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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심도기행 해설

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해설 3

by 한국의산천 2019. 5. 15.

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해설 3


심도기행 답사하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881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 인천대학교

인천학 연구원


譯註 沁都紀行
초판인쇄 2008년 12월 26일
초판발행 2008년 12월 31일
저 자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역 자 김형우ㆍ강신엽
발 행 인 이갑영
발 행 처 인천학연구원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편집·인쇄 도서출판 아진


❚발간사 ❚일러두기


발간사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은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讚歌)이다.

이 기행시문은 강화도 선비 화남 선생이 지은것으로 모두 256 수의 7언 절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강화의 마을 유래와 풍경,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고재형은 1846년 강화군 두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1888년(고종25년)에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은 선비였다.

그는 “평소 충의와 대의를 쫓은 인물들을 흠모하였으며 전통이 급속히 사라져가는 풍속을 개탄하였다”고 한다.

고재형은 자신이 태어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서 출발하여

당시 강화군 17개면 100여 마을을 필마(匹馬)에 의지하여 빠짐없이 섭렵하였다.


저자가 “강화부 전체의 산천과 고적을 다시 탐방하기 위해” 단신으로 강화기행을 떠난 것은 1906년 봄이었는데

강화 기행을 감행한 동기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터인 강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었을 터이다.


한편 그가 강화순례를 떠난 해가 서구문명이 물밀듯 밀려들어 전통과 유풍이 점차 사라져 가는 때였으며,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암울한 시대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재형이 순례자가 되어 강화의 땅 구석구석을 밟으며 걸어갈 때의 심정은

훗날 이상화 시인이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을) 다리를 절며 걷고 싶다”고 토로했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은 독특한 구조와 내용을 지닌 기행시문이다.

우선 기존의 기행문학이 출발지와 목적지라는 두 점을 잇는 선형적 구조의 플롯을 취하고 있음에 비해

이 작품은 강화도의 모든 마을을 샅샅이 탐방해가는 공간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심도기행(沁都紀行)』의 문체는 시와 산문이 병치되고 서로 조응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한편의 서사시처럼 읽힌다.


256수의 7언시를 골격으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한시 작품과 관련되는 주석이나 해설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산문으로 기술된 강화의 역사적 유산이나 자연경관, 풍속과 생활상, 성씨와 인물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지지(地誌)를 이룰 만큼 풍부하고 자세하다.


한편 『심도기행(沁都紀行)』은 저자 자신이 나고 자라고 생활한 고향땅을 기행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보통의 기행문학은 주체가 먼 이방 지대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접하는 이색적 풍물이나 감흥을 기록한 산물이다.

자신의 삶터가 성찰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면 거기에는 주체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일 터이다.

친숙한 장소가 낯선 공간으로 현현(顯現)했을 때 주체의 대응 방식은 낯선 공간을 다시 자신의 영토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전통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낯선 공간으로 떨어진 향토를 재발견하여 전유(專有)하기 위한 주체의 대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전환기 향토문학 가운데 선편에 놓을 수 있겠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의 입체적 성격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텍스트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ʻ권리ʼ를 허락해준다.

문학적 텍스트로, 그리고 민속지로, 지리지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을 읽는 분들께 화남 선생이 100년 전에 노래하며 홀로 걸었던 강화의 땅을 밟으며,

강도(江都)가 겪어 온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돌아보고,

그 땅이 길러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ʻ新 심도기행ʼ을 떠나보자고 권유하고 싶다.


2008년 12월
인천학연구원장 이 갑 영


일러두기


1. 이 책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이 1906년 강화도의 각 마을 명소를 직접 방문하여 256수의 한시(漢詩)를 짓고,

그 마을의 유래와 풍광, 인물, 생활상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인 기행문집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번역한 것이다.
2. 『심도기행(沁都紀行)』은 필사본 2종이 조사되었으며, 그 중 종손 고승국이 소장하고 있는 ʻ고승국소장본ʼ을 저본으로 삼았고,

구창서의 발문이 있는 ʻ구창서발문본ʼ을 부본으로 삼아 대조하며 번역하였다. 번역문 뒤에 저본으로 삼은 ʻ고승국소장본ʼ을 영인본으로 수록하였다.
3. 원문의 수록 순서대로 한시 256수와 해설문을 배열하되, 당시의 면(面) 별로 묶어서 편집하였다.
4. 제목이 없는 한시는 바로 앞의 제목을 따르거나, 내용 중에서 주제어를 뽑아 제목으로 삼고 끝에 ʻ*ʼ를 붙여 구별하였다.
5. 지명의 주석은 ≪강화지명지≫(강화문화원, 2002)와 ≪한국지명총람-강화군≫(한글학회, 1986) 등을 참고하고,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 보완하였다.
6. 인물의 주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의 자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주로활용하였다.
7. 이 책의 각주는 모두 역자가 단 것이며, 저자의 주는 본문 속에 포함시켰다.
8. ʻ구창서발문본ʼ에만 있는 구창서의 발문은 번역문 맨 뒤에실었다.
9. 이 역주본은 2005년 3월부터 12월까지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의 강독회 회원들의 강독이 출발점이 되었다.

C O N T E N T S

❚인정면(仁政面) ····································································· 15
1. 두두미동(斗頭尾洞) 2. 백운동(白雲洞)① 

3. 백운동(白雲洞)②  4. 삼동암동(三同岩洞)

5. 서문동(西門洞) 6. 마장동(馬場洞)

7. 석성동(石城洞) 8. 대청교(大淸橋)


❚선원면(仙源面) ····································································· 24
9. 거말동(巨末洞) 10. 연동(烟洞)

11. 송공촌(宋公村) 12. 독정촌(獨政村)

13. 남산동(南山洞) 14. 용당사(龍堂寺)

15. 참경루(斬鯨樓) 16. 가리포(加里浦)

17. 신당동(神堂洞) 18. 신지동(神智洞)

19. 대문동(大門洞) 20. 염씨산영(廉氏山塋)
21. 냉정동(冷井洞) 22. 선행동(仙杏洞) 충렬사(忠烈祠)

23. 안동인 김상용 24. 벽진인 이상길 

25. 청송인 심현 26. 파평인 윤전

27. 남양인 홍명형 28. 남양인 홍익한 

29. 남원인 윤계 30. 창원인 황일호

31. 연안인 이시직 32. 은진인 송시영
33. 진주인 강위빙 34. 연안인 이돈오

35. 평해인 황선신 36. 능성인 구원일

37. 진주인 강흥업 38. 안동인 권순장
39. 광산인 김익겸 40. 김수남

41. 여흥인 민재  42. 강화수신(江華守臣)

43. 충의혼백(忠義魂魄) 44. 열녀절부(烈女節婦)

45. 선원사(禪源寺) 46. 고성인 이암(李嵒)

47. 경주정씨 48. 진주유씨

49. 창동(倉洞) 50. 이정(梨井)

51. 조산평(造山坪)


❚부내면(府內面) ····································································· 77
52. 남산동(南山洞) 53. 구춘당(九春堂)

54. 청송심씨(靑松沈氏) 55. 부내12동(府內12洞)

56. 진보 돈대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58. 남대제월(南臺霽月) 59. 서문동(西門洞)

60. 국정동(國淨洞) 61. 맥현제단(麥峴祭壇)

62. 사직단(社稷壇) 63. 문묘(文廟)
64. 명륜당(明倫堂) 65. 강당(講堂) 안연재(安燕齋)

66. 북문(北門) 67. 여제단(厲祭壇)

68. 당주동(唐州洞) 69. 북장대(北將臺)
70. 북장춘목(北場春牧) 71. 기우청단(祈雨晴壇)

72. 행궁 궁아제단(宮娥祭壇) 73. 척천정(尺天亭)

74. 장녕전(長寧殿) 75. 세심재(洗心齋)
76. 연초헌(燕超軒) 77. 규장외각(奎章外閣)

78. 상아(上衙) 79. 객사(客舍) 

80. 민풍시(民風詩) 81. 도과(道科)
82. 공도회(公都會) 83. 이아(貳衙) 

84. 중영(中營) 85. 진무영(鎭撫營) 열무당(閱武堂)

86. 선원비각(仙源碑閣) 87. 시장(市場)
88. 용흥궁(龍興宮) 89. 육궁(六宮)

90. 부내 심부윤(沈府尹) 91. 부내 최판서(崔判書)

92. 부내 김효자(金孝子) 93. 성황단(城隍壇)
94. 고려궁지(高麗宮址) 95. 동문(東門)

96. 강화부성(江華府城)


❚장령면(長嶺面) ··································································· 138
97. 장동(長洞) 98. 묵사동(墨寺洞)

99. 갑곶동(甲串洞) 100. 갑성열초(甲城列譙)

101. 이섭정(利涉亭) 102. 진해사(鎭海寺)
103. 제승곶(濟勝串) 104. 오종도비(吳宗道碑)

105. 삼충단(三忠壇) 106. 용정동(龍井洞) 

107. 용정동 남궁공 108. 용정동 황공
109. 장승동(長承洞) 110. 성정(星井) 

111. 왕림동(旺林洞) 112. 추포영당(秋浦影堂) 

113. 옥포동(玉浦洞) 114. 옥포동 황공
115. 범위리(範圍里) 116. 월곶동(月串洞)

117. 연미조범(燕尾漕帆) 118. 대묘동(大廟洞)

119. 고성당동(高聖堂洞) 120. 양양곡(襄陽谷)
121. 선학곡(仙鶴谷) 122. 소산리동(小山里洞)


❚송정면(松亭面) ··································································· 162
123. 낙성동(樂城洞) 124. 솔정동(率亭洞)

125. 숙룡교(宿龍橋) 126. 뇌곶동(雷串洞)

127. 숭릉동(崇陵洞) 128. 포촌동(浦村洞)


❚삼해면(三海面) ··································································· 166
129. 당산동(堂山洞) 130. 승천포(昇天浦)

131. 긍곡(矜谷)  132. 상도동(上道洞)

133. 하도동(下道洞)


❚하음면(河陰面) ··································································· 172
134. 하음면(河陰面) 135. 신촌동(新村洞)

136. 봉가지(奉哥池) 137. 부근동(富近洞)

138. 장정동(長井洞) 139. 양오리(陽五里)

❚북사면(北寺面) ··································································· 176
140. 산이포동(山里浦洞) 141. 철곶동(鐵串洞)

142. 덕현동(德峴洞) 143. 삼성동(三省洞)

144. 군하동(羣下洞) 145. 냉정동(冷井洞)


❚서사면(西寺面) ··································································· 180
146. 증산동(甑山洞) 147. 교항동(橋項洞)

148. 송산동(松山洞) 149. 인화동(寅火洞)


❚간점면(艮岾面) ··································································· 183
150. 별립산(別立山) 151. 창교동(倉橋洞)

152. 강후동(江後洞) 153. 이현동(梨峴洞)

154. 이현동 덕수이씨 155. 삼거동(三巨洞)
156. 신성동(新成洞)


❚외가면(外可面) ··································································· 189
157. 삼거동(三巨洞) 158. 망월동(望月洞)


❚내가면(內可面) ··································································· 190
159. 산곶동(山串洞) 160. 고산동(孤山洞)

161. 구주동(鳩洲洞) 162. 구하동(鳩下洞)

