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해설 6
▲ 이 책이 나온지 올해로 꼭 110년이 되었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 인천대학교
인천학 연구원
譯註 沁都紀行
초판인쇄 2008년 12월 26일
초판발행 2008년 12월 31일
저 자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역 자 김형우ㆍ강신엽
발 행 인 이갑영
발 행 처 인천학연구원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편집·인쇄 도서출판 아진
❚발간사 ❚일러두기
발간사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은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讚歌)이다.
이 기행시문은 강화도 선비 화남 선생이 지은것으로 모두 256 수의 7언 절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강화의 마을 유래와 풍경,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고재형은 1846년 강화군 두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1888년(고종25년)에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은 선비였다.
그는 “평소 충의와 대의를 쫓은 인물들을 흠모하였으며 전통이 급속히 사라져가는 풍속을 개탄하였다”고 한다.
고재형은 자신이 태어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서 출발하여
당시 강화군 17개면 100여 마을을 필마(匹馬)에 의지하여 빠짐없이 섭렵하였다.
저자가 “강화부 전체의 산천과 고적을 다시 탐방하기 위해” 단신으로 강화기행을 떠난 것은 1906년 봄이었는데
강화 기행을 감행한 동기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터인 강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었을 터이다.
한편 그가 강화순례를 떠난 해가 서구문명이 물밀듯 밀려들어 전통과 유풍이 점차 사라져 가는 때였으며,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암울한 시대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재형이 순례자가 되어 강화의 땅 구석구석을 밟으며 걸어갈 때의 심정은
훗날 이상화 시인이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을) 다리를 절며 걷고 싶다”고 토로했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은 독특한 구조와 내용을 지닌 기행시문이다.
우선 기존의 기행문학이 출발지와 목적지라는 두 점을 잇는 선형적 구조의 플롯을 취하고 있음에 비해
이 작품은 강화도의 모든 마을을 샅샅이 탐방해가는 공간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심도기행(沁都紀行)』의 문체는 시와 산문이 병치되고 서로 조응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한편의 서사시처럼 읽힌다.
256수의 7언시를 골격으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한시 작품과 관련되는 주석이나 해설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산문으로 기술된 강화의 역사적 유산이나 자연경관, 풍속과 생활상, 성씨와 인물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지지(地誌)를 이룰 만큼 풍부하고 자세하다.
한편 『심도기행(沁都紀行)』은 저자 자신이 나고 자라고 생활한 고향땅을 기행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보통의 기행문학은 주체가 먼 이방 지대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접하는 이색적 풍물이나 감흥을 기록한 산물이다.
자신의 삶터가 성찰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면 거기에는 주체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일 터이다.
친숙한 장소가 낯선 공간으로 현현(顯現)했을 때 주체의 대응 방식은 낯선 공간을 다시 자신의 영토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전통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낯선 공간으로 떨어진 향토를 재발견하여 전유(專有)하기 위한 주체의 대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전환기 향토문학 가운데 선편에 놓을 수 있겠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의 입체적 성격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텍스트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ʻ권리ʼ를 허락해준다.
문학적 텍스트로, 그리고 민속지로, 지리지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을 읽는 분들께 화남 선생이 100년 전에 노래하며 홀로 걸었던 강화의 땅을 밟으며,
강도(江都)가 겪어 온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돌아보고,
그 땅이 길러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ʻ新 심도기행ʼ을 떠나보자고 권유하고 싶다.
2008년 12월
인천학연구원장 이 갑 영
일러두기
1. 이 책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이 1906년 강화도의 각 마을 명소를 직접 방문하여 256수의 한시(漢詩)를 짓고,
그 마을의 유래와 풍광, 인물, 생활상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인 기행문집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번역한 것이다.
2. 『심도기행(沁都紀行)』은 필사본 2종이 조사되었으며, 그 중 종손 고승국이 소장하고 있는 ʻ고승국소장본ʼ을 저본으로 삼았고,
구창서의 발문이 있는 ʻ구창서발문본ʼ을 부본으로 삼아 대조하며 번역하였다. 번역문 뒤에 저본으로 삼은 ʻ고승국소장본ʼ을 영인본으로 수록하였다.
3. 원문의 수록 순서대로 한시 256수와 해설문을 배열하되, 당시의 면(面) 별로 묶어서 편집하였다.
4. 제목이 없는 한시는 바로 앞의 제목을 따르거나, 내용 중에서 주제어를 뽑아 제목으로 삼고 끝에 ʻ*ʼ를 붙여 구별하였다.
5. 지명의 주석은 ≪강화지명지≫(강화문화원, 2002)와 ≪한국지명총람-강화군≫(한글학회, 1986) 등을 참고하고,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 보완하였다.
6. 인물의 주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의 자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주로활용하였다.
7. 이 책의 각주는 모두 역자가 단 것이며, 저자의 주는 본문 속에 포함시켰다.
8. ʻ구창서발문본ʼ에만 있는 구창서의 발문은 번역문 맨 뒤에실었다.
9. 이 역주본은 2005년 3월부터 12월까지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의 강독회 회원들의 강독이 출발점이 되었다.
