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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53돈대탐방

일본군의 조선 침투, 운요호 사건 운양호 사건

by 한국의산천 2019. 4. 20.

[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

일본군의 조선 침투, 운요호 사건

 

정한론(征韓論) 발톱을 드러내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1875년 조선의 해안 탐측 명분으로 기습공격 감행… 조선 정복해 부국강병 이루려는 ‘야심’ 구체화돼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설치된 ‘초지진’.

사적 제225호로 1716년(숙종 42) 강화 해안을 지키기 위해 설치됐으며,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전적지다. 
 

고종 11년(1874) 봄에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親政)하면서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흥선대원군의 대일 외교를 일선에서 주도하던 동래훈도(訓導) 안동준을 위시해 부산첨사, 동래부사가 모두 바뀌었다.

일본 신문에는 조선이 곧 개항할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메이지 정부는 조선의 실정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첩자를 파견했다.

 

1874년 6월 15일(양력)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가 초량왜관에 도착했다.

그는 외형상 외무성 소속의 외교관이었지만 실제는 첩자였다.

모리야마가 초량왜관에 도착하던 날, 안동준을 대신하게 된 동래훈도 현석운 역시 부산에 도착했다.

현석운은 초량 왜관을 찾아 모리야마와 회담하고 그 결과를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이는 조선 입장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동안 조선은 일본의 외교 창구는 오직 대마도주뿐이라 주장하며

외무성이 파견한 외교관들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현석운이 공식적으로 모리야마와 회담했던 것이다.

그래서 현석운과 모리야마의 회담은 역사적인 회담이라 부를 만했다.

<명치천황기>에서는 이 회담을 “조선정부가 우리 외무성 관리를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응접한 효시”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1870년대 격렬했던 당시 상황을 대변해주는 포탄 흔적. 
 

모리야마는 현석운에게 첫 번째로 기왕의 국서를 접수할 것을 제안했다.

이런 제안은 메이지 유신 이래 계속됐기에 형식적인 것이었고, 실제 핵심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제안이었다.

조선의 요구사항을 고려해 국서를 다시 작성해 보내겠다는 것이 두 번째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일면 획기적일 뿐만 아니라 전향적이기도 했다.

 

수년에 걸쳐 조선이 국서를 접수하지 않은 이유는

천황·천자·칙서 같은 표현 때문이었는데 이런 표현을 바꿀 수 있다는 암시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제안은 조선이 먼저 일본에 사절을 보내면 받아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현석운은 20여일 정도 기다려주면 답을 주겠다고 했다.

조선정부에서는 두 번째 제안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영의정 이유원은 고종에게 “만약 국서를 다시 작성해 온다면 그들이 서로 화해하고자 하는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후의를 잘 말하게 하고 다시 작성해 오게 해,

괜찮으면 교린의 옛 우호를 강구하고 혹 따르기 어려운 구절이 있으면 다시 거절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조선의 뜻을 확인한 모리야마는 다시 국서를 작성해 오겠다 약속하고 귀국했다.

그때가 10월 24일이었다.

모리야마의 보고에 따라 일본정부는 외무경과 외무대승 명의의 국서를 다시 작성했다.

또한 히로쓰 노부히로(廣津弘信)를 부관(副官)으로 임명해 모리야마를 보좌하게 했다.

 

새로 작성한 국서를 모리야마가 가져왔다는 동래 부사의 장계가 올라왔을 때 조선조정의 논의는 둘로 갈렸다.

첫 번째는 관행에 어긋나므로 접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의였다.

이는 흥선대원군 섭정 때부터 있던 논의였다.

고종이 친정한 이후로도 이런 논의가 주류였다.

두 번째는 관행에 관계없이 접수해야 한다는 논의였다.

이런 논의는 고종이 친정한 이후로 등장했지만 아직 소수였다.

 

고종은 중신회의에서 “이번에는 접수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해 곧바로 접수했으면 하는 뜻을 내비쳤다.

그때 우의정 김병국은 “한 번 자세히 살펴본 후 격식에 어긋나는 곳이 있으면 사리에 근거해 거절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는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고종은 동래부사로 하여금 특별 연향(宴饗)을 베풀게 하고 그 기회에 국서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함정에 빠진 조선정부

 

 

▎1875년 9월 조선의 해안 탐측을 명분으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운요호. 
 

