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해설 5
129. 당산동(堂山洞) ~ 160. 고산동(孤山洞)까지 32수 옮김
▲ 망월돈대 답사중 서해 황금 들녁길에서 ⓒ 2019 한국의산천
▲ 이 책이 나온지 올해로 꼭 110년이 되었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 인천대학교
인천학 연구원
譯註 沁都紀行
초판인쇄 2008년 12월 26일
초판발행 2008년 12월 31일
저 자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역 자 김형우ㆍ강신엽
발 행 인 이갑영
발 행 처 인천학연구원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편집·인쇄 도서출판 아진
❚발간사 ❚일러두기
발간사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은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讚歌)이다.
이 기행시문은 강화도 선비 화남 선생이 지은것으로 모두 256 수의 7언 절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강화의 마을 유래와 풍경,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고재형은 1846년 강화군 두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1888년(고종25년)에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은 선비였다.
그는 “평소 충의와 대의를 쫓은 인물들을 흠모하였으며 전통이 급속히 사라져가는 풍속을 개탄하였다”고 한다.
고재형은 자신이 태어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서 출발하여
당시 강화군 17개면 100여 마을을 필마(匹馬)에 의지하여 빠짐없이 섭렵하였다.
저자가 “강화부 전체의 산천과 고적을 다시 탐방하기 위해” 단신으로 강화기행을 떠난 것은 1906년 봄이었는데
강화 기행을 감행한 동기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터인 강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었을 터이다.
한편 그가 강화순례를 떠난 해가 서구문명이 물밀듯 밀려들어 전통과 유풍이 점차 사라져 가는 때였으며,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암울한 시대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재형이 순례자가 되어 강화의 땅 구석구석을 밟으며 걸어갈 때의 심정은
훗날 이상화 시인이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을) 다리를 절며 걷고 싶다”고 토로했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은 독특한 구조와 내용을 지닌 기행시문이다.
우선 기존의 기행문학이 출발지와 목적지라는 두 점을 잇는 선형적 구조의 플롯을 취하고 있음에 비해
이 작품은 강화도의 모든 마을을 샅샅이 탐방해가는 공간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심도기행(沁都紀行)』의 문체는 시와 산문이 병치되고 서로 조응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한편의 서사시처럼 읽힌다.
256수의 7언시를 골격으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한시 작품과 관련되는 주석이나 해설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산문으로 기술된 강화의 역사적 유산이나 자연경관, 풍속과 생활상, 성씨와 인물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지지(地誌)를 이룰 만큼 풍부하고 자세하다.
한편 『심도기행(沁都紀行)』은 저자 자신이 나고 자라고 생활한 고향땅을 기행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보통의 기행문학은 주체가 먼 이방 지대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접하는 이색적 풍물이나 감흥을 기록한 산물이다.
자신의 삶터가 성찰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면 거기에는 주체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일 터이다.
친숙한 장소가 낯선 공간으로 현현(顯現)했을 때 주체의 대응 방식은 낯선 공간을 다시 자신의 영토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전통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낯선 공간으로 떨어진 향토를 재발견하여 전유(專有)하기 위한 주체의 대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전환기 향토문학 가운데 선편에 놓을 수 있겠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의 입체적 성격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텍스트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ʻ권리ʼ를 허락해준다.
문학적 텍스트로, 그리고 민속지로, 지리지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을 읽는 분들께 화남 선생이 100년 전에 노래하며 홀로 걸었던 강화의 땅을 밟으며,
강도(江都)가 겪어 온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돌아보고,
그 땅이 길러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ʻ新 심도기행ʼ을 떠나보자고 권유하고 싶다.
2008년 12월
인천학연구원장 이 갑 영
일러두기
1. 이 책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이 1906년 강화도의 각 마을 명소를 직접 방문하여 256수의 한시(漢詩)를 짓고,
그 마을의 유래와 풍광, 인물, 생활상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인 기행문집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번역한 것이다.
2. 『심도기행(沁都紀行)』은 필사본 2종이 조사되었으며, 그 중 종손 고승국이 소장하고 있는 ʻ고승국소장본ʼ을 저본으로 삼았고,
구창서의 발문이 있는 ʻ구창서발문본ʼ을 부본으로 삼아 대조하며 번역하였다. 번역문 뒤에 저본으로 삼은 ʻ고승국소장본ʼ을 영인본으로 수록하였다.
3. 원문의 수록 순서대로 한시 256수와 해설문을 배열하되, 당시의 면(面) 별로 묶어서 편집하였다.
4. 제목이 없는 한시는 바로 앞의 제목을 따르거나, 내용 중에서 주제어를 뽑아 제목으로 삼고 끝에 ʻ*ʼ를 붙여 구별하였다.
5. 지명의 주석은 ≪강화지명지≫(강화문화원, 2002)와 ≪한국지명총람-강화군≫(한글학회, 1986) 등을 참고하고,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 보완하였다.
6. 인물의 주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의 자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주로활용하였다.
7. 이 책의 각주는 모두 역자가 단 것이며, 저자의 주는 본문 속에 포함시켰다.
8. ʻ구창서발문본ʼ에만 있는 구창서의 발문은 번역문 맨 뒤에실었다.
9. 이 역주본은 2005년 3월부터 12월까지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의 강독회 회원들의 강독이 출발점이 되었다.
