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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심도기행 해설

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해설 2

by 한국의산천 2019. 5. 15.

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해설 2


이 책이 나온지 올해로 꼭 110년이 되었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 심도기행 옛 표지와 본문. 심도기행은 목판본으로 간행되지 않았고 현재 필사본 2종이 남아 있다.


100년 전 강화기행 한시 256수

≪沁 都 紀 行≫

 

저자 : 高在亨(1846-1916)

일시 : 1906년 봄

수록 : 華南集 한시 7언절구 256수

1906년(광무10) 봄에 화남재에서 짓고, 1909년(융희 3)에 학산산방에서 베껴 쓰다.

(光武十年春 抄于華南齋, 聖上卽位隆熙三年 謹謄于鶴山山房)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은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讚歌)이다.


이 기행시문은 강화도 선비 화남 선생이 지은것으로 모두 256 수의 7언 절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강화의 마을 유래와 풍경,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심도기행 발간사 중에서


역사와 문화 숨결 따라 걷는 길 


우선 강화도의 옛지명을 살펴보겠습니다 

 

강화군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
강화도는 강화 해협의 언덕에서 적의 동태를 정찰하기 쉽고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적들을 공격하기 쉬웠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강화의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입니다.

'갑비'는 고유어 '갑'을, 고차는 '곶, 곶이'를 표기한 것으로 '고차'는 바닷가의 굴곡진 곳을 뜻하는 '곶'을 말한다 하여 고조선 때 '갑비고차'라 불렸습니다.

    .

즉 '두 갈래로 갈라진 물가(갑곶)에 있는 고을'이라는 뜻입니다.

'고차'는 바닷가의 굴곡진 곳을 뜻하는 '곶'을 말하며, 강화도 앞바다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개의 강이 만나는 삼합수(三合水)는 강화도 말고는 찾기 드문 지형입니다. 

고조선 때 '갑비고차(甲比古次)'로 불리던 강화군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까지 혈구(穴口), 해구(海口), 열구(冽口)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모두 강과 바다의 입구라는 뜻입니다.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강도(江都)'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 '강화'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강화(江華)는 '강(江)을 끼고 있는 빛나는(華) 고을'이라는 뜻입니다.



C O N T E N T S

❚인정면(仁政面) ····································································· 15
1. 두두미동(斗頭尾洞) 2. 백운동(白雲洞)① 

3. 백운동(白雲洞)②  4. 삼동암동(三同岩洞)

5. 서문동(西門洞) 6. 마장동(馬場洞)

7. 석성동(石城洞) 8. 대청교(大淸橋)


❚선원면(仙源面) ····································································· 24
9. 거말동(巨末洞) 10. 연동(烟洞)

11. 송공촌(宋公村) 12. 독정촌(獨政村)

13. 남산동(南山洞) 14. 용당사(龍堂寺)

15. 참경루(斬鯨樓) 16. 가리포(加里浦)

17. 신당동(神堂洞) 18. 신지동(神智洞)

19. 대문동(大門洞) 20. 염씨산영(廉氏山塋)
21. 냉정동(冷井洞) 22. 선행동(仙杏洞) 충렬사(忠烈祠)

23. 안동인 김상용 24. 벽진인 이상길 

25. 청송인 심현 26. 파평인 윤전

27. 남양인 홍명형 28. 남양인 홍익한 

29. 남원인 윤계 30. 창원인 황일호

31. 연안인 이시직 32. 은진인 송시영
33. 진주인 강위빙 34. 연안인 이돈오

35. 평해인 황선신 36. 능성인 구원일

37. 진주인 강흥업 38. 안동인 권순장
39. 광산인 김익겸 40. 김수남

41. 여흥인 민재  42. 강화수신(江華守臣)

43. 충의혼백(忠義魂魄) 44. 열녀절부(烈女節婦)

45. 선원사(禪源寺) 46. 고성인 이암(李嵒)

47. 경주정씨 48. 진주유씨

49. 창동(倉洞) 50. 이정(梨井)

51. 조산평(造山坪)


❚부내면(府內面) ····································································· 77
52. 남산동(南山洞) 53. 구춘당(九春堂)

54. 청송심씨(靑松沈氏) 55. 부내12동(府內12洞)

56. 진보 돈대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58. 남대제월(南臺霽月) 59. 서문동(西門洞)

60. 국정동(國淨洞) 61. 맥현제단(麥峴祭壇)

62. 사직단(社稷壇) 63. 문묘(文廟)
64. 명륜당(明倫堂)
65. 강당(講堂) 안연재(安燕齋)

66. 북문(北門) 67. 여제단(厲祭壇)

68. 당주동(唐州洞) 69. 북장대(北將臺)
70. 북장춘목(北場春牧) 71. 기우청단(祈雨晴壇)

72. 행궁 궁아제단(宮娥祭壇) 73. 척천정(尺天亭)

74. 장녕전(長寧殿) 75. 세심재(洗心齋)
76. 연초헌(燕超軒) 77. 규장외각(奎章外閣)

78. 상아(上衙) 79. 객사(客舍) 

80. 민풍시(民風詩) 81. 도과(道科)
82. 공도회(公都會) 83. 이아(貳衙) 

84. 중영(中營) 85. 진무영(鎭撫營) 열무당(閱武堂)

86. 선원비각(仙源碑閣) 87. 시장(市場)
88. 용흥궁(龍興宮) 89. 육궁(六宮)

90. 부내 심부윤(沈府尹) 91. 부내 최판서(崔判書)

92. 부내 김효자(金孝子) 93. 성황단(城隍壇)
94. 고려궁지(高麗宮址) 95. 동문(東門)

96. 강화부성(江華府城)


❚장령면(長嶺面) ··································································· 138
97. 장동(長洞) 98. 묵사동(墨寺洞)

99. 갑곶동(甲串洞) 100. 갑성열초(甲城列譙)

101. 이섭정(利涉亭) 102. 진해사(鎭海寺)
103. 제승곶(濟勝串) 104. 오종도비(吳宗道碑)

105. 삼충단(三忠壇) 106. 용정동(龍井洞) 

107. 용정동 남궁공 108. 용정동 황공
109. 장승동(長承洞) 110. 성정(星井) 

111. 왕림동(旺林洞) 112. 추포영당(秋浦影堂) 

113. 옥포동(玉浦洞) 114. 옥포동 황공
115. 범위리(範圍里) 116. 월곶동(月串洞)

117. 연미조범(燕尾漕帆) 118. 대묘동(大廟洞)

119. 고성당동(高聖堂洞) 120. 양양곡(襄陽谷)
121. 선학곡(仙鶴谷) 122. 소산리동(小山里洞)


❚송정면(松亭面) ··································································· 162
123. 낙성동(樂城洞) 124. 솔정동(率亭洞)

125. 숙룡교(宿龍橋) 126. 뇌곶동(雷串洞)

127. 숭릉동(崇陵洞) 128. 포촌동(浦村洞)


❚삼해면(三海面) ··································································· 166
129. 당산동(堂山洞) 130. 승천포(昇天浦)

131. 긍곡(矜谷)  132. 상도동(上道洞)

133. 하도동(下道洞)


❚하음면(河陰面) ··································································· 172
134. 하음면(河陰面) 135. 신촌동(新村洞)

136. 봉가지(奉哥池) 137. 부근동(富近洞)

138. 장정동(長井洞) 139. 양오리(陽五里)

❚북사면(北寺面) ··································································· 176
140. 산이포동(山里浦洞) 141. 철곶동(鐵串洞)

142. 덕현동(德峴洞) 143. 삼성동(三省洞)

144. 군하동(羣下洞) 145. 냉정동(冷井洞)


❚서사면(西寺面) ··································································· 180
146. 증산동(甑山洞) 147. 교항동(橋項洞)

148. 송산동(松山洞) 149. 인화동(寅火洞)


❚간점면(艮岾面) ··································································· 183
150. 별립산(別立山) 151. 창교동(倉橋洞)

152. 강후동(江後洞) 153. 이현동(梨峴洞)

154. 이현동 덕수이씨 155. 삼거동(三巨洞)
156. 신성동(新成洞)


❚외가면(外可面) ··································································· 189
157. 삼거동(三巨洞) 158. 망월동(望月洞)


❚내가면(內可面) ··································································· 190
159. 산곶동(山串洞) 160. 고산동(孤山洞)

161. 구주동(鳩洲洞) 162. 구하동(鳩下洞)

163. 황청동(黃淸洞) 164. 구포촌동(舊浦村洞)
165. 옥계(玉溪) 166. 조계동(皂溪洞)

167. 백씨산소(伯氏山所) 168. 창원황씨

169. 동래정씨


❚고려산(高麗山)과 매음도(媒音島) ····································· 196
170. 고려산(高麗山) 171. 청련사(靑蓮寺)

172. 백련사(白蓮寺) 173. 적련사(赤蓮寺)

174. 흥릉(洪陵) 175. 보문사(普門寺)


❚위량면(位良面) ··································································· 205
176. 정포동(井浦洞) 177. 외주동(外州洞)

178. 항주동(項州洞) 179. 낙인동(樂仁洞)

180. 흥천동(興川洞) 181. 산문동(山門洞)
182. 존강동(存江洞) 183. 건평동(乾坪洞)

184. 장지포(長池浦) 185. 진강산(鎭江山)

186. 목장(牧場)


❚상도면(上道面) ··································································· 213
187. 하일동(霞逸洞) 188. 하촌(霞村)

189. 묵와선생(黙窩先生) 190. 능내동(陵內洞)

191. 가릉(嘉陵) 192. 조산동(造山洞)
193. 장하동(場下洞) 194. 장하동 청주한씨

195. 장하동 평해황씨 196. 석릉(碩陵)

197. 장두동(場頭洞) 198. 추포정(秋浦亭)
199. 가릉포(嘉陵浦)


❚하도면(下道面) ··································································· 222
200. 문산동(文山洞) 201. 상방리(上坊里)

202. 내동(內洞) 203. 마니산(摩尼山)

204. 천재암(天齋庵) 205. 성단청조(星壇淸眺)
206. 망도서(望島嶼) 207. 장곶동(長串洞)

208. 여차동(如此洞) 209. 흥왕동(興旺洞)

210. 화포지(花浦址) 211. 동막동(東幕洞)
212. 해산정(海山亭) 213. 정수사(淨水寺)

214. 사기동(沙器洞) 215. 덕포동(德浦洞)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길상면(吉祥面) ··································································· 238
217. 선두동(船頭洞) 218. 장흥동(長興洞)

219. 산후(山後)  220. 전등사(傳燈寺)

221. 삼랑성(三郞城) 222. 장사각(藏史閣)
223. 취향당(翠香堂) 224. 양공비(梁公碑)

225. 애창(艾倉)  226. 온수동(溫水洞)

227. 초지동(草芝洞) 228. 초지동 대구서씨
229. 직하동(稷下洞) 230. 직산동(稷山洞)①

231. 직산동(稷山洞)② 232. 직산동 제주고씨

233. 정하동(亭下洞) 234. 정두동(亭頭洞)
235. 곤릉(坤陵) 236. 길상산(吉祥山)

237. 굴곶포(屈串浦)


❚불은면(佛恩面) ·································································· 252
238. 덕진동(德津洞) 239. 대모산(大母山)

240. 손석항(孫石項) 241. 손석항 손장군(孫將軍)

242. 광성동(廣城洞) 243. 광성나루[廣城津]
244. 신현동(新峴洞) 245. 넙성동(芿城洞)

246. 둔랑촌(芚浪村) 247. 오두동(鰲頭洞)

248. 오두어화(鰲頭漁火) 249. 오두동 평양조씨
250. 사복포(司僕浦) 251. 능촌동(陵村洞)

252. 능촌(陵村) 253. 고잔동(高盞洞)

254. 지천(芝川) 255. 곶내동(串內洞)
256. 두두미(斗頭尾)


❚沁都紀行 원문 ··································································· 269






33. 충렬사 진주인 강위빙(晉州人 姜謂聘86))


姜公陪護到江潯 강위빙 공은 호종하고 강화에 왔는데,
白刃飜中炳赤心 흰 칼이 번득이고 충성심도 빛났도다.
斷舌斷頭雙立膝 혀 잘리고 머리 잘려도 나란히 선 두 무릎이
擎天撑地永如今 하늘 받들고 땅을 버텨 지금까지 영원하도다.