163. 황청동(黃淸洞) 164. 구포촌동(舊浦村洞)
165. 옥계(玉溪) 166. 조계동(皂溪洞)

167. 백씨산소(伯氏山所) 168. 창원황씨

169. 동래정씨


❚고려산(高麗山)과 매음도(媒音島) ····································· 196
170. 고려산(高麗山) 171. 청련사(靑蓮寺)

172. 백련사(白蓮寺) 173. 적련사(赤蓮寺)

174. 흥릉(洪陵) 175. 보문사(普門寺)


❚위량면(位良面) ··································································· 205
176. 정포동(井浦洞) 177. 외주동(外州洞)

178. 항주동(項州洞) 179. 낙인동(樂仁洞)

180. 흥천동(興川洞) 181. 산문동(山門洞)
182. 존강동(存江洞) 183. 건평동(乾坪洞)

184. 장지포(長池浦) 185. 진강산(鎭江山)

186. 목장(牧場)


❚상도면(上道面) ··································································· 213
187. 하일동(霞逸洞) 188. 하촌(霞村)

189. 묵와선생(黙窩先生) 190. 능내동(陵內洞)

191. 가릉(嘉陵) 192. 조산동(造山洞)
193. 장하동(場下洞) 194. 장하동 청주한씨

195. 장하동 평해황씨 196. 석릉(碩陵)

197. 장두동(場頭洞) 198. 추포정(秋浦亭)
199. 가릉포(嘉陵浦)


❚하도면(下道面) ··································································· 222
200. 문산동(文山洞) 201. 상방리(上坊里)

202. 내동(內洞) 203. 마니산(摩尼山)

204. 천재암(天齋庵) 205. 성단청조(星壇淸眺)
206. 망도서(望島嶼) 207. 장곶동(長串洞)

208. 여차동(如此洞) 209. 흥왕동(興旺洞)

210. 화포지(花浦址) 211. 동막동(東幕洞)
212. 해산정(海山亭) 213. 정수사(淨水寺)

214. 사기동(沙器洞) 215. 덕포동(德浦洞)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길상면(吉祥面) ··································································· 238
217. 선두동(船頭洞) 218. 장흥동(長興洞)

219. 산후(山後)  220. 전등사(傳燈寺)

221. 삼랑성(三郞城) 222. 장사각(藏史閣)
223. 취향당(翠香堂) 224. 양공비(梁公碑)

225. 애창(艾倉)  226. 온수동(溫水洞)

227. 초지동(草芝洞) 228. 초지동 대구서씨
229. 직하동(稷下洞) 230. 직산동(稷山洞)①

231. 직산동(稷山洞)② 232. 직산동 제주고씨

233. 정하동(亭下洞) 234. 정두동(亭頭洞)
235. 곤릉(坤陵) 236. 길상산(吉祥山)

237. 굴곶포(屈串浦)


❚불은면(佛恩面) ·································································· 252
238. 덕진동(德津洞) 239. 대모산(大母山)

240. 손석항(孫石項) 241. 손석항 손장군(孫將軍)

242. 광성동(廣城洞) 243. 광성나루[廣城津]
244. 신현동(新峴洞) 245. 넙성동(芿城洞)

246. 둔랑촌(芚浪村) 247. 오두동(鰲頭洞)

248. 오두어화(鰲頭漁火) 249. 오두동 평양조씨
250. 사복포(司僕浦) 251. 능촌동(陵村洞)

252. 능촌(陵村) 253. 고잔동(高盞洞)

254. 지천(芝川) 255. 곶내동(串內洞)
256. 두두미(斗頭尾)


❚沁都紀行 원문 ··································································· 269



65. 강당 안연재(講堂 安燕齋)


數仞墻東一講堂  높은 담장 동쪽에는 큰 강당이 있으니,
故來絃誦振江鄕  예로부터 학업하는 소리 강화 고을 진동했네.
笙篁金石鏗鏘處  생황이며 금석 악기 낭랑하게 울리는 곳,
抱玉諸生共躋蹌 옥을 품은 여러 학생 다함께 예를 갖추네.


○ 지금은 안연재(安燕齋)라고 부르는데, 정전(正殿)의 안쪽 담장 동쪽에 있으니, 바깥 담장의 안쪽이다.



66. 북문(北門)


鎭松門下久徘徊  진송루 성문 아래서 한참을 머물러 보니,
山自高麗屈曲來  산은 고려산에서 굽이쳐 흘러왔고,
眼下一千茅瓦屋  눈 아래는 일천 채의 초가집과 기와집,
烟火影裡半塵埃  연기 그림자 속에 절반이 티끌이네.

○ 강화부의 북산(北山)을 송악(松嶽)이라 하고 북문으로 진송문(鎭松門)이라고 하였다.
○ 정조 계묘년(1783)에 유수(留守) 김노진168)이 다음과 같은 기문을 지었다.


“강화도는 산을 빙 둘러 성을 쌓은 것이, 또한 10 리이다. 무릇 4문을 설치하였는데 동문 서문 남문에는 모두 누각이 있으나 유독 북문만 누각이 없으니 어찌 북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는가. 대개 미처 누각을 쌓을 겨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절도사직을 제수 받고 송정에서 전함을 사열하였는데, 길이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벗겨진 첩과 짧은 구릉이 어슴프리 쑥대밭 사이로 보였다. 이어 좌우에 있는 수행원에게 ʻ아, 이와 같은데 방어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ʼ 라고 말하였다. 이 문은 송악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송악과 대치하고 있으니 옛 서울과 접하는 것이다. 송정에 임하여 굽어 살펴보니 전함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람들이 담장 밖에서 지나가는데 그 (지나가는 사람들의) 상투가 보이는 것과 같다. 돈대와 섬들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고, 날개 모양으로 숲 사이로 드러난 것이 연미정이다.
호서와 영서의 조운선이 경유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짝 지어 경작하는 볼만 하다. 갓옷을 입고 허리띠를 두르고 있으니 편안한 날로 교화할 수 있고, 빗장을 단단히 잠가서 폭도를 막을 수 있으니 이 가운데 한 가지만 해당되어도 누각이 없을 수가 없다. 하물며 두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데 누각이 없어서 되겠는가. 이에 누각을 지어 앞선 사람들이 남긴 나머지를 대신하면 좋지 않겠는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ʻ좋다ʼ라고 하였다. 돌을 캐고 재화를 모아서 축조를 시작하니 얼마 안 되어 완성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누각에 편액을 달아 ʻ진송ʼ이라 이름을 명명하고 그 대략을 이와 같이 기록한다. 계묘년(1783) 초여름 하순에 유수 김노진(金魯鎭)은 기록한다.” 


168) 김노진(1735∼1788) 본관은 강릉. 자는 성첨(聖瞻). 강화유수·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편서로 ≪강화부지 江華府志≫가 있다.


67. 여제단(厲祭壇169))


門外指云厲祭壇  북문 밖 가까운 곳에 여제단이 있는데,
沈沈烟霧鬼難看  연무가 내려앉아 귀신조차 보기 어렵네.
導迎和氣年年祝  화기(和氣)를 모아서 해마다 축원하니,
庶使州人得一安  고을 사람들 모두가 편안하길 바라네.
○ 여제단(厲祭壇)은 북문 바깥에 있다.


68. 당주동(唐州洞170))


北望唐州一谷深  북쪽 당주마을 골짜기 깊은 곳이,
世云舊邑址傳今  예전의 읍터라고 지금껏 세상에 전해오네.
後人結構東西密  뒷날의 사람들이 빼곡이 집을 짓고,
耕織生涯淡泊心  밭 갈고 옷감 짜며 담담하게 살고 있네.


○ 당주동(唐州洞)의 구읍(舊邑) 터는 부의 안쪽 경계 내의 북문바깥에 있다.


169) 여제단은 나라에 역질이 돌 때에 여귀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이다.
170) 당주동은 현재 송해면 신당리의 으뜸 마을이다.



69. 북장대(北將臺)


石築嵬然北將臺  높다란 석축 위에 북장대가 있는데,
滿山草木有風來  산 가득 숲 우거졌고 산들바람 불어오네.
誰能先據宣威武  누가 먼저 차지하여 무예 위엄 보이는가.
軍令分明數擧杯  분명한 군령 후엔 몇 잔 술이 있었겠지.


○ 송악의 정상에 사방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돌을 쌓아 북장대(北將臺)를 지었다.


70. 북장춘목(北場春牧)


松岳山北草色齊  송악산 북쪽은 풀색이 가지런하고,
三三兩兩馬牛蹄  삼삼오오 늘어있는 소와 말의 발자욱들.
春風一葉聲聲笛  한 줄기 봄바람 속에 들려오는 피리소리,
吹送江天日影西  하늘 닿은 서쪽 강으로 지는 해를 보내노라.


○ 송악산 북쪽 우마장(牛馬場)도 강화부 10경 중의 하나이다.


71. 기우청단(祈雨晴壇)


祈雨祈晴築有壇  비를 빌고 개기를 빌기 위해 쌓은 제단은,
神靈怳若鎭峯巒  신령이 깃들여 산봉우리 진압하는 듯.
推看六所皆如此  여섯 곳이 모두다 이 곳과 같을지니,

庶免人間旱澇嘆  가뭄 장마 인간 걱정 면해주길 기원하네.


○ 기우청제단(祈雨請祭壇)은 모두 6개소인데 고려산(高麗山), 화산(花山), 마니악(摩尼嶽), 송악산(松嶽山), 혈구산(穴口山), 갑곶진(甲串津)이다.


72. 행궁 궁아제단(行宮 宮娥祭壇)


祗今寥落古行宮  지금은 무너져버린 옛적의 행궁은,
後苑叢林細雨中  후원의 숲속에서 가랑비에 젖어 있네.
唯有層壇山與屹  오직 기단만이 산과 함께 우뚝하여,
年年春色杜鵑紅  해마다 맞는 봄볕에 진달래의 붉음이여.


○ 행궁(行宮)은 부의 관아 북쪽 송악산에 있다. 정축년 난리에 빈궁(嬪宮)을 모시고 온 궁인(宮人)들이 오랑캐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서 행궁 후원의 나무에 목매 죽었다.
○ 영조는 특별히 유수에게 명하여 그 땅에 단을 설치하고 제사지내게 했으며 매해마다 그리 하도록 했다.


73. 척천정(尺天亭)


北山下有尺天亭  북산의 아래쪽에 척천정이 있는데,
花自粧紅草自靑  꽃 절로 붉어지고 풀은 스스로 푸르네.
憶昔宋公扁額字  옛적 송공의 편액 글자를 생각하니,
周旋一念侍長寧  주선 했던 일념은 장녕전 모실 생각이었네.


○ 행궁의 북쪽에는 예전에 산 위에 정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없었다. 영조 무신년(1728)에 유수 송성명(宋成明)171)이 액자를 걸고 척천정(尺天亭)이라고 하였다. 그 시의 끝 글귀는 다음과 같다. “예의법도 지키니 하늘조차 작아지고(周旋不違尺五天) 나라걱정 신하 마음 일편단심 뿐이라네(耿耿臣心丹一片).” 대체로 이 시는 장녕전(長寧殿)
의 뜻과 은연중 통한다.