C O N T E N T S
❚인정면(仁政面) ····································································· 15
1. 두두미동(斗頭尾洞) 2. 백운동(白雲洞)①
3. 백운동(白雲洞)② 4. 삼동암동(三同岩洞)
5. 서문동(西門洞) 6. 마장동(馬場洞)
7. 석성동(石城洞) 8. 대청교(大淸橋)
❚선원면(仙源面) ····································································· 24
9. 거말동(巨末洞) 10. 연동(烟洞)
11. 송공촌(宋公村) 12. 독정촌(獨政村)
13. 남산동(南山洞) 14. 용당사(龍堂寺)
15. 참경루(斬鯨樓) 16. 가리포(加里浦)
17. 신당동(神堂洞) 18. 신지동(神智洞)
19. 대문동(大門洞) 20. 염씨산영(廉氏山塋)
21. 냉정동(冷井洞) 22. 선행동(仙杏洞) 충렬사(忠烈祠)
23. 안동인 김상용 24. 벽진인 이상길
25. 청송인 심현 26. 파평인 윤전
27. 남양인 홍명형 28. 남양인 홍익한
29. 남원인 윤계 30. 창원인 황일호
31. 연안인 이시직 32. 은진인 송시영
33. 진주인 강위빙 34. 연안인 이돈오
35. 평해인 황선신 36. 능성인 구원일
37. 진주인 강흥업 38. 안동인 권순장
39. 광산인 김익겸 40. 김수남
41. 여흥인 민재 42. 강화수신(江華守臣)
43. 충의혼백(忠義魂魄) 44. 열녀절부(烈女節婦)
45. 선원사(禪源寺) 46. 고성인 이암(李嵒)
47. 경주정씨 48. 진주유씨
49. 창동(倉洞) 50. 이정(梨井)
51. 조산평(造山坪)
❚부내면(府內面) ····································································· 77
52. 남산동(南山洞) 53. 구춘당(九春堂)
54. 청송심씨(靑松沈氏) 55. 부내12동(府內12洞)
56. 진보 돈대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58. 남대제월(南臺霽月) 59. 서문동(西門洞)
60. 국정동(國淨洞) 61. 맥현제단(麥峴祭壇)
62. 사직단(社稷壇) 63. 문묘(文廟)
64. 명륜당(明倫堂) 65. 강당(講堂) 안연재(安燕齋)
66. 북문(北門) 67. 여제단(厲祭壇)
68. 당주동(唐州洞) 69. 북장대(北將臺)
70. 북장춘목(北場春牧) 71. 기우청단(祈雨晴壇)
72. 행궁 궁아제단(宮娥祭壇) 73. 척천정(尺天亭)
74. 장녕전(長寧殿) 75. 세심재(洗心齋)
76. 연초헌(燕超軒) 77. 규장외각(奎章外閣)
78. 상아(上衙) 79. 객사(客舍)
80. 민풍시(民風詩) 81. 도과(道科)
82. 공도회(公都會) 83. 이아(貳衙)
84. 중영(中營) 85. 진무영(鎭撫營) 열무당(閱武堂)
86. 선원비각(仙源碑閣) 87. 시장(市場)
88. 용흥궁(龍興宮) 89. 육궁(六宮)
90. 부내 심부윤(沈府尹) 91. 부내 최판서(崔判書)
92. 부내 김효자(金孝子) 93. 성황단(城隍壇)
94. 고려궁지(高麗宮址) 95. 동문(東門)
96. 강화부성(江華府城)
❚장령면(長嶺面) ··································································· 138
97. 장동(長洞) 98. 묵사동(墨寺洞)
99. 갑곶동(甲串洞) 100. 갑성열초(甲城列譙)
101. 이섭정(利涉亭) 102. 진해사(鎭海寺)
103. 제승곶(濟勝串) 104. 오종도비(吳宗道碑)
105. 삼충단(三忠壇) 106. 용정동(龍井洞)
107. 용정동 남궁공 108. 용정동 황공
109. 장승동(長承洞) 110. 성정(星井)
111. 왕림동(旺林洞) 112. 추포영당(秋浦影堂)
113. 옥포동(玉浦洞) 114. 옥포동 황공
115. 범위리(範圍里) 116. 월곶동(月串洞)
117. 연미조범(燕尾漕帆) 118. 대묘동(大廟洞)
119. 고성당동(高聖堂洞) 120. 양양곡(襄陽谷)
121. 선학곡(仙鶴谷) 122. 소산리동(小山里洞)
❚송정면(松亭面) ··································································· 162
123. 낙성동(樂城洞) 124. 솔정동(率亭洞)
125. 숙룡교(宿龍橋) 126. 뇌곶동(雷串洞)
127. 숭릉동(崇陵洞) 128. 포촌동(浦村洞)
❚삼해면(三海面) ··································································· 166
129. 당산동(堂山洞) 130. 승천포(昇天浦)
131. 긍곡(矜谷) 132. 상도동(上道洞)
133. 하도동(下道洞)
❚하음면(河陰面) ··································································· 172
134. 하음면(河陰面) 135. 신촌동(新村洞)
136. 봉가지(奉哥池) 137. 부근동(富近洞)
138. 장정동(長井洞) 139. 양오리(陽五里)
❚북사면(北寺面) ··································································· 176
140. 산이포동(山里浦洞) 141. 철곶동(鐵串洞)
142. 덕현동(德峴洞) 143. 삼성동(三省洞)
144. 군하동(羣下洞) 145. 냉정동(冷井洞)
❚서사면(西寺面) ··································································· 180
146. 증산동(甑山洞) 147. 교항동(橋項洞)
148. 송산동(松山洞) 149. 인화동(寅火洞)
❚간점면(艮岾面) ··································································· 183
150. 별립산(別立山) 151. 창교동(倉橋洞)
152. 강후동(江後洞) 153. 이현동(梨峴洞)
154. 이현동 덕수이씨 155. 삼거동(三巨洞)
156. 신성동(新成洞)
❚외가면(外可面) ··································································· 189
157. 삼거동(三巨洞) 158. 망월동(望月洞)
❚내가면(內可面) ··································································· 190
159. 산곶동(山串洞) 160. 고산동(孤山洞)
161. 구주동(鳩洲洞) 162. 구하동(鳩下洞)
163. 황청동(黃淸洞) 164. 구포촌동(舊浦村洞)
165. 옥계(玉溪) 166. 조계동(皂溪洞)
167. 백씨산소(伯氏山所) 168. 창원황씨
169. 동래정씨
❚고려산(高麗山)과 매음도(媒音島) ····································· 196
170. 고려산(高麗山) 171. 청련사(靑蓮寺)
172. 백련사(白蓮寺) 173. 적련사(赤蓮寺)
174. 흥릉(洪陵) 175. 보문사(普門寺)
❚위량면(位良面) ··································································· 205
176. 정포동(井浦洞) 177. 외주동(外州洞)
178. 항주동(項州洞) 179. 낙인동(樂仁洞)
180. 흥천동(興川洞) 181. 산문동(山門洞)
182. 존강동(存江洞) 183. 건평동(乾坪洞)
184. 장지포(長池浦) 185. 진강산(鎭江山)
186. 목장(牧場)
❚상도면(上道面) ··································································· 213