그런데 새로 작성된 국서 역시 완벽하게 조선의 요구에 합치될 수 없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따라서 고종이 강력하게 국서 접수를 명령하지 않는 한 접수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접수하기 전에 미리 자세하게 살펴보자는 우의정 김병국의 논의에 따름으로써 사실상 접수를 포기했다.

이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세우지 않는 고종의 ‘개성’ 때문이기도 했고,

조정 중신들 사이에 국서 접수를 거부해야 한다는 논의가 다수인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고종 친정 이후에도 중앙정부의 관료들이 여전히 예전 관행을 존중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요구를 반영해 새로 국서를 작성했다고는 하지만 그 국서에는 여전히 황(皇)·칙(勅) 같은 표현이 있었다.

메이지 정부 입장에서는 이런 표현까지 모두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모리야마가 가져온 국서 역시 접수되지 않았다.

 

그러자 모리야마는 직접 동래부사를 만나 담판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동래부사와의 담판 역시 무산됐다.

동래부사를 면담할 때, 모리야마는 양복을 입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동래부사는 전통에 따라 옛날 복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모리야마는 거부했다. 동래부사는 연향을 취소했다.

 

작년 가을에는 그토록 우호적이던 훈도와 동래부사가 갑자기 이토록 융통성 없이 나오자 모리야마는 조선의 권력구도에 심각한 변화가 나타났다고 의심했다.

고종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져 정부 노선이 갈팡질팡하는 것으로 짐작했던 것이다.

모리야마는 바로 이 기회에 무력도발을 일으킨다면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만약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권력투쟁을 벌이는 중이라면

이 기회에 군함 한두 척을 파견해 무력도발을 일으켜 고종을 도와 승리하게 함으로써 고종을 확실한 친일파로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만에 하나 흥선대원군이 승리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한두 척의 군함을 파견해 조선의 연해 항로를 측량해 두면

훗날 대규모 무력도발을 일으킬 때 유용할 것 역시 분명했다.

이런 판단에서 모리야마는 일본 정부에 군함 한두 척을 파견해 무력도발을 일으키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메이지 정부는 군함 두 척을 파견해 무력도발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겉으로 내세운 핑계는 약속에 따라 다시 국서를 작성해 보냈는데 조선이 약속을 어기고 접수하지도 않을뿐더러 회답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로 보면 모리야마의 두 번째 제안을 수용한 조선정부는 함정에 빠졌다고 할 수도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조선정부가 국서를 접수하지 않은 것은 요구사항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국서를 접수하지 않은 모든 책임을 조선에 돌리고

곧바로 무력 도발에 나선 것은 모리야마와 일본정부가 의도적으로 제안하고 그 책임을 조선에 떠넘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한편 일본정부는 군함을 파견하면서 대마도와 조선의 연해 항로를 조사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먼저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파견됐다.

 

대마도의 연해 항로를 조사한 운양호는 음력 4월 20일 초량왜관에 입항했다.

조선 측에서는 사전예고도 없이 군함이 입항하는 것은 전례에 어긋난다며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초량왜관의 일본 거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며 무시했다.

뒤이어 5월 9일에는 군함 제이정묘호(第二丁卯號)가 초량왜관에 입항했다.

조선 측에서는 다시 항의했지만 역시 무시됐다.

부산훈도 현석운이 조사차 군함에 승선했을 때 두 군함에서는 연습을 핑계로 함포사격을 감행해 주변 지역을 공포에 몰아넣기까지 했다.


무력도발 감행한 일본정부

 

 


▎1894~95년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가 그린 당시의 한반도 주변 상황.

조선이 물고기로 묘사된 가운데 일본· 중국·러시아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 사진제공·손승철
 

1875년 5월 10일 고종은 중신 회의를 소집했다.

운요호가 지난 4월 20일 초량왜관에 도착한 지 20일 만이었다.

일본 군함이 왜관에 입항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후로 고종은 국서 접수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군함 입항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10년 가까이 국서를 접수시키지 못한 일본정부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전경고일 수 있었다.

더 이상 국서 접수를 미루다가는 심각한 상황이 닥칠 우려가 있었다.

 

5월 10일 고종은 창덕궁 희정당에서 조정 중신들을 만났다.

국서 접수 여부를 놓고 고종과 중신들 사이에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당시 전임대신과 현임대신들 중에서 국서 접수에 찬성한 사람은 판부사 박규수와 좌의정 이최응 두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영부사 이유원, 영돈녕 김병학, 판부사 홍순목, 우의정 김병국은 반대였다.