○ 강위빙(姜謂聘)은 익위사(翊衛司) 익위(翼衛)로서 원손(元孫)을 호종하고 왔다.

성이 함락될 때 오랑캐에게 잡혀서 협박을 당하여 무릎 꿇리게 되었다. 공이 분하여 욕을 하며 “머리가 잘릴지언정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적이 마침내 혀를 잘라 죽였다. 일이 알려지자 이조판서에 추존되었으며 충렬(忠烈)이란 시호를받았고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축문에 “혼조(昏朝)에서 벼슬하기를 부끄럽게 여겼고 황제를 위해 의리로 순절하였네. 높고 뛰어난 충절은 윤리를 똑바로 세웠네.”라고 하였다.


86) 강위빙(1569∼1637) 본관은 진주. 자는 백상(伯尙), 호는 서호(西湖). 순안현령(順安縣令)을 거쳐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가서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배종, 호위하였다.

강화성이 함락되자 포로가 되어 항복을 강요당하였으나 “내 목은 끊을 수 있으나 너희들 앞에 무릎은 꿇을 수 없다.” 하여 끝내 순절하였다.
1657년 좌승지에 추증되고, 1811년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혜국지(惠局志)≫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34. 충렬사 연안인(延安人) 이돈오(李惇五87)) 이돈서(李惇叙88))형제


陪護西來李弟兄  배호하고 서쪽에 온 이씨 형제는,
一門節義倂垂名  한 문중이 절의로 함께 이름을 빛냈네.
鎭江泓水流無極  진강산 큰물은 끝없이 흐르는데,
忠孝家聲益著明 충효의 가문 명성은 더욱더 빛나는구나.


○ 이돈오(李惇五)는 광흥창수(廣興倉守)로서 세자빈(世子嬪)을 호종하고 왔다.

성이 함락될 때 오랑캐가 세자빈을 핍박하여 남한으로 달려갔는데 공이 분함을 참지 못하여 욕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필선 윤전·익위 강위빙과 함께 죽었다. 일이 알려지자 좌찬성에 추존되었으며 충현(忠顯)이란 시호를 받았다.
○ 그 아우 이돈서(李惇叙)도 역시 오랑캐에게 잡혀서 탄식하기를

“우리 집은 충과 효로써 지금에 이르렀는데 내가 구차하게 죽지 않는다면 종사를 엎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진강(鎭江)에 이르러 투신자살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이조판서에 추존되었으며 충민(忠愍)이란 시호를 받았고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창수공(倉守公)이 축문을 짓기를

“학문은 경서와 예를 오로지 하였으며 행동은 충과 효를 돈독히 했네. 집안을 온전히 하고 인을 이루었으니 빛이 해와 달과 다투네.”라고 하였다.

학생공(學生公)이 축문을 짓기를 “우뚝하구나, 형제여. 바다 같은 절개를 밟고 기러기 털처럼 한 번에 버리니 만고의 역사에 남을지어다.”


87) 이돈오(1585∼163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전(子典), 호는 일죽(一竹).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광흥고수(廣興庫守)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건너가서 훈련도감낭청으로 군기(軍器)를 관리하다가, 적이 침입하자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좌참찬에 증직되었고,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88) 이돈서(1599∼1637)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륜(子倫), 호는 만사(晚沙).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성으로 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마니산(摩尼山)으로 들어갔다.

적병에게 잡혔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고, 함께 잡힌 유옹(柳雍)과 함께 진강(鎭江)의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1824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35. 충렬사 평해인 황선신(平海人 黃善身89))


黃公白髮立江皐  백발의 황선신공 강 언덕에 우뚝 서서,
浪坼軍中一柱高  흩어진 군사 앞에 기둥처럼 높이 섰네.
弦斷矢虛當日節  활시위 끊기고 화살통 비어 그날로 순절했으니,
先王親見特加褒  임금님이 친히 보고 특별히 포상했네.


○ 훈정(訓正) 황선신(黃善身)이 강화부의 중군(中軍)으로서 주장하고 간하는 것이 매우 힘이 있었다.

오랑캐가 이르자 천총(千摠) 강흥업(姜興業)이 돌아보며 “일이 어렵게 되었다. 우리들이 나라에 보답하는 길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약간의 노인들과 병사들을 거느리고서 갑곶진을 지켰다.

오랑캐가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군대들이 모두 흩어졌다.

홀로 서서 적에게 활을 쏘았는데 활시위가 끊어지고 화살이 다하여 적에게 포로가 되었지만 굴하지 않고서 죽었다.


효종이 눈으로 직접 그의 죽음을 보고서 일찍이 연석에 임하여 탄식하기를

“내가 황선신의 용모를 보니 다른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나이도 많았는데 이미 홀로 힘썼다. 이 일은 특히 포상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병조참의에 추존하고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 청호(靑湖)가 지은 축문에 이르기를,

“삼군(三軍)이 물결처럼 흩어졌지만 한 기둥으로 그 흐름을 막았도다. 죽기를 본분처럼 여겼으니, 그 의열(義烈)은 천추에 전해지리.”라 하였다.


89) 황선신(1570∼1637)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사수(士修). 1597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공격하자,

강화부 중군의 직책으로 강진흔(姜晉昕), 구원일(具元一) 등과 함께 적을 방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갑곶진에서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1792년 정조는 그의 충렬을 기려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다.


36. 충렬사 능성인 구원일(綾城人 具元一90))


具公自有一心丹   구원일 공은 본래부터 충성심이 강했으니,
甲串91)千年怒激湍  갑곶나루 천년동안 격노하며 흘러가네.
雲薄天高剛正氣  구름 엷고 하늘 높은데 올바른 기운 보였으니,
手中如雪劍光寒  손에 쥔 칼날 빛이 눈처럼 차갑구나.


○ 구원일(具元一)은 천총(千摠)으로서 변란 소식을 듣고 갑곶나루로 달려갔으나 이미 오랑캐가 강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 때 검찰사 김경징(金慶徵)과 부사 이민구(李敏求)는 싸우지 않고 배로 도망가 버렸다.

유수 장신(張紳)이 강구에 닻을 내리고 있었지만 우물쭈물하면서 싸울 뜻이 없었다.

구원일 공이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바위에 올라 크게 부르기를 “오랑캐의 군대가 강을 건너서 종묘사직을 핍박하는데 어찌하여 대장은 싸우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면서 먼저 대장을 베고 후에 전투하기를 청하였다. 장신이 크게 분노하면서 군대를 지휘하여 왔다.


구원일 공이 칼을 어루만지며 크게 소리치며

“그대는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니 죄가 하늘과 통한다. 내가 이 칼로 너를 죽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니 어찌 이 몸이 그대에게 죽임을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여 통곡하면서 네 번 절하고 칼을 잡고서는 강으로 뛰어들었다.

죽음이 알려지자 병조참의에 추존되었고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황상의 정축년(1877, 고종 14)에 병조판서에 추존되었다.


○ 택당 이식이 축문을 지어 “벼슬은 낮았지만 의리는 하늘에 닿을 듯 높았도다. 일편단심은 성난 파도 되어 천년을 가네.”라고 하였다.


90) 구원일(1582∼1637)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여선(汝先). 선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좌부 천총(千摠)으로서 갑곶나루로 나아갔으나,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싸울 뜻이 없음을 보고 항의하다 바다에 빠져 자결하였다.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91) 구창서발문본에는 ʻ串ʼ이 ʻ津ʼ으로 되어 있다.


37. 충렬사 진주인 강흥업(晉州人 姜興業92))


姜公當敵鎭天君  강흥업 공은 적을 맞아 마음을 진정시키고,
甲串津頭射朔雲  갑곶나루 앞에 나가 적을 향해 활을 쐈네.
北虜見之猶嘖嘖  오랑캐도 그걸 보고 오히려 찬탄했네,
丹心白首兩將軍ʻ 충성스런 백발의 두 장군ʼ이라고.


○ 강흥업(姜興業)은 천총(千摠)으로서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과 함께 출전하여 강가에서 황선신이 죽는 것을 보고는 더욱 치열하게 싸우며 죽는 것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랑캐가 그의 시신을 바다속으로 던져버리면서 오히려 탄식하기를 “장하구나, 두 노장군이여.”라고 하였다. 두 장군은 대체로 황공과 강공을 말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병조참의에 추존하였다.
○ 황상 정축년(1877, 고종 14)에 병조판서에 추존되었다.
○ 청호(靑湖)의 축문에는 “몸을 던져 적을 막고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하였도다. 엄숙한 그 의리 이름은 산과 같이 높았도다.”라고 하였다.


92) 강흥업(1575∼1637) 본관은 진주. 자는 위수(渭叟). 권필(權韠)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으나, 왜란의 참화를 목격하고 무인의 길로 들어섰다. 1596년 무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훈련원첨정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우부천총(右部千摠)으로서 강화부중군(江華府中軍)인 황선신(黃善身)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순절하였다.

노장으로 분투하였으므로 적병도 ʻ백수장군(白首將軍)ʼ이라고 칭송하였다 한다.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남문

남문의 편액은 안파루(晏波樓)이다.


38. 충렬사 안동인 권순장(安東人 權順長93))


望蔚賢關權別坐  성문을 지키던 권순장 별좌는,
南樓共對積硝筵  남문루에 마주 하여 화약 쌓아놓고 순절했네.
可憐是日松亭舍  애석하게도 같은 날 송정마을 그의 집에선,
婦女奴婢摠九泉  부인과 노비까지 다 함께 자결했네.


○ 별좌(別坐) 권순장(權順長)은 창의하여 남한산성을 지켰다. 갑곶나루가 함락될 때에 두 아우를 보내서 노모를 구하게 하고, 군대를 피하여 진사 김익겸(金益謙)과 함께 선원 김상용(金尙容)을 찾아가서 분신자살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좌찬성에 추존되었으며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받았고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아내 이씨, 여동생 그리고 여러 친척의 부녀자들은 병란을 피하여 송정촌(松亭村) 집에 모여 있었는데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는 그날로 목매어 죽었다. 노(奴) 의남(宜男)과 비(婢) 의례(宜禮)도 역시 죽었다.
○ 청호(靑湖)가 축문을 짓기를 “명망은 현관(賢關)에 빛나고 행적은 이도(泥塗)에 고달팠도다. 동시에 절의를 취하였으니 그 덕이 외롭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93) 권순장(1607∼1637) 본관은 안동. 자는 효원(孝元).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로 피란갔다가, 검찰사 김경징(金慶徵)과 유수 장신(張紳) 등이 수성대책을 세우지 못하자, 의병을 일으키고 순사(殉死)할 것을 맹세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상신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화약에 불을 질러 분사했다. 이튿날 그의 처와 누이동생이 그 소식을 듣고 목을 매어 자결했으며, 아우 순열(順悅)과 순경(順慶)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조정에서는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강화의 충렬사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북장대 강화내성​ (江華內城, 사적 제132호)   

1233년(고려고종20)에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면서 ​현재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북쪽 북산(126m), 남쪽 남산(463m) 동쪽 견자산(75m), 서쪽은 북산과 고려산(436m)의 산줄기가 이어지는 능선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강화산성 (사적 132호)

고려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 1232년)에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궁궐을 지을 때 도성도 함께 쌓았는데

개성성곽과 비슷하게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1232년부터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1만 1,232m를 쌓았는데 

고려는 1270년 다시 개경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이중 내성에 해당하는것이 지금의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숙종3년(1677년) 강화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돌성으로 쌓으며 현재와 같은 석성을 이루었다


성 둘레는 7,122m이며

4개의 대문이 있으며

강화내성 사대문의 이름을 살펴보면 ​ : 동문 망한루 ​(望漢樓), 서문 첨화루(瞻華樓). 남문 안파루(晏波樓) , 북문 진송루(鎭松樓)과

2개소의 수문, 2개소의 성문장청이 있었다.