187. 하일동(霞逸洞) 188. 하촌(霞村)
189. 묵와선생(黙窩先生) 190. 능내동(陵內洞)
191. 가릉(嘉陵) 192. 조산동(造山洞)
193. 장하동(場下洞) 194. 장하동 청주한씨
195. 장하동 평해황씨 196. 석릉(碩陵)
197. 장두동(場頭洞) 198. 추포정(秋浦亭)
199. 가릉포(嘉陵浦)
❚하도면(下道面) ··································································· 222
200. 문산동(文山洞) 201. 상방리(上坊里)
202. 내동(內洞) 203. 마니산(摩尼山)
204. 천재암(天齋庵) 205. 성단청조(星壇淸眺)
206. 망도서(望島嶼) 207. 장곶동(長串洞)
208. 여차동(如此洞) 209. 흥왕동(興旺洞)
210. 화포지(花浦址) 211. 동막동(東幕洞)
212. 해산정(海山亭) 213. 정수사(淨水寺)
214. 사기동(沙器洞) 215. 덕포동(德浦洞)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길상면(吉祥面) ··································································· 238
217. 선두동(船頭洞) 218. 장흥동(長興洞)
219. 산후(山後) 220. 전등사(傳燈寺)
221. 삼랑성(三郞城) 222. 장사각(藏史閣)
223. 취향당(翠香堂) 224. 양공비(梁公碑)
225. 애창(艾倉) 226. 온수동(溫水洞)
227. 초지동(草芝洞) 228. 초지동 대구서씨
229. 직하동(稷下洞) 230. 직산동(稷山洞)①
231. 직산동(稷山洞)② 232. 직산동 제주고씨
233. 정하동(亭下洞) 234. 정두동(亭頭洞)
235. 곤릉(坤陵) 236. 길상산(吉祥山)
237. 굴곶포(屈串浦)
❚불은면(佛恩面) ·································································· 252
238. 덕진동(德津洞) 239. 대모산(大母山)
240. 손석항(孫石項) 241. 손석항 손장군(孫將軍)
242. 광성동(廣城洞) 243. 광성나루[廣城津]
244. 신현동(新峴洞) 245. 넙성동(芿城洞)
246. 둔랑촌(芚浪村) 247. 오두동(鰲頭洞)
248. 오두어화(鰲頭漁火) 249. 오두동 평양조씨
250. 사복포(司僕浦) 251. 능촌동(陵村洞)
252. 능촌(陵村) 253. 고잔동(高盞洞)
254. 지천(芝川) 255. 곶내동(串內洞)
256. 두두미(斗頭尾)
❚沁都紀行 원문 ··································································· 269
삼해면(三海面)
129. 당산동(堂山洞310))
須到堂山披晩霞 당산리에 이르니 저녁노을 퍼져있고,
李安許朴櫛比家 이씨 안씨 허씨 박씨네 집들이 즐비하네.
一條長路昇天府 한 갈래 긴 길은 승천부로 이어지고,
半是蒼松半是花 절반은 푸른 소나무 절반은 꽃이로다.
○ 삼해면(三海面) 당산동(堂山洞)은 강화부 관아의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승천포(昇天浦)에 이른다.
○ 홍주(洪州) 이씨인 진사 이윤중(李允中)311)의 증손 이현필(李賢弼)과 강진 안씨와 양천 허씨 그리고 권관 반남 박씨 진사 박제형(朴齊衡)의 자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130. 승천포(昇天浦312))
昇天浦口問歸船 승천포 나루에서 돌아가는 배 물어보니,
或指開城或漢川 어떤 것은 개성이요 어떤 것은 한강을 가리키네.
念昔高皇麾二將 옛적에 태조께서 두 장수 거느리고,
倭氛掃盡此津邊 왜구를 소탕한 곳이 바로 이 나룻가네.
309) 현재는 송해면에 편입되었다. 송정면과 삼해면이 합하여 송해면이 되었다.
310) 송해면 당산리 당산 마을로, 당집이 있던 당산 아래에 있다.
311) 이윤중(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사인. 본관은 홍주(洪州). 호는 신재(愼齋). 문간공(文簡公) 이서(李舒)의 후손으로 강화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 강화 송해에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포상만록(浦上漫錄)≫이 있다.
312) 송해면 당산리 당산 동쪽에 있던 포구이다. 고려 때 개경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 고려 우왕 4년 무오년(1378)에 우리 태조 고황제(高皇帝)와 최영(崔瑩), 양백연(楊伯淵)이 승천부(昇天府)에서 왜병(倭兵)을 크게 격파하였다.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이곳을 건너면서 시를 지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 물결 모질어 막지도 못하는데(遮莫風濤惡), 호기를 부리는 손과도 같지 않네(無如客興豪).
파란 하늘은 작은 돌에 기대 있고(靑天欹片石), 하이얀 저 눈은 봄 옷을 씻는구나 (白雪洒春袍).
고래악어 보고서는 크게 한 번 웃어주고(一笑看鯨鱷),술내오라 명하고서 노래를 부르네(長歌命酒醪).
외로운 배 아무리 실세했다 하지만(孤槎縱失勢), 저 높은 하늘을 해치지는 못하네(未害上天高).”
○ 포음(圃陰) 김창집(金昌緝)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마니산을 나막신 신고 가고(摩山收蠟屐) 승천포 가에서 고기를 낚는구나.(昇浦上漁舠)
지는 해에 초루가 작아보이니(落日華譙小) 봄바람에 푸른 바다 높구나.(春風碧海高)
배 지나니 악어가 놀라고(揚帆驚怒鱷) 배 멈추니 높은 파도 밀려오네.(散帙信飛濤)
집안의 경계를 범할지라도(縱犯垂堂戒) 내 길에서 스스로 호기 부리네.(吾行也自豪)”
131. 긍곡(矜谷313))
矜谷來留客馬覊 긍곡에 다다라서 나그네 발길을 멈추니,
依然春色舊遊時 봄기운 의연하네 옛적에 놀던대로.
薔薇花下金韓老 장미꽃 아래서 김씨 한씨 노인 둘이,
情話慇懃日影移 은근한 정담으로 해가 저물어가네.
○ 긍곡(矜谷)은 당산동(堂山洞)의 소지명이다.
○ 해풍군(海豊君)의 후예인 대장(大將) 김영(金瑩)의 족손인 김씨와 청주인 삼괴정(三槐亭) 한경린(韓景麟)314)의 후손인 한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132. 상도동(上道洞315))
上道村前春水生 상도촌 앞에는 봄물이 불어나고,
洪崖琥谷近郊程 홍애부락 호박골이 가까이 자리했네.
李金各倚東西壟 이씨와 김씨네가 동서 뚝 사이에 살며,
夜織茵紋晝出耕 밤에는 돗자리 짜고 낮에는 농사짓네.
○ 상도동의 동쪽의 호박골(琥珀谷)316)에는 대흥 이씨(李氏)들이 살고 있고, 서쪽의 홍애촌(洪崖村)317)에는 광산 김씨(金氏)들이 살고 있다. 모두들 부지런히 농사짓고 자리 짜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313) 송해면 당산리 금곡마을이다.
314) 한경린(1544년 출생) 자는 중진(仲振). 1582년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로 합격하였다. 강원도사(江原都事)를 지냈다.
315) 송해면 상도리이다.
316) 송해면 상도1리로 홍의 마을 동쪽에 있다.