이렇게 논의가 갈라지자 중신들은 고종이 결단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고종은 그렇게 하지 않고 다시 의정부에 최종 결정을 맡겼다.

그 결과는 다수 의견에 따른 접수 거부였다.

이처럼 고종은 개인적으로 국서 접수를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힘이 약했다.

고종은 조정 중신들의 다수 의견을 존중하는 국왕이었지만, 동시에 시대 변화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고 추진력 역시 부족한 국왕이었다.

 

이런 와중에 초량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인 운요호는 6월 20일에 초량을 떠났다.

동해안을 따라 영흥까지 갔던 운요호는 6월 29일에 다시 초량 앞바다로 돌아왔다가 7월 1일에 나가사키 항으로 귀항했다.

그 사이 제이정묘호 역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운요호와 제이정묘호가 무력도발을 벌였지만 조선은 여전히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모리야마는 또다시 무력도발을 요청했고, 메이지 정부는 운요호를 다시 파견했다.

이번의 무력 도발은 지난번보다 훨씬 과격했다.

 

음력 8월 13일 운요호는 나가사키를 출항해 조선으로 향했다.

함장은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였다.

이노우에가 해군성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조선 서해안에서 청나라 우장(牛莊)에 이르는 항로를 조사할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핑계였고 실제 목적은 조선 서해안에서의 무력도발이었다.

 

운요호는 거제도 옥포, 전라도 소안도를 지나 8월 20일 오후 월미도 앞바다에 이르러 정박했다.

다음날 오전에 출항한 운요호는 두 시간쯤 항해하고 영종도 위쪽의 난지도에 정박했다.

 

영종 첨사 이민덕은 운요호가 일본 군함인 줄 모르고 “이양선(異樣船)이 난지도에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조선정부에서는 낯선 이양선이 강화도 가까이에 무단 정박하자 아연 긴장했다.

혹시라도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때처럼 또 강화도를 침략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고종은 300명의 군사를 강화도 손돌목으로 긴급 파견해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게 했다.

아울러 통역관을 파견해 어디에서 무슨 이유로 왔는지 확인하게 했다.

 

그러나 통역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발단은 일본의 무단 침입이었다.

8월 21일 오후 4시쯤 운요호에서 10여 명의 일본군이 작은 배로 옮겨 타고 강화도 초지진 쪽으로 접근했다.

물론 사전통보는 없었다. 정체불명의 선박이 내양(內洋)으로 무단 침입해 들어오자 초지진 포대에서 경고발포를 했다.

그러자 작은 배에서도 응사했다. 30분 가까이 교전이 지속된 후 작은 배는 되돌아갔다.


조선군,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1919년 1월 거행된 고종 황제의 장례식.

처음에는 조선 황실의 법도 에 따라 진행되던 장례 절차가

일본 왕의 “(일본식) 국장으로 치르라” 는 칙령에 따라 돌연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제관장을 맡은 이토 히로쿠니 (앞쪽) 공작과 부제관장으로 임명 된 조동윤 남작.
 

당시 조선의 국방을 총괄하던 삼군부에서는 정체불명의 배가 초지진 앞바다에 접근해 사격한 사건을 보고받고

“내양에 침입해 들어온 것도 이미 망측한데 총포까지 쏘았으니 더더욱 가증스럽다”고 했다.

“내양에 침입해 들어온 것”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내양을 영해로 간주했다.

따라서 외국 선박이 내양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것을 곧 침략행위로 여겼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내양을 지키는 군병들이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영해 수호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했다.

 

해안선에서 대략 10리까지의 내양을 조선 사람들이 영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일본 사람들이 모를 수는 없었다.

수백 년에 걸쳐 초량왜관을 드나들던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의 영해 인식을 모른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운요호에서 작은 배로 옮겨 타고 초지진 쪽으로 접근한 일본인들은 고의로 영해를 침범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무력도발을 위해서였다.

 

정체불명의 배가 내양 즉 영해로 무단 침입하는 것을 발견한 초지진의 조선군들이 발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초지진은 한강을 통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요충지이기도 했다.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는 이처럼 중요한 초지진의 내양에 고의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무력도발을 야기했던 것이다.