동문은 '한양을 바라본다'라는 뜻의 망한루 ​(望漢樓)

서문은 '서문으로 아름다움을 본다'는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물결이 늦게 오는  성곽'이라는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해서 진송루(鎭松樓)인가? 유추해본다.




39. 충렬사 광산인 김익겸(光山人 金益謙94))


詩禮家中上舍金  시문과 예법 높은 가문의 김익겸 진사가,
南城孤守朔雲侵  외로이 남쪽 성문 지키는데 오랑캐 쳐들어왔네.
捐生殉節堂堂語  몸 바쳐 순절하며 당당하게 남긴 말,
火裡江樓共一心  화염 속 남문루와 한 마음이 되었네.


○ 진사(進士) 김익겸(金益謙)은 별좌 권순장(權順長)과 함께 남문을 지키다가 이미 군대가 핍박해 온다는 말을 듣고 선원 김상용에게 나아갔다.

김익겸 공이 웃으면서 “상공(相公)만이 홀로 좋은 일을 할것인가.”라고 하면서 같이 분신자살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영의정에 추존되었으며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았고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청호(靑湖)가 축문을 짓기를 “집안은 시와 예를 전승하고 이름은 포위(포위)에 독점하였도다. 목숨을 버리고 순절하였으니 그 빛이 열렬하도다.”라고 하였다.


94) 김익겸(1614∼1636) 본관은 광산. 자는 여남(汝南). 할아버지는 장생(長生)이고, 아버지는 참판 반(槃)이다. 1635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가서 섬을 사수하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김상용(金尙容)이 남문에서 분사할 때, 권순장(權順長)과 함께 순절하였다.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40. 충렬사 김수남(金秀南95)*)


金佐郞隨廟社來   종묘사직 강화 올 때 김 좌랑도 따라왔는데,
南樓火裡一聲雷   남문루 화염에 덮이고 우레 소리 진동했네.
以身殉國男兒事96) 몸을 바쳐 순국함은 남아의 뜻이니,
寄內書中臟腑開   집안에 부친 글 속에 속마음을 펼쳤다네.


○ 좌랑(佐郞) 김수남(金秀南)은 종묘사직을 따라 강화성으로 왔는데 장차 성이 함락될 때에 승지 홍명형(洪命亨)과 함께 선원 김상용(金尙容)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직책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지만 의리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관직이 낮다고 해서 어찌 충신(忠臣)이 될 수가 없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나와서는 서찰을 집안의 종에게 부탁하였다.

그 서찰에는 “이 몸을 다해 나라 위해 죽는 것은 남아가 평소에 정한 것이다. 나랏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겠는가. 두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아이들은 어머니를 위로하고 나의 죽음을 한스럽게 여기지 말아라.”라고 하고는 마침내 분신자살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승지에 추존되었으며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축문에 이르기를 “연원 있는 학문은 죽어서도 도를 지키네.유서 여덟 자는 미리 정해진 것이니 빠르기도 하네.”라고 하였다.


95) 김수남(1576∼1637) 본관은 광산. 자는 여일(汝一), 호는 만치당(萬痴堂).162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감찰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도로 피란하였으나, 그곳에 적군이 침입하자 홍명형(洪命亨)과 같이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남루(南樓)에 올라 분사(焚死)하였다. 뒤에 공조좌랑·승지에 추증되었다. 강화의 충렬사, 은진의 금곡사(金谷祠)에 제향되었다.
96) 구창서발문본에는 ʻ事ʼ가 ʻ志ʼ로 되어 있다.


41. 충렬사 여흥인 민성(驪興人 閔垶97))


念昔閔公入海濱  옛적에 민성 공이 강화도에 들어왔는데,
忠貞孝烈十三人  충정과 효열 인사 13명이나 되었네.
床頭敬讀龍巖傳  책상머리에서 용암 선생 전기를 공손히 읽어보니,
知我東方砥礪身  알겠네 우리 동방의 숫돌(砥礪)이신 것을.


○ 용암(龍巖) 민성(閔垶)은 옛 재상 민인백(閔仁伯)의 아들이다.

병자년 난리에 그의 아들 민지침(閔之針)·민지흑(閔之釛)·민지술(閔之銊)과 함께 의병에 소속되었다.

성이 장차 함락될 때에, 지침·지흑·지술과 지침의 아내 이씨·지흑의 아내 김씨·지술의 아내 유씨와 함께하였다.

그의 장녀는 최여준(崔汝峻)의 처이고 둘째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세 사람·서제(庶娣)·그 첩들은 흙으로 지은 집에가서 정결하게 하고 관복을 정제하고는 서열대로 서제에게 말하기를

“제의 나이는 많으니 필시 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를 업고 가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이미 떠나자 첩에게 말하기를 “만일 네가 죽지 않는다면 따라서 가는 것도 가하다.” 첩은 “함께 죽기를 바란다.”라고 하고서 모두 목을 매어 죽었다.

서제가 선원리(仙源里)에 이르러서 이 일을 듣고는 업고 있던 아이를 여종에게 부탁하고는 목매어 죽었다.

죽은 자가 모두 13명인데 후에 명하여 모두 용암에 정려되었다. 호조판서에 추존되었으며 충민(忠愍)이란 시호를 받았고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선정(先正) 우암(尤菴) 송시열이 그의 발자취를 전기로 지었다.
○ 축문에 “한 가문의 충과 효는 온 천하보다 열렬하네. 순결한 공이 없으니 선정이 전기를 지어주었네.”라고 하였다.


97) 민성(1586∼1637)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재만(載萬), 호는 용암(龍巖). 광
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했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출전하여
적의 침공에 맞서 요새를 지키다가 1637년에 전 가족 13명과 함께 순절하
였다.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용암실기(龍巖實記)≫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42. 강화부 수신(江華府 守臣*)


廟社西來萬姓啼  종묘사직 서쪽 올 때 만 백성이 울었는데,
守臣何事醉眠迷  수비 신하 어이하여 술 취해서 졸았던가.
雖歸地下應多愧  지하에 묻혀서도 응당 몹시 부끄러울지니,
猶見賢兒又義妻  그래도 훌륭한 아들과 의로운 아내가 있었다네.


○ 병자년 난리에 강화부의 검찰사 김경징(金慶徵)98)과 부사 이민구(李敏求)99) 등이 교만하고 사치하여 술 마시고 놀이에 빠져 전쟁을 준비하고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

오랑캐가 강을 건널 때에 이르러서 김경징과 이민구 등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김경징의 아내 박씨(朴氏)와 첩 권씨(權氏)는 모두 목매어 죽었다. 후에 정려(旌閭)를 내려주었다.

이민구의 아들 이원규(李元揆)·이중규(李重揆)는 적을 만나서 분전하다가 굽히지 않고 죽었다.

그의 조카 이상규(李尙揆)도 죽었다. 난이 평정되자 김경징은 사약을 받았으며 이민구는 금고되었다.


98) 김경징(1589∼1637) 본관은 순천. 자는 선응(善應).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 판윤이 되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비의 책임을 맡았는데, 혼자서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하고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다.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의 계책을 세웠으나 군사가 부족하여 해변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나룻배로 도망하여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대간으로부터 강화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아 사사(賜死)하였다.


99) 이민구(1589∼167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洲)·관해(觀海).

이조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莚事)를 역임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로 임명되었다.

난이 끝난 뒤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죄로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1649년에 풀려났다.

그뒤 부제학·대사성·도승지·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저술을 좋아해서 평생에 쓴 책이 4,000권이 되었으나 병화에 거의 타버렸다.

저서로는 ≪동주집≫·≪독사수필 讀史隨筆≫·≪간언귀감 諫言龜鑑≫·≪당률광선 唐律廣選≫ 등이 있다.


43. 충의혼백(忠義魂魄*)


嗚呼慘矣丙丁羞  오호라 참혹하다 병자정축년 수모여,
崖海淮城此一州  바다 절벽 성을 이룬 이곳 강화 고을에는,
義魄忠魂難可數  충의로운 혼백이 셀 수 없이 많아서,

蕭條閭里盡霜秋  쓸쓸한 마을에 온통 서릿발이 서는구나.


○ 정축년 난리에 순절하고서도 표창되지 않은 자들은 아래에 대략 기술한다.
○ 정백형(鄭百亨)100)은 장령으로서 옛 유수 정효성(鄭孝成)의 아들이다. 스스로 합문해서 목매어 죽었으니 죽은 자가 아홉명이었다.
○ 심지심(沈之諶)은 선비로서 성이 함락될 때에 그 어미가 살해되었다. 심지심이 구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여 어미를 덮어서 같이 죽었다. 그 아내도 역시 죽었다.
○ 심숙(沈諔)은 충렬공 심현(沈誢)의 사촌동생이다. 의병장이 되어 오랑캐가 이르렀을 때 달려 나갔는데 전쟁 후에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 이가상(李嘉相)101)은 급제하였으나 병란에 죽었다.
○ 이사규(李士珪)102)는 첨정으로서 병란에 죽었다.
○ 이참(李參)은 파총으로서 갑곶진을 지켜려 시종 힘껏 싸우다 죽었다. 임진년에는 손자 이시익(李時翊)의 상소로 인하여 공조참의 에 추존되었고 정려를 내려주었다. 유수 이은(李溵)103)은 이참의 후손들이 잔약해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토지를 주고 결혼도 시켜주었다. 묘표의 음기도 고쳐 새겨서 세웠다. 묘표의 추기에는 다음과 같다. “아! 정축년 충신 이공의 묘이다. 예전에 묘표가 있었으니 중간에 훼손되어 동네 사람들이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호, 연도 등을 잘못 써서 충신의 혼도 갑절이나 수치스럽고 분통하였을 것이다.
마침내 이것을 깎아내고 이와 같이 고쳐 새겼다. 영령이 어찌 처음부터 송승상(宋承相) 세 글자에 편안하게 여기겠는가? 공의 5대손 봉룡은 잔약하여 매우 안타깝다. 유수 이은이 황운조(黃運祚)에게 돌에 쓸 것을 청하였다.”
○ 안몽상(安夢祥)104)은 파총으로서 이참과 함께 갑곶진에서 죽었다. 애초에 아들이 없었는데 유수 이은(李溵)이 당시 방손 세태(世泰)로서 양자를 삼아주었다. 매년 순절한 날에 관청에서 제물을 주는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이참의 집안에도 이 관례를 똑같이 하였다.
○ 전기업(全起業)은 전이직(全以直)105)의 아들로 나이가 스물셋이었는데, 정축년 난리 때 아버지가 연일(延日)의 임소에 있었다. 기업은 홀로 집에 있으면서 군대를 모집하여 적을 방어하려 하였다. 그의 어미가 “너의 아버지가 지금 바깥의 임소에 계시고 외할아버지가 교동(喬桐)에 계시다. 나라의 은혜가 끝이 없으니 지금 너는 우리
국가를 위하여 죽는다 한들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칼을 가져다가 이마의 머리카락을 한 치 남짓 잘라서 주고는 마침내 전쟁에 나아가게 하였다. 기업은 손에 작은 칼도 없었다. 나무를 깎아 병기를 만들어 마침내 순절하였다. 병술년(1706)에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사적을 살펴 부역을 경감시켜 주었다. 임신년(1752)에는 유수 조관빈(趙觀彬)은 선비들의 장계에 의거하여 세금을 완화해 주었다.
○ 황대곤(黃大坤)106)은 무과에 합격하여 파총으로서 적을 방어하였다. 갑곶진에서 칼로 자살하였다. 병오년(1726)에 유수 박사익(朴師益)107)이 장계를 올려서 공조참의에 추존되고 정려문을 세워주었으며 황상의 정축년(1877)에 병조판서에 추존되었다.
○ 이사후(李嗣後)는 초관(哨官)이었다. 이광원(李光元)108)은 기패관(旗牌官)이었다. 서언길(徐彦吉)109)은 출신(出身)이었다. 고의겸(高義謙)은 교사(敎師)였다. 차명세(車命世)110)는 정병(正兵)이었다. 이상 다섯 명이 갑곶진에서 같이 죽었다. 표충단(表忠壇)에 보인다.
○ 김득남(金得男)111)은 철곶 첨사로서 출전하여 힘이 다하여 싸우다 죽었다. 송영춘(宋榮春)은 수군으로서 적이 그 마을에 도착하자 분함을 참지 못해 목매어 죽었다. 이상 2인은 표충단에 함께 올라 있다.
○ 이국화(李菊華)은 사노(私奴)로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 한여종(韓汝宗)은 정축년(1637) 효종이 봉림대군으로서 이 고을에 들어왔을 때, 사람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쓴 자이다. 그는 서리(書吏)로서 사람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인조가 그의 충성심을 가상하게 여겨서 특별히 내자주부(內資主簿) 직을 주었다. 후에 강화부로 돌아와서 초지만호(草芝萬戶)가 되었다.
○ 송해수(宋海壽)는 사노(私奴)였다. 어머니를 효로써 지극하게 섬겼으나, 정축년(1637) 난리에 목매어 죽었다. 기해년에 효심을 기리기 위해 정려문을 내려주었고, 경진년에는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또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100) 정백형(1590∼1637)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후(德後). 승문원저작·예문관검열을 거쳐 대교·봉교를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임금을 따라 강화도에까지 갔던 공로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아버지 효성과 함께 자결하였다. 현종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101) 이가상(1615∼163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회경(會卿), 호는 빙헌(氷軒). 병자호란이 일어나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가서 피난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신은 적에게 잡히고 아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옆의 섬으로 피난하였다. 그 뒤 풀려나왔으나 여러 차례 적진에 들어가 어머니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적에게 피살되었다. 아내 나씨도 이 소식을 듣고 상심한 끝에 죽었다. 1671년 승지 이단하(李端夏)의 건의로 수찬을 추증받았다.
102) 이사규(1583~?) 아버지는 이경백(李景白)이다. 1603년(선조 36) 식년시 진사 3등 62위로 합격했고, 1610년 별시(別試) 병과(丙科) 16위로 합격했다.