▲ 마을 길이 끝나는 끝에 서있는 유허비 ⓒ 한국의산천
권필이 살던 강화도 오류내 언덕에 권필의 4대손인 강화유수 권적이 세운 비석하나가 쓸쓸히 서있다.
석주 권필선생은 조선 중기의 탁월한 시인으로서 한때 강화에서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며 시화를 나눈 인연을 갖고 있다.
유허비는 대리석으로 전면에 "석주권선생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궁유시(宮柳詩)〉와 〈충주석(忠州石)〉은 그 대표적인 풍자시라고 할 수 있다.
133. 하도동(下道洞318))
石洲卜宅五流川 석주선생 오류천319)에 자리 잡고 살았는데,
陂上櫻桃幾百年 언덕 위의 앵두나무 몇 백 년이 되었는가.
讀罷碑文如復見 비문을 읽고 나니 다시 선생을 보는 듯,
羹牆遺意士皆然 우러러 사모하는 뜻 선비라면 모두 같네.
○ 석주(石洲) 권필(權韠)320)은 절개와 행실을 갈고 닦아서 벼슬길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 때에 궁류시(宮柳詩)에 연좌되어 해를 당하고서 이곳 오류천(五流川) 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 소유동(小有洞) 앵도파(櫻桃坡)와 반환정(盤桓亭)이 있었는데 지금도 명칭이 전해진다. 사손(嗣孫) 권적(權樀)이 강화부의 유수가 되었을 때에 그 유허에 비를 세워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강화부 서쪽 오리천은 석주 선생의 유지이다. 선생의 휘는 필(韠)이요 자는 여장(汝章)으로 습재 선생 권벽(權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고, 계부(季父) 생원부군 휘 별(撇)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뜻이 없어 포기하고 관직에 제수되어도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의 번거로움을 피해 이곳에 집을 짓고 거주하니 원근의 학자(學子)들이 선생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몰려들어 구의(摳衣 ; 옷을 걷어 올려 존경을 표함)로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선생은 나날이 가르쳐 성취시키는 것을 일로 삼았고, 때때로 시를 읊으며 스스로 소일하여 늙음에 이르는 것도 알지 못 하였다. 수년간 거하였는데 강화유수가 재물에 빠져 아비를 시해한 옥사를 관대히 처결하자, 선생은 소를 올려 그 죄를 바로잡았고, 드디어는 이곳을 떠나 현석강으로 돌아가 살았는데 스스로 호하여 석주(石洲)라 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공이 일찍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문사를 엄선할 때 선생은 유생으로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죽창 구용(具容)과 함께 화친을 주장하는 두 상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는 글을 써 올렸다. 이이첨(李爾瞻)을 남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담을 넘어서 피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 4) 무옥(誣獄)에 궁류시(宮柳詩 ; 광해군 비 유씨의 아우 柳希奮 등 척족들의 방종을 비방한 시)로 연좌되어 화를 입었으니 간악한 무리들의 모해로 그렇게 된 것이다. 계해년(1623, 인조 즉위년) 인조의 개옥(改玉ㆍ왕은 佩玉으로 즉법을 고침, 인조반정을 이름)에 이르러 선생에게 지평을 추증하고 그 후사를 관직에 채용하니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다. 선생은 자질이 매우 뛰어났고 안으로 행실이 심히 조신하셨으며 염락(濂洛)321)의 여러 책을 읽어 그 견해가 두루 통하여 밝았다. 또한 도학정맥(道學正脈) 한 편을 저술하였으니 그 초(抄)하고 평(評)함이 자세하고 적절하니, 문장을 짓는 일은 실로 여가의 일인데, 세상에서 선생을 아는 이들은 다만 시를 쌓인 것을 다 살피지 못하니 역사 아는 것이 천박하다. 불초한 제가 무오년(1738, 영조 14) 가을, 강화부에 부임하여 선생의 유거(遺居)를 내방하니, 황폐한 집터며 부서진 섬돌들은 오히려 이곳이 유거임을 판별하게 한다. 반환정(盤桓亭), 앵도파(櫻桃坡), 소유동(小有洞) 등 여러 명승지는 선생의 시집 중에서 지칭한 곳이며, 또한 고로(古老)들도 가리켜 전해져 설명한 곳이기도 하다.
상하의 두 연못에 이르러서는 지금은 벼논이 되어 옛날의 맑은 물결이 없어, 배회하며 쓸쓸한 감상을 억제할 수 없다. 드디어 초당 옛터에 짧은 표(表)를 세워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리노니 이 역시 선생을 경모하고 추념하는 뜻이 깃든 것이다. 나를 뒤이어 오는 사람이 만약 더욱 뜻이 있어 이를 보호하여 비문이 벗겨져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준다면 어찌 비단 자손들만의 사사로운 다행이겠는가.”
317) 송해면 상도2리로 홍의(紅衣), 홍해(紅海)라고도 불린다.
318) 송해면 하도리이다.
319) 송해면 하도2리 오류내 마을에서 다섯 개울물이 합해져 바다로 흘러간다. 오리천(五里川)이라고도 한다.
320) 권필(1569∼1612)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321) 중국 송대 성리학의 두 계파로, 염은 염계의 주돈이, 낙은 낙양의 정호·정이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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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하음면(河陰面322))
冬音奈縣卽河陰 옛적의 동음나현 오늘의 하음이니,
麗代傳名尙到今 고구려 때 전한 이름 오늘에 이르렀네.
屹彼鳳頭山上石 높다란 봉두산의 꼭대기에 있는 돌은,
烽烟銷盡海雲沈 봉수 연기 없어졌고 구름 속에 잠겨있네.
○ 하음면(河陰面)은 유수부 관아의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 옛날의 하음현(河陰縣)은 고구려 때에는 동음나현(冬音奈縣)이었다. 또 우고(芋高)323)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해구(海口)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하음(河陰)으로 고쳐서 불렀다. 그 옛 터에는 봉두산(鳳頭山)이 있고 방장대석(方丈坮石)이 있으니, 대체로 신라와 고려 때의 옛 유적이다. 조선에 와서 봉수를 설치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135. 신촌동(新村洞324))
新村洞口樹多陰 신촌동 입구에는 숲이 많이 우거졌고,
金老恒遊道德林 김씨 노인 언제나 도덕의 세계에서 노닐었네.
勉使兒孫勤講讀 부지런히 책 읽으라 아이들을 독려했고,
滿床皆是古人箴 옛 사람 잠언이 책상에 가득했네.
○ 청풍(淸風) 김씨 정우당(淨友堂) 김식(金湜)325)의 후손이 이 마을에 많이 살고 있다.
322) 본래 하음현이 있던 곳으로, 신촌·장정·부근·양오의 4개 동을 관할하였다.