C O N T E N T S
❚인정면(仁政面) ····································································· 15
1. 두두미동(斗頭尾洞) 2. 백운동(白雲洞)①
3. 백운동(白雲洞)② 4. 삼동암동(三同岩洞)
5. 서문동(西門洞) 6. 마장동(馬場洞)
7. 석성동(石城洞) 8. 대청교(大淸橋)
❚선원면(仙源面) ····································································· 24
9. 거말동(巨末洞) 10. 연동(烟洞)
11. 송공촌(宋公村) 12. 독정촌(獨政村)
13. 남산동(南山洞) 14. 용당사(龍堂寺)
15. 참경루(斬鯨樓) 16. 가리포(加里浦)
17. 신당동(神堂洞) 18. 신지동(神智洞)
19. 대문동(大門洞) 20. 염씨산영(廉氏山塋)
21. 냉정동(冷井洞) 22. 선행동(仙杏洞) 충렬사(忠烈祠)
23. 안동인 김상용 24. 벽진인 이상길
25. 청송인 심현 26. 파평인 윤전
27. 남양인 홍명형 28. 남양인 홍익한
29. 남원인 윤계 30. 창원인 황일호
31. 연안인 이시직 32. 은진인 송시영
33. 진주인 강위빙 34. 연안인 이돈오
35. 평해인 황선신 36. 능성인 구원일
37. 진주인 강흥업 38. 안동인 권순장
39. 광산인 김익겸 40. 김수남
41. 여흥인 민재 42. 강화수신(江華守臣)
43. 충의혼백(忠義魂魄) 44. 열녀절부(烈女節婦)
45. 선원사(禪源寺) 46. 고성인 이암(李嵒)
47. 경주정씨 48. 진주유씨
49. 창동(倉洞) 50. 이정(梨井)
51. 조산평(造山坪)
❚부내면(府內面) ····································································· 77
52. 남산동(南山洞) 53. 구춘당(九春堂)
54. 청송심씨(靑松沈氏) 55. 부내12동(府內12洞)
56. 진보 돈대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58. 남대제월(南臺霽月) 59. 서문동(西門洞)
60. 국정동(國淨洞) 61. 맥현제단(麥峴祭壇)
62. 사직단(社稷壇) 63. 문묘(文廟)
64. 명륜당(明倫堂) 65. 강당(講堂) 안연재(安燕齋)
66. 북문(北門) 67. 여제단(厲祭壇)
68. 당주동(唐州洞) 69. 북장대(北將臺)
70. 북장춘목(北場春牧) 71. 기우청단(祈雨晴壇)
72. 행궁 궁아제단(宮娥祭壇) 73. 척천정(尺天亭)
74. 장녕전(長寧殿) 75. 세심재(洗心齋)
76. 연초헌(燕超軒) 77. 규장외각(奎章外閣)
78. 상아(上衙) 79. 객사(客舍)
80. 민풍시(民風詩) 81. 도과(道科)
82. 공도회(公都會) 83. 이아(貳衙)
84. 중영(中營) 85. 진무영(鎭撫營) 열무당(閱武堂)
86. 선원비각(仙源碑閣) 87. 시장(市場)
88. 용흥궁(龍興宮) 89. 육궁(六宮)
90. 부내 심부윤(沈府尹) 91. 부내 최판서(崔判書)
92. 부내 김효자(金孝子) 93. 성황단(城隍壇)
94. 고려궁지(高麗宮址) 95. 동문(東門)
96. 강화부성(江華府城)
❚장령면(長嶺面) ··································································· 138
97. 장동(長洞) 98. 묵사동(墨寺洞)
99. 갑곶동(甲串洞) 100. 갑성열초(甲城列譙)
101. 이섭정(利涉亭) 102. 진해사(鎭海寺)
103. 제승곶(濟勝串) 104. 오종도비(吳宗道碑)
105. 삼충단(三忠壇) 106. 용정동(龍井洞)
107. 용정동 남궁공 108. 용정동 황공
109. 장승동(長承洞) 110. 성정(星井)
111. 왕림동(旺林洞) 112. 추포영당(秋浦影堂)
113. 옥포동(玉浦洞) 114. 옥포동 황공
115. 범위리(範圍里) 116. 월곶동(月串洞)
117. 연미조범(燕尾漕帆) 118. 대묘동(大廟洞)
119. 고성당동(高聖堂洞) 120. 양양곡(襄陽谷)
121. 선학곡(仙鶴谷) 122. 소산리동(小山里洞)
❚송정면(松亭面) ··································································· 162
123. 낙성동(樂城洞) 124. 솔정동(率亭洞)
125. 숙룡교(宿龍橋) 126. 뇌곶동(雷串洞)
127. 숭릉동(崇陵洞) 128. 포촌동(浦村洞)
❚삼해면(三海面) ··································································· 166
129. 당산동(堂山洞) 130. 승천포(昇天浦)
131. 긍곡(矜谷) 132. 상도동(上道洞)
133. 하도동(下道洞)
❚하음면(河陰面) ··································································· 172
134. 하음면(河陰面) 135. 신촌동(新村洞)
136. 봉가지(奉哥池) 137. 부근동(富近洞)
138. 장정동(長井洞) 139. 양오리(陽五里)
❚북사면(北寺面) ··································································· 176
140. 산이포동(山里浦洞) 141. 철곶동(鐵串洞)
142. 덕현동(德峴洞) 143. 삼성동(三省洞)
144. 군하동(羣下洞) 145. 냉정동(冷井洞)
❚서사면(西寺面) ··································································· 180
146. 증산동(甑山洞) 147. 교항동(橋項洞)
148. 송산동(松山洞) 149. 인화동(寅火洞)
❚간점면(艮岾面) ··································································· 183
150. 별립산(別立山) 151. 창교동(倉橋洞)
152. 강후동(江後洞) 153. 이현동(梨峴洞)
154. 이현동 덕수이씨 155. 삼거동(三巨洞)
156. 신성동(新成洞)
❚외가면(外可面) ··································································· 189
157. 삼거동(三巨洞) 158. 망월동(望月洞)
❚내가면(內可面) ··································································· 190
159. 산곶동(山串洞) 160. 고산동(孤山洞)
161. 구주동(鳩洲洞) 162. 구하동(鳩下洞)
163. 황청동(黃淸洞) 164. 구포촌동(舊浦村洞)
165. 옥계(玉溪) 166. 조계동(皂溪洞)
167. 백씨산소(伯氏山所) 168. 창원황씨
169. 동래정씨
❚고려산(高麗山)과 매음도(媒音島) ····································· 196
170. 고려산(高麗山) 171. 청련사(靑蓮寺)
172. 백련사(白蓮寺) 173. 적련사(赤蓮寺)
174. 흥릉(洪陵) 175. 보문사(普門寺)
❚위량면(位良面) ··································································· 205
176. 정포동(井浦洞) 177. 외주동(外州洞)
178. 항주동(項州洞) 179. 낙인동(樂仁洞)
180. 흥천동(興川洞) 181. 산문동(山門洞)
182. 존강동(存江洞) 183. 건평동(乾坪洞)
184. 장지포(長池浦) 185. 진강산(鎭江山)
186. 목장(牧場)
❚상도면(上道面) ··································································· 213
187. 하일동(霞逸洞) 188. 하촌(霞村)
189. 묵와선생(黙窩先生) 190. 능내동(陵內洞)
191. 가릉(嘉陵) 192. 조산동(造山洞)
193. 장하동(場下洞) 194. 장하동 청주한씨
195. 장하동 평해황씨 196. 석릉(碩陵)
197. 장두동(場頭洞) 198. 추포정(秋浦亭)
199. 가릉포(嘉陵浦)
❚하도면(下道面) ··································································· 222
200. 문산동(文山洞) 201. 상방리(上坊里)
202. 내동(內洞) 203. 마니산(摩尼山)
204. 천재암(天齋庵) 205. 성단청조(星壇淸眺)
206. 망도서(望島嶼) 207. 장곶동(長串洞)
208. 여차동(如此洞) 209. 흥왕동(興旺洞)
210. 화포지(花浦址) 211. 동막동(東幕洞)
212. 해산정(海山亭) 213. 정수사(淨水寺)
214. 사기동(沙器洞) 215. 덕포동(德浦洞)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길상면(吉祥面) ··································································· 238
217. 선두동(船頭洞) 218. 장흥동(長興洞)
219. 산후(山後) 220. 전등사(傳燈寺)
221. 삼랑성(三郞城) 222. 장사각(藏史閣)
223. 취향당(翠香堂) 224. 양공비(梁公碑)
225. 애창(艾倉) 226. 온수동(溫水洞)
227. 초지동(草芝洞) 228. 초지동 대구서씨
229. 직하동(稷下洞) 230. 직산동(稷山洞)①
231. 직산동(稷山洞)② 232. 직산동 제주고씨
233. 정하동(亭下洞) 234. 정두동(亭頭洞)
235. 곤릉(坤陵) 236. 길상산(吉祥山)
237. 굴곶포(屈串浦)
❚불은면(佛恩面) ·································································· 252
238. 덕진동(德津洞) 239. 대모산(大母山)
240. 손석항(孫石項) 241. 손석항 손장군(孫將軍)
242. 광성동(廣城洞) 243. 광성나루[廣城津]
244. 신현동(新峴洞) 245. 넙성동(芿城洞)
246. 둔랑촌(芚浪村) 247. 오두동(鰲頭洞)
248. 오두어화(鰲頭漁火) 249. 오두동 평양조씨
250. 사복포(司僕浦) 251. 능촌동(陵村洞)
252. 능촌(陵村) 253. 고잔동(高盞洞)
254. 지천(芝川) 255. 곶내동(串內洞)
256. 두두미(斗頭尾)
❚沁都紀行 원문 ··································································· 269
161. 구주동(鳩州洞379))
鷗洲洞在鳳山前 봉산의 앞에 있는 구주동 다다라서,
來攪南宮石枕眠 돌베개 베고 자던 남궁씨를 깨웠네.