74. 장녕전(長寧殿)


長寧殿古草菲菲  장녕전 옛터엔 풀만이 우거졌지만,
兩廟曾臨咫尺威  일찍이 두 임금 초상 모셔져 위엄을 보였다네.
白首丹心崔別檢  충성스런 노인이었던 최 별검이,
丙寅九月奉安歸  병인 9월 난리 피해 안전하게 옮겨 모셨다네.


○ 장녕전(長寧殿)에는 숙종과 영조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황상병인년(1866) 9월에 양인이 쳐들어와 성이 함락되었을 때 별검 최씨(崔氏)가 임금의 영정을 받들어서 서울로 돌아와 궁 안의 진전(眞殿)에 봉안하였다.


75 세심재(洗心齋)


春風三月客登臨  봄바람 삼월에 나그네로 와서 보니,

山有寒泉可洗心  산에는 샘물 있어 내 마음을 씻을 만 해.
物累都將隨爾去  쌓인 허물 모두 다 너를 따라 보내노니,
淸閑世界廣披襟  맑고 한가한 경계로 마음이 넓어지네.


○ 서하(西河) 이민서(李敏叙)172)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산보하며 못의 정자에 이르니(閒步到池亭)

비 온 뒤에 뫼 빛이 푸르구나.(雨餘山色靑)

지게문 열어서 그윽한 꽃 감상하니(幽花開戶賞)

괴이한 새소리는 발을 격해 즐겁구나.(怪鳥隔簾听)

책을 펴서 읽는 것이 무척이나 좋으니(正好披書卷)

마음을 기르는 일 단정하게 어울리네.(端宜養性靈)

쓸쓸하게 앉아서 하루를 보내자니(蕭然坐終日)

소나무 그림자가 빈 뜰에 비춰지네.(松影轉空庭)”


○ 회헌(悔軒) 조관빈(趙觀彬)173)의 시는 다음과 같다.

“물가의 늙은이 살고 있는 정자에(河翁所營亭)

오래도록 완연한 단청이라네.(閱劫宛丹靑)

청렴과 절개는 맑은 샘이 보고 있고(廉節淸泉見)

인자한 소문은 늙은 나무가 듣는구나.(仁聲老樹聽)

지금의 바다에는 장수가 없으니(無能今海帥)

이 산의 신령에게 부끄러움 있다네.(有愧此山靈)

시를 지어 이 내 마음 즐겁고 기쁜데(只喜詩添料)

샘물에 꽃이 지니정자에 비 지나네.(花泉雨過亭)”


○ 서하(西河) 이민서의 시는 다음과 같다.

“두 언덕 사이에 살 집을 지으니(築室兩崖間)

맑고 맑은 샘물이 앞으로 흐르네.(前有淸泉流)

물과 돌은 어여쁘고 고우니(水石媚閒娟)

솔과 대는 날개치듯 흔들리네.(松竹亦翛翛)

은둔해서 사는 것이 아무리 아니더라도(雖非隱遯居)

산림의 그윽한 건 분명한 사실이네.(宛似山林幽)

벼슬할 때에는 간소하게 일처리하고(居留職事簡)

공직에서 물러서는 때때로 홀로 노니네.(公退時獨遊)

발 휘장으로 온화한 바람이 들어오고(和風入簾帷)

숲에서는 밝은 달이 더욱 더 빛나네.(明月烱林邱)

쓸쓸히 맑은 것을 기뻐하여 감상하니(蕭然愜淸賞)

나그네 근심조차 모든 것 잊게하네.(却忘羈旅憂)

이곳에 살면서 스스로 만족하니(遇地便自得)

한가로이 지내면서 무엇을 구하리요.(攸攸何所求)”


○ 또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 매미 울음소리에 손님을 배웅하고(秋蟬送客兩三聲)

차갑게 흐르는 건 비온 뒤의냇물이라네.(雨後寒川決決鳴)

손짓에 맞추어서 기러기는 머물고(着處宜鴻留指瓜)

작은 못에 밝은 달만이 한가롭고 맑구나.(小塘明月獨閒淸)”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74)의 시는 다음과 같다.

“관직에 있으면서 싸우려하지 말아라(莫以官留閙)

마음을 씻는 것은 진실로 이곳이라네.(洗心良在玆)

봄의 그늘은 노정에 드리웠고(春陰滋露井)

밤에 내린 비는 이끼 낀 못을 적시네.(夜雨滴苔池)

안석에 기대니 하늘이 가깝고(隱几寥天近)

지팡이를 짚으니 먼 곳으로 가고 싶네.(扶藜遠壑意)

그대 만나 짝이 되어 잠을 자니(逢君成伴宿)

시의 감흥은 침상 휘장에 가득하네.(詩興滿床帷)”


○ 회헌(悔軒) 조관빈의 시는 다음과 같다.

“세상사 위험하긴 이것과 같지만(世路危如彼)

관사라고 하는 것은 고요하기 이와 같네.(官齋靜若玆)

동산의 섬돌에는 가지가지 꽃피우고(雜花園接砌)

우물은 못과 통해 물길을 내었구나.(活水井通池)

발자취를 머물고서 생각을 깊이 하니(滯跡窮溟想)

끊어진 협곡으로 이 몸을 숨긴 듯.(逃身絶峽疑)

마음을 씻고서는 외물에 관심 없고(洗心無物累)

한가로운 깊은곳에서 책 읽으며 살려하네.(閒僻欲書帷)”


○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75)의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다 나라에 아스라이 비 내리다(海國茫茫雨)

맑게 개니 온 못이 넘치네.(晴來湛一池)

한가로운 세심재엔 해가 빛나고(閒齋有白日)

높은 나뭇가지에 새소리가 좋구나.(好鳥自高枝)

세사 밖에는 먼산이 녹색이고(事外遙山綠)

잠을 자는 도중에는 가는 풀이 자라네.(眠中細草滋)

손과 주인의 쓸쓸한 뜻은(蕭然賓主意)

오언시를 지어서 흥을 돋우네.(漫興五言詩)”


○ 회헌(悔軒) 조관빈의 시는 다음과 같다.

“진영 안에는 오히려 골이 깊고(營內猶深壑)

세심재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네.(齋前有小池)

숲 속의 새 소리에 소매를 떨치고(托襟林鳥語)

가지에 있는 두견새에 발길을 머무네.(留蹟杜鵑枝)

늙어가니 인연이 소중하고(老去因緣重)

봄이 오니 그 뜻이 재미있구나.(春來意味滋)

농사짓는 일이란 내가 바라는 바이고(農淵吾所仰)

책에서 본 시 글귀을 떠올린다네.(追揭卷中詩)”


171) 송성명(1674년 출생)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성집(聖集), 호는 송석(松石).

172) 이민서(1633∼168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西河).
173) 조관빈(1691∼1757)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晦軒).

174) 김창협(1651∼1708) 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76. 연초헌(燕超軒)


超軒遺石壓山深  연초헌엔 초석만이 산 깊숙이 박혀있는데,
過客緣何獨坐吟  과객은 무슨 인연으로 홀로 앉아 읊조리나.
却憶當時賢太守  그 시절 생각하면 어진 태수 계셨으니,
燕居無累一淸心  얽매임 없는 맑은 마음으로 편안히 살았으리.


○ 유수 권적(權䙗)176)의 시는 다음과 같다.

“녹색 나무 그늘지고 그린 누각 깊은데(綠樹陰陰畵閣深)

이 사이의 맑은 정취 그대와 읊조리네.(這間淸趣共君吟)

관리되어 오래도록 머문 것이 부끄러운데(爲官自愧經年滯)

머무는 손이 어찌 방해하리 저녁내 비오는 것을.(留客何妨竟夕霪)

한가한 날에 매헌에서 자주 술마시니(暇日梅軒頻對酌)

난실에서 옷깃을 여민 것이 언제이던가.(幾時蘭室更聯襟)

산 정자에서 활쏘기를 마치고 다시 글쓰니(山亭射罷仍揮翰)

이별 뒤에는 마음을 씻는 것이 아름답다네.(別後容華在洗心)”


○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177)의 시는 다음과 같다.

“누대의 나무가 겹겹이 깊으니(樓臺樹木重重深)

한가로이 앉아서 초연히 읊조리네.(燕坐超然可嘯吟)

가까운 영문에는 세속의 일이 없고(咫尺營門無俗事)

둘러친 바닷물은 비바람에 끊어졌네.(環圍海水絶風霪)

주인은 생각 많아 술과 안주 내오고(主人多意置肴酒)

머무는 손 다시 생각 잠자리로 가는구나.(客子還思移枕衾)

글을 쓰고 활쏘는 건 아직도 아니 끝나(揮翰射帿殊未了)

솔 바람과 시내물에 마음이 맑아지네.(松風澗雨更淸心)”


○ 회헌(悔軒) 조관빈의 시는 다음과 같다.

“과중한 업무에 이 병이 깊어지니(强病分司此島深)

백성들은 힘이 들어 노래소리 그쳤네. (兵民務劇廢閒吟)

산으로 돌아가니 가을 느낌 상쾌하니(歸山何待秋嵐爽)

바다가에 머무니 여름 장마 어렵구나.(滯海難經暑雨霪)

경인년 일 생각하니 자리만을 더하였고(遺愛庚寅徒忝席)

정축년 일을 근심하니 이부자리 편치않아.(餘憂丁丑敢安衾)

위급할 때에는 목숨을 바치고(一方利害刳肝疏)

물러나서 나라 지킬 마음을 생각하네.(將退猶懷衛國心)”


175) 김창흡(1653∼1722) 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子益),호는 삼연(三淵).

176) 권적(1675∼175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하(景賀), 호는 창백헌(蒼白軒)·남애(南厓)·계형(繼亨).
177) 김진상(1684∼1755) 본관은 광산.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退漁).


77. 규장외각(奎章外閣)


奎章閣在古宮傍  규장각은 행궁의 옆 자리에 있었는데,
一視天恩最我鄕  임금님 은혜 보여주니 우리 고장 으뜸가네.
玉牒丹書眞寶氣  옥첩과 단서는 참된 보배 기운이니,
海西夜夜亘虹光  서쪽 바다엔 밤마다 무지개빛 뻗혔네.


○ 정조 신축년(1781)에 유수 서호수(徐浩修)178)에게 명하여 행궁의 동쪽에 규장외각(奎章外閣)을 지어서 열조(列朝)의 보첩(譜牒)·단보어제(丹寶御製)·어정제서(御定諸書)들을 봉안하였고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액자를 써서 걸게 하였으니, 대체로 문장을 같게 하여 한결같이 보려는 뜻이었다.


78. 상아(上衙)


以寬堂上覺新晴  이관당에 오르니 새로 맑아짐을 느끼는데,
伊昔保釐文武營  그 옛적 보리문무영이 있었네.
畵角時時簾外起  때때로 화각 소리 주렴 밖으로 들렸으리니,
平臨六十六州城  예순 여섯 고을과 성곽 평화롭게 다스렸네.


○ 이관당(以寬堂)은 현윤관(顯允館)이라고 하는데 유수가 정사를 보는 정아(正衙)이다. 문무(文武)의 이름난 재신(宰臣)들이 와서 다스렸다. 외삼문을 진어보리영(鎭禦保釐營)이라고 했으며 내삼문은 호수문(虎睡門)이라고 하였다. 심영(沁營)은 경기 35읍, 황해 17읍, 충청13읍을 관할하였다.