323) ≪고려사≫ 지리지에는 ʻ아음(芽音)ʼ으로 되어있다.
324) 하점면 신봉1리 새말이다.
136. 봉가지(奉哥池326))
雲龍直上奉哥池 구름 탄 용 봉가지에서 수직으로 올라갔고,
中有浮函出有兒 떠오른 상자 속에 아이가 있었다네.
年代杳然難可攷 연대가 아득하여 고증하긴 어렵지만,
閣留眞像一巖奇 바위에 새겨진 모습 건물 안에 남아있네.
○ 강화부의 서북쪽으로 봉가지(奉哥池)가 있는데 전하기를 “용이 올라가서 못이 되었다. 못에서는 석함(石函)이 있어서 물에 떠서 저절로 나왔다. 그 안에 아이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거두어 길렀다. 이것으로 인하여 봉(奉)을 성(姓)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대개 받들고 지킨다는 뜻인데, 그 연대는 살필 수가 없고, 바위에 새긴 그 형상이 각(閣) 속에 있다.
325) 김식(1482∼1520) 조선 중종 때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동천(東泉) 또는 정우당(淨友堂).326) 봉가지는 하점면 부근리 420번지에 있다.
137. 부근동(富近洞327))
麗山峯壑赴河陰 고려산 봉우리와 골짝은 하음에 다다르고,
富近村閭碧繞林 부근리 마을이 푸른 숲에 둘려있네.
坐讀農書黃主政 농서를 즐겨 읽는 황봉희 주사는,
戒令後學守恒心 항상심을 지키라고 후학들을 가르치네.
○ 부근동(富近洞)에는 창원 황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황봉희(黃鳳熙)는 일찍이 주사(主事)를 역임했는데 근검한 풍도로써 자제들을 가르쳤다.
138. 장정동(長井洞328))
西上雲山二里餘 서쪽으로 2리 떨어진 구름 낀 산 올라가니,
聽鷄忽覺有人居 닭소리에 문득 깨닫네 사람 사는 마을임을.
乃知長井眞仙境 그리고 또 알겠네 장정리가 선경임을.
聾世閑翁掛短鋤 세속 일에 귀막은 노인이 호미를 걸고 있네.
○ 장정동(長井洞)에는 종가(鍾哥)가 많이 살고 있어서 종촌(鍾村)이라고도 한다.
327) 하점면 부근리이다.
328) 하점면 장정리이다.
139. 양오리(陽五里329)*)
陽五里村水石奇 양오리 마을에는 수석이 기이한데,
三家相接短松籬 세 성씨 모여 살며 소나무로 울타리 쳤네.
乃知文武多兼備 문과 무를 겸비한 집안임을 알겠으니,
盡是聖朝簪紱垂 모두가 조정에서 높은 벼슬 하였다네.
○ 청주 한씨 삼괴정(三槐亭) 한경린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광산 김씨 김명현(金命鉉)은 무관으로서 인화권관(寅火權官)이 되었으며 양성(陽城)으로 승차하였다.
○ 영월 신씨 백록(白麓)의 후손인 신성묵(辛成黙)은 문과에 합격해서 시독경, 지제교, 대흥군수를 역임하였다.330)
329) 송해면 양오리이다.
330) 1890년(고종27) 경인(庚寅)에 별시(別試) 을과(乙科)에 합격하였다. 지제교와 대흥군수를 역임 사실은 구창서발문본에 실려있다.
140. 산이포동(山里浦洞332))
山里浦前水色連 산이포 앞쪽은 바닷물에 닿아 있어,
漁歌一曲去來船 오고가는 배에서 고기잡이 노래곡조.
家家揭網家家酒 집집마다 그물 걸고 집집마다 술 담그니,
笑道延坪是貨泉ʻ 연평길은 재화의 샘ʼ이라고 웃으며 말하네.
○ 북사면(北寺面) 산이포동(山里浦洞)은 강화부의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기잡이의 배로 생업을 잇고 있다.
141. 철곶동(鐵串洞333))
鐵串當年設鎭關 그 당시 철곶에는 진관(鎭關)이 있었으나,
祗今唯指一拳山 지금은 하나의 작은 봉우리뿐이구나.
居人慣識行船法 그 곳 주민 배 부리는 법 훤히 꿰고 있었기에,
碧水聲中任去還 푸른 물 파도 소리 속에 마음대로 오고 갔네.
331) 현재는 북사면과 서사면이 합하여 양사면이 되었다. 북사면에는 철곶, 산이포(포촌), 덕현, 군하, 북정(냉정), 삼성 등의 마을이 있었다.
332) 양사면 철산리의 산이포마을로, 한때 양사면사무소와 시장, 학교, 경찰지서 등이 있었다.
333) 양사면 철산리 철곶마을로, 산이포 서북쪽에 있다.
○ 철곶동(鐵串洞)에는 예전에 수군 첨사(水軍僉使)를 두었는데 유수 서필원(徐必遠)334)이 아뢰어서 수군을 풍덕으로 옮기고 별장(別將)을 두었다. 유수 김휘(金徽)335)가 도로 첨사를 두었다. 숙종 임진년(1712)에 유수 조태로(趙泰老)336)가 아뢰어서 주문도로 옮겼다가 다시 별장을 두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업으로 생활한다.
142. 덕현동(德峴洞337))
德峴洞前客馬停 덕고개 마을 앞에 나그네 발길 멈추노니,
白波縈裡碧山屛 흰 물결 둘러친 안쪽에 푸른 산이 병풍 쳤네.
知吾金老平安否 나를 아는 김 노인은 평안하신지,
星髮斜陽掃石庭 흰머리로 저녁 무렵에 바위마당을 쓸고 있네.
○ 덕현동(德峴洞)에는 광산(光山) 김씨로 자(字)가 익선(益善)인 사람이 살고 있다.
334) 서필원(1614∼1671)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335) 김휘(1607∼1677) 본관은 안동. 자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만은(晚隱).
336) 조태로(1658∼1717)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인수(仁叟), 호는 지산(地山).
337) 양사면 덕하1리의 덕현마을이다.
143. 삼성동(三省洞338))
三省村名錫以嘉 삼성촌 이름은 기리기 위해 붙였으니,
曾門傳業是誰家 일찍이 업을 이은 가문 누구의 집안인가.
萬殊一本璿源李 성씨 중에 으뜸가는 왕족 이씨 집안이니,
鷹谷春風欲吐花 응골에 봄바람 불어 꽃망울을 틔우려하네.