憑問李基何處是 이 선생 댁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文章德業尙今傳 문장과 덕망이 아직도 전해 온다네.
○ 한성판관인 전주 이씨 이중명(李重溟)380)은 호가 구주(鳩州)인데 이곳에 살았으며 문장과 학업으로 서울까지 소문이 났다. ≪동악집(東岳集)≫의 부(賦)·송(頌)·잠(箴)·명(銘)에 보이는 병판관(病判官)이 이 사람이다.
○ 구춘당(九春堂)의 후손 남궁협(南宮浹)이 지금 이 동네에 살고 있다.
377) 내가면 오상3리 고상골이다. 오산(鰲山)이라고도 한다.
378) 원본에는 없으나, 구창서발문본에 있어 삽입하였다.
379) 내가면 오상1리 구주동이다. 양구(陽鳩)라고도 한다.
380) 이중명(?-1637)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구주(鷗洲).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둘째 아들 이증(李䎖)과 함께 집에서 자결했다.
162. 구하동(鳩下洞381))
鳩下村前導五川 구하촌 앞에는 다섯 시냇물이 흐르고,
趙金相接一村烟 조씨와 김 씨네가 한 마을을 이루었네.
春光近借府中客 봄빛이 다가오니 고을 손님 찾아오고,
富貴鶯花年復年 부귀와 영화도 해마다 찾아오네.
○ (해설문 없음)
163. 황청동(黃淸洞382))
黃淸水色一千年 황청리의 물색은 천 년 동안 한결같으니,
聖運乾坤海屋連 나라 운세 천지 간에 끝없이 이어지리.
因遇權兄同榻坐 권형(權兄)을 만나서 자리를 같이 하니,
指言此地足風烟 그 곳 땅을 가리키며 풍경이 흡족하다 말을 하네.
381) 내가면 구하리이다.
382) 내가면 황청리이다.
○ 음사로써 호조좌랑에 지낸 권개(權愷)383)의 후손으로 자(字)가 취중(就中)384)인 사람이 선원(仙源)의 연동(烟洞)에서 이쪽으로 이사와 살고 있다.
164. 구포촌동(舊浦村洞385))
舊浦村前大海連 구 포촌 앞쪽은 큰 바다에 이어져,
南商北賈往來船 남북의 상인들이 배를 타고 드나드네.
滿盤魚膾盈樽酒 생선 안주 쟁반 가득하고 술독도 가득 차니,
杏店斜陽一醉眠 해질 녘 은행나무 주막에서 술에 취해 한숨 자네.
○ (해설문 없음)
165. 옥계(玉溪)
玉溪一曲繞靑山 옥계는 한번 굽어 청산을 감아 돌고,
樹色如眠白日閑 나무는 졸린 듯 대낮인데 한가롭다.
有二兪生迎我語 유 선생 두 분이 나를 맞아 말 나누니,
卜居已久此中間 이곳에 자리 잡고 산지가 오래 됐다네.
383) 권개(1530~1568). 강화부사였던 권적의 손자이며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이고, 임진왜란 때 명장 권율의 형이다. 의금부도사·호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384) 구창서발문본에는 집중(執中)으로 되어 있다.
385) 내가면 황청2리 포촌 마을이다.
○ 기계 유씨(杞溪兪氏)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 두 사람은 나와 친하다.
166. 조계동(皂溪洞386))
皂溪猶白碧山嵬 거무내는 오히려 희고 청산은 우뚝한데,
知是韓門次第開 한씨들이 차례차례 가문을 일으켰네.
中有一家遊洛社 그 중의 한 집은 서울에 유학했고,
棣華387)同日採 蓮來형제가 같은 날에 급제하고 돌아왔네.
○ 청주 한씨가 이곳에 많이 살고 있는데 그 친족의 한 명이 서울로 이사 간 지 여러 해 되었다. 형제가 같은 해에 진사가 되어서 이 동네에 살고 있다.
167. 백씨산소(伯氏山所*)
穴山西北谷縈回 혈구산 서북쪽 감아 도는 골짜기에,
巖下封塋一土坮 바위 아래 무덤과 자그마한 둔덕 있네.
瞻拜斜陽因洗淚 해질 녘 참배하고서 눈물을 씻으니,
塤聲怳惚引風來 질나팔 소리 아득하게 바람에 실려 오네.
○ 나의 형의 산소가 혈구산 북쪽과 고려산 남쪽 사이의 오좌자향(午坐子向)의 언덕에 있다.
386) 내가면 고천리 조계동, 현천(玄川) 거무내 마을이다.
387) 구창서발문본에는 ʻ華ʼ가 ʻ花ʼ로 되어 있다.
168. 창원황씨(昌原黃氏*)
遠上雲山石逕斜 저 멀리 구름 낀 산에 돌길이 비껴 있고,
鸎聲忽覺有人家 꾀꼬리 소리 문득 들려 인가 있음을 알려주네.
雄詞健筆黃司馬 문장과 글씨가 활달했던 황 사마는,
採得紅蓮一朶花 과거 시험 보아서 급제를 하였다네.
○ 창원 황공 아무개는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으며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9. 동래정씨(東萊鄭氏*)
谷谷幽居谷谷村 골골이 그윽하여 골골에 마을 있어,
管領春風鄭一門 정씨네 가문이 봄바람을 거느렸네.
文詞德行承承業 학문과 덕행을 가업으로 이어받아,
是祖家中有是孫 그런 조상 있는 가문 그런 후손 이어지네.
○ 동래 정씨 정건(鄭楗)은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참봉을 역임하였다. 그 손자 정민(鄭旻)은 강화부의 교관(敎官)으로서 서부의 참봉으로 옮겨갔고 후손들이 여기서 산다.
170. 고려산(高麗山*)
高麗山屹鎭江州 고려산 우뚝 솟아 강화 고을 누른 곳에,
五色蓮花五井湫 다섯 색깔 연꽃과 다섯 우물 있었다네.
北虜何心來鍤鐵 북쪽 오랑캐는 무슨 뜻으로 철심을 박았는가,
閔公修鑿跡猶留 민진원공 파낸 흔적 아직도 남아있네.