103) 이은(1722∼178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1766-1767년 강화유수로 재직했다.
104) 안몽상(?∼1637)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강진(康津).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강화군영의 파총(把摠)으로 있었다. 이 때 갑곶진이 무너지자 차명세(車命世), 황선신(黃善身) 등과 함께 갑곶진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병조참의에 추증하였다가 다시 병조판서로 증봉하였다. 강화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105) 전이직(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주(星州). 상서(尙書) 전신(全信)의 후손으로 강화 양도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연일현감(延日縣監), 백령진수군첨절제사(白翎鎭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묘지는 국사봉(國賜峯)에 있다.

106) 황대곤( ?∼1637)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평해(平海). 호는 송포(松圃).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파총(把摠)으로 전투에 참전하여 이참(李參), 안몽상(安夢祥)과 함께 갑곶진을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1726년 강화유수 박사익(朴師益)이 장계를 올려 공조참의에 증직하고,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107) 박사익(1675∼1736)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겸지(兼之), 호는 노주(鷺洲).강화유수로 1725년 5월 부임하여 1727년 윤3월에 이임하였다.
108) 이광원(1560~1637)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선초(善初). 1618년 식년시 생원 3등으로 급제하였다.
109) 서언길(?∼1637) 조선 중기의 무인. 1636년 병자호란 때 갑곶진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외손인 송만(宋萬)이 보관하고 있는 문서철에 그가 전투시 중군(中軍)에게 올린 글과 본영에서의 회답문, 그리고 군중(軍中)과 관아에서 공론한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110) 원본에는 차광세(車光世)로 되어있으나 구창서발문본 및 표충단 기록 등에 의거하여 차명세(車命世)로 고쳤다.

111) 김득남(1591∼163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선술(先述), 호는 매죽헌(梅竹軒). 철곶첨사(鐵串僉使)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
났는데, 부평(富平) 근처에서 적에게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44. 열녀절부(烈女節婦*)


丁年二月一州空  정축 2월 난리 통에 모든 고을 비었으니,
烈婦爭投水火中  열부들이 다투어 물과 불에 몸 던졌네.

北虜亦驚相顧語  오랑캐도 놀라서 서로 보고 말하기를,
海東不似漢南風  조선의 풍속은 중국과는 다르구나.


○ 당시에 열녀와 절부는 이루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체로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 일찍이 이런 말을 들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간 청나라 장수들은 “동방에 절개있는 여인이 많은 것은 한남(漢南)이 음란한 것과는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 정씨(鄭氏)는 무거(武擧) 이춘남(李春男)의 아내이다. 정묘년(1627) 봄에 이춘남이 군에 입대하자 정씨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는데 오랑캐들이 와서 그것을 파내려 했다. 정씨는 어린 아이를 업고 피하려다가 그들과 마주쳤고, 모욕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는 동쪽으로 향하여 네 번 절하고서 “여자가 순국하지 못하고 헛되이 죽는 것이 매우 한스럽습니다. 주상께서는 이 난리를 극복하고 영원히 나라를 누리소서”라고 하고는 마침내 자신이 차고 있던 칼로 자결하였다.
○ 안씨(安氏)는 학생 유인립(劉仁立)112)의 아내이다. 정축년(1637)에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도망가다가 화살에 맞아 몸이 온전한 데가 없었는데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았으므로 오랑캐들이 기이하게 여겨 그냥 두고 가버렸다.
○ 이씨(李氏)는 집의(執義) 윤선거(尹宣擧)113)의 아내이다. 정축년 난리 때 목매 죽었다. 당시 윤선거는 위사(衛士)의 대열에 있어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들 윤증(尹拯)114)은 나이가 아홉 살이었는데도 빈소에서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으며 그 곳 네 귀퉁이에 돌을 두고 중간에 회를 다진 뒤에 곡(哭)을 하였다.
여종이 엎고 나왔다. 상서 이민서(李敏叙)115)가 왕에게 아뢰기를 “이씨는 조용히 자결하였습니다.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몸을 버렸으니 더욱 숭상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죽음이 가장 먼저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특별히 명하여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 권씨(權氏)는 영상 이성구(李聖求)116)의 아내이다. 아들 이상규(李尙揆)의 아내 구씨(具氏), 이일상(李一相)117)의 아내가 된 딸, 급제 한오상(韓五相)의 아내가 된 딸과 함께 같은 날 목매죽었다. 이들 모두에게 정려문을 내렸다.


○ 유씨(柳氏)는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118)의 아내이다. 성이 무너지가 아들 김경징의 아내 박씨(朴氏), 부제학 진률(震慄)의 아내 정씨(鄭氏), 김류의 첩 신(申)가, 경징의 첩 권(權)가와 함께 같은 날 목매 죽었다. 모두에게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 장씨(張氏)는 도정 권순창(權順昌)119)의 아내로 옛 경력 장우한(張遇漢)120)의 딸이다. 성이 무너지자 송정(松亭)에 있는 권씨(權氏)의 집을 나와 여러 절개 있는 여인들과 함께 같은 때 목매 죽었다. 모두에게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 이씨(李氏)는 권순정(權順正)의 아내로 장씨의 손아래 동서이다. 성이 무너지자 동서가 같이 목매 죽었는데,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 이씨(李氏)는 헌납 홍명일(洪命一)121)의 아내로 군사를 피해 갑곶진으로 갔다가 배안에서 오랑캐의 압박을 받았다. 시어머니 황씨(黃氏)가 자살할 때 이씨는 그 옆에 있다가 생질 박세상(朴世相)의 아내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어 죽었다. 그의 두 아들 자의(子儀)와 자동(子仝)도 함께 죽었다. 모두 정려문을 세워 주었다.
○ 두 한씨(韓氏)는 맏이가 참판 여이징(呂爾徵)122)의 아내이고 둘째가 참판 정백창(鄭百昌)123)의 아내로 모두 인열왕후(仁烈王后)124)의 여동생들인데, 성이 무너지자 목매 죽었다. 정백창의 아들 사복 정정선(鄭正善)과 아내 권씨(權氏)도 죽었다. 모두 정려문을 세워 주었다.
○ 아무개 선비의 아내는 성(姓)이 전하지 않는다. 성이 무너지자 자살하기 전에 여종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적들이 나의 시신 근처에 오게 하지 말아라” 라고 하고서는 향리에서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매우 안타까워 하였다.


○ 충렬사순절비문(忠烈祠殉節碑文)은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125)가 찬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숭정(崇禎) 병자년 겨울에 건주(建州)의 오랑캐들이 대거 입구하니 상께서는 강도(江都)로 행행하려하여 종묘(宗廟)의 위패를 모시고 먼저 떠나게 하고 그 뒤로 빈궁(嬪宮) 원손 대군과 군신 중 노병자를 따르게 하였으며 대가도 뒤따라 출발하여 서울 남문에 이르니 오랑캐들이 벌써 서교(西郊)를 압박하는지라 어가를 돌려 남한(南漢)산성으로 들어갔다. 검찰사 김경징(金慶徵), 부사 이민구(李敏求) 유수 장신(張紳)이 실질적으로 강도의 일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강도(江都)는 믿을 만한 천험(天險)의 요새라고 말하면서 술과 놀이로 싸워 지킬 일을 내쳐두니, 방비하는 이가 충고를 하면 즉석에서 이를 억압 굴욕하였다.


정축년 정월 22일에 적이 갑곶이 나루로 건너오니 경징 등은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배를 빼앗아 타고 도망하니 강도는 함락되었다.

그때에 의정부 우의정이었던 선원 김상용(金尙容) 선생은 반드시 구제할 수 없을 줄 알고 탄식하기를 ʻ종묘사직과 원손이 여기에 있으니 이곳은 나의 죽을 땅이다ʼ 하고 일이 급하게 되니 성 남쪽의 초루(譙樓)에 올라가 초황(硝黃) 상자에 걸터앉아 자폭하였다.


공조판서였던 이상길(李尙吉)은 성 밖 10리 되는 곳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급보를 듣고는 달려 들어와 종묘의 신주 앞에 통곡하고는 순절하였으며, 돈령부도정이었던 심현(沈誢)은 집사람들이 배를 마련해놓고 울면서 바다로 나가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사배(四拜)하고 손수 왕에게 상소하는 글을 쓴 뒤에 부부가 함께 죽었고, 사헌부장령이었던 이시직(李時稷)은 유서를 써서 종에게 주고, 사복시주부 송시영(宋時榮)과 함께 관(棺) 두 개를 사고 구덩이 둘을 판 뒤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시강원 필선 윤전(尹烇)은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다가 해를 입었고, 의금부도사였던 권순장(權順長)과 성균관생원 김익겸(金益兼)은 스스로 군사 대열에 뛰어들어 남문의 성첩(城堞)을 지키다가 상공(相公)이 자폭할 때 비켜라 해도 비키지 않고 함께 죽었으며, 본부 중군 황선신(黃善身)과 천총 강흥업(姜興業)은 잔병을 이끌고 강나루를 끊으려 힘써 싸우다가 죽었고 천총 구원일(具元一)은 강 언덕에 올라가 김경징 등을 꾸짖으며 울분이 폭발하여 물에 몸을 던졌다.


난이 끝나니 조정에서 충의를 가상히 여겨 의정공에게는 시호 문충(文忠)을, 판서공에게는 좌의정과 충숙(忠肅)을, 도정공에게는 이조판서와 충렬(忠烈)을, 장령공에게는 참찬과 충목(忠穆)을, 주부공에게는 참찬과 충현(忠顯)을, 필선공에게는 도승지를, 도사공과 생원공에게는 지평을, 구공 황공 강공에게는 모두 참의를 내렸다.