○ 삼성(三省)이란 일찍이 부자(夫子)의 도이기 때문에 인하여 동네 이름이 ʻ삼성동(三省洞)ʼ되었다. 이곳에는 응곡(鷹谷)이 있는데 전주 이씨(李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144. 군하동(羣下洞339))
花綠絮業去無窮 꽃 피고 잎새 나는 일 끝없이 이어지니,
江北山川三月風 강화 북쪽 산천에도 3월 바람 불어온다.
狻浦橋頭逢客語 산예포 다리에서 나그네 만나 이야기 나눴는데,
指云羣下洞中翁 그 분이 바로 군하동의 어르신이라고 하네.
○ 예전에는 군두동(羣頭洞)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군하동(羣下洞) 이라고 한다. 근처에 산예포교(狻猊浦橋)가 있다.
338) 양사면 북성리 삼성동, 생설미 마을이다.
339) 양사면 덕하리 군하동이다.
145. 냉정동(冷井洞)
長江一曲抱村流 긴 강이 한 번 굽어 마을 안고 흐르는데,
韓友居之瑤谷幽 요곡의 그윽한 곳에 한씨 친구 살고 있네.
認是三槐多積蔭 삼괴정 쌓은 음덕 많음을 알겠으니,
蓮花隨處紫香浮 연꽃은 가는 곳마다 자주빛 향기를 풍기네.
○ 요곡(瑤谷)340)은 냉정동(冷井洞)의 지명이다. 삼괴정(三槐亭) 한경린의 후손인 청주 한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진사 한경곤(韓景鯤)과 진사 한수겸(韓守謙)의 후손이다. 그 중에 한상철(韓相哲)은 우리집과 교류하는 사람이다.
○ 그 중에 한두석(韓斗錫)341)은 진사이다.
340) 양사면 북성리의 북정동(北井洞), 요골 마을이다.
341) 한두석(1850년 출생) 자는 성칠(聖七), 본관은 청주(淸州).
146. 증산동(甑山洞343))
甑山之上碧生烟 증산 마을 위에서 푸른 연기 일어나고,
南繞松林北繞川 남쪽은 솔숲이 두르고 북쪽은 시냇물이 둘렀네.
趙老高翁相指語 조씨 노인 고씨 노인 서로 보고 하는 말이,
蕉巖靴石古來傳 파초 바위, 신발 바위 예로부터 전해온다네.
○ 서사면(西寺面) 증산동(甑山洞)은 강화부 관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조씨(趙氏)와 고씨(高氏)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 근처에는 파초암 화자석(芭蕉巖靴子石)이 있다고 한다.
147. 교항동(橋項洞344))
橋項洞人識古風 교항동 사람들은 옛 풍습을 잘 알아서,
金生昔日著心紅 예전의 김 선생은 깊은 충정 드러냈네.
東西從享東西廡 향교의 동쪽 채 서쪽 채서 제향을 올렸고,
丙歲奉安茅屋中 병인년 난리 때엔 초가집에 봉안했네.
342) 현재는 서사면과 북사면이 병합되어 양사면이 되었다. 서사면에는 교항,증산, 송산, 인화 등의 마을이 있었다.
343) 양사면 교산1리 증산(시루뫼, 시리메) 마을이다.
344) 양사면 교산2리 교항(다리목) 마을이다.
○ 병인년(1866) 9월에 병인양요 때문에 성이 함락되던 날 교관(敎官) 황호덕(黃浩悳)은 대성전의 위패[聖廟]를 봉안하여 산 뒤로 옮겼고, 자(字)가 치일(致一)인 김씨가 동서무(東西廡)의 위패를 그 집으로 종향(從享)하였다.
148. 송산동(松山洞345))
松林深處是松山 소나무 숲 우거진 곳이 송산 마을이거늘,
曲曲回龍曲曲灣 굽이굽이 용이 돌고 굽이굽이 물이 도네.
下馬愁然仍瞻拜 말에서 내려 숙연해져 바라보며 절을 하니,
表家楸域此中間 외가 조상 무덤이 여기에 있어서.
○ 송산(松山)의 땅은 형세상 굴곡이 많아 기이하며 그 중에 한 지역은 우리 표가(表家)가 사는 산기슭이다.
149. 인화동(寅火洞346))
寅火中流石虎雄 석호의 웅장한 기운 인화리서 흘러서,
西通延海與喬桐 서쪽의 연안 해주와 교동까지 통하네.
渚雲野屋黃忠節 물안개 낀 들판 집이 황충신의 집이니,
甲串千年海日紅 갑곶에서 천년토록 바다 태양처럼 붉으리.
345) 양사면 인화1리 송산(솔뫼, 솔미) 마을이다.
346) 양사면 인화리이다. 범바위 즉, 인화석(寅火石)이 있어 인화성, 인애성이라고도 한다.
○ 인화석진(寅火石津)은 서해 중에 범처럼 생긴 바위가 남방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인화석(寅火石)이라고 이름 하였다. 수로로 10여리에 교동·연안·해주 등을 교통하니 진실로 서해의 요충지이다. 효종 병신년(1656)에347) 유수 홍중보(洪重普)348)가 진을 설치하여 별장(別將)을 두었다. 기미년(기해, 1659)에는 윤이제(尹以濟)349)가 아뢰어서 만호(萬戶)로 승격시켰고 황상의 조정에서 아뢰어서 권관으로 승격시켰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그 위 저운야(渚雲野)에 평해 황씨(平海黃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정축호란 때에 순절한 황대곤(黃大坤)350)의 집이 이곳에 있다. 자세한 것은 충렬사순절록(忠烈祠 殉節錄)에 보인다.
○ 남익문(南益文)의 시는 다음과 같다.
“형승은 악양루라 예전에 들었는데(舊聞形勝岳陽樓)
이 정자에 와서 보니 주변 경치 훌륭하네.(今到斯亭八景優)
인화의 격한 조수에 옥두를 단장하고(寅火激潮粉玉斗)
각산에서 작을 하니 오두에서 춤추네.(角山當汋舞鰲頭)
은관에 요새 설치 천참을 이루고(銀關設險成天塹)
정포로 못을 삼아 땅끝을 맺는구나.(井浦爲池括地陬)
열기 올라 말 세우고 감상한 것 많으니(乘熱停驂多所賞)
어느날에 다시 와서 맑은 흐름 이룰까.(重來何日作淸流)”
347) 원문에는 ʻ숙종 병신년(1716)ʼ으로 되어 있으나, 홍중보 강화유수 재임기간이 1655년 5월~1657년 1월이므로, ʻ효종 병신년(1656)ʼ이 맞다.
348) 홍중보(1612~1671)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백(遠伯), 호는 이천(梨川).
349) 윤이제(1628~170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즙(汝楫).