○ 고려산(高麗山)은 강화부의 진산(鎭山)이며 일명 오련산(五蓮山)이라 한다. 전하기를 “천축(天竺)의 승려가 일찍이 다섯 빛깔의 연꽃으로써 하늘에 날려서 각각 떨어진 곳에 사찰 한 개씩을 세웠다.”라고 한다. 지금은 청련사(靑蓮寺)와 백련사(白蓮寺)와 적련사(赤蓮寺) 세 사찰만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되었다.
고려산을 오련산이라고도 칭한다. “정상에 다섯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마시면 힘이 강해진다. 중국인들이 보고서는 시기를 해서 못을 쳐서 막았기 때문에 샘이 마르고 선비들도 역시 나지 않는다”라고도 한다.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388)은 영의정을 지냈는데, 강화유수가 되었을 때에 여기에 가서 다시 우물을 뚫고 축대를 쌓아서 비로소 샘의 맥을 소통시켰으나 다시 말라버렸다.
○ 옛날에 전하기를 “다섯 연못에는 다섯 가지 빛깔의 연꽃이 나오는데 천축의 승려가 이것을 던져서 사찰의 터를 점지하였다.”라고도 한다.
388) 민진원(1664∼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1705년, 1710년 두 차례 강화유수를 지냈다.
171. 청련사(靑蓮寺389))
靑蓮寺在碧山東 청련사는 고려산의 동쪽의 있는데,
國淨僧尼但指空 국정사 여승들은 공(空)의 진리 가리키네.
在近龍藏今亦廢 근처의 용장사도 폐허되어 없으니,
麗王玉輦過雲中 고려 임금 타신 가마 구름 속을 지났었네.
○ 청련사(靑蓮寺)는 고려산 동쪽에 있으며 속칭 국정암(國淨菴)과 원통암(圓通菴)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는 비구니들이 살고 있다. 그 동쪽에 예전에는 용장사(龍藏寺)가 있었는데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일찍이 와서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172. 백련사(白蓮寺390))
白蓮寺在碧山西 백련사는 벽산의 서쪽에 있는데,
法侶閑投括眼篦 스님들은 한적하게 졸음 쫓는 죽비 치네.
誰與淵明同結社 그 누가 도연명의 백련결사 동참했나,
詩人往往姓名題 시인들은 종종 이름을 남겨 놓았네.
○ 백련사는 고려산 서북쪽에 있다. 석주(石洲) 권필(權韠)391)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사찰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니(不識招提路)
날씨는 추워서 온 산에 눈 덮였네.(天寒雪滿山)
연기를 피는 곳을 홀연히 보노라니(忽看煙起處)
우거진 소나무 사이란 걸 알겠구나.(知在亂松間)”
389) 강화읍 국화2리 국정마을에 있다.
390) 하점면 부근리에 있다.
391) 원본에는 권필(權鞸)로 되어 있다.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사찰은 고요하니 승려가 찾아들고(院靜僧初定)
저 산도 맑아서 달도 점점 차는구나.(山晴月更多)
뒤얽힌 풀 속에서 반디불은 날고 있고(流螢依亂草)
깊고 깊은 가지에 밤새들이 모이네.(暗鳥集深柯)
벼슬할 뜻은 외로운 칼에다가 남겨두고(仕志餘孤劍)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시 한수를 읊조리네.(窮愁且短歌)
서울에 살고있는 우리의 형제들은(京華有兄弟)
소식이 어떠한지 몹시도 궁금하네.(消息正如何)”
○ 동악(東岳) 이안눌의 시는 다음과 같다.
“백년사 앞에 있는 오동나무와(白蓮寺前桐)
궁궐 안에 심겨진 대나무라네.(紫極宮裏竹)
만고에 울려 퍼진 가을 소리는(萬古一秋聲)
밤 기운에 상쾌해서 움킬만도 하구나.(夜氣爽堪掬)
여러 분의 현인 시를 앉아서 외노라니(坐誦諸賢詩)
시대는 달라도 외로움은 한가지네.(異代共羈獨)
이슬이 차가우니 벌레 울기 시작하고(露冷初蟲吟)
숲속이 고요하니 밤 새가 자는구나.(林靜夜鳥宿)
내 나이는 마흔 아홉이 되었지만(吾亦四十九)
점치는 사람에게 어떻게 물어볼까.(鉅可問太卜)
늙어서의 경계는 씀씀이가 큰 것이니(老戒必大費)
귀해지긴 쉬워서 머지 않아 회복하리.(易貴不遠復)
그윽한 정이야 여유로움 즐기지만(幽情樂閑曠)
인생의 황혼에서 엎어짐이 두렵다네.(末路畏傾覆)
벼슬살이 버리고서 떠나고 싶으니(卽欲解綬去)
호수있는 고향에는 느지막히 벼가 익네.(湖鄕晩稻熟)”
○ 권적(權樀)의 시는 다음과 같다.
“우리 할아버지가 시를 지은 곳인데(吾祖題詩處)
집을 비운지 많은 세월 지났네.(空門歲月多)
높고높은 이름은 북두성과 동등하고(高名齊北斗)
지나간 자취는 남쪽 가지와 같다네.(往跡等南柯)
산승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고(迸淚山僧話)
골짜기 새 울음에 마음이 상하도다.(傷心谷鳥歌)
마음먹고 한번쯤 크게 취해보려는데(一樽湖海酒)
취하고 싶어도 언제일까 기약없네.(更欲醉無何)”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예전에 만든 판을 사롱 속에 두었으니(紗籠護舊板)
푸른 달 아래에 빈 산이 비치네.(壁月照空山)
오류내의 작은 돌을(一片五川石)
구름 바다 사이에 다시금 둔다네.(更留雲海間)”
○ 유수 심성진(沈星鎭)의 시는 다음과 같다.
“서성을 나오니 비갠빛이 선명하고(偶出西城霽色鮮)
높고높은 산 위에 사찰이 멀리 보이네.(禪樓遙在是高巓)
기운은 모여있고 높은 산은 가까운데(蔥籠佳氣喬山近)
큰 숲의 연기는 큰 바다와 연해 있네.(浩森烟波大海連)
이 절에는 승려 많다 들은 적이 있으니(此寺吾聞多法侶)
이곳에서 노니는 건 신선이라 말들하네.(此遊人說是神仙)
풍광을 인연삼아 시 지으며 보내려는데(輸將景物閑題品)
백련사보다 적련사가 낫다는 말 기약 못하네.(未必赤蓮勝白蓮)”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산에 의지해 옛 절이 있으니(古寺依山在)
뜬 구름은 오랜 세월 지났구나.(浮雲閱劫多)
매의 향기 불전 앞에 공양하고(梅香供榻佛)
뜰 앞의 나뭇가지에 비를 적시네.(華雨濕庭柯)
들녘의 손은 봄의 감흥 일으키고(野客尋春興)
숲속의 앵무새는 종일 운다네.(林鸚盡日歌)
누에 올라도 좋은 글귀 없으니(登樓無好句)
석주 권필은 어떠했을지 궁금하네.(其奈石洲何)”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절 뒤에는 솟구치는 물이 있고(寺後溶溶水)
누 앞에는 우뚝 솟은 산이라네.(樓前矗矗山)
짚신에다 대나무 지팡이로(芒鞋與竹杖)
종일토록 산수를 거닌다네.(終日山水間)”
173. 적련사(赤蓮寺392)) 적석낙조(積石落照)
赤蓮寺在碧山南 적련사는 고려산의 남쪽에 있는데,
積石奇形手欲探 돌 쌓은 모습 기이하여 만지고 싶어졌네.
