸업했으며 최고 법계(法階)인 '명사(明師)' 반열에 오른 첫 비구니였다.
1958년 서울 삼선동에 정각사를 창건한 그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으로 어린이·중고생·대학생 법회와 일요 법회를 개설했다. 김동화 박사 등을 초빙해 최신 불교학 강좌를 열고 학승들을 지원했다.
장례가 화제가 된 것은 기존 불교계의 '장례 문법'과 다른 소박함 때문이다.
스님은 지난 18일 오후 60년간 지내온 정각사 자신의 방에서 입적했다. 이후 동국대 일산병원에 빈소가 마련됐다.
일반적으로 노스님이 병원에서 열반해도 사찰로 옮겨 장작을 때는 식의 다비장을 하는 것과는 반대였다. 장례 형식은 조계종 종단장(葬)이나 전국비구니회장(葬)이 아닌 '문중장(門中葬)'이었다. 화장 장소도 서울추모공원이었다.
제자인 정목 스님은 "이미 5년쯤 전부터 '장례는 깨끗하게, 간소하게'를 당부하셨다"고 했다.
출가 본사(本寺)인 직지사로 모실까 묻자 "정진(精進)하는 스님들 발목 묶는다"며 싫다고 했다. "난 대단한 사람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야"라며 "껍데기(시신)는 그냥 벽제로 가~"라고 했단다. 평생 모아온 보시금은 비구니 승가대학 4곳 등에 기부하라고 유언했다.
빈소를 병원에 마련하라는 말씀은 따로 없었지만 주택가 꼭대기에 있는 정각사에 빈소를 차리면 인근 주민 불편이 뻔한 상황이었다. 생전의 스님은 "동네 사람들 불편하면 안 된다"며 새벽 예불 땐 목탁도 살살 치라고 했다.
영정 사진은 미리 찍었다. 환한 표정의 스님은 자꾸 가슴에 손을 모았다. 제자들이 "손 내리시라"고 하자 "나도 모르게 자꾸 합장이 돼"라고 했다.
5년쯤 전부터 거동은 불편했지만 생활은 깔끔했다.
정목 스님은 "입적하신 날 아침에도 목욕하고 새 옷 갈아입고 계시다가 고통 없이 떠나셨다"며 "스님이 생전에 미리 배려해주신 덕에 장례를 잔치처럼 치렀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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