350) 황대곤(1577~1637)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평해(平海), 호는 송포(松圃), 자는 자후(子厚).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파총(把摠)으로 갑곶진을 방어하다가 이삼(李參), 안몽상(安夢祥)과 함께 전사했다.
150. 별립산(別立山)
別立山高石萬層 별립산 높이 솟아 돌계단도 많구나,
盤龍蹲虎勢騰騰 서린 용과 웅크린 호랑이가 뛰쳐 오르는 듯.
大海環從西北注 큰 바다 감아 돌아 서북쪽에서 흘러드니,
應使遐夷不可升 응당 변방 오랑캐는 오를 수가 없었네.
○ (해설문 없음)
151. 창교동(倉橋洞352))
倉橋洞在海西濱 창교동은 서쪽 편 바닷가에 있는데,
李具書樓共是春 이씨 구씨 서당엔 봄빛이 가득하다.
因說閑中還有攪 한가로운 가운데에 소란함이 있다고 말하니,
石工鹽賈往來頻 석공과 소금장수의 왕래가 빈번하기 때문이라네.
○ 이 지역은 송계(松溪) 청해백(靑海伯)의 후손인 청해 이씨, 강암공(江菴公)의 후손인 능성 구씨가 거주하고 있다. 땅의 모양이 산을 등지고 바닷가에 임하고 있어, 바다에는 소금이 생산되고 산에는 돌을 뜨는 곳이 있으니, 석수(石手)들과 소금장수들이 빈번히 왕래 하고 있다.
351) 현재 하점면에 편입되어 있다.
352) 하점면 창후리의 창교동이다. 창말, 사탯말, 샛말을 통틀어 일컫는다.
152. 강후동(江後洞353))
別立山前江後基 별립산 앞쪽의 강후마을이 있는데,
隱居韓友老於斯 숨어 사는 한씨 친구 여기서 늙어 가네.
侍堂侍墓平生孝 사당 지키고 선영 지키며 평생토록 효도하니,
天地知之日月知 하늘과 땅이 알고 해와 달도 안다네.
○ 서원(西原)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354)의 후손인 한정리(韓鼎履)가 이 강후촌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효성이 남보다 뛰어나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나와는 특별히 우정이 도탑다.
153. 이현동(梨峴洞355))
梨峴來尋表弟家 이현마을 이르러 외가 아우 찾아가서,
終霄情話海無涯 밤새도록 정다운 얘기 끝이 없이 이어졌네.
紅蓮幾出三槐蔭 삼괴정의 음덕으로 여러 사람 벼슬 꽃 피니,
一片江州處處花 강화도 곳곳에 꽃동산이 생겼네.
353) 하점면 이강리의 강후동, 함촌말이다.
354) 한확(1403∼145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355) 하점면 이강3리 이현(梨峴, 배고개, 배우개 마을)이다.
○ 이현(梨峴)은 한씨들이 대대로 사는 곳이다. 한경린(韓景麟)은 아우 한경갑(韓景甲)·한경곤(韓景鯤)과 함께 삼괴정(三槐亭)을 짓고서 학문을 이루었다. 한경린은 문과에 급제하여356) 대간, 해주 판관을 역임하였다. 아우 한경갑도 문과에 급제하여357) 충청도사를 지냈으며 한경곤은 진사에 합격하였다. 삼괴정의 그 옛 터가 아직도 이 동네에 있으니 삼괴의 한씨들이 세상에 유명해졌다. 그 손자 한수검(韓守儉)은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한수온(韓守溫)과 한수겸(韓守謙)은 무과에 합격하여 진무공신이 되었고 한수공(韓守恭)은 무과에 합격하여 첨정이 되었다. 그 후에 과거 합격자가 강화의 사방에서 많이 나왔으니 한씨들은 모두 삼괴정 한경린의 후손들이다.
○ 나의 외사촌 한일석(韓一錫)은 자가 여집(女執)인데 이 종친으로서 이곳에 살고 있다.
154. 이현동 덕수이씨(德水李氏*)
柿林來訪李兄居 감나무 숲 이씨 형이 사는 곳을 찾아가니,
三疊淸琴一架書 삼첩의 거문고와 서가 가득 책이 있네.
簪紱曾投司憲府 일찍이 사헌부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時從野老自怡如 지금은 촌로 따라 유유자적 살고 있네.
○ 덕수 이씨인 이기영(李基永)은 자가 여방(汝邦)으로 택당(澤堂) 이식(李植)358)의 후손이다. 강화부의 분교관(分敎官) 이규신(李奎信)의 종손(從孫)이다. 일찍이 사헌부 감찰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때때로 이웃의 벗들을 따라서 시와 술로써 스스로를 즐겼다.
356) 한경린은 1582년(선조 15) 식년시(式年試) 을과에 합격했다.<국조문과방목>
357) 한경갑은 1585년(선조 18) 식년시(式年試) 병과에 합격했다.<국조문과방목>
358) 이식(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155. 삼거동(三巨洞359))
三巨洞中訪沈兄 삼거리에 들어와서 심씨 형님 찾았는데,
從前文學大家聲 종전엔 문학으로 대가 명성 있었다네.
靑衫白髮前司馬 청삼 입고 백발을 한 사마(司馬)를 지내신분,
指導門庭幾後生 그 집에서 가르친 후학들이 많다네.
○ 청송 심씨 청천군(靑川君)의 후손 충렬공(忠烈公) 심현(沈誢)360)과 사촌동생 심숙(沈諔)은 병자호란 때에 의병장이 되어서 오랑캐가 다다르자 강가로 달려 나가 전쟁하다가 죽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충성을 표창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웃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였다. 그 후손들은 모두 이곳에 살고 있는데 모두 문학으로써 옛날부터 이름이 있었으며 그 중에 심능철(沈能徹)361)은 갑오년(1894) 사마시에 합격하여 돈녕부 도정을 제수받았다.
359) 하점면 신삼2리 삼거동, 서촌마을이다.
360) 심현(1568∼163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화(士和).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361) 심능철(1874년 출생) 자는 통일(通一)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56. 신성동(新成洞362))
新成洞有古人風 신성동엔 옛 사람의 풍습이 있으니,
兩李門前一逕同 두 분 이씨 정려문이 한길로 연결되네.
竊想當時忠孝烈 당시의 충성 효열 가만히 생각해 보니,
炳然星日海天東 동쪽 바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누나.