夕照倘沈西海否 저녁 해는 서쪽 바다로 잠기는 게 아닐까,
先將此理問瞿曇 먼저 이 이치를 부처에게 물어볼까.
○ 적련사(赤蓮寺)는 고려산 서남쪽에 있다. 지금은 적석사(積石寺)라고 한다.
○ 낙조(落照)는 강화부 10경(景)의 하나이다. 중수한 사실을 적은 비문의 글씨는 상서 윤순(尹淳)393)이 썼다.
○ 전하기를 “장차 좋은 일이 일어날 때는 서기가 충만하고 장차 재변이 일어날 때는 우물이 마른다.”라고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정축년(1637) 오랑캐들이 이곳에 왔을 때 머리 숙여 예배하였고 거주하는 승려들이 피해를 면하였다고 하는데 일이 대략 다음과 같다.”라고 하는데 황당해서 믿지 못하겠다.
○ 정축의 난리에 정명공주(貞明公主)가 이곳에 피난하였는데 그초상화를 두었었다. 화재를 겪어서 사찰을 중수하였는데 예전의 정명공주의 초상화는 다시 보지 못하였다.
○ 동악 이안눌이 지은 사남루(寺南樓)에 대한 시는 다음과 같다.
“길에는 해당화가 피어있고(逕又棠花發)
처마에는 제비새끼 나는구나.(簷仍燕子飛)
젊어서 일찍이 도착했지만(眼靑曾到處)
늙어서야 비로소 돌아간다네.(頭白始歸時)
양남곡에서 잎사귀를 채취하고(採葉楊南谷)
면북기에서 고기를 낚는구나.(釣魚沔北機)
십년 동안의 한스러움은(十年前後恨)
이 누각과 더불어 알고 있네.(留與一樓知)”
○ 전정(前正) 정휴(鄭庥)394)는 유수 이익(李翊)395)과 함께 모임을 가지려고 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시를 지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귀타고 높은 비탈 오르는데(騎驪上危磴)
흰구름 사이에 절이 있다네.(寺在白雲間)
미망의 바깥에는 해읍이 있고(海邑迷茫外)
깁 사이로 종소리가 나는구나.(鐘聲縹紗間)
축축한 찬비에 걱정 많은데(却愁寒雨濕)
한가로운 노승이 부러웁구나.(偏羨老僧閒)
높이 오르면 굽히기 어려우니(高駕應難枉)
숲 속을 질러서 혼자서 돌아오네.(穿林獨自還)”
○ 만난 뒤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불단에는 아침햇살 비치고(採龕暎朝日)
절간에선 돌끝에 앉는다네.(禪菴駕石端)
하늘은 창해 밖으로 이어지고(天連滄海外)
사람은 비취빛 속에서 말하네.(人語翠微間)
여러 해의 괴로움을 벗어나(已脫經年苦)
이날에야 한가함 즐긴다네.(偏因此日閒)
노니는 일은 다시 얻기 어려워라(淸遊難在得)
저녁이라도 돌아감을 재촉말아라.(向夕莫催還)”
○ 유수 심성진(沈星鎭)396)의 시는 다음과 같다.
“절의 누대 높이 솟아 바위를 누르는 듯(寺樓高壓石嶬峨)
하늘은 가까워 손으로도 만지는 듯.(尺天雲霄手可摩)
승려 떠난지 언제런가 불경만이 남아있고(師去何年留寶揭)
손은 와서 종일토록 바라소리 듣는구나.(客來終日聽婆羅)
깊은 숲속 세 가지의 나무가 있다지만(深林應有三枝椏)
기이한 자취는 오색 연꽃에서 들었네.(異迹曾聞五色荷)
상서로운 기운은 언제나 일어나지만(瑞氣尋常朝暮起)
영험한 고을이라 사람들은 말을 하네.(人語靈驗在邦家)”
○ 내가[저자 고재형]이 이 절에서 노닐고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층층이 싸인 바위 높게도 올라서(積石層層高可攀)
푸른 숲속에 승려가 인도하여 들어오네.(寺僧導入碧松間)
불교는 우리 도가 아니라고 누가 말했나(誰言鷲嶺非吾道)
용문에 오르려면 이산부터 거쳐야지. (欲至龍門自此山)
나무가 하늘 받친 듯 남은 빛이 걸려있고(若木浮天殘照掛)
적련은 뭍으로 나와 서운이 조화되네.(赤蓮出陸瑞雲斑)
사물을 보는 것은 모두가 인연이라(推看物物皆因果)
만겁이 흘러서 바다 소리 찾는구나.(萬㤼流覓聲海灣)”
394) 정휴(1625년 출생) 자는 대경(大卿). 본관은 경주(慶州).
395) 이익(1629∼1690)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우(季羽), 호는 농재(農齋).
396) 심성진(1659년 출생) 자는 시서(時瑞) 본관은 청송(靑松).
392) 적련사는 현재의 적석사인데, 내가면 고천리에 있다.
393) 윤순(1680∼1741) 조선 후기의 문신·서화가.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白下)·학음(鶴陰). 만년에는 나계(蘿溪)·만옹(漫翁)이 라 하였다.
174. 홍릉(洪陵397))
麗朝如夢鳥空啼 고려시대 꿈 같은데 새만 부질없이 울어대고,
春雨洪陵草色齊 봄비 젖은 홍릉은 풀빛이 가지런하네.
北望雲中松岳樹 북쪽의 구름 속에 송악산 숲이 있고,
猶自靑靑漢水西 절로 푸른 한강물은 서쪽으로 흘러가네.
○ 홍릉(洪陵)은 고려 고종(高宗)의 능이다.
397)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으로 강화읍 국화리에 있다.
175. 보문사(普門寺398)) 첩도(疊濤)
渡口錦山一路橫 나루 어귀 금산은 한 길로 이어졌고,
普門寺下疊濤鳴 보문사 아래쪽엔 겹친 파도 울어대네.
石舟不去眉巖立 돌배는 멈췄고, 눈썹 바위 서있으니,
云是梵王窟宅成 범왕과 석굴이 이뤄졌다 말을 하네.
○ 보문사(普門寺)는 매음도(媒音島)의 금산(錦山)399) 치우친 곳에 있는데 고려산 서쪽 기나긴 장강의 바깥에 있는 섬이다. 바다에 임해서 넘실넘실하기가 끝이 없고 사찰의 옆에는 석실이 있는데 관음보살을 안치하였으며 위로는 미암(眉岩)이 있고 옆에는 석주(石舟)가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인도의 왕이 타고 온 것이라고 하지만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시는 다음과 같다.