 

조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초지진에서의 무력도발은 제2의 난출(欄出)과 같았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아직 근대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여전히 ‘약조제찰비’의 규정이었다.

‘약조제찰비’의 규정을 신봉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무단으로 초량왜관을 벗어나는 일본인들은 모두가 난출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조선이 더 이상 난출한 일본인들을 무력으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고종 9년(1872) 5월에 56명의 일본인이 무단으로 초량왜관을 나와 동래부로 갔을 때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난출에 가담한 56명을 처벌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에 항의하지도 못했다. 애꿎은 훈도와 군사들만 처벌받았다.

 

초지진의 내양을 침범한 이번의 난출은 1872년의 난출보다 훨씬 심각했다.

우선 장소가 심각했다.

1872년에는 난출이 자행된 곳이 동래부였음에 비해 이번에는 수도 한양의 턱밑이라 할 강화도 입구였다.

 

난출 방식은 훨씬 더 심각했다.

1872년의 난출 때, 일본인들은 훈도에게 알렸고 평화적인 방법을 썼다.

그에 비해 이번의 난출은 아예 알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력까지 사용했다.

 

조선정부가 ‘약조제찰비’의 규정을 신봉하고 또 지켜내기 위해서는

초지진의 내양을 침범한 일본인들을 철저하게 응징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조선정부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우선 초지진의 내양을 침범한 주체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설사 알았다고 해도 응징할 무력수단이 없었다.

일본의 운요호는 근대 군함이었음에 비해 조선군의 무기는 여전이 구식이었다.

 

조선의 무능을 잘 아는 이노우에는 한 번의 도발로 끝내지 않았다.

마치 조선의 무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노우에는 여러 차례 도발을 자행했다.

조선은 1872년 5월의 난출 사건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듯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것도 무력도발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8월 22일 오전 이노우에는 운요호를 이끌고 강화도 초지진 쪽으로 접근해 먼저 발포했다.

초지진 포대에서도 대응 사격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쏜 대포알은 운요호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운요호에서 쏜 대포알은 초지진 포대를 강타했다.

포대는 파괴됐고 수많은 병사가 사상당했다.

 

운요호는 약 두 시간 정도 맹폭을 가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하지만 이노우에는 그냥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가는 길에 영종도를 공격하고 약탈했다.

8월 22일 밤 응도 앞바다에서 정박한 이노우에는 23일 오전 6시쯤 출발해 7시쯤 영종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노우에는 다짜고짜 영종성을 향해 대포를 쏘아댔다.


약탈·살육 일삼은 침략군이 피해자로 둔갑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독식하기 위한 마지막 수순이었다. 

이 무렵 일제는 침략에 저항한 조선인을 국사범(國事犯)으로 간주해 처참하게 처형했다. / 사진제공·눈빛 출판
 

이어서 두 척의 작은 배에 해군 병사들을 보내 영종성을 함락시켰다.

일본 해군은 도주하는 조선군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해 수십여 명을 사살했다.

부상당한 조선군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 해군은 성내를 불태우고 전리품을 약탈했다.

그날 밤 이노우에는 운양호에서 승전축하 잔치를 벌이고 다음날 오전 영종도를 떠나 귀국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기습 약탈을 당한 셈이었다.

이노우에는 정체를 밝히지도 않은 채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해 대포를 쏘아댔다.

또한 영종도에 상륙해 방화·약탈·살육까지 자행했다.

조선은 영해를 침범당했고 무수한 인명까지 살상당했으며 재산까지 약탈당한 크나큰 피해자였다.

 

하지만 조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둔갑돼 있었다.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흑색선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식수를 구하기 위해 평화롭게 해로를 측량하던 자신들의 배에 조선이 무단 발포했다는 흑색선전이었다.

가증스럽게도 일본은 자신들을 피해자인 양 선전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조선에서는 세계를 향해 반론하지 못했고, 흑색선전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운요호 사건의 현장 주범인 함장 이노우에는 후안무치하게도 자신들의 영종도 약탈을 이렇게 왜곡했다.

“어제 우리의 작은 배가 해로를 측량할 때

조선 측 포대로부터 한마디의 심문도 없이 제멋대로 발포했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만 했다.

이대로 그냥 물러가면 나라의 치욕이 되며 더욱이 해군의 임무를 게을리 한 것이 된다.

따라서 오늘 저들의 포대를 향해 그 죄를 다스리려 한다.

일동은 그 임무를 받들어 국위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라.”