○ 이문위(李文偉)는 청해 이씨 청해백(靑海伯)의 후손이다. 강화부의 부윤 이중로(李重老)363)의 아들이다. 인조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 그의 아버지 이중로는 방어사로서 강음(江陰)의 마탄(馬灘)에서 적과 대항하였는데 군대가 패하자 의리상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적장인 이수백(李守白)364)은 평소 이중로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는데 물속에서 그 시신을 가져다가 목을 잘라다가 이괄에게 바쳐 공을 노렸다. 이괄이 패하자 이괄의 머리를 가져다가 관군에게 보내고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조정에서는 그를 사형시켰다. 이문위는 그 아우 이문웅(李文雄)과 반드시 보복하려는 마음먹었다. 마침내 이수백을 큰길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목을 쳐서 그 목을 가지고 대궐에 들어와 죄를 청하였는데, 상이 현명하게 여겨서 삼사에 특용하였고, 이름을 드러내어 충청병마사까지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서 이문위의 어머니 정씨는 목릉(穆陵 : 선조)의 재상 정언신(鄭彦信)의 딸이었다. 이중로가 절개를 지키다가 죽음에 미치자 몸소 전장을 돌아다니며 시신을 수습하고 상을 치렀는데 탈상을 하지 않으니 친척들이 모두 예를 넘어서는 것을 의심하였다. 얼마 안 있어 두 아들이 이수백을 베니 정씨가 그것을 듣고 통곡하면서 “아이들이 능히 그 일을 해냈구나.”라고 하고는 수백의 머리를 가져다가 이중로의 영전에 고하고 제사상을 차렸다. 이때까지 모두 11년이 걸렸다. 사람들은 능히 놀라고 탄복하였다. 이문위가 죽자 그 제문을 하사하였는데 “일문의 충효는 고금에 보기 어렵구나. 주곤(州閫)을 지내면서 큰 실적이 있었구나.”라고 하였다.
○ 아들 이수(李脩)는 관직이 사평에 이르렀으며 이수의 아들은 이광도(李廣道)365)이다. 숙종 을유년(1705)에 진사가 되었고 문과에 급제하여 세 임금을 섬겼으며 사간으로서 종성부사에 제수받았고 임지에서 죽었다. 그 후손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 연안 이씨는 연봉(蓮峯) 이기설(李基卨)366)의 아들인 충민공(忠敏公) 이돈서(李敦敍)367)이다. 그 일이 충렬사의 주(註)에 보인다. 그 후손 교리 이중련(李重蓮)368)의 고손은 이의록(李義祿)인데 여기서 살고 있다.
362) 하점면 신삼1리 신성동, 동촌마을이다.
363) 이중로(1577∼162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진지(鎭之).
364) 이수백(?∼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무신.
365) 이광도(1673년 출생) 자는 대중(大中), 본관은 청해(靑海).
366) 이기설(1556∼162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367) 이돈서(1599∼1637)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륜(子倫), 호는 만사(晚沙).
368) 이중련(1765년 출생) 본관은 연안(延安). 1790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2위로 합격했다.
157. 삼거동(三巨洞)
多雲里是外三街 삼거리 바깥쪽에 다운리370)가 있는데,
安李分居碧樹崖 안씨와 이씨가 푸른 숲 언덕에 나뉘어 사네.
堦下長坪連望月 섬돌 아랜 망월 벌판 널따랗게 이어있고,
春耕夏耨養禾佳 봄 밭 갈기와 여름 김매기로 벼를 잘도 길렀네.
○ 외가면(外可面) 삼거동(三巨洞)에는 강진 안씨(康津安氏),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많이 살고 있다.
158. 망월동(望月洞371))
望月洞開大野中 망월동은 넓은 들판 가운데에 펼쳐있고,
烏橋春水鵲橋通 까마귀다리 봄물은 까치다리로 통하네.
水秧旱播隨天氣 비 오면 모내고 가물면 씨 뿌려 날씨를 따르지만,
穡事年年實有豊 해마다 농사일은 풍년이 든다네.
○ 망월동(望月洞)의 서쪽 아래에는 오교(烏橋)가 있고 위로는 작교(鵲橋)가 있으니 모두 큰 평야이다.
369) 외가면 전 지역은 1914년 하점면에 편입되었다.
370) 하점면 망월1리 다운리 마을이다.
371) 하점면 망월리이다. 마을이 벌판 가운데 있어서 달을 보기에 좋은 곳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내가면(內可面])
159. 산곶동(山串洞372))
山串村開一樂窩 산곶동 마을은 낙원을 열었으니,
春風最是此中多 봄바람 여기에 가장 많이 불어오네.
尹家文筆連鳴世 윤씨 가문 문필로 명성이 높았고,
丹桂紅蓮種種科 여러 가지 과거에 두루두루 합격했네.
○ 파평 윤씨 윤학수(尹學洙)는 일찍이 강화부의 분교관을 지냈는데 법도가 있었다. 그 아들 윤시영(尹時榮)373)은 황상 병인년(1866)에 강화부의 도과(道科)에 합격하여 대간을 지냈다. 그 아들 윤훈(尹塤)374)은 어린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만년에는 본부의 분교관을 지냈다. 능참봉과 능령을 거쳤으며 원외랑 벼슬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윤시영의 재종(再從) 윤유영(尹有榮)375)은 황상 신미년(1871)에 본부의 유수 정기원(鄭岐源)376)이 백의종군했다고 해서 천거하였으며 계유년(187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372) 하점면 망월2리 산곶동으로, 산화(山花), 미꾸지라고도 불린다.
373) 윤시영(1818년 출생) 본관은 파평(坡平). 1866년 별시(別試) 병과(丙科) 1위로 합격했다.
374) 윤훈(1831년 출생) 자는 치성(穉聲). 본관은 파평(坡平). 1858년 식년시 진사(進士) 2등 23위로 합격하였다.
375) 윤유영(1821년 출생) 자는 선여(善汝). 본관은 파평(坡平). 1873년 식년시 진사(進士) 3등 195위로 합격하였다.
376) 정기원(1809년 출생)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봉수(鳳叟).
160. 고산동(孤山洞377))
孤山林麓近西湖 고산골 산록은 서쪽 호수에 가까운데,
籠鶴誰家報客乎 어떤 집의 우리 속 학(鶴)이 손님 왔음을 알리네.
最是安韓居得趣 으뜸 가문 안씨 한씨 취향 맞춰 사는데,
東西籬角杞瓜紆 동편 서편 울 모서리엔 구기자 모과가 둘러있네.
○ 고산(孤山)은 지금의 오산동(鰲山洞)이다. 강진 안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 주사 안태병(安泰秉)이 있다. 청주 한씨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는 진사 한성렬(韓成烈)과 주사 한병렬(韓炳烈)이 있다. 이곳은 구기자와 모과가 많이 나는데, 마당과 울타리 사이에 많이 심겨 있다.
377) 내가면 오상3리 고상골이다. 오산(鰲山)이라고도 한다.
256수 중에서
현재 160수 옮김
계속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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