○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80)의 시는 다음과 같다.

“벼슬길이 영화롭다지만 나만은 심려 깊어(人說官榮我慮深)

밤에도 잠 못자고 낮에도 신음하네.(夜無眠睡晝呻吟)

봄에는 비개이면 가뭄이 걱정되고(春天乍霽偏憂旱)

여름에는 비내려서 장마될까 두렵다네.(夏日仍霾旋懼霖)

뜨거운 날 김매기를 보고서 넓은 집을 혐오하고(炎見野耘嫌廣廈)

추울 때엔 베짜기를 듣고서는 겹이불이 부끄럽네.(凍聞村織愧重衾)

숲속에 사는 재미 늙어서 기억하니(老身却記林居味)

밥에다가 산나물은 내 마음에 흡족하네.(飯煑山蔬愜素心)”


○ 유수 이복원(李福源)181)의 시는 다음과 같다.

“태평한 천하에서 못난 선비 늙었으니(腐儒生老太平天)

이 섬에서 벼슬한 건 훌륭한 인연일세.(海國分符亦勝緣)

갑곶진을 한번 건너 느끼는 게 많으니(一渡甲津多感慨)

오랑캐의 난리를 모두가 말한다네.(無人不說丙丁年)”


○ 동악(東岳) 이안눌182)이 동헌에 쓴 벽상시(壁上詩)는 다음과 같다.

“기내의 관방은 이 섬에 이 고을이고(畿內關防島上州)

바다와 강에는 형세가 둘러있네.(海門江口勢環周)

나라에서 진을 두니 3천 호를 이루었고(國朝置鎭三千戶)

왕씨가 천도하니 40년의 세월이네.(王氏移都四十秋)

즉묵183) 지방 보존하니 제나라가 날을 달리고(卽墨獨全齊走日)

진양184) 지방 소속되니 조나라의 계획이었네.(晉陽方屬趙歸謀)

용종이 질까봐 밝은 때에 의지하고(龍種恐負明時倚)

청평검을 손에 잡고 옛 누에 기대네.(手握靑萍倚古樓)”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태수가 새롭게 부윤으로 승진하니 (太守新陞尹)

예전 고려 때엔 도읍을 옮겼었지.(前朝舊徙都)

지형은 험하고 견고하여(地形留險固)

조정 의논으로 유사시를 대비했네.(廷議備難虞)

세금이 많이 걷혀 창고가 가득차고(廩匱增租賦)

전쟁나서 판도가 줄어드네.(軍興減版圖)

마음은 나태한 성품을 털어내고(心慚䟽懶性)

특별한 은혜에 거듭 부치네.(重寄荷恩殊)”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10년 동안 옛 성지를 거듭해서 살펴보니(十年重按古城池)

앉아서 헤아리니 많은 세월 지났구나.(坐度星霜屆一朞)

난리가 일어나니 수레 가마 임하고(車駕曾臨兵亂日)

마을 사람 흩어지고 가뭄도 들고 마네.(里閭俱散旱荒時)

재주가 볼품없어 명예는 손상되고 (才微只合聲名損)

정사는 졸렬해서 남긴 은혜 없어라.(政拙元無惠愛遺)

마음은 얼음 밟듯 머리는 눈내린 듯(心似履氷頭似雪)

녹봉만 챙겼으니 누린 은덕 부끄럽네.(俸錢空愧荷恩私)”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흉년이라 백성 살릴 방법 없고(歲飢無術活民流)

봄여름엔 해마다 밤낮으로 근심 걱정.(春夏年年日夜憂)

견책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 받았으니(嚴譴幸稽三考過)

잘못된 은혜에 또 한 해가 지났구나.(謬恩虛飜一冬流)

부로들은 경하한다 그릇되이 전하니(謾傳父老俱相賀)

산하를 마주하고 나 스스로 부끄럽네.(獨對山河益自羞)

세상에선 어렵다하고 이 몸은 너무 늙어(世事傳難身太老)

기대에 못미쳐서 허물될까 두렵구나.(未酬隆委恐招尤)”


○ 정해당(靜海堂)은 이관당(以寬堂) 남쪽에 있다.
○ 현종 을사년(1665)에 유수 조복양(趙復陽)185)이 지은 상량문(上樑文)은 다음과 같다.


“요새를 지켜서 국가를 견고하게 하는 것은 막중한 임무를 맡은 유수의 소임이다. 옛 건물을 새롭게 꾸며 마침내 정사를 보는 집을 건립하였으니, 산과 들판은 광채를 더하였고, 고을 부로(父老)들은 경관이 바뀐 것이라 하였다. 돌아보건대 오직 이 강화만이 천연의 요새라 불렸다. 그 이유는 긴 강과 큰 물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어 못이 되었고, 길게 늘어선 높고 험한 봉우리는 반공에 우뚝 솟아 있어 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강화는 황해도·경기도 하류의 문호에 있으면서 여섯 갈래 길이 모이는 해안의 요충지로서 고려의 왕이 오랑캐를 피해 궁궐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강화의 지난 사적을 기록해 본다면,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오래된 제단이 아직 있으며 임진난 때는 서쪽 요새로 파천하였으니 나라의 운명은 이로써 걱정이 없었다. 정묘년에 이르러서는 북방 오랑캐의 창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임금이 이곳에 잠시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아, 참람된 일이 생겼으니, 병자년에 나라가 다시 도탄에 빠졌지만 강화의 형승은 바뀌지 않아, 전과 다름없이 안팎으로 요새를 지켰지만, 평범하고 용렬하게 대응하여 더렵혀졌고 안전을 한낱 명주실에 맡기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렇지만 조 유수의 거친 식견으로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고, 또한 주시에서 말한 지도가 무엇인지 듣기는 하였으나 재주는 거칠고 계략은 얕아서 비록 한가지 장점이라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해도, 정성과 지혜를 다하였다. 대개 백가지 폐해가 나타난다고 해도 모두 참여해서 오직 관아 중건을 보고자 했다. 일찍이 지난 번 난리 초에 보면, 넓고 드높은 관아와 동헌이 있었지만 관부의 체제는 완성되지 않았었다. 작은 뜰과 깊게 박혀있는 작은 건물은 관민들이 일을 보러 오고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옛날 구양주가 활주서의 동헌을 새롭게 꾸미지는 않았고, 소장공의 부풍당 북쪽은 마땅히 증축되고 고쳐져야 했을 것이다. 저 남쪽 꼭대기에 있는 굽은 정자를 보라. 또 그 전면에 있는 이리저리 얽혀있는 옆면을 보라. 그 다음에는 점차 백성들의 집이 헐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심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말하듯이 지맥이 쇠절한 까닭인 것이니 하물며 전란 후에 반드시 돌아갈 땅임에랴. 마땅히 근신하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해애 해악을 물리고 안정을 얻을 것이니 어찌 회필할 수 있겠는가. 철거할 것은 철거하고 세울 것은 세워 거주하는데 마땅함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무와 돌들을 주고받으면서 공역에 참여한 사람들의 뜻은 일 자체를 넘어 섰다. 작업 도구를 나란히 하고 장인들의 손놀림은 서로 다투었으니, 드디어 가운데 구역의 넓은 터를 열기에 이르렀다. 옛 수령 관아 중 동헌을 이곳에 옮기니 그로 인해 승지가 될 것이다. 어찌 마음을 다하여 계획을 세우고 기초를 닦지 않겠는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어 눈앞에 우뚝 솟아있고 섬돌 아래는 상쾌하게 돋아져있다. 긴 회랑과 빗장 문은 멋지게 돌아있고 갖가지 꽃과 대나무는 여기저기 심어져 있다.


굽이굽이 담장은 돌계단으로 받쳐지고 언덕 모양으로 둘러져 있는데, 동네 우물은 눈앞에 있고 성안에 부는 연기를 내뿜기도 하고 들여 마시기도 한다. 이곳에서 산하를 바라다보니 요새처럼 되어 있는 섬 전체를 관할하고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에 이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길이길이 상서롭도록 길한 이름을 걸자. 아득하게 멀리가고 아득하게 무사하도록. 이 집이 앞으로 좁게 느껴지고 전체가 없어진다고 해도 사치하지 않고 누추하지 않도록 지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실로 이 강화부의 규모가 완성된다 할 것이다. 이 집에서는 사람들의 화목을 마땅히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며 보통 사람들과 같이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군비를 잘 계산해서 증강시키는데 주의하면 사나운 외적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비록 풍속이 바뀐다고 해도 임금의 교화가 있으면 그 명령이 잘 시행될 것이다. 스스로 강화부에서 어떤 정책을 꾸민다 해도 관아 밖으로 새 나가지만 않는다면 우스운 얘깃거리라 해도 조용하게 이곳 안에서 처리할 수 있을것이다. 반드시 이 관아 일대 지역을 잘 다스리면 그 어떤 근심이 있더라도 편하게 쉴 수가 있을 것이고 앉아서도 멀리 일어나는 풍파를 잘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이름이 가진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들보를 잘 닦아 세우면 좋은 정치를 온전히 베풀 것이다.


어영차 떡을 들보 동쪽으로 던져라. 한강 서쪽은 바다에 접하여 통해있고 정성스런 마음은 매일 밤 조수를 따라 임금 계신 서울을 왕복하니 지척간이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남쪽으로 던져라. 포구 끝은 보이질 않아도 기운은 쌓여 가고 만 가지 곡식은 큰 배 실려 오고가는데 붉은 밤과 산삼만은 곧장 서울로 가는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서쪽으로 던져라. 마니산에서 곧장 가니 북쪽은 산이 가지런하여 산 앞에 늘어선 섬들이 마치 바둑판 위 돌 같은데 고기잡이 집들은 고기 잡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북쪽으로 던져라. 고려산의 맥은 송도에 있는데 도읍 옮긴 날 전 왕조를 생각하니 백만 오랑캐 군대는 얻지 못할 것을 엿보았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위로 던져라. 하얀 달빛 아래 먼데서 부는 바람은 허공에 떠있고 맑은 향이 나는 그림의 창끝은 한가로이 종이 한 장을 거느릴 뿐. 아침에 부는 맑은 기운은 다시 새롭게 맛을 낸다.
어영차 떡을 들보 아래로 던져라. 마음 속 사무쳐 홀로 노래 부르지만 대답하는 사람 없구나. 내 한 가지 소원은 늘 만물이 따뜻하게 있는 것이었는데, 내 추위를 가리고 어찌 드넓은 집을 얻으리오.
엎드려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는 군민이 평안하고 화목하여 바다와 육지가 모두 맑은 기운으로 나라의 근본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푸른 바다를 지키며 이어온 우리 조정은 관방을 굳건히 하여 태산과 같은 네 가지 근본이 있었으므로 해마다 풍년이 드는 낙토가 되어 오랫동안 노래 소리가 끊이질 않기를 바란다. 또 여유가 있으면 화당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술이라도 서로 나누기를 바란다. 뽕나무 밭이 아무리 다른 것으로 바뀌어도 이 정해당만은 어그러짐이 없기를 바란다. 을사년 중춘에 쓰다.”


178) 서호수(1736∼1799)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양직(養直).
179)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 의해 도서가 약탈되고 불태워진 사실은 서술되어 있지 않다.