임오년에 경외의 유생들이 합의하여 강화부 남쪽 7리 되는 선원촌(仙源村)에 사우(祠宇)를 세우니 이곳은 문충공이 어렸을 때 살던 곳이다.

문충이 주향(主享)이 되고 충숙, 충렬, 충목,충현과 구공이 배향(配享)이 되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ʻ충렬사(忠烈祠)ʼ란 호가 내렸고, 효종(孝宗) 조에 이르러서는 황(黃) 강(姜) 2공과 윤(尹), 권(權), 김(金) 3공이 선후(先後)하여 추향(追享)되었으며 지금의 주상 정축년에는 그 순의한 날짜에 관원을 보내 제(祭)를 올렸으니 어시호(於是乎) 성조의 포충(褒忠) 현렬(顯烈)이 유감없이 이루어졌다 하겠다.


오호라! 사대부들이 평소에는 도리를 말하여 참으로 사생(死生)과 의리(義利)를 분변할 줄 아는 것 같다가도 일조에 큰 난리를 만나면, 나라를 배반하고 살길을 엿보며 몸을 욕되게 하고 이름을 망하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다.

여기 문충제공은 천지가 번복되는 날을 당하여 의(義)를 지켜 자정타가 조용히 죽음을 택하였고 일명(一命 : 꼭 한번 벼슬이 주어진, 진급이 없는)의 한산한 관료나 포의의 한낱 선비들까지 사직을 수호하다가 순국하였으며 또 작은 고을의 비장들까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면서도 모두 충의심을 분발하여 죽음을 초개같이 여겼으니 그 세운 바 공훈은 비록 일월과 빛을 다툰다 하여도 가하리라. 슬프다.


하늘이 상란(喪亂)을 내려 온 나라가 침몰하였으나 동토(東土)의 사민(士民)으로 하여금 천지의 떳떳한 기강이 있음을 알게 하고, 3백년 예의지방(禮義之邦)의 면모를 실추시키지 않은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이었던가?

전 유수 이이명(李頤命)이 여러 공(公)들의 사실과 사우(祠宇)를 세우게 된 전말을 수집하고 또 구, 황, 강, 3공을 위하여 전(傳)을 지어 사우에 갈마 두었으며 김창집(金昌集)이 이어서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사우를 참배해 뵙고는 개연히 탄식하기를 ʻ사당에 비를 세우는 것은 옛날부터의 준례다.

비(碑)가 없으면 어떻게 당세와 후세에 알릴 수 있겠는가?ʼ하고 드디어 돌을 떠 제생(諸生)들에게 맡기니 제생들이 기꺼이 나가서 돌을 다듬어 놓고 이후(李侯)가 기록한 일통(一通)의 사실을 나 상하에게 주면서 글을 청하였다.

나는 태어나기는 비록 후세에 태어났으나 그 사실에 감격하고 격앙되어 실상을 상상해보면서 눈물 흘려온 지 오래였다.

이제 의리 없이 사양 할 수 없어 그 대략을 간추려 후세에 신빙하는 자료가 되게 하고자 한다.”


112) 유인립(1601년 출생) 본관 김성(金城), 거주지 이천
113) 윤선거(1610∼1669)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
114) 윤증(1629∼1714)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115) 이민서(1633∼168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西河)
116) 이성구(1584∼164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
117) 이일상(1612∼1666)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
118) 김류(1571∼1648) 본관은 순천.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119) 권순창(1609∼1687)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聖之).
120) 장우한(1585년 출생) 본관 인동(仁同).

121) 홍명일(1603∼1651)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만초(萬初), 호는 보옹(葆翁).
122) 여이징(1588∼1656)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구(子久), 호는 동강(東江).
123) 정백창(1588∼1635)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여(德餘), 호는 현곡(玄谷).
124) 인열왕후(1594∼1635) 조선 인조의 비. 청주한씨.
125) 권상하(1641∼1721) 본관 안동.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45. 선원사(禪源寺126)*)


禪源古寺問阿誰  선원사 옛 절을 누구에게 물어보나,
流水桃花處處疑  시냇물에 복사꽃 떠오는 곳곳마다 의심 가네.
寂矣半千龕月影  적막토다 오백불상 달그림자 속에 들고,
黃金銷盡碧蘿垂  황금불상 다 녹아서 푸른 덩굴 드리웠네.


○ 선원사(禪源寺)는 지금의 선원리(仙源里)에 있다. 고려 고종 때 술사(術士)의 말을 따라서 절을 지었다.

최우(崔瑀)127)가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몄으므로 ʻ반천선감(半千禪龕)ʼ128)이라고도 하였다.


126) 고려시대 강화도읍기 당시 최고집권자 최우(崔瑀)가 강화도에 세운 절.

무인정권과 관련이 있던 정혜결사의 송광사 스님들이 주로 주석하였다. 충렬왕이 피난을 하기도 했으며, 실록을 보관하는 등 국가적 비중이 컸던 절이다.
127) 최우(?∼1249)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뒤에 이(怡)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충헌(忠獻)'선(禪)'을 '선(仙)'으로 바꿔 지명이 되었으므로 당시에 무엇을 숭상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지금은 폐지되었으며 여전히 옛 터가 전해지지만 넝쿨 숲만이 무성할 뿐이다.




46. 고성인 이암(固城人 李嵒129))


杏村老相築山臺  늙은 재상 행촌 선생 산대를 세웠는데,
息隱禪師共往來  선원사 식은선사130)가 친구 되어 왕래했네.
果是當年明哲計  정말로 그 당시의 명철한 뜻 있을진대,
海雲堂上絶浮埃  해운당 위에는 먼지마저 끊어졌네.


○ 고려 공민왕 때의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嵒)은 호가 행촌(杏村)이었는데

정승을 역임한 후에 선행촌(仙杏村)에 거주하면서 식은노인(息隱老人)과 함께 결사하여 시름을 같이하면서 당시의 난리를 피하였다.

선원사 중에 해운당(海運堂)이 있었다.


128) 오백 개의 감실(龕室)이 있는 선찰(禪刹)이란 의미로, 이는 오백나한전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29) 이암(1297∼1364)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侅).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우왕 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30) ≪동문선≫·≪목은집≫ 등에는 식영(息影)·식영암(息影菴)으로 되어있다.




47. 선원리 경주정씨(仙源里 慶州鄭氏*)


丹霞深鎖碧茅家  붉은 노을은 푸른 초가집을 깊이 감싸고 있는데,
鄭是山中有桂花  정씨 댁의 산중에는 계수나무 서있네.
花下有人來拾馥  꽃 아래 사람들이 향기 맡으러 찾아오니,
介然一路石間斜  잠깐 사이 한 줄기 길이 돌 틈 사이로 비스듬히났네.


○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세족으로서 지평(持平) 정아무개의 후손이 거주하면서 대대로 문학으로 가르쳤는데 여러 제자들 중에 성취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ʻ개연성로(介然成路)ʼ라고 말한 것이다.


48. 선원리 진주유씨(仙源里 晉州柳氏*)


古宅江山柳色連  옛집 있는 산과 내에 버들 빛이 연이었는데,
炳然文藻尙今傳  빛나는 글월들이 아직도 전해오네.
欲知沁府由來蹟  강화의 유래와 자취를 알고자 한다면,
先看宜蔬誌一篇  의소(宜蔬)공의 ≪강도지≫를 먼저 보아야 할 것이네.


○ 진주 유씨(晉州柳氏) 좌랑(佐郞) 유택하(柳宅夏)131)는 호가 의소(宜蔬)이며 일찍이 ≪강도지(江都誌)≫를 찬술하였다.
○ 그 형인 유택조(柳宅肇), 아우인 진사 유택규(柳宅揆)·유택우(柳宅堣)·유택□(柳宅□)의 5형제가 과거에는 장령(長嶺)에서 거주하다가 후에 이 동네로 이사하여 살았다.


131) 유택하(1714년 출생)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장(彦長), 호가 의소당(宜蔬堂)이다.

176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급제하였고, 벼슬이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이르렀다. 강화에 살면서 ≪강도지(江都誌)≫ 2권을 편찬하였다.


49. 창동(倉洞132))


還踰花麓洞云倉  꽃묏부리 돌아 넘어 창리가 있는데,
大路東西列短墻  큰길 동서 편에 낮은 담장 열지어 있네.
春種秋收儲幾斛  봄에 뿌리고 가을 거두니 몇 가마나 쌓을까,
知應穡133)事比豊穰  농사일이 풍년임을 응당 알겠네.


○ 이곳은 토질이 비옥하며, 큰길의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50. 이정동(梨井洞134))


梨井一村對府城  이정촌은 강화부성과 마주하고 있는데,
殷殷窓外午鍾鳴  창밖으로 은은히 정오 종소리 울리네.
高司馬去兒孫繼  고형규 선생 돌아가셨지만 후손들이 이어져,
淡泊生涯讀且耕  책 읽고 밭 갈며 담백하게 살고 있네.


○ 제주 고씨의 세족으로서 진사 고형규(高亨奎)135)의 자손이 이곳에 살고 있다.
○ 관아와의 거리가 3리 남짓이고 정오에는 종소리가 창문 하나를 격해서 들리는 듯하다.
○ 지명을 고식이(固植里)라고도 한다.


132) 선원면 창리이다.
133) 구창서발문본에는 ʻ穡ʼ이 ʻ稼ʼ로 되어 있다.
134) 선원면 신정리는 신당동과 이정동이 합해서 생긴 이름이지만, 현재 이정(梨井)마을은 창1리에 속해 있다.


51. 조산평(造山坪136)*)


一平廣濶造山坪  평평하고 널따란 조산평 들판엔,
農老紛紛聽水聲  농부들이 분주하게 물을 대고 있구나.
最是江都膏沃地  이곳은 강화에서 손꼽히는 옥토이니,
府城富客擲金爭  성안의 부자들이 다투어 투자하네.


○ 조산평(造山坪)은 비옥한 땅으로 읍내 부자들의 곡식창고로 불리웠다. 강화부의 남쪽 수문 밖에 있는데, 고을의 풍흉과 금값의 고하가 오로지 이곳에 달려있다.
135) 고형규(1828년 출생) 본관은 제주. 1849년 식년시 진사(進士) 3등 58위로 합격하였다.
136) 강화읍 갑곶리와 선원면 창리 사이의 넓은 들판을 말한다.


부내면(府內面)


52. 남산동(南山洞137)) 수록암(壽祿巖138))


壽祿巖前壽祿增  수록암 앞에 살면 수명 복록이 늘어난다는데,
南宮世世卜居仍  남궁씨 가문이 대를 이어 살고 있네.
乃知壽祿由心德  수명과 복록은 심덕(心德)에서 나옴을 알겠으니,
一鑑東天水月澄  동쪽 하늘 물에 비친 달을 거울삼고 살았네.


○ 함열 남궁씨인 부제학 남궁찬(南宮璨)139)의 후손이 수록암 마을에서 대대로 세습하여 살았다.

손자 남궁제(南宮埞)는 진사로서 행실과 의리에 돈독하였다. 향리에서 장녕전(長寧殿) 참봉에 제수된 것으로 인하여 형조좌랑 회덕 현감을 지냈다.
○ 그 아들 남궁헌(南宮金憲)은 관직이 인동 부사에 이르렀는데 효행이 뛰어났었다. 영조 계유년(1753)에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그 아들 남궁철(南宮澈)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 후손 가선대부 남궁일(南宮鎰)과 남궁주(南宮澍) 부자는 향반(鄕班)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어찌 장수와 복록의 징험이 아니겠는가?
137) 강화읍 남산리이다.
138) 이형상 ≪강도지≫에 보이는 남산 남쪽에 수륙암리(水陸庵里)가 수록암·술감으로도 불린 것으로 짐작된다.
139) 남궁찬(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여헌(汝獻), 호는 창랑(滄浪). 제주목사·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53. 구춘당(九春堂*)


九春堂後幾經春  구춘당 떠나신지 몇 해가 지났는가,
碧桃紅杏尙一新  푸른 복사 붉은 살구 더욱더 새롭구나.
東岳先生題壁䪨  동악 선생 지은 시 벽에다 써붙이니,
有心嘗許卯君親  마음으로 허락한 동갑내기 친구였네.