[이노우에, <강화도사건 최초보고서>. 메이지 8년(1875) 9월 29일(양력), 일본방위연구소 소장]

 

위는 이노우에가 영종도 약탈 직전에 장병들에게 했다는 훈시이자 그가 귀국 후에 보고한 내용이기도 했다.

이에 의하면 영종도 약탈은 약탈이 아니라 조선의 무단 공격에 대한 정당방위이자 보복공격으로 정당화돼 있다.

후안무치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이노우에의 무력도발이 일본 정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기에 이 같은 보고서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노우에의 무력도발에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사후에라도 진상을 조사해 재발을 방지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이 같은 조선의 무능을 확인한 일본인들의 도발은 계속됐다.

그들의 도발은 점점 노골적으로 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고종 12년(1875) 10월 11일 일본 해군 7명이 초량왜관을 나왔다.

그들은 조선 측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다. 난출이었다.

그들은 왜관에 이웃한 구초량리로 갔다.메추리 사냥을 하겠다며 마을로 들어가려 했다.

뒤따라온 훈도 현석운이 그들을 막아섰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훈도 현석운과 함께했다.

난출한 일본인들을 받아들이면 후환이 있을 것이 뻔했기에 마을 사람들이 나선 것이었다.

 

일본 해군들은 칼을 뽑아 위협했다. 그럼에도 훈도 현석운과 마을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들에게는 눈앞의 칼보다 나중의 후환이 훨씬 두려웠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일본 해군 7명은 발길을 돌려 왜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70명의 일본 해군이 초량왜관을 난출했다.

지난 밤 사이에 작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다시 구초량리로 몰려갔다.

수가 워낙 많아서 훈도 현석운은 그들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구초량리를 뒤집어 놓은 후 일본 해군 70명은 유유히 왜관으로 되돌아갔다.


“책임 묻겠다”며 되레 압박 나선 일본군

 

 

▎초량의 <왜관도>

1783년 부산 동래부 소속 화원이었던 변박이 그린 부산 초량의 <왜관도>.

오늘날 부간 용두산공원에 있는 부산타워 자리다. / 사진제공·손승철
 

일본 해군이 두 번이나 난출해 도발했지만 훈도를 비롯해

부산첨사, 동래부사는 속수무책이었다.

 

부산 첨사와 동래부사는 일본 해군이 구초량리에서 난동을 부릴 때

무력을 동원해 진압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못했다.

 

신식 총으로 무장한 일본 해군을 제압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첨사와 동래부사는 훈도를 닦달하기만 했다.

잘 타일러서 다시는 난출하지 않게 하라는 닦달이었다.

 

중앙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출 보고를 받은 의정부에서 제시한 대책은

“행패를 부린 일본인들에게 속히 해당되는 형률을 시행하라는 뜻으로

훈도를 시켜 우두머리 왜인에게 따지게 해야 하며,

왜관 근처에서 파수하는 등의 일을 조심해서 거행할 것을 신칙(申飭)”하는 것이었다.

 

난출한 일본인들을 직접 체포해 처벌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자신이 없어서

훈도와 경비병에게 책임을 전가한 셈이었다.

 

10월 26일 초량왜관에 머물던 일본 해군 85명이

작은 배 6척에 나누어 타고 진하면 좌일리로 가서 포구에 정박했다.

 

배에서 내린 55명은 마을 사람들이 포구로 오는 것을 막았다.

상륙한 55명은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지만 배에 남은 30명은 무기를 소지했다.

 

조선에 아무런 통고도 하지 않은 채 좌일리 포구에 난출한 일본 해군은

마치 제나라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민간인들의 접근을 통제하듯이

마을 사람들의 접근을 통제했다.

노골적인 난출에 더해 영해침해, 주권침해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문제는 경상좌수사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근대 군함과 신식 총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의도적으로 난출해 도발했다.

처음에는 평화적이던 난출이 점차 폭력적으로 변했다.

난출의 범위 역시 점차 넓어져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았다.

부산 첨사와 경상좌수사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구식 군대와 구식 무기밖에 없었다.

크게 무력충돌을 벌였다가는 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기에

부산첨사와 경상좌수사는 말로 해결하려 들었다.

 

자신만만해진 일본정부는 난출에서 더 나갔다.

아예 조선에 파병해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1873년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했던 정한론을 실현하려는 의도였다.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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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