“지는 해 안개 물결에 큰 물이 질펀하고(落日烟波浩水漫)
가운데엔 배가 떠서 푸른 산을 얻었구나.(中有艤棹得靑巒)
모든 이는 홀연히 풀을 잡고 오르니(諸人忽已攀籮到)
세 섬에서 약초 캐기 어렵다 누가 말했나.(三島誰言採藥難)
동굴은 깊숙하고 샘물은 담담한데(太始窟深泉湛湛)
천인석에 비춘 달은 둥글기도 하여라.(千人石逈月團團)
대합은 초야에 빛과 기운 넉넉하니(蚌胎初夜饒光氣)
고승이 혼자서 보아야 한다네.(應是高僧獨自看)”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외로운 섬 겹겹이 사방과 끊어졌고(孤島重溟絶四鄰)
티끌 없이 깨끗한 바위굴이 아깝구나.(更憐巖屈淨無塵)
밝아서 박쥐가 머물지를 못하니(空明未許巢蝙蝠)
트인 계곡에 귀신이 있는 듯도 하구나.(開壑渾疑有鬼神)
물결 속에 보이는 산자라의 등과 같고(浪裏看山是鰲背)
교룡인지 사람인지 깊은 밤에 불경 듣네.(夜深聽梵是蛟人)
깨닫고 난 다음에는 온누리가 너무 좁아(伊來轉覺寰逼隘)
줄로 엮은 침상 빌려 이 몸이 늙고 싶네.(願借繩床老此身)”
파도가 밀려드는 보문사의 첩도(疊濤)는 본부10경 중의 하나이다.
398) 삼산면 매음리에 있다.
399) 보문사 뒷산을 오늘날에는 낙가산이라 하고 그 산줄기의 서쪽 높은 봉우리는 상봉산이라 부른다.
176. 정포동(井浦洞401))
客馬來尋井浦樓 말을 탄 나그네가 정포 누각 찾아가니,
鎭雲散盡海長流 진보 구름 흩어지고 바다는 멀리 흐르네.
却推許老詩中意 허씨 노인 지은 시의 속뜻을 생각하니,
城月光輝又一秋 성터의 밝은 달빛 속에 또 한해가 지나가네.
○ 위량면(位良面) 정포동(井浦洞)은 강화부 관아의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 허봉(許葑)402)의 ʻ정포의 성루(城樓)ʼ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늦도록 성루에 혼자서 앉아 있자니(獨坐城樓晩)
시끄럽던 까마귀 둥지에 드는구나.(棲烏無數喧)
바다 산은 안개에 싸여있어 어둡고(海山籠霧暗)
사장의 포구는 조수 밀려 흐리구나.(沙浦帶潮渾)
손이 되어 속절없이 근심하고 생각하니(作客空愁思)
집으로 돌아가는건 꿈속의 혼이라네.(還家只㒱魂)
참성단에 올라서 주변을 바라보면(塹城壇上望)
이 나라로 들어오는 정문을 볼 수 있으리.(應見國正門)”
이 시로써 미루어 보건대 옛날에는 성루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옹성 여러 곳이 있는데 “광해세자가 이곳에 구금되었다.”라고들 전한다.
○ 옛날에는 진보가 있어서 수군 만호를 두었으며 현종 병오년(1666, 현종 7)에 유수 서필원(徐必遠)403)이 아뢰어서 수군을 교동으로 옮기고 별장을 두었다. 기유년(1669, 현종 10)에는 유수 김휘(金徽)404)가 도로 만호를 두었다. 숙종 무오년(1678, 숙종 4)에는 윤이제(尹以濟)405)가 아뢰어서 장봉도로 옮겼지만 다시 별장을 두었다.
○ 제방은 서필원이 쌓은 것이다.
400) 위량면은 1914년 내가면과 양도면으로 나뉘어 편입되었다.
401) 내가면 외포2리 정포마을로, 외포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402) 허봉(1551∼1588)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본관은 양천(陽川).
177. 외주동(外州洞406))
幽谷橫斜是外州 깊은 골짝 비스듬히 외주(外州) 마을 있는데,
門前南出一貂頭 문 앞에 남쪽으로 초피산이 솟아 있네.
宋金兩姓連書屋 송씨·김씨의 글방이 나란히 있으니,
各採紅蓮玉漵秋 각 집안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네.
○ 외주동(外州洞) 남쪽으로는 초피산(貂皮山)의 한 봉우리를 바라 볼 수가 있는데 붓처럼 생겨서 매우 보기가 좋다. 그 거주하는 이는 여산 송씨 송기호(宋基皓)407)와 김해 김씨가 있는데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그 친척과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403) 서필원(1614∼1671)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404) 김휘(1607∼1677) 본관은 안동. 자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만은(晚隱)
405) 윤이제(1628∼170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즙(汝楫).
406) 내가면 외포1리 외주동으로 박골, 바꼴이라고도 한다.
407) 송기호(1865년 출생) 본관은 여산(礪山). 1885년 식년시 생원(生員) 3등 157위로 합격하였다.
178. 항주(項州408))
項州洞口問星田 항주동 입구에서 별밭을 방문하니,
牟麥春光上下連 보리가 봄볕 속에 위아래로 연이었네.
申老閑眠桑樹下 신씨노인 뽕나무 아래 한가로이 졸다가도,
時呼穉子讀靑篇 어린아이 공부하라고 때맞추어 소리치네.
○ 항주(項州)에는 성전(星田)이 있다. 어떤 이는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도 한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179. 낙인동(樂仁洞409))
國賜峯前王訪村 국사봉 앞쪽에 왕방촌이 있는데,
世居全氏向陽門 전씨들이 양지쪽에 대대로 살고 있네.
丹花仙籍黃金印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 올라가니,
觀海眞工自有源 관해공의 참된 공부 스스로 근원이 있었네.
○ 낙인동(樂仁洞)은 항주에서 갈라진 동네이다. 성주 전씨 전신(全信)410)은 고려조의 병부상서로서 공왕(恭王)을 수행하여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 우리 태종이 공을 방문하였는데 왕방리(王訪里)에서 물어보았기 때문에 그 마을 이름을 왕방리라고 하였다. 권농사(勸農使)를 제수하였고 큰 산 하나를 하사하였기 때문에 그 산을 이름하여 국사봉(國賜峯)이라고 한다. 그 후손은 무과에 급제하여 연일·초계·경주의 영장(營將)과 백령 첨사를 역임하였으며 영사원종일등공신(寧社原從一等功臣)에 등록되었다. 성품이 매우 강직해서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는데 일찍이 강화부 중군(中軍) 때에 공용 면포 한 필을 마상(馬裳)으로 하도록 하였는데 체임될 때를 미쳐 그 마상을 중군청에 도로 갖다 주었다. 그 아들 전기업(全起業)은 정축년(1637) 난리에 순절하였으니 일이 충렬사 주(註)에 보인다. 그 후손 관해공(觀海公) 전재봉(全在鳳)411)은 일찍이 문과에 합격하여 대간의 청직을 거쳐서 제주 목사로 나갔다. 물러나서는 그 친척과 자손들이 이곳에 많이 살고 있다.