○ 구춘당(九春堂) 남궁수(南宮樇)140)는 자가 자구(子久)였는데 대사성 남궁침(南宮忱)141)의 손자이다.

일찍이 학업을 폐지하고 강화부의 남산 바깥 수록암(壽祿菴)에 집을 짓고 화초를 많이 심었으며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겨서 매우 은거하는 뜻이 있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42)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아홉 수의 시를 지어서 걸었으며 ≪동악집(東岳集)≫에 전하는데 ʻ남궁자구(南宮子久)의 초당(草堂)ʼ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 첫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궁벽한 곳 뜰에다가 길가에 못을파니(崖闢園庭蹊鑿池)

초당이 진실로 주인과 걸맞구나.(草堂眞與主人宜)

붉은 단풍 노란 국화 가을날을 알리고(赤楓黃菊九秋日)

붉은 은행 푸른 복숭아 삼월의 때이로세.(紅杏碧桃三月時)

지난해엔 일찌감치 맑은 술을 두고서(去歲曾蒙置淸醥)

오늘 새벽엔 문득문득 참신한 시 짓는구나.(今晨却要賦淸詩)

바람은 산골로 흐르는게 이와 같아(風流岳壑有如此)

육십의 취한 노인 또 한잔을 기울이네.(六十醉翁添一奇)


○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강화는 황량한 고을이라 물산 적어 (江府荒村少物華)

벗님의 집에서 늦은 봄을 어엿버하네.(獨憐春晩卯君家)

스스로 이월부터 삼월까지(自從二月及三月)

한 꽃이 새로 피니 모든 꽃이 따른다네.(新開一花仍百花)

흰 꽃이 울에 가득 맑은 것이 눈을 안고(素蘂壓籬晴擁雪)

붉은 꽃 담에 비춰 느지막히 노을 지네.(紅葩映塢晩蒸霞)

늙은이가 수레 타고 문득이 방문하니(老夫乘興輒相訪)

글귀를 찾느라고 해지는 줄 모르네.(素句不知山日斜)


○ 구춘당의 아들 남궁섭(南宮爕)143)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그 아들 남궁민(南宮火民)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지냈다.

남궁섭의 아들 남궁제(南宮埞)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남궁제의 아들 남궁헌(南宮金憲)은 정려문을 내려주었다.(위에 보인다.)
○ 남궁헌의 아들 남궁철(南宮澈)은 사마에 합격하였다.
○ 남궁철의 아들 남궁빈(南宮贇)은 인동 부사를 지냈다.
○ 동악은 구춘당과 함께 형제의 의리를 맺었기 때문에 묘군(卯君)144)으로 일컬어졌다.


140) 남궁수(생몰년 미상) 본관 함열(咸悅), 자는 자구(子久), 동악 이안눌과 교유하였다.
141) 남궁침(1513∼1567)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성중(誠仲).
142) 이안눌(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54. 남산동 청송심씨(南山洞 靑松沈氏*)


府南城下近郊墟  강화부 남쪽의 성 아래 근교에,
沈雅聯床坐讀書 심씨 형제 책상 놓고 글을 읽고 있었네.
道德門前春月色  도덕심 높은 문 앞에는 봄 달빛이 가득한데,
令人和悅駐征車  사람들 화락하여 가던 수레 머물게 하네.


○ 청송심씨(靑松沈氏)의 청성군(靑城君)의 후손 세마 무문재(無聞齋) 심태(沈㙂)145)의 손자 심낙형(沈樂逈), 심낙선(沈樂善) 형제가146)거주하였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벗을 좋아하였다.
○ 소동파집(蘇東坡集)에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가을의 달빛은 사람을 참담케하고 (秋月色令人慘憺) / 봄의 달빛은 사람을 기쁘게 하네(春月色令人和悅).


143) 남궁섭(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함열(咸悅). 구춘당(九春堂) 남궁수(南宮修)의 아들로 강화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뒤 흥해군수(興海郡守)를 지냈다.
144) 묘년(卯年)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 남문 안파루




▲ 물결이 늦게 온다는 뜻을 지닌 남문의 안파루


55. 안파루 부내12동(晏波樓 府內12洞147)*)


晏波樓上坐停杯  안파루 위에 앉아 술잔을 들고 보니,
滿眼繁華次第開  번화한 집들이 차례차례 보이네.
桃李杏花三萬樹  복사꽃 살구나무가 삼만 그루나 되는데,
影中無處不樓臺  그림자 중에는 누대 없는 곳이 없도다.


○ 안파루(晏波樓)는 심부(沁府 : 江華府)의 남문의 편액이다.


○ 신사년(1761) 9월에 광산 김씨 김상복(金相福)148)이 예조의 당상(堂上)으로써 명을 받들고 와서 지나다가 나이 오십 이전에 거주할 때를 추억하였다.

홍태(洪台)의 아들 홍안(洪安)에게 새겨서 걸게 했으니, 그것은 시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행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누각에 올라 옛날 남문루를 물어보고 싶어서(登樓欲問舊南樓)

칼에 기대 가을 바다에 높게도 의지하네.(倚釼高欹海日秋)

오십리 성터는 반쯤이 허물어지고(五十里城一半毁)

병자정축년 사건은 고금이 다르구나.(丙丁年事古今差)

선원선생 사당에 우주가 머물렀고(空留宇宙仙源廟)

갑곶나루에 손놓고 앉아서 관방 잃었네.(坐失關防甲串流)

성세에 소임 나눠 은혜도 못갚고서(聖世分司恩未報)

벼슬을 버리고 한가로이 노니네.(可能裘帶作遨遊)”


145) 심태(1698-1761)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자고(子固), 호는 무문재(無聞齋) 혹은 모둔자(慕鈍子)이다.

심상원(沈尙元)의 아들이다.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 후손이 강화도로 입향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간 이들이 많다.

종손 심광식씨가 소장하고 있는 심태의 ≪無聞齋集≫은 2008년 인천학연구원에 의해 학계에 공개되었고, 심경호 교수는 논문 <무문재 심태의 문학과 학술>(≪하곡학과 근대성≫, 제5회 하곡학국제학술대회 발표문집, 2008)을 발표하였다.
146) 원본에는 무문재 심태, 심낙형, 심낙선 등의 이름이 빈 칸으로 되어 있으나, 구창서발문본에 의거하여 보완하였다.
147) 제목 ʻ부내12동ʼ 뒤에 남산동(南山洞)·구촌동(舊村洞)·신촌동(新村洞)·종각동(鍾閣洞)·홍문동(紅門洞)·부사후동(府司後洞)·부사하동(府司下洞)· 동문동(東門洞)·숙곶동(稤串洞)·서문동(西門洞)·국정동(國淨洞)·당주동(唐州洞) 등이 열거되어 있다.



56. 진·보 돈대(鎭堡墩臺*)


百里封疆地勢雄  백리 강도는 지세가 웅장하고,
山靑水白四環中  푸른 산 맑은 물이 사방에 둘러 있네.
十三鎭與諸墩堡  열세 개의 진보(鎭堡)와 수많은 돈대는,
制勝當年凜凜風  승리하던 당시의 늠름한 풍모네.


○ 강화[沁]에는 13개의 진이 있는데

월곶진(月串鎭), 제물진(濟物鎭), 용진진(龍津鎭), 광성진(廣城鎭),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 선두진(船頭鎭), 장곶진(長串鎭), 정포진(井浦鎭), 철곶진(鐵串鎭), 인화진(寅火鎭), 승천진(昇天鎭), 문수진(文殊鎭)이다.


그리고 53개의 돈대가 있는데

적북돈(赤北墩), 휴암돈(鵂巖墩), 월곶돈(月串墩), 옥창돈(玉倉墩), 망해돈(望海墩), 제승돈(制勝墩), 염주돈(念珠墩), 갑곶돈(甲串墩), 가리돈(加里墩), 좌강돈(左岡墩), 용당돈(龍堂墩), 화도돈(花島墩), 오두돈(鰲頭墩), 광성돈(廣城墩), 손석항돈(孫石項墩), 덕진돈(德津墩), 초지돈(草芝墩), 장자평돈(長者坪墩), 섬암돈(蟾巖墩), 택지돈(宅只墩), 동검북돈(東檢北墩), 후애돈(後崖墩), 양암돈(陽巖墩), 갈진돈(葛津墩), 분오리돈(分五里墩), 송곶돈(松串墩), 미곶돈(彌串墩), 북일곶돈(北一串墩), 장곶돈(長串墩), 검암돈(黔巖墩), 송강돈(松岡墩), 굴암돈(屈巖墩), 건평돈(乾坪墩), 망양돈(望洋墩), 삼삼암돈(三三巖墩), 석각돈(石角墩), 계룡돈(鷄龍墩), 망월돈(望月墩), 무태돈(無殆墩), 인화돈(寅火墩), 광암돈(廣巖墩), 구등돈(龜登墩), 작성돈(鵲城墩), 초루돈(譙樓墩), 불장돈(佛藏墩), 의두돈(蟻頭墩), 철북돈(鐵北墩), 천진돈(天津墩), 석우돈(石隅墩), 빙현돈(氷峴墩), 소우돈(疎雨墩), 숙룡돈(宿龍墩), 낙성돈(樂城墩)이다. 이것은 모두 한 고을의 관방(關防)이다.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고는 개연히 예전에 돈대를 세운 뜻을 생각해 보았다.


148) 김상복(1714∼1782)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수(仲受), 호는 직하(稷下) 또는 자연(自然). 이조·호조·예조판서와 우의정·영의정을 지냈다. 평소 청빈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57. 충신 이춘일(忠臣 李春一*)


粵在丙寅失此門   병인년 난리 통에 남문을 못 지켜서,
鑰魚堞雉帶羞149)痕  자물쇠와 치첩에는 상처가 둘러 있네.
大呼拔劍忠臣李  호령하며 칼을 뽑던 충성신하 이춘일은,
泉下應歸不死魂  구천으로 돌아갔으련만 혼은 죽지 않았네.


○ 황상의 병인년(1866, 고종 3) 9월에 서양인의 도적들의 난리를 일으켰을 때 유수 이인기(李寅夔)150)·판관 김세헌(金世獻)·중군 이 아무개 등이 수비를 하지 않고 도적떼가 이르자마자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그때 남문의 수문장인 이춘일(李春一)이 도적떼가 이르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너희들이 감히 이곳에 들어오려 하려느냐.”라고 하며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일이 알려지자 공조참의에 추존되었고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149) 구창서발문본에는 ʻ羞ʼ가 ʻ愁ʼ로 되어 있다.


58. 남대제월(南臺霽月)


南山臺上久踟躕  남산대 위에 올라 오래토록 머뭇대는데,
霽月浮來太極圖  맑은 달 떠오르는 모습 태극도와 같구나.
流峙如看金鏡裡  흘러내린 산줄기는 금거울을 보는 듯하니,
昭昭十景一江都151)  밝고 밝은 그 모습은 강화 10경의 하나로다.


○ 강화부의 남산은 화산(花山)이라고도 하는데 위에 장대(將坮)가 있었다.
○ 영조 기축년(1769)에 유수 황경원(黃景源)152)이 누각을 짓고 장인대(丈人臺)라는 현판을 붙였다.