180) 이안눌(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181) 이복원(1719∼179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수지(綏之), 호는 쌍계(雙溪).
182) 이안눌(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183) 즉묵(卽墨)은 전국시대 제(齊)의 고을 이름이다. 연(燕)의 장수 악의(樂毅)에게 대패하여 거(居)와 즉묵 두 고을만 남게 되자, 즉묵 사람들이 전단(田單)을 장수로 추대하여 기이한 전략으로 빼앗긴 70여 성을 되찾았다.

184) 진양(晋陽)은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고을 이름이다. 진나라 조간자(趙簡子)가 윤탁(尹鐸)에게 진양을 다스리라고 하자, 윤탁은 진양을 보장(保障)이 되게 하기 위해 세금을 절반으로 줄였고, 그 후 조간자의 아들 지백(智伯)이 난을 피해 진양에 들어갔을 때, 윤탁의 관대한 정치 덕분에 백성들이 끝내 배반하지 않았다고 한다. <國語 晋語>

185) 조복양(1609∼1671)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79. 객사(客舍)


海口館前官道橫해구관 앞에는 큰길이 뻗어 있고,
廳房倉庫昔盈盈관공서와 창고들이 옛적엔 즐비했었네.
丙寅甲午何堪說병인년과 갑오년 일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十有兩三仍舊名열여섯 개 옛 건물의 이름이 남아있네.


○ 해구보장지관(海口保障之館). 곧 객사이다. 예전에는 장녕전(長寧殿)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상아(上衙)의 서쪽에 있다.
○ 옛 벽대청(舊甓大廳). 전패(殿牌)와 향축(香祝)을 이 포(鋪)에 봉안하였는데 이를 벽(甓)이라 해서 벽대청이라고 하였다.
○ 망궐례(望闕禮). 매월 삭망에 유수·경력·검률·중군·각 진의 장수들이 이 진의 뜰에서 예를 행하는 것이었다.
○ 영사(迎赦). 사면하는 글과 교서는 가져오는 관리가 남문 바깥에 이르면 용정(龍亭) 의장(儀仗)과 고취(鼓吹)를 갖추고, 경력(經歷)이 나아가 맞이하여 앞장서서 인도하여 여기서 예를 행하였다.
○ 영명(迎命). 경력·중군·각 진(鎭)의 장수들이 각각 부임할 때,그리고 4영장(營將)이 일로 인하여 본부에 도달하는 자의 교서·유서를 받들어 예를 행하는 처소가 역시 위와 같다.
○ 전최(殿最). 매년 6월과 12월에 있다. 유수가 자리를 열고 동헌에 오르면 경력, 중군, 별검, 참봉, 각 진의 장수, 월령 검률, 이고참봉(吏庫參奉),186) 제 군문(軍門)의 장군과 장교들은 예에 의거하여 참배하고 알현한 후에 포폄(褒貶)하고 봉하여 아뢰었다.
○ 봉전(封箋). 해마다 정월 초하루·동지, 대전(大殿)의 탄신일과,언제든 나라의 경사가 있어 하례하는 전문이 있을 때에도 동헌에 올라 봉하여 바쳤다. 그러므로 망궐례 등의 절차와 아울러 여기에 기록한다.
○ 향청(鄕廳 : 상아(上衙)의 서쪽에 있다. 향임이 거주하며 편액은 향헌당(鄕憲堂)이다.)·비장청(裨將廳 : 상아의 동남쪽에 있다.)·집사청(執事廳 : 편액은 운주(運籌)이다.)·서리청(書吏廳 : 상아의 서쪽에 있다.)·장려좌우열장관청(壯旅左右列將官廳 : 상아의 남쪽에 있다.)·영군청(營軍廳 : 상아의 남쪽에 있다.)·의려좌우열급장관청(義旅左右列及將官廳 : 상아의 남쪽에 있다.)·종사군관청(從事軍官廳 :이아(貳衙)의 옆에 있다.)·별군관청(別軍官廳)·포도청(捕盜廳)·관청(官廳)·군무장관청(軍務將官廳)·중영관청(中營官廳)·청직청(廳直廳: 편액은 소성(小星)이다.)·별파진청(別破陣廳)·도훈도청(都訓導廳)·관노청(官奴廳)·순뢰청(巡牢廳)·종각(鐘閣)·내탕제고(內帑諸庫)·사창(司倉)·호조창(戶曹倉)·서창(西倉)·남창(南倉)·유비창(有備倉)·관청고(官廳庫)·보민청(補民廳)·부사고(府司庫 : 동문 안에있다.)·군기고(軍器庫)·화약고(火藥庫 : 세 곳이다.)·경적고(京籍庫)·부적고(府籍庫)·공방고(工房庫)·호남고(戶南庫)·약방고(藥房庫)·진휼고(賑恤庫)·군수고(軍需庫)·수성고(修城庫)·부료고(付料庫)·빙고(氷庫)·병대청(兵隊廳:두 곳이다.)·옥(獄)이 있었다. 이상 여러 청(廳)과 방(房)은 병인양요 때 불타 없어졌기도 했고 다시 짓거나 증설하기도 했다. 갑오년(1894)에 개혁한 뒤에 모두 폐지되었는데 대체로 두세 개의 옛 이름이 있을 뿐이다.


186) <속수증보강도지>에는 ʻ사각참봉(史閣參奉)ʼ으로 되어 있다.


80. 민풍시(民風詩)


金公昔日涖江鄕김상익 공 옛적에 강화에 부임하여,
詩誦民風二十章백성들의 풍속을 20수 시(詩)로 읊었었지.
耕織漁塩多少字밭 갈고 옷감 짜고 어염 일을 몇몇 글자로 짓되,
最先保障海西方서쪽 바다 지키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네.


○ 영조 을유년(1765)에 김상익(金尙翼)187)이 강화부의 민풍시(民風詩) 20장(章)을 지어 올렸다. 그 계사(啓辭)는 다음과 같다.

“우리 성상께서는 요임금의 힘써 일할 때의 나이로 위무공의 청잠하는 계율을 본받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근심하여 밤낮으로 나태함이 없었고, 교서를 칠월장(七月章)을 거듭 강하던 날에 두루 내려서 상한 백성을 걱정하는 어진 마음으로 정녕 간절하고 측은히 여겨 짐승을 감화하고 금석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강화부는 수백 년 동안 국가를 지키던 땅으로서 열성조의 근심하던 법전을 입어서 계속되는 원망은 반드시 풀어주고 묵은 병폐는 반드시 시정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의 마음을 만정에 더욱 근면하고 숨어있는 것을 캐내어 도와주기를 극진히 하지 않은 적이 없고 한마디의 말로 온 섬이 은혜를 입었으니 기뻐서 춤을 추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우리 백성들이 기대할 만하였습니다. 신이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에 풍속과 백성의 산업의 어려움을 간략하게나마 채집하여 삼가 가려 뽑아서 올립니다.”


1) 보장(保障)
우뚝한 저 마니산(截彼尼嶽) 바다를 지킨다네.(鎭玆海防)

대양에 둘러싸여(環以大洋) 백리의 지역이라네(百里其方)

쌓고 또 수리하여(修斯築斯) 단단히 묶어 매네.(繫于苞桑)

해자 덮는 경계를(覆隍之戒) 어떻게 잊겠는가?(俾也可忘)


2) 진전(眞殿)
아름다운 진전(穆穆眞殿) 위엄있는 곤룡포네.(有儼龍袞)

하늘 멀다 누가 그랬나?(誰謂天遠) 무척이나 가깝네.(尺五之近)

우러르고 의지하니(載瞻載依) 반짝반짝 빛나네.(日襯耿光)

백성에겐 별이 있어(庶民有星) 숭앙하는 정성이네.(此拱之誠)

3) 사각(史閣)
보각은 높고높아寶閣崇崇) 삼랑성 옛성일세.(三朗古廓)

왕실 기록 보관하고藏寶藏史) 중요 서책 빛나누나.(有煌玉軸)

하늘이 존엄하니(木天尊嚴) 모두가 공경하네(孰不起欽)

하물며 지난 세월(矧惟往歲)우리 임금 행차했네.(我后光臨)


4) 충렬사(忠烈祠)
아름다운 사당이여(有廟如奕) 12분의 충신이네.(十二貞忠)

인을 이룬 곳에서成仁之地) 백세의 기풍일세.(百世氣風)

풍모 명성 감동하니(風聲攸動) 지사들이 분발하네.(志士愈激)

이곳에 제사 지내爼豆于斯) 우리의 법도라네.(爲我矜式)


5) 사속(士俗)
바다의 입구에는(海之口矣) 백성들이 어리석네.(氓俗蚩蚩)

무사가 일곱이고(弓馬其七) 선비가 셋이라네.(士也三之)

가르침이 부족해서(文敎不振) 속되게 되는구나.(遂歸下俚)

본래의 습성은(習尙固然) 환경이 그러했네.(風氣所使)


6) 염전(鹽田)
바닷물이 넘쳐서(海水濫濫) 경작지로 흘러드네.(亦流于田)

둑만들려 해보지만䂓以爲偃) 사방이 그러하네.(四郊皆然)

바닷가에 염전 개척海濱斥鹵) 흉년이 들었다네.(罕有有年)

흉년이 들었으니(罕有有年)백성들은 배고프네.(民惟食艱)


7) 목어(牧圉)
진강의 목장에는(鎭江之場) 토양이 비옥하지.(孔沃其土)

개간하지 않은 것은(土何不墾) 목장이 있어서라네.(牧圉之故)

범조차도 하천 못건너(虎不渡河) 말무리가 비어있네.(馬羣殆空)

백성 모집 의논에는(募民之議) 모두가 동의하네.(萬口攸同)


8) 선상(船商)
얼음 강이 깨지면서(氷江卽坼) 갈매기가 우는구나.(鷗有春聲)

가진배를 수리하고(理舟理楫) 장사하고 떠나려네.(將賈將行)

물귀신에 제사 지내(爰賽水神) 둥둥둥 북을 치네.(伐鼓淵淵)

일곱 산의 험함이여(七山之險) 조심하라 부탁하네.(婦曰愼旃)


9) 춘경(春耕)
봄날에 햇빛 비춰(春日載陽) 농사 때가 되었구나.(農候始至)

우리 소에 여물 주고(言飼我牛) 우리 처자 같이하네.(同我婦子)

해안에는 눈 있지만(海岸殘雪) 바람으로 자취남네.(于以風趾)

창포는 싹이 나고(菖已笋矣) 은행은 아니 꽃펴.(杏未花矣)


10) 잠상(蠶桑)
초여름을 견뎌내고(載勝初下) 누에 일을 시작하네.(蠶事起矣)

여인은 광주리 잡고(有女執筐) 이것을 따른다네.(薄言遵彼)

야들야들 잎사귀는(嫩綠者葉) 아침저녁 구한다네.(爰求朝暮)

채집해도 양이 적고(采不盈掬) 뽕나무는 아니 크네.(桑不宜土)


11) 엽무(饁畝)
저 교외를 보자니(瞻彼郊坰) 보리싹이 파릇파릇.(麥苗靑靑)

곡식은 비어있고(甁粟旣罄) 집안도 비어있네.(室如懸磬)

밭일이 더디니(田日遲遲) 배고픈걸 어찌하리?(何以求飢)