408) 양도면 인산2리 항주동으로 황골이라고 한다. 황골 동남쪽에 별밭[星田] 마을이 있다.
409) 양도면 인산1리 왕방 마을이다.
410) 전신(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사와(謝臥)
180. 흥천동(興川洞412))
岐巖山下是興川 기암산 아래에 흥천 마을 있는데,
短竹疎松繞宅邊 작은 대와 성근 소나무가 집 주위에 둘러있네.
大冶爐頭金躍否 커다란 쇠가마에 쇳물을 끓이니,
犂商鼎賈若紛然 쟁기장수 솥장수가 분주히 다녀가네.
○ 이 동네에는 주철(鑄鐵)의 분점(盆店)이 있는데 호미 장사와 솥 장사가 많이 모여 왕래한다.
○ 산 이름은 기암(岐岩)이라고 한다.
411) 전재봉(1834년 출생)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1861년 식년시 병과(丙科) 24위로 합격하였다.
412) 양도면 삼흥2리 흥천 마을이다. 고려시대에 흥천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181. 산문동(山門洞413))
山門洞倚碧山松 산문동은 푸른 소나무 숲에 의지하고 있는데,
漸覺泉聲瀉兩峯 양 봉우리 솟아나는 샘물소리 차츰 들리네.
灌入稻畦能免旱 논에 물을 댈 수 있어 가뭄 걱정 면하니,
年年相賀太平容 해마다 태평한 모습 서로서로 치하하네.
○ 땅의 형세가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샘물이 마르는 일이 없고, 가뭄이 들지 않는다.
182. 존강동(存江洞414))
存江洞口久停鞭 존강동 입구에서 오래토록 머물다가,
因坐南宮舊榻筵 남궁씨 옛 터전에 잠시나마 앉아보네.
溪柳庭花分植處 시내버들과 정원화초 나누어 심은 곳에,
淸風明月尙依然 맑은 바람 밝은 달은 아직도 의연하다.
○ 구춘당(九春堂)의 후손으로 주사를 지낸 남궁혁(南宮金赫)은 이곳에 살았다. 그 아들 남궁경(南宮氵敬)은 나와 매우 친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그 자손이 여기에 살고 있다.
413) 양도면 삼흥2리 산문 마을로 흥천 동남쪽에 있다. 이 산문동 부분이 원본에는 106면 ʻ정두동ʼ 뒤에 실려 있으나, <고창서 발문본>의 순서에 따라 이곳으로 옮겼다. 산문동은 흥천동과 인접하여 있다.
414) 양도면 삼흥1리 존강 마을로, 존개이·종개이라고 한다.
183. 건평동(乾坪洞415))
名是乾坪卽水坪 이름은 건평이지만 물 많은 수평인가,
滿堰春波灌稻粳 뚝에 가득 봄물 차니 논에 물을 대기 좋다.
且畊且讀諸君子 밭 갈면서 책 읽은 이 모두가 군자이니,
聊得斯中一味淸 그러한 가운데서 맑은 기운을 얻는구나.
○ 평해 황씨(平海黃氏),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 강진 안씨(康津安氏),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모두 이곳에 살고 있다.
184. 장지포(長池浦416))
長池春水漲東西 장지포 봄물은 동서로 넘쳐나고,
井浦乾坪築兩堤 정포와 건평에는 두 둑을 쌓았구나.
欹笠何翁投釣餌 삿갓을 쓴 어떤 노인 낚시 바늘 던져놓고,
白鳩飛去影高低 나는 백구는 그림자가 높았다가 낮아지네.
○ 제방은 유수 서필원(徐必遠)417)이 쌓은 것인데 물이 항상 얕지 않아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의지하여 생업을 이루어나갔다. 동서에 있는 두 제방은 항상 낚시꾼들이 있어서 취미를 얻고 있을 뿐이다.
415) 양도면 건평리이다.
416) 양도면 건평리 노고산 북쪽에 있는 갯고랑이다.
417) 서필원(1614∼1671)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185. 진강산 귀운(鎭江山歸雲)
鎭江山色碧如屛 진강산 산색은 푸른 병풍을 친 듯 하고,
片片歸雲錦繡形 흐르는 조각구름 비단에 수놓은 듯하다.
首智遺墟何處是 수지현 옛터는 어디쯤에 있을까,
造翁筆下影丹靑 조물주의 붓끝 아래 단청이 그려졌네.
○ 산릉을 두르고 있는 산은 벌려져 있고 굽어 있어서 그 아래에 의지하여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으니 옛날에 진강현(鎭江縣)이 그 아래에 있었다.
○ 고구려의 수지현(首智縣)418)의 터는 진강 남쪽에 있었다. 그 서쪽 5리에 해녕향(海寧鄕)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능곡(陵谷)은 옮겨져서 찾을 수가 없다.
○ 돌아가는 구름[歸雲] 역시 강화부부 10경(景)의 하나이다.
186. 목장(牧場)
三百年前設牧場 삼백년 이전에 목장이 설치되어,
古稱此地馬多良 좋은 말이 많은 곳으로 오래 전부터 불려왔네.
盖聞伐代驄云者 듣건대 벌대총이라 불린 말은,
內廐嘶風獨異常 궁궐 마구간에서 울부짖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다네.
418) 원문에는 수지손(首智孫)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라 ʻ孫ʼ을 ʻ縣ʼ으로 고쳤다.
○ 옛날에 목장이 있었는데 인조 기축년(1649)에 유수 조계원(趙啓遠)419)이 장계를 올려서 목장을 파하고 농사를 짓게 하자고 하였으며, 기해년(1719)에는 유수 심택현(沈宅賢)420)이 태복을 지낼 때에 “목장에는 훌륭한 말의 종자들이 있으니 다시 목장을 설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길상산(吉祥山)이 이곳이다.
세속에 전하기를 “효종이 심양에서 돌아올 때 청나라 황제가 말 한 마리를 돌려주면서 ʻ이것은 너희 나라 진강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가 나라로 돌아갈 때 이 말과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ʼ라고 하였다. 효종은 그 말을 사랑하여 돌아와서는 장차 강을 건너고자 하니 말이 먼저 날아서 건너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비로소 그것이 신령스러운 종자임을 알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효종이 심양에서 돌아올 때 이 목장에서 팔준마를 얻었다.”라고 하기도 한다. 일설에는 “효종이 말 한 마리를 길러서 내구에 두었는데 벌대총(伐大驄)이라고 이름하였다. 이것은 진강의 종자들이 다른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이름을 지은 데에는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에 가장 사랑하고 길렀다고 한다.
419) 조계원(1592∼1670)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약천(藥泉).
420) 심택현(1674∼173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여규(汝揆).