정조 계묘년(1783)에 유수 김노진(金魯鎭)153)이 본부의 십경(十景)을 지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남산대에서의 비개인 날에 뜨는 달(南臺霽月)·

북장에서 봄에 기르는말(北場春牧)·

진강산으로 돌아오는 구름(鎭江歸雲)·

적석사에서 바라보는 낙조(積石落照)·

오두돈대에서의 고기잡이 불(鰲頭漁火)·

연미정의 조운선(燕尾漕帆)·

갑곶 성에 벌려있는 초루(甲城列譙)·

보문사에 밀려오는 파도(普門疊濤)·

선두평에서의 늦 농사(船坪晩稼)·

참성단의 맑은 조망(星壇淸眺). ʻ

비갠 뒤의 달(霽月)ʼ은 십경 중에서 가장 우선하므로 읊은 것이다.


○ 장인대(丈人臺)에서 유수 황경원(黃景源)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마니산의 그림자는 외로운 성 안고 있고(摩尼山影抱孤城)

높디높은 층대에는 새벽 안개 생겨나네.(百丈層坮曉靄生) 그

린 창에 해가 올라 삼각이 가깝고(畵戟日昇三角近)

돛대에 구름 휘도니 오관이 고르구나.(錦纜雲擁五冠平)

난간 높아 언제나 은하수를 범하고(欄高常犯星河氣)

성안이 조용하니 새소리가 들리네.(疊靜唯聞烏雀聲)

가을 바람 기다려서 큰 열병에 임하니(且待秋風臨大閱)

일곱 고을의 군사를 거느린다 말을 하네.(敢云能將七州兵)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아름다운 피리 불어 강화성을 움직이고(鳴鳴畵角動江城)

바위 끝 깃발에는 저녁 안개 생겨나네.(巖際旌旗夕煙生)

물가가 제릉 감싸 파란 풀이 가깝고(洲繞齊陵靑草近)

호수가 한수 도니 흰 구름이 깔리네.(湖廻漢水白雲平) 높

은 누에 누군가가 충신의 혼 위로하니(危樓誰慰忠臣魂)

옛 나루서 전사의 함성 소리 생각하네.(古渡唯思戰士聲)

칼 만지며 긴 노래에 감개가 많으니(拊劒長歌多感慨)

이 대에서 다시는 군대 얘기 않으리.(玆臺不忍更論兵)


○ 장녕전(長寧殿)의 별검(別檢) 김택수(金宅洙)154)가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한 섬의 관방은 십리되는 성인데(一島關防十里城)

산봉우리 높은 누에 여름 구름 생겨나네.(峯嶺層榭夏雲生)

깃발로 멀리 알려 삼방이 광활한데(旌旗逈壓三方闊)

부월이 높이 서니 일곱 진이평정되네.(斧鉞高臨七鎭平)

지휘에 장군 지략 펼쳐진걸 기뻐하니(已喜指揮宣將略)

호령에 군대 소리 엄숙한걸 알겠구나.(更知號令肅軍聲)

이 대는 옛날의 건물이 아니니(玆臺不是舊觀所)

원수는 해마다 이곳에서 열병하네.(元師年年此閱兵)


○ 만녕전(萬寧殿)의 별검(別檢) 최현필(崔顯珌)155)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높고높은 층대는 고성을 진압하고(千尺層坮壓古城)

해문에는 모두가 연기가 피어나네.(海門皆處瘴煙生)

훌륭한 집 잡아 당겨 많은 산이 서있고(飛檐遠控群山立)

높은 난간 내려보니 여러 진이 평정되네.(危欖高臨列鎭平)

만리되는 비바람에 변화는 무쌍하고(萬里風雲歸變化)

한 나라의 국방책은 위엄을 떨치네.(一邦保障振威聲)

나쁜 기운 끊어짐을 이곳에서 문득 느껴(登玆頓覺氛埃絶)

상장의 계획은 병서보다 낫구나.(上將訏謨勝讀兵)


○ 위에 차운한 두 수는 장녕전과 만녕전 두 전각에서 장인대에 올라 주고받은 시이다.

이튿날 보여주고는 상대로 하여금 이어서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졸렬함을 잊고 웃음거리에 대비한다.


○ 좌랑 유택하(柳宅夏)156)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허공에는 높은 누각 층층 성을 걸터앉고(半空飛閣駕層城)

좌정한 곳 상쾌한 바람 겨드랑이 불어오네.(坐處輕颷兩腋生)

백리되는 뽕과 삼에 들판이 펼쳐지고(百里桑麻田野闢)

세 방향의 떠가는 배 바다 조수 고르다네.(三方舟楫海潮平)

낮에 쏘는 대포소리는 맑은 날의 우레이고(晴雷晝听輪砲響)

밤에 패는 장작소리 벌려있는 횃불이네.(列炬宵傳木坼聲)

첩첩의 성벽에는 모두가 붉은 깃발(疊疊詞垣皆赤幟)

장군은 5영부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네.(將軍兼統五營兵)


150) 이인기(1804년 출생) 본관은 전주. 강화유수를 지냈다.
151) 구창서발문본에는 ʻ都ʼ가 ʻ州ʼ로 되어 있다.
152) 황경원(1709∼1787) 조선 후기의 문신·예학자(禮學者).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153) 김노진(1735∼1788) 본관은 강릉. 자는 성첨(聖瞻). 강화유수·형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편서로 ≪강화부지 江華府志≫가 있다.

154) 김택수(1714년 출생) 본관은 의성(義城).
155) 최현필(1725년 출생) 본관은 강릉(江陵).
156) 유택하(1714년 출생)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장(彦長), 호는 의소당(宜蔬堂)



▲ 아름다움을 본다는 뜻의 첨화루 (서문)


59. 서문동(西門洞157)) 서문루(西門樓)


瞻華樓頭倚夕陽  첨화루 지붕 위에 석양이 걸렸고,
山腰川帶共縈蒼  산허리 두른 내는 함께 얽혀 푸르다.
萋萋鍊武堂前草  연무당 앞의 풀은 무성하게 자랐는데,
幾度春秋大操場  봄가을 큰 훈련을 몇 번이나 치렀을까.


○ 첨화루(瞻華樓)는 심도부성(沁都府城) 서문(西門)의 편액이다.
그 안에는 대조장(大操場)과 연무당(鍊武堂)이 있으니 곧 옛날 서장대(西將臺)의 옆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60. 국정동(國淨洞158))


府內西連國淨村  강화부 서쪽에는 국정촌이 이어져서,
辛韓兩姓闢山門  신씨와 한씨가 산문을 열었네.
桃梨柿栗幽幽谷  복숭아 배 감과 밤이 골짜기에 그윽하고,
耕讀生涯永不諼  밭 갈고 책 읽는 삶이 영원토록 변치 않네.


○ 영월 신씨(寧越辛氏)와 청주 한씨(淸州韓氏) 현감 한상부(韓相阜)의 증손 한성모(韓聖謩)가 이 국정동 동네에 처음 살기 시작했고 그 자손이 계속 거주하고 있다.


157) 강화읍 관청7리의 서문동마을이다.
158) 국정동(國淨洞)은 강화읍 국화2리 옛 국정사(國淨寺) 어귀에 있는 큰 마을이다.

61. 맥현제단(麥峴祭壇)


麥峴壇前不忍馳  맥현 제단 앞에는 차마 달려 지날 수 없어,
丙丁往事自然思  병자 정축년 지난 일이 저절로 생각나네.
妖氛未散愁雲黑  원통한 기운 아직 안 걷혀 검은 구름 되었으니,
一氣東天亘日維  동쪽 하늘에 그 기운이 하루 종일 이어졌네.


○ 맥현제단(麥峴祭壇)은 서성(西城) 안의 사직단(社稷壇) 남쪽 산등성이에 있다.

정축년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 군민(軍民)과 사녀(士女)들이 묻힌 이곳에서 매번 제사를 지냈다.

무릇 삼단(三壇) 육위(六位)를 설치하고, 직책이 있던 사람이든 직책이 없던 사람이든 간에 똑같이 단에 위를 나누었고,

직책이 있던 부녀와 직책이 없던 부녀도 단을 똑같이 하여서 자리를 나누었으며, 서인(庶人)의 군민과 서인의 여인은 단을 같이하여 위를 나누었으며

그 위에는 각각 패(牌)가 있었다.

62. 사직단(社稷壇)


一府城中社稷壇  강화부 성중에 사직단이 있으니,
萬千家戶賴而安  수많은 백성들이 힘을 입고 편안해지네.
蒸民乃粒無非極  백성은 곡식을 지극히 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厚德元來氣鬱盤  후덕함이 원래부터 가득 서려 있었다오.


○ 사직사(社稷祠)는 부성(府城) 북문 안의 교궁(校宮)159)의 동쪽에 있다.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영조 갑자년(1744)에 유수 김시혁(金始爀)160)이 세웠다.
○ 부(府)의 사직사는 단의 남쪽 조금 낮은 곳에 있다.
○ 사직단(社稷壇)은 부성의 소서문(小西門) 안에 있다.


63. 문묘(文廟)


仰止樓前肅肅然  앙지루 앞에서는 마음이 숙연하네,
大成殿屹聖師筵  대성전 우뚝하니 공자님의 자리일세.
三綱五典明明敎  삼강과 오륜으로 밝은 가르침 밝히니,
天地同流萬億年  천지와 함께 흘러 억만년을 이어가리.


○ 성묘(聖廟)는 부의 서쪽 성안에 있다. 외삼문(外三門)의 편액은 앙지루(仰止樓)이며, 내정전(內正殿)은 대성전(大成殿)이다.
○ 전하기를 몽골이 성을 허물 때에 위판(位版)을 볼음도[甫音島]에 옮겨 모셨는데, 비록 징험할만한 문헌이 없지만 옛터와 위전은 모두 섬안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옮긴 시기와 그 터는 모두 상고할 수 없다.

인조 갑자년(1624)에 유수 심열(沈悅)161)이 소동문(小東門) 바깥 송악의 동쪽 기슭 아래에 세웠는데 7년이 지나 경오년(1630)에 유수 이안눌(李安訥)162)이 비로소 위판을 받들어 명륜당(明倫堂)에 세우고 시를 지어 게시하였고, 이중명(李重溟)163)이 돌에 새겨서 그 일을 기록하였다. 그 해에 향교를 승격시켜 학교로 삼아서 비로소 학궁(學宮)이라고 칭하였다. 대체로 송도에서 신관(新館)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횡당(黌堂)이라고 하였다.


제도가 학궁(學宮)이라고 칭하면서 이때부터 새로와졌다. 현종 계축년(1673)에 유수 민시중(閔蓍重)164)이 성내(城內) 남산 아래로 옮겨 세웠다. 영조 신해년(1731)에 유수 유척기(兪拓基)165)가 “관아가 부에서 가까이 있는 것은 받들고 공경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것을 재우(齋宇)와 포주(庖廚)를 옮겨서 세웠다.

이때부터 질서정연해졌다. 병술년(1766, 영조 42)에 유수 동악(東岳)의 5대손 이은(李溵)166)이 중수한 일을 기록한 비석을 교문(校門)의 바깥에 새겨서 누각을 세웠다.