나뭇잎을 따다가(言採槐葉) 삶아서 먹는다네.(以烹以饁)


12) 한한(暵旱)
오월인데 가뭄이라(五月其暵) 농사 때를 잃었구나.(三農愆期)

해마다 흉년이니(歲將無秋) 백성들이 곯는구나.(民其殿屎)

타는 듯한 근심 걱정(憂心如惔) 그 누가 살피리요?(繫誰察眉)

성후께서 측은해하니(聖后其惻) ʻ운한ʼ이란 시가 있네.(雲漢有詩)


13) 추획(秋獲)
가을 걷이 하였지만(我稼載獲) 쭉정이요 빈 것이네.(有殼其空)

가을인데 수확 없어(秋旣不粒) 세금을 어찌 내리.(租稅何從)

이것 저것 팔고서(賣係賣犢) 말로만 옮기네.(言輸其粟)

부자들도 죄이는데(富亦云急) 가난한자 어찌하리?(奈何窮獨)


14) 창저(倉儲)
창고 속을 보노라니(相彼倉實) 그 수량이 매우 많네.(鉅萬其數)

예전에는 넘쳤지만(昔何盈矣) 지금은 축났다네.(今何耗矣)

이리저리 빌리지만(東輸西貸) 병조차도 못 채우네.(甁罍之恥)

흉년든 세월이니(歲其大侵) 무얼 믿고 내가 살까?(我將焉恃)


15) 어리(漁利)
포구에는 소라 있고(浦口有螺) 바다 속엔 새우 있네.(海中有蝦)

그물치고 잡아다가(爰罟爰採) 지고 가고 이고 가네.(以負以載)

밥먹는 고을에서(就食稻鄕) 우리 처자 같이 살지.(偕我妻帑)

철따라 이동하며(秋南春北) 새들과도 함께하네.(鴻雁與俱)


16) 자염(煮鹽)
바다 조수 밀려가면(海潮初退) 소금 꽃이 땅에 뜨네.(鹺花浮地)

걸러서 볶으니(漉以熬之) 모래와 물이구나.(惟沙與水)

흰 것을 내고 보니(搆白出素) 눈싸인 광경인 듯.(積雪其似)

파는 것을 일삼아서(販以爲業) 이익 남겨 생활하네(牢盆之利)


17) 판시(販柿)
밭에는 감이 있어(于田有柿) 과실이 익었구나.(有爛其顆)

따다가 껍질 벗겨(迺摘迺剝) 광주리에 담는다네.(于筐于筥)

저자로 가서는 (爰赴墟市) 팔아서 빚을 갚네.(鬻以補糴)

이것 키운 땅에서는(爲生殖地) 그 이익도 매우 크네.(其利孔博)


18) 직공(織功)
한해가 저무니(歲聿暮矣) 귀뚜라미 벽에 있네.(蟋蟀在壁)

농사가 끝나니(田功旣訖) 길쌈을 하는구나.(可紡可績)

남자는 베를 짜고(士曰織布) 여인은 자리 짜네.(女曰織席)

인생이란 근면이니(人生在勤) 노력하지 않겠는가?(可不努力)


19) 안집(安集)
하늘은 은혜 내리고(天降恩言) 정사는 자식 보듯.(子視之政)

일하는 자 근본 복귀(傭者返本) 그 성을 회복한다네.(迺復其姓)

떠도는 자 귀향해서(流者還土) 편안하게 사는구나.(迺安其堵)

그 누가 하사 했나?(伊誰之賜) 우리 임금 쓰다듬네.(撫我惟后)


20) 초애(椒艾)
바닷가에 쑥이 있어(海瀆有艾) 목장 말은 먹지 않네.(場駒勿食)

물가에는 산초있어(川上有椒) 물고기가 먹지 않네.(沙禽勿啄)

그 쑥을공께 바치고(艾以獻公) 산초로 임금 기리네.(椒以頌君)

충성하고 사랑하니(寓我忠愛) 천만세를 사시겠지.(壽千萬春)


187) 김상익(1699∼1771) 본관은 강릉. 자는 사필(士弼).


81. 도과(道科)


文武道科別典垂  문무 도과에 별전이 행해져 왔는데,
通喬豊邑亦無遺  통진교동 풍덕읍도 포괄하여 치러졌네.
紅牌丹桂春風客  홍패와 단계를 내려 받은 젊은이는,
盡是朝廷稷卨夔  모두다 조정의 명신들이 되었네.


○ 문무의 도과(道科)는 특명으로 인하여 행하므로 정기적으로 시행하지는 않는다.


○ 인조 5년 정묘년(1627) 정월에 청나라 사람들이 항복한 장수 강홍립(姜弘立)을 향도로 삼아 크게 거병하여 깊숙이 들어와서 평산(平山)에 이르렀다. 임금이 강화도로 행차하였는데 3월에 여러 재신(宰臣)들을 파견하고 오랑캐들과 협상하여 진해루(鎭海樓)에서 강화하였다. 친히 임하여 선비를 시험하기를 ʻ무간우우양계(舞干羽于兩階)ʼ라는 제목으로 시험을 해서 허색(許穡)188)·정유성(鄭維城)189)·남진명(南振溟)·윤계(尹棨)190) 등 4명을 선발하였다. 통진(通津)과 교동(喬桐)에도 각각 1명씩을 들게 하였다. 그리고 어가가 서울로 돌아갔다.


○ 영조 2년 병오(1726)에 대제학 이병상(李秉常)을 파견하여 선비를 시험하기를 ʻ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ʼ라는 제목으로 시험을 해서 성유열(成有烈),191) 조정(趙挺), 이선태(李善泰),192) 황연(黃沇),193) 황태빈(黃泰彬)194) 등 5명을 선발하였다. 통진과 교동에 각각 1명씩 들게 하였다. 무과로는 구철(具澈) 등 185명을 선발하였다.
○ 영조 20년 갑자(1744)에 어사 윤득재(尹得載)를 파견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다.
○ 영조 27년 신미(1751)에 어사 성천주(成天柱)를 파견해서 무재를 시험하였다.
○ 영조 40년 갑신(1764)에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을 파견하여 ʻ억위보장(抑爲保障)ʼ이라는 제목으로 시험을 해서 유택하(柳宅夏),195)민응세(閔膺世), 이사조(李思祚),196) 전광서(全光瑞) 등 4명을 선발하였으며, 통진과 교동에 각 1인씩 들게 하였다. 무과로는 조기(趙琦)등 57인을 선발하였다.
○ 철종 4년 계축(1853)에 대신 정원용(鄭元容)을 파견하여 선비를 시험하였는데 ʻ보장재(保障哉)ʼ를 제목으로 해서 수석한 자로 남궁갑(南宮鉀)197)을 선발하고 나머지 급제자에게 상을 내렸다. 무과에 아무개 등 몇 명을 선발하였다.
○ 고종 3년 병인(1866)에 중신 조병창(趙秉昌)을 파견해서 선비를 시험하였는데 ʻ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ʼ를 제목으로 해서 이연수(李演壽),198) 이건창(李建昌),199) 윤시영(尹時榮),200) 이만규(李晩奎),201) 유원식(劉元植),202) 권채규(權綵奎)203) 등
6명을 선발하였다. 통진과 교동, 풍덕에 각각 1인씩 들게 하였다. 무과로는 유영길(劉永吉) 등을 뽑았다.


188) 허색(1586년 출생) 본관은 양천(陽川)
189) 정유성(1596∼1664)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덕기(德基), 호는 도촌(陶村).
190) 윤계(1583∼1636)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薪谷).

197) 남궁갑(1820년 출생) 본관은 함열(咸悅).
192) 이선태(1673년 출생) 본관은 연안(延安).
193) 황연(1680년 출생) 본관은 평해(平海).
194) 황태빈(1691년 출생) 본관은 창원(昌原).
195) 유택하(1714년 출생)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장(彦長), 호는 의소당(宜
蔬堂).
196) 이사조(1729년 출생) 본관은 전주(全州).
197) 남궁갑(1820년 출생) 본관은 함열(咸悅).


82. 공도회(公都會204))


都會古規陞補同  공도회의 옛 규범은 승보시205)와 같은데,
三場詩賦擇精工  삼장의 시부로 인재를 뽑았네.
年年貢擧從原數  정해진 인원을 해마다 올렸기에,
伊昔江州蔚士風  예로부터 강화는 선비풍(학구열)이 높았었네.


○ 공도회(公都會)는 매년 정기적으로 제술(製述)과 시부(詩賦)를 설해서 각각 1명씩 선발하고 사서(四書)와 소학(小學)을 강하여 각각 1명씩을 선발하는데 모두 4명을 선발하였다. 유수 권적(權樀)이 소학만으로는 뽑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제술을 1명 추가할 것을 아뢰었다. 황상[高宗] 때에 유수 이재원(李載元)이 아뢰어서 4명을 더 선발해서 도합 8명이 되었다. 시부삼장(詩賦三場)으로 계획하고 합격자를 뽑았으니 서울에서 선발하여 보임하는 관례를 따른 것이다.
○ 시관(試官)으로는 유수(留守)가 주시험관이 되고 장녕전 별검(別檢)이 부시험관이 되고, 기내의 문관과 수령, 찰방들이 부시험관으로 참여했다.
○ 초시를 보아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에는 주악을 울리고 음식을 마련해서 합격자들이 함께하여 즐거워하였다. 인재를 선발하는 절차와 선비를 대우하는 방식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강학(講學)하는 선비의 풍속이 매우 볼 만하였다.


198) 이연수(1809년 출생) 본관은 전주(全州).
199) 이건창(1852∼1898) 조선 말기의 문신·대문장가. 본관은 전주(全州). 소
명(小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
200) 윤시영(1818년 출생) 본관은 파평(坡平). 강화(江華) 거주
201) 이만규(1833년 출생) 본관은 전주(全州). 통진(通津) 거주
202) 유원식(1847년 출생) 본관은 배천(白川). 교동(喬桐) 거주.
203) 권채규(1792년 출생) 본관은 안동(安東). 풍덕(豊德) 거주.
204) 공도회(公都會)는 조선시대 각 도(道)와 유수부(留守府)에서 매년 관할 지역의 향교 생도들 대상으로 실시하던 시험이다. 제술(製述)과 고강(考講)의 두 과목을 시험하여, 합격자는 이듬해 서울에서 열리는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205) 승보시(陞補試) : 소과의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시험. 성균관 대사성이 사학(四學) 의 유생에 대상으로 시험을 쳐서 성적이 우수하면 식년(式年)의 소과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83. 이아(貳衙)


敬愛堂中太守閑  경애당의 태수는 일이 없어 한가하니,
時時拄笏對西山  때때로 홀을 괴고 서산을 대했었지.
最是李公循良政  으뜸은 이공(李公)의 어진 정치를 꼽는데,
十七碑傳里巷間  열일곱 마을 사람들이 세운 비석이 전해오네.


○ 경애당(敬愛堂)은 객사 남쪽 약간 낮은 곳에 있었다. 관리가 정사를 듣고 돌보는 동헌으로 그 북쪽에 주홀당(拄笏堂)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폐지되어 향청(鄕廳)으로 사용하고 있다.
○ 옛날 숙종 을미년(1715)에 이세성(李世晟)이 경력(經歷)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잘 펼쳤는데, 유수 이태좌(李台佐)206)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는 옛날의 ʻ순양리(循良吏 : 어진 관리)ʼ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강화부의 업무를 모두 맡길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가 떠나가고 나서 열일곱 개 마을의 사람들이 비를 세워주었다.207)


206) 이태좌(1660∼173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국언(國彦), 호는 아곡(鵝谷).