187. 하일동(霞逸洞)
霞峴西南谷谷幽 하현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
山中宰相古今留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
二公宅址三公墓 두 정승의 집터422)와 세 정승의 무덤423) 있어,
云是江州第一區 이곳을 강화도의 ʻ제일구(第一區)ʼ이라고 부른다네.
○ 상도면(上道面)은 강화부 관아 남쪽 35리에 있다. 도촌(陶村) 정유성(鄭維城)424)은 연일 정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인데, 선원면(仙源面) 연동(烟洞) 부분의 주(註)에 보인다. 현종 때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묘는 하일리(霞逸里)의 서쪽 산기슭에 있다.
○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425)는 도촌의 손자이다. 집터가 여기에 있는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도학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오조를 거쳐 국태로(國太老)의 학자라고 하였다. 또 하곡(霞谷) 선생이라고 불리었으며,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의 명을 받들어 지위가 숭록대부우찬성 겸 성균좨주(崇祿大夫 右贊成 兼 成均祭酒)에까지 올랐고, 죽어서는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거처하는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지 못하여서 유수 민진원(閔鎭遠)426)이 평소에 선생을 공경하였기 때문에 집을 지어주었다. 묘는 하현(霞峴)의 동쪽 기슭에 있다. 지금 그 손자인 참판(參判)을 지낸 정원하(鄭元夏)427)가 와서 살고 있다.
○ 영의정을 지낸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428)는 해주 최씨인데 이 집이 진강산 서쪽에 있었다. 집이 매우 허름하여 경상(卿相)의 집같지가 않았으며 거실에 편액하기를 수운헌(睡雲軒)이라고 하였다.
9언4구의 시가 전해진다.
(雲在峀 捲復舒 舒復捲)
“구름이 산에 있을 때에는 말렸다가 펴지고 펴졌다가 다시 말리고
(人在欄 睡復醒 醒復睡)
사람이 난간에 있을때에는 잠자다가 깨고 깼다가 다시 잠드네
(捲則睡 人在峀 雲在欄),
말리면 잠드는 것은 사람이 산에 있고 구름이 난간에 있을 때이고
(舒則醒 人在欄 雲在峀).
펴지면 깨는 것은 사람이 난간에 있고 구름이 산에 있을 때라네
당시 심은 자단(紫檀)나무와 측백나무가 여전히 살아있다.
○ 안동권씨 권개(權愷)429)는 강정(康定) 권철(權轍)430)의 아들이다. 관직은 호조좌랑을 지냈고, 묘는 하곡에 있다.
421) 원본에는 ʻ상도면ʼ이 빠져있으나, 구창서발문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상도면은 오늘의 양도면에 편입되었다.
422) 정제두와 최규서의 집터를 말한다.
423) 정유성, 정제두, 권개의 무덤을 말한다.
424) 정유성(1596∼1664)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덕기(德基), 호는 도촌(陶村).
425) 정제두(1649∼1736)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426) 민진원(1664~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1705년, 1710년 두 차례 강화유수를 지냈다.
427) 정원하(1855년 출생)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성조(聖肇). 아버지는 연안도호부사 기석(箕錫)이며, 어머니는 풍산홍씨이다.
428) 최규서(1650~1735)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429) 권개(1530~1568) 강화부사였던 권적의 손자이며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이고, 임진왜란 때 명장 권율의 형이다. 의금부도사·호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430) 권적(1503~157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아버지는 강화부사 적(勣),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며, 율(慄)의 아버지이다.
188. 하촌(霞村*)
霞村卜築幾人基 하촌에 집을 짓고 누구 누구 터 잡았나,
南望貂皮一筆奇 남쪽의 초피산은 붓끝처럼 기이하다.
閔朴許同三逕月 민씨와 박씨가 함께 세 달 지내고서,
桂蓮掛榜又時時 과거 시험 함께 보고 함께 급제 하였다네.
○ 남쪽으로는 붓의 형상을 하고 있는 초피산(貂皮山)이 있는데, 여흥 민씨 장령 민응세(閔膺世)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다. 밀양 박씨 진사 박승위(朴承偉)가 이 옹일촌(雍逸村)431)에 살고 있다. 현석공(玄石公)의 손자로서 진사 박선수(朴善壽)도 이곳에 살고 있다.
189. 묵와선생(黙窩先生*)
春風來拜黙窩翁 봄바람 쐬면서 묵와선생께 절을 하네,
世世家聲學業崇 학업 숭상 가문 명성 대대로 이어온 때문.
識得箇中淸意味 사물의 밝은 의미 훤히 알고 있었지만,
時人浮說摠如聾 세상의 경박한 말은 귀를 막고 안 들었네.
○ 묵와(黙窩) 민재승(閔載昇)은 문학으로써 가업을 계승하였으며 그 마음은 부드럽고 스스로를 깨끗이 하였다.
431) 양도면 하일리 옹일 마을이다. 하일의 남서쪽에 있다.
190. 능내동(陵內洞432))
陵內村中草結廬 능내촌 가운데에 풀을 엮어 집을 짓고,
金申坐讀古人書 김씨와 신씨가 고전을 읽고 있네.
蔭郎庠士何歸速 음직 낭관 지낸 그대는 어찌 빨리 돌아가셨나,
尤是情雲鎖舊居 정다운 구름만 옛집을 에워싸고 있구나.
○ 강릉 김씨 수창(睡窓)의 후손인 진사 김연의(金演儀)433)와 고령신씨 죽당(竹堂)의 후손인 교관 신홍구(申鴻求)는 나와 친지로서의 정이 있는 사이이다. 모두 세상 사양하고 추탄(追歎)하였다. 그 아우와 조카는 모두 이곳에 살고 있다.
191. 가릉(嘉陵434))
一片鎭江碧幾層 진강산 한쪽 편에 겹겹의 푸른 기운 감돌고,
白雲多處是嘉陵 흰 구름 많은 곳에 가릉이 있다네.
年年杜宇東風淚 해마다 두견새는 동풍에 눈물짓고,
每向開花百感增 개경을 향할 때마다 만감이 더한다네.
○ 고려 원종(元宗)의 비 순경태후(順敬太后)435)의 능(陵)이다.
432) 양도면 능내리이다.
433) 김연의(1856년 출생) 본관은 강릉(江陵). 1891년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110위로 합격했다.
434)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고려 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 무덤으로 사적 370호로 지정되어 있다.
435) 순경태후(?∼1236) 고려 원종의 비. 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경주(慶州).아버지는 약선(若先)이다.
○ 개화(開化)는 송도의 옛 이름이다.
192. 조산동(造山洞436))
造洞來尋李石翁 조산동에 이르러 이석 옹을 찾아가니,
梅蘭菊竹屋西東 매란국죽 사군자가 집 주위에 둘러있네.
四時長得春風氣 사계절 내내토록 봄기운을 얻었는가,
倚案淸談老亦雄 책상 기대어 하시는 말씀 늙었지만 힘이 있네.
○ 여흥 이씨로서 소릉(少陵)의 후손인 이성구(李星九)는 호가 석치(石痴)인데 이곳에 살면서 화초를 가꾸며 스스로를 즐기고 있다.
436) 양도면 조산리이다.
계속 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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