159) 강화향교를 이르는 말이다.
160) 김시혁(1676∼1750) 본관은 강릉. 자는 회이(晦而), 호는 매곡(梅谷).
161) 심열(1569∼1646)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162) 이안눌( 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163) 이중명(생몰년 미상)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구주(鷗洲)
164) 민시중(1625∼1677)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공서(公瑞), 호는 인재(認齋).
165) 유척기(1691∼1767)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166) 이은(1722∼178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 대성전(大成殿)
○ 10 칸으로 다섯 성인의 위패를 모셔서 안치하였다.
○ 동쪽의 종향(從享)한 분은 다음과 같다. 비공(費公) 민손(閔損),설공(薛公) 염옹(冉雍), 여공(黎公) 단목사(端木賜), 위공(衛公) 중유(仲由), 위공(魏公) 복상(卜商),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頓頤),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
○ 서쪽에 종향한 분은 다음과 같다. 운공(鄆公) 염경(冉耕), 제공(齊公) 재여(宰予), 서공(徐公) 염구(冉求), 오공(吳公) 언언(言偃), 영천후(穎川侯) 전손사(顓孫師),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
○ 동무(東廡)는 4칸이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 서무(西廡)는 4칸이다. 문창공(文昌公) 최치원(崔致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원공(文原公) 이언적(李彦迪),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 제기고(祭器庫), 신문(神門), 명륜당(明倫堂), 예방(醴房), 강당(講堂), 전사청(典祀廳), 공수(供需), 중문(中門), 동서재(東西齋), 포소(庖所), 비각(碑閣), 홍전문(紅箭門), 외삼문(外三門), 유제기(鍮祭器),보궤(簠簋), 용작(龍爵), 작(爵), 작대(爵臺), 향로(香爐), 향합(香盒),준(樽), 촉대(燭臺), 분(盆), 사제기(沙祭器), 목두(木豆), 상변(杻籩),목촉대(木燭臺), 목작대(木爵臺), 축판(祝板), 향상(香床), 축상(祝床),조상(俎床), 관(盥), 관세상(盥洗床), 폐광(幣筐), 가자(架子), 가자복(架子袱), 제복(祭服), 제복궤(祭服櫃), 부(釜), 식정(食鼎).

○ 교생(校生) 원안(原案) 200인, 별안(別案) 54인, 동몽(童蒙) 170인, 재직(齋直) 20명, 노(奴) 4명, 비(婢) 7명, 위전(位田)은 망도(望島)에 130두락(두락), 각 면(面)에 수전(水田) 129두락, 한전(旱田) 55두락.
○ 복호미(復戶米) 100두.
○ 동몽미(童蒙米)는 이름마다 각각 2두이다.
○ 접량미(接粮米)는 150석이다. 병자년에 유수 조영국(趙榮國)이 처음으로 300석을 갖추고서 관창에 소속시키고 관리하였다.

매년 10분의 1을 소모된 것으로 취해서 유생들이 사용하는 식량으로 삼았다. 흉년에 이르러서는 소모 곡식을 줄였으며 이 수를 간직하였다.
○ 석전(釋奠)은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지낸다.
○ 서(黍), 직(稷), 도(稻), 량(粱), 양(羊)의 희생은 소 한 마리와 돼지 한 마리 희생으로 대신하였다. 폐백을 시행하는 데에는 절차가 별도로 있었다.


64. 명륜당(明倫堂)


萬古明倫屹一堂  만고의 명륜당이 큰 집으로 솟아있고,
槐風杏雨入淸凉  느티 바람 은행 비는 청량함이 들게 한다.
敬推東岳經營意  동악 선생 경영한 뜻 미루어 생각하니,
牖我靑衿趣向方  우리 유생 나아갈 방향을 열어 주었네.


○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다음과 같다.


고을에는 으레 명륜당이 있지마는(郡邑明倫例有堂)

강도의 사당과 학교만은 황량하다네.(江都廟學獨荒凉)

예악과 시서는 사서를 따르고(禮樂詩書遵四術)

군신과 부자는 삼강을 세웠다네.(君臣父子樹三綱)

재물을 기증하여 터전을 마련하고(損貲敢愛鳩財用)

대궐의 제도대로 사방 인재 양성하네.(闕制堪羞養四方)

흰머리 노인은 경영할 뜻 지키고(白頭老守經營意)

혹시라도 선비들이 잊을까 경계하네.(說如靑衿戒或忘)


○ 명륜당창건비명(明倫堂創建碑銘)은 판관 이중명(李重溟)이 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 임금님이 즉위하신 지 5년 정묘년(1627)에 임금님께서 강도에 행차하시니 선비 심숙(沈諔) 등이 하소연하되, ʻ본부의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부윤(府尹)이 되었을 때에, 몸가짐이 청렴하고, 백성에게 은혜로움이 많았고, 직무에 임하심이 분명했고, 일을 처리함이 부지런하셨다ʼ 하니, 임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때에 본 강화부가 국가의 방어에 중요한 땅이라 하여 부윤을 격상하여 유수(留守)로 삼았다. 전 유수가 체임한 뒤로, 조정의 논의가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어렵다하여 이공을 으뜸으로 추천하나 아직 수습 기용되지 못했다고 계청하니, 임금이 말씀하되, ʻ이안눌이 전에도 소문난 치적이 있어 내가 아름다이 여겼으니, 지금 다시 임용함이 옳다ʼ 하셨다.


공이 목욕재계하고 일을 살피면서 이르되, ʻ임금의 사랑이 심히 중한데 감히 힘쓰지 않으랴ʼ 하다. 하루는 공자의 사당을 알현하고 물러나 모든 생도에게 가서 이르되, ʻ강화부는 이름을 격상했는데, 공자의 사당에 명륜당(明倫堂)이 없으니, 나는 인재를 잃어 유교가 소홀해질까 두렵다ʼ 하고는 이에 사당의 남쪽에 짓기로 하고 유생 안종도(安宗道) 등에게 일을 독려하게 하여 전당(殿堂)과 실방(室房)이 각기 법도를 얻으니, 전당이 격식을 갖추어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다. 학생과 선생에게 방이 있고 주방과 창고가 차서가 있어, 모든 칸수가 48칸이다. 당이 이루어지자 술을 마시며 즐거워 하니, 어느 선비가 술잔을 들고 이르되, ʻ인류가 있은 이후로 공자의 시대보다 융성한 때가 없었은즉 공자의 끼친 풍교를 우러름이 이에 있지 아니한가. 더구나 건축을 경영함에 있어 관가의 재정을 허비하지 않으며 백성의 힘을 아껴, 철차를 줄여 꾸미면서 여러 방면을 주선하니 공의 민첩한 처사가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르렀겠는가ʼ 한다.


완산(完山) 이중명(李重溟)이 대중에게 이르되, ʻ오늘의 세대가 성명한 군주를 만났고, 이 강화부는 우리 공을 만나 모든 선비가 이 명륜당으로부터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삼강의 진리를 밝혀, 세상이 태평하면 예와 악을 배워 우리 민생을 풍족히 하고 국가가 불행할 때는 아들은 효도로 죽고, 신하는 충성으로 죽으리니, 오! 우리 많은 선비들이여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나ʼ 하니 모두가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려 ʻ그렇다ʼ 한다.


오! 성상께서 현명한 이를 선택하고 유능한 이에게 맡겨, 우리 공이 당을 짓고 가르침을 세웠음이 모두가 간격이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모든 선비들이 공을 위해 비를 세움은 성상을 위함이고 공자를 위함이다. 여러 선비들이 공을 위한 정성도 오! 가상한 일이도다.
공은 덕수이씨(德水李氏)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지조가 있으며 여가의 일로 문장을 하니 늙을수록 건장 강경하여 사람들을 위해 교육을 일으킴은 더구나 평소에 쌓여진 포부이다. 명(銘)을 짓되, “드높은 그 집이여 공이 경영한 바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 있음이여 많은 선비 평안한 바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에 갈고 다듬고 이에 노래하고 익히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름을 회고하고 의를 생각하여 우리 선비 많이 기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 ≪명륜당중수록(明倫堂重修錄)≫은 다음과 같다.
전현감 교수 석지형(石之珩)167)이 부임하여 학궁(學宮)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서쪽으로 50보쯤 떨어져 집을 짓고 예전의 강당을 이전하여 연이어 강당을 축조하였다. 재내(齋內) 에는 강당이 없고 마침 성전(聖殿) 안에 물린 기와와 자재가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준공되었다. 공장(工匠)을 동원하니 강당의 옛터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엮어 뒤터에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때 도유사(都有司)와 재임(齋任)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각읍 향교의 위전은 고을의 크기, 농지의 수가 법전에 수록되어 있다. 강도(江都)의 학교 위전(位田)은 만력 20년(1592) 임진왜란 이후에 전복(典僕)의 무리들이 훔쳐 팔았다. 또 고려가 강도로 들어와 병화(兵火)를 피한 39년에 볼음도(甫音島)로 학교의 위전을 옮겼으니 5결은 본도에 있으며 도행장(導行帳, 농지세에 관한 장부)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임진년 큰 난리를 겪은 후에 이 섬의 백성들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대부 등이 여러 번 정문(呈文)을 보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담장 밖에 빼앗긴 전지를 환수하고, 다음으로 볼음도에 점유된 위전을 환수하기로 하였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날에 도유사 등 35인이 유상(留相)민공(閔公)에게 글을 올렸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학교를 세우면 반드시 위지(位地)가 있어야 하고 위지가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반드시 위답(位畓)이 있으며, 위답이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예모(禮貌)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본부의 문묘(文廟)는 담장 아래로 4면이 모두 경작지로 옛날부터 노비등이 대를 이어 전해서 자기의 소유물과 동일시하여 농사지어 선비를 양성하였습니다.

임진년에 병화(兵禍)가 잇따르고 계축년·갑인년에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노비를 담당한 관리들이 헐값으로 팔아치워 여러 해가 지난데다가, 팔고 되팔고 하여 문서가 이뤄지고 해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그렇게 내려오던 폐단들 하루아침에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명륜당(明倫堂)을 짓고서도 구차하게 좁은 땅을 빌리자니 뜰에서는 생도(生徒)가 예를 행할 수 없고 문에서는 똑바로 갈 수가 없어서 사람들 모두가 애통해 하면서도 고쳐보고자 하지만 힘이 부칩니다.


지금의 문묘는 개축하고 길을 남쪽으로 곧게 내어 담장 밖의 빼앗긴 경작지를 학교의 위전으로 환원하여 소속시키고 사방을 터서 정면을 바르게 하며 명륜당을 개축하여 시선을 높이는 것은 비단 여러 선비들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역시 국가에도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문묘의 터전과 위전의 규모는 모두 법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특별히 영원히 행해질 정사를 펴시기 바랍니다.

전후로 이뤄진 소송이나 문건 등을 살피고 판단하여 먼저 곧은 길을 내고 그러한 뒤에 명륜당을 개축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삼가 몸가짐을 바로해서 아룁니다.”


답변서는 다음과 같다.
“설령 학교의 위전이 백성들에게 잘못 편입되었더라도 경작지의 일은 이미 60년 전의 일이라서 지금에 와서 반환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다른 전지로 바꾸는 것이 ʻ공사(公私)가 모두 편하다ʼ라고 하는 것이다. 살펴서 시행하라.”
그러므로 그날로 반값으로 바꿔 수노와 정생을 환속시키고 학교 위전의 문건을 완성하여 비치하고서야 그러한 뒤에 정면의 길이 곧아지고 남쪽 밖 대문 3칸이 새로 지어졌으며 명륜당이 거듭 수리되고 강당이 수리, 단장되었다.


일을 시작한 이듬해 봄 2월 13일에 도유사·재임이 자재와 기와를 살펴 감독하였다. 매매하던 쌀과 베가 남아있는 것이 없게 되고 교수가 혁파되었기 때문에 집이 훼손되었다. 부족한 것을 메워 수리하였다. 일을 마친 것은 대체로 5월 3일이었다.

일꾼의 경우에는 김경력(金經歷)이 역군(役軍) 235명을 부조하고 유도사(柳都事)가 역군 195명을 부조했으며 서재(西齋)의 유림 303명이 각각 노비 3명씩을 부조했으니 모두 1,339명이었다.

명륜당은 거듭 새로워지고 사방을 텄으며 정면의 길은 똑바르게 하고 남향을 시원스럽게 만들었으며 시선을 높게하도록 하였다. 아! 아름답구나.


167) 석지형(1610년 출생) 본관은 화원(花園). 자는 숙진(叔珍), 호는 수현(壽峴).



전편에 이어 32수가 추가되었습니다 (총 256수중 현재 64수 옮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습니다.


오늘까지 64편 옮김.

<심도기행>7언 절구 256수 중 32 + 32편 정리

다음 준비중 : 32(편) x 8(페이지) = 25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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