84. 중영(中營)


挽河軒上甲兵收  만하헌 안에는 갑옷 병기 거둬두니,
曾是昇平累百秋  일찍부터 오랜 세월 평화로운 때문이네.
今日惟餘房一二  오늘에는 한두 개의 방만이 겨우 남아,
敎員課字此中留  교원이 머물면서 학업을 권면하네.


○ 만하헌(挽河軒)은 중군(中軍)이 머무는 동헌(東軒)의 명칭이다. 정조 정해년208)에 중군 김상태(金相台)가 편액을 고쳤다.
○ 황상 병인년(1866) 후에 고쳐 세우고 삼문에 편액하기를 부수영(副帥營)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모두 폐지되고 하나둘만 있으며 나머지는 엮어서 교원들이 거주하면서 과업을 권하고 있다.


85. 진무영 열무당(鎭撫營 閱武堂)


閱武堂高大將筵  열무당 드높으니 대장의 지휘소라.

試才月月又年年  달마다 해마다 재주를 시험하네.
兼是春秋操鍊日  봄과 가을 두 차례 열병 훈련 하던 날은,
麾下軍容萬六千  휘하의 군사가 만육천 명이나 되었네.


○ 진무영(鎭撫營)은 종각의 서쪽에 있으니 즉 열무당(閱武堂)이다. 숙종 갑자년(1684)에 유수 윤계(尹堦)209)가 짓고서 ʻ열무(閱武)ʼ라는 편액을 걸었다. 일명 승천대(承天臺)라고도 한다.
○ 진무사(鎭撫使)가 무과를 시험할 때에 머무는 곳이다. 매월 활쏘기를 시험하여 상을 주고, 매년 도시(都試)를 설치하여 무과를 취한다. 매년 봄, 가을에 조련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진무영 아래의 수군들은 합해서 16,200인이었다.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207) ʻ유수이태좌선정비ʼ와 ʻ경력이세성선정비ʼ가 강화 화도면 상방리 비석군에 있다. 이 2기의 비석은 모두 1781년에 상도면과 하도면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208) 정조 재위시에는 정해년이 없다.



86. 선원비각(仙源碑閣)


舊南門址閣丹靑  옛적 남문 있던 터의 단청한 비각에,
一石嵬然紀丙丁  비석하나 우뚝하니 병자·정축년 일 적혀 있네.
硝火聲中金相國  화약 폭발 소리 속에 김상국이 있었으니,
萬古貞忠貫日明  만고의 충정은 해를 뚫고 밝았다네.


○ 옛 남문의 누각은 곧 상국(相國)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순절한 터이고 후에 비각을 세워서 진무영 외삼문(外三門) 동쪽에 두었다.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순의비기(殉義碑記)를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오호라! 여기는 강화부성 남문으로 고 우의정 문충공 선원 김선생께서 순의하신 곳이다. 선생의 휘는 상용(尙容)이니, 안동인이다. 만력 18년 경인년(1590, 선조 23)에 급제하여 여러 조정을 섬기면서 벼슬은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충후하고 정직함으로써 사류의 떠받들음이 되었다.


숭정 병자년(1636, 인조 14)에 오랑캐가 쳐들어오니 임금께서는 강화로 납시려 하였다. 그 때에 선생은 이미 재상의 벼슬을 그만두었고 또 늙고 병든 몸이었는데도 임금께서 선생에게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먼저 떠나라고 명하시었다. 이에 장신(張紳)을 강화부의 유수로 삼고, 검찰사 김경징(金慶徵)과 부사 이민구(李敏求)에게 군사(軍事)를 맡게 하였다. 그러자 이미 임금님의 행차(大駕)가 오랑캐의 선봉에게 공격을 받아 창졸간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적은 두터운 포위망을 구축하고 지키면서 내외의 연락을 차단하니 제도(諸道)의 근왕병들은 오는대로 모두 궤멸 당하였다. 적은 또 군사를 나누어 강도를 엿보고 있었는데, 장신과 김경징 등은 천험(天險)만 믿고 이에 대비하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경징은 교만 방자하여 군사로써 간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성을 내어 이를 묵살시켜 버렸다.


이에 선생께서 분연히 이르기를 ʻ행재소가 포위당한 지 벌써 오래 되었고, 정세규(鄭世規)도 도로에서 패하여, 풍문에는 이미 그가 죽었다고들 하니, 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부사는 호서로 달려가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호남의 병졸로 뒤쳐진 자들을 독려하여 임금의 위급함에 내달아 기회를 늦추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ʼ라 하고, 또 이르기를 ʻ남한성의 소식이 끊겼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를 모집하고 벼슬이 있는 자들을 일으켜 열 번을 시도하면 한 번쯤은 뚫고 들어갈 수 있을 터인데 신하된 도리에 어떻게 팔짱만 끼고 보고 있단 말인가?ʼ하니, 경징 등이 빈정거리면서 말하기를 ʻ스스로 여기를 관장할 사람이 있는데 피난 온 대신이 참여할 일이 아닐 줄 아오.ʼ 하고는, 하나도 듣지 않고 시행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ʻ일은 끝났습니다. 어찌하여 배를 준비하여 급한 일에 대비하지 않으십니까?ʼ하니, 선생께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ʻ주상께서는 포위 중에 계시며 종묘사직과 왕손인 원손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만일 불행한 일이 닥친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ʼ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적이 크게 몰려온다는 보고가있었으나, 장신과 김경징은 이를 믿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말하기를 ʻ첫 겁쟁이들이로다. 강물이 넘실거려 흐르는데 적이 어떻게 날아 건너올 것이냐?ʼ 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적이 과연 갑곶으로 건너오니 우리 병졸들은 바라만 보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무너지고 김경징 등은 일시에 배를 빼앗아 타고 도망하였다. 이에 적은 평시에 행군하듯 성 밑에 이르렀다.


선생께서는 집안사람들과 결별하고 성의 문루에 올라 염초를 쌓아 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고는 손을 저어 좌우를 물리치고 불을 붙여 자폭하였다. 손자 수전(壽全)은 당시 나이 13세로 곁에 있었다. 선생께서 노복을 시켜 손자를 데려가라고 하였으나, 손자는 선생의 옷을 붙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ʻ할아버지를 따라 죽어야지 어디로 가겠습니까?ʼ하니, 노복도 가지 않고 함께 죽었다.


별좌 권순장(權順長)과 진사 김익겸(金益兼)은 동지들과 먼저 약속하여 부하들을 성문으로 나누어 보내, 관군을 도와 성을 사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이에 이르러 마침내 선생과 함께 죽으니 실로 정축년(1637, 인조 15) 정월 22일이었다. 


 대저 이미 선생께서 죽으니 국가에서는 충신의 문으로 정려(旌閭)하고, 또 강화부성의 남쪽 7리 되는 곳에 사우(祠宇)를 짓고 ʻ충렬사(忠烈祠)ʼ라 사액하여 권공(權公), 김공(金公) 및 이상길(李尙吉) 이하 열 한 사람을 모두 배향하게 하였으니, 숭보하는 은전이 갖추어졌다 하겠다.


금상(숙종) 24년 무인년(1698)에 백씨(伯氏)께서 왕명을 받들어 본부의 유수가 되어 현지에 이르자, 먼저 사당에 배알하고 다시 남문에 올라 크게 한숨을 지으면서 ʻ위공자(魏公子)의 선비 후대한 일을 갖고도 대량(大梁)의 동문에다 글을 적은 사람이 있었고, 사마천은 이 일을 사기(史記)에 쓰기까지 하였는데 하물며 선생의 충절은 혁혁하여 백세토록 인륜 기강으로 신뢰하는 바이니, 이 일이 기록이 없을 수 있는가?ʼ하고는 이에 돌을 다듬어 비를 만들어 전액(篆額)으로 크게 써서 남문 가에 세우고는 나 창협(昌協)으로 하여금 그 본말을 적도록 하였다.


창협이 조용히 생각건대, 충의가 사람들에게 감동시킴이 깊다. 정축년(1637)에서 지금까지는 60여년이요, 당시의 노인들은 다 가고 없건만, 사람들은 아직도 이 남문을 기리면서 아무개가 이곳에서 죽었노라 하고는 왕왕 그 때의 일을 어제의 일처럼 이야기들을 한다. 그리고 사대부로서 오다가다 이 고을을 찾는 자도 반드시 남문이 어디 있느냐고 먼저 묻고는 흐느끼면서 감탄하며 떠날 줄을 모른다.


이로보아 말한다면 비록 비석이 없어도 역시 좋은 일이겠으나, 유적을 포지 게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갑절이나 더 많이 살펴보도록 하여 백세 뒤에라도 선생의 충절을 잊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비석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정부를 돌아보면, 이런 데에 마음을 쓰지 못했음이, 어쩌면 국가 장해의 보호를 급히 여기기에 겨를이 없었던 것인가? 그러나 절의의 장사가 국가에서는 국방을 위한 성곽이나 무기보다 더함을 안다면 오늘 이 일이 급한 일이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하겠는가?

백씨의 이름은 김창집(金昌集)이니 선생의 아우 문정공 청음선생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다. 그래서 후인들이 이 일이 혹 사사로운 처사였다고 의아해 한다면, 이는 대공의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209) 윤계(1622∼1692)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태승(泰升), 호는 하곡(霞谷).


87. 시장(市場)


閱武堂前一市場  열무당 앞쪽에 큰 시장이 있는데,
日之二七列廛商  2일과 7일에는 가게들이 늘어서네.
朝來暮去紛紛處  아침에 왔다 저녁에 가는 분주한 곳이지만,
殖貨何人辨出藏  돈 버는데 어느 누가 오고 감을 따지겠나.
○ 시장은 열무당 앞 구천(緱泉)의 뒤편에 있었다. 매월 2일과 7일에 장이 서서 물건을 사고 판다.



88. 용흥궁(龍興宮)


龍興宮裡五雲多  용흥궁 안쪽에 오색구름 가득하니,
庚戌元年海內歌  경술(1860) 원년 강화섬에 노래 소리 울렸었네.
江水益深山益重  강물 더욱 깊이 흐르고 산 또한 첩첩하니,
昇平日月聿中和  태평스런 세월이 중화를 이루었네.


○ 용흥궁(龍興宮)은 열무당의 동쪽에 있다. 동쪽 성 안에 있는 철종(哲宗)210)의 잠저이다. 경술년(1850)에 등극하였다.
○ 단종 원년 계유년(1453)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211)과 그 아들 우직(友直)을 강화도에 유배 보냈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89. 육궁(六宮)


六宮昔日倣京師  육궁은 옛적의 서울을 본떴는데,
空逐飛灰但有基  무너지고 먼지 날려 그 터만 남아있네.
到此行人皆指點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 지점을 가리킬 뿐,
飛花殘草幾多時  꽃 날리고 풀 시든 세월 몇 차례나 지났는가.


○ 내수사(內需司)는 동문 안쪽에 있었다.
○ 명혜궁(明惠宮)은 내수사 동쪽에 있었는데 뒤에는 육상궁(毓祥宮)이다.
○ 어의궁(於義宮)은 내수사 북쪽에 있었다.
○ 용동궁(龍洞宮)은 내수사 남쪽 건너편에 있었다.
○ 명례궁(明禮宮)은 용동궁 남쪽에 있었다.
○ 수진궁(壽進宮)은 군기고 서쪽에 있었다. 병인양요 때 모두 폐허되었다.


210) 철종(1831∼1863) 조선 제25대왕. 재위 1849∼1863.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㼅)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 사이의 셋째아들이다.
211) 안평대군(1418∼1453) 조선 초기의 왕족·서예가.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 세종의 셋째아들이다.


90. 강화부내 심부윤(沈府尹*)


沈府尹來按此城  심 부윤이 부임해와 강화성을 다스리며,
迎儒昔日大開黌  선비를 모셔다가 학교를 열었었네.
千秋尙有文翁化  오랜 세월 지났어도 선생 교화 남았으니,
處處相聞講讀聲  책 읽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네.


○ 강화부의 옛날 습속은 궁벽하고 누추하여 일찍이 강학(講學)할줄을 몰랐다. 고려 때에 심덕부(沈德符)가 강화부의 부윤이 되면서 크게 횡당(黌堂) 즉, 학교를 크게 열고 스승을 모셨으며, 마을의 자제들을 모아 시·서·예·의를 가르쳐서 울연(蔚然)하게도 문옹(文翁)이 촉나라를 교화시킨 풍속이 있었으니, 한 고을의 학문이 지금까지 빛이 난다.


91. 강화부내 최판서(崔判書*)


崔判書曾此土生최판서는 일찍이 이곳에서 태어나,
海東夫子特垂名ʻ해동부자ʼ 칭호를 특별히 받았다네.
天朝亦是稱楊震ʻ동방의 양진ʼ이라 중국서도 불렸으니,
兩國江山共著明두 나라 강산에서 다함께 저명했네.


○ 형조판서 최용소(崔龍蘇)212)는 본래 강화 사람이었다. 세종과 문종을 섬겼는데 죽어서는 제정(齊貞)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일찍이 해동부자(海東夫子)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 중국에서도 동방의 양진(楊震)213)이라고 칭하였다.


212) 최용소(?∼142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강화. 조선 태종 때 공
조판서를 지냈으며, 성품이 청백하였다. 시호는 제정(齊貞).


92. 강화부내 김효자(金孝子*)


金孝子居此府城  김창구 효자는 강화부에 살았는데,
海東黔婁一紅旌  해동의 검루214)라고 정려문을 받았다네.
氷魚山虎從何出  얼음속 잉어와 산 호랑이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知有天翁著此誠  하늘은 알고 있다네, 이 정성에서 나온 것을.


○ 효자 김창구(金昌九)는 강화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섬김에 있어서 매우 효성스러웠다. 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다 드렸고, 시묘(侍墓) 살이 할 때에는 산의 범이 보호해 주었다는 말까지 있었다. 영조가 이를 듣고는 최용소의 고사(故事)를 원용하여 ʻ해동검루(海東黔婁) 김창구의 문ʼ이라는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93. 성황단(城隍壇)


亭子山頭有一壇정자산 꼭대기에 제단이 있는데,

城隍祭所鬱如盤성황의 제사장소로 반석처럼 성대하다
雉頭獸角環周勢꿩머리와 짐승 뿔이 주위를 감싼 형세이니,
賴使江州保泰安강화의 평안 보전을 여기에 의지했네.


○ 성황단(城隍壇)은 동문 안의 정자산(亭子山)에 있다..


213) 양진(?-124) 중국 후한의 사람으로 박학하고 청렴했다.
214) 검루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이름난 효자 유검루(分黔縷)로,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하기 위해 변의 맛을 보았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한 상분(嘗糞)이라는 고사성어는 지극한 효성을 뜻한다.



94. 고려궁지(高麗宮址)


麗王何事昔移都고려왕은 무슨 일로 도읍을 옮겨 왔나,
延慶康安摠虛無연경궁과 강안전이 모두 다 허무하네.
埋地洪鍾誰敢發땅에 묻힌 큰 종을 누가 감히 꺼내겠나,
滿天雷雨卽時驅하늘 가득 우레 소리가 곧바로 몰아친다는데.


○ 고려 고종 19년 임진년(1232)에 최우(崔瑀)가 왕을 보좌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가 원종 11년 경오(1270)에 예전의 서울로 돌아갔다. 충렬왕은 왕 16년 경인년(1290)에 또 강화에 도읍하였고 18년 임진(1292)에 개경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 성터와 궁터가 모두 강화부의 동남쪽 정자산 바깥에 있다. 강안전(康安殿)은 연경궁의 안에 있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그 터에서 옛날의 종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발굴하려 하니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라고 하였다. 궁터 4, 5리 안에는 담장, 산재한 주춧돌, 붕괴된 기와, 깨진 옹기 등이 군데군데 밭 사이에 쌓여 있다.
○ 지금 장령(長嶺)의 성문현(城門峴)과 선원(仙源)의 대문현(大門峴)과 인정(仁政)의 서문동(西門洞) 그리고 대묘동(大廟洞)·도감동(都監洞)의 지명은 여전히 남아있다.
○ 가정(稼亭) 이곡(李穀)215)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산해의 깊은 곳에 작은 배가 떠있고(山海深處一扁舟)

화산을 다니는데 흥이 아직 남았구나.(行到華山興未休)

옛날부터 금성탕지는 덕을 펴기에 해가되니(自古金湯能害德)

이곳으로 천도한 것은 누구의 계획인가?(移都此地是誰謀)”


○ 고려의 허금(許錦)216)의 시는 다음과 같다.

“어부 초동도 옛날의 천경을 말하는데(漁樵猶說舊天京)

임금 수레 기구하여 이 성에 행차하였네.(玉輦崎嶇幸此城)

구름이 참담하여 찬 빛인 듯 하는데(洞雲慘惔疑寒色) 

궁의 나무 남아서 옛소리를 울리네.(宮樹潺湲咽舊聲)”


○ 용헌(容軒) 이원(李原)217)의 시는 다음과 같다.

“길을 닦아 바다 섬에 통하고(修程通海島)

예전의 관은 구름 봉우리에 기댔구나.(古館倚雲峰)

고요히 밤 지내니 시끄러움 없어지고(夜靜坐喧息)

빈처마에 달빛이 파고 드네.(簷虛月色侵)

침상에는 살랑살랑 맑은 바람 불어오고(床風淸細細)

뜰에 있는 나무에는 녹음이 우거지네.(庭樹綠陰陰)

살고 있는 백성들이 말하는 걸 듣자니(聽得居民話)

태평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네.(昇平正値今)”


○ 함부림(咸傅霖)218)의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다는 가까우니 구름은 물기 머금고(海近雲猶濕)

산으로 둘러싸여 해가 쉽게 지는구나.(山圍日易陰)”

  

○ 안숭선(安崇善)219)의 시는 다음과 같다.

“이어진 산에는 비취빛이 떠서 멀고(連崗浮遠翠)

깍아지른 언덕에는 층층이 구름 이네.(斷壟起層雲)”


○ 권맹손(權孟孫)220)의 시는 다음과 같다.

“고국은 푸른 바다에 둘러 있고(故國環滄海)

빈 성은 비취빛 산으로 벌려있네.(空城列翠岑)”


215) 이곡(1298∼1351) 고려 말엽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호는 가정(稼亭).
216) 허금(1340∼1388)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공암(孔巖 : 陽川). 자는 재중(在中), 호는 야당(埜堂).
217) 이원(1368∼143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수문하시중 암(嵒)의 손자이며, 밀직부사 강(岡)의 아들이다.
218) 함부림(1360∼141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95. 동문(東門)


望漢樓前望漢陽  망한루 앞에 서서 한양을 바라보니,
圓紅朝旭自東方  붉고 둥근 아침 해가 동쪽에서 일어나네.
操兵場上菲菲草  병사들의 조련장은 풀들만이 무성하고,
含得光輝未吐芳  햇빛을 머금었지만 향기 내지 못하네.


○ 망한루(望漢樓)는 심부(沁府 : 강화부)의 동문(東門)의 편액이다.

문 밖에 병사를 조련하는 훈련장이 있었다. 병인양요(1866년) 후에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빈터가 되었다.


219) 안숭선(1392∼145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지(仲止), 호는 옹재(雍齋).



96. 강화부성(江華府城*)


環城終日感懷多  성을 돌다 해가 지니 감회가 많구나,
五十年間變幾何  지나간 오십 년 동안 변란이 몇 번 있었는가.
官吏武文多少式  문무의 관리들이 많았을 터인데,
摠如一劫夢中過  모두가 한순간의 꿈처럼 지나갔네.


○ 내가 일찍이 50년 전 여기 강화부에서 노닐 적엔, 관리들의 방어대책과 문무를 대우하고 기르는 방법, 관청 건물과 창고들이 매우 치밀하였었다.

황상 병인년(1866) 9월에 서양의 오랑캐가 갑곶진에 와서 정박하고 갑자기 강화부로 쳐들어왔다. 이때 유수 이인기(李寅夔)221)와 본관 김재헌(金在獻)과 중군 이아무개 등은 대비를 소홀히 하고 달아나 버리고, 하급관리와 백성들은 스스로 뛰어다니며 허우적대는데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저 오랑캐들이 관청 건물을 소굴로 삼고 한 달 가까이 살았다. 저들 수백 인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 함부로 쳐들어갔다가, 마침 양헌수(梁憲洙)222)의 매복 계획에 당하여 포를 맞고 죽은 자가 많았다. 그들은 이곳이 대비가 잘 돼있는 것을 보고는 관사(官舍)와 공청(公廳)과 각 탕고(帑庫)에 불을 지르고 철수하였다.

후에 조정에서는 다시 세 관아의 관각과 공청을 지어서 웅장하고 견고하게 하였다.

하급관리를 더 설치하고 별무사 3000명을 두어서 군량미 3000석을 준비해서 방어하는 대책으로 삼았으니 매우 장하다고 할 수 있다.

관(官)은 문무를 겸임하여 다스리는데, 유수겸 진무사 삼도통어사가 있고, 그 아래의 판관과 중군이 있는데, 모두 명망 있고 정선된 자들이었다.

사(士)는 향교의 분교관(分敎官)인데 처음 벼슬을 맡은 계급이었다. 매년 도회(都會)에서 여름마다 시험을 보고 혹 백일장을 치러 가르침을 장려하였다.

무(武)는 춘추로 도시(都試)를 보고 매월 활쏘기를 시험해서 무예를 분발시켰다.

갑오년(1894)에는 단지 군수(郡守) 또는 부윤의 한 관아만을 남기니 그 나머지 관아들은 폐지되거나 저절로 없어진 것들이 많았다.

50년 동안 변화된 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육궁과 각 탕고들은 어떠했겠는가. 다만 탄식할 뿐이다.

221) 이인기(1804년 출생) 본관은 전주. 강화유수를 지냈다.
222) 양헌수(1816∼1888)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220) 권맹손(1390∼145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예천. 자는 효백(孝伯), 호는 송당(松堂).


심도기행 96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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