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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강화53돈대탐방

강화나들길 걷기 연미정

by 한국의산천 2014. 4. 16.

강화나들길 걷기 연미정 [2014 · 4 · 16 · 오전에 안개비가 내리고 오후부터 하늘이 개인 수요일]

 

  오늘 걷기 목적지는 강화 교동도 화개산과 교동도 답사를 계획했지만 창후리 선착장은 썰물로 인하여 바닥이 너무 낮기에 배가 뜨지 않았다.

오후 3시경에 배가 뜬다고 하기에 강화나들길 1코스를 따라서 연미정까지 다녀오기로 급변경 했다. (원점회기 10km)

 

  집사람과 딸에게서 카톡이 계속온다. 확인해보니 제주도행 배가 조난을 당하고 기울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오전에 뉴스 소식으로는 미리 움직이면 모두 구조 될듯한 상황이라는 뉴스보도를 보았는데 나들길을 돌고와서 보니 사태가 매우 심각했다.

 

우선 오늘 사고로 인하여 영면하신 꽃다운 청춘들에게 애통함과 함께 명복을 빕니다.

현재 실종으로 확인되는 분들의 조속한 무사귀환을 기도합니다.

   

 

 

 

▲ 강화시내에서 우회전하여 고려궁지방향으로 들어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이길로 드어서면 용흥궁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고려궁지와 북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용흥궁 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배낭끈을 조여매고 출발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도보여행자에게는 신발이 전부다. 모자니 셔츠니 명예니 덕목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 다음의 문제다.

  속담에서 오직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첫걸음이라지만 그 첫걸음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그 첫걸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한동안 규칙적인 생활의 고즈넉함에서 뿌리가 뽑혀 예측할 길 없는 길과 날씨와 만남들과 그 어떤 다급한 의무에도 매이지 않는 시간표에 몸을 맡기게 된다.

 

 

 

 

 

 

▲ 첫번째로 철종께서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머무르셨던 용흥궁을 찾아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철종의 잠저지(潛邸址) 용흥궁 (지방유형문화재 20호) ⓒ 2014 한국의산천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

  이곳은 시내 도로에서 고려 궁지로 가는 중 성공회 사적지 바로 못미쳐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으며 강화도령 철종이 임금님으로 등극하시기 전에 기거하시던 잠저지이디.

원래는 3칸짜리 초가집이었으나 임금님이 되신지 4년 되던 해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문을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비각안에 '철종잠저구기'라 적혀 철종이 머물던 곳임을 표시하고 있다. 강화시내를 남북으로 지나는 도로에서 주택가쪽으로 약 5분거리 (안내판 있음: 용흥궁)

 

 

 

  골육상쟁의 제물이 되는 운명을 피하려고 왕족이 한낱 나무꾼이 되어 살다가 갑자기 부름을 받고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이 살던 곳에 지금은 철종 잠저지(潛邸址)의 비가 서 있다.(잠저비 표지석은 문안 왼쪽 누각안에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중에 은신군, 은전군은 자식이 없었고, 은언군만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상계군은 역모를 꾀한 자들이 추대한 죄로 정조때 처형되었고, 은언군도 처형되고, 풍계군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남은 사람은 전계군 뿐이었는데  전계군은 아버지와 형들이 비명횡사하는 것을 보고 자랐고 집안은 거의 쑥대밭이 되어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며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였다. 전계군이란 것도 나중에 아들이 철종이 된 후에 붙여진 칭호이며 그 전에는 왕족 대우도 받지 못했다.

   전계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원경(元慶)이 또 안동김씨들에 의해서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그래서 둘째인 영평군(나중에 붙인 이름)과 셋째 원범(元範)만 남게 된 것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철종(이원범)의 유명한 별호는 바로 "강화도령"이다. 안동김씨 세도 이후 왕가의 직계를 제외한 왕손들이 역모로 많이 사망하자,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은 자신이 왕족임을 숨기고 먼 강화도에 와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있었으며 철종은 자신을 데리러 궁에서 나올때까지 자신이 왕족인것도 몰랐다고 했다.

 

사연인즉 순조가 죽기전에 세자인 효명세자가 사망하자 어린 왕손인 헌종이 왕이 되고 이 헌종이 24세 어린 나이에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왕의 직계에서는 적당한 인물이 없게된다. 그 때 흥선대원군의 옹립이 유력하였으나 안동김씨에서 반대하여 강화도에서 이원범을 데려와 철종으로 세우게 된다. 

 이후 철종은 안동김씨의 엄청난 세력에 휩싸여 제 뜻을 펼치지 못하고....

 

 

▲ 뒤뜰에는 아픔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라일락꽃이 진한 향을 풍기며 활짝 피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오늘 함께 동행해 주신 '운산의 봄'님께 감사드립니다 ⓒ 2014 한국의산천

 

계속해서 성공회 성당으로 이동합니다

 

 

▲ 강화 성공회 성당 (사적 제 424호) ⓒ 2014 한국의산천

1900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사찰이나 우리의 전통가옥과 흡사한 강화 성공회 성당  

 

  조선 후기에 전파된 천주교는 조선의 전통적인 제사 의식 등을 부정햇기때문에 극심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양 여러 나라와 수교를 함에 따라 탄압이 없는 상태에서 새로 들어온 종교가 개신교와 성공회이다. 

 

  영국 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둘러싸고 카톨릭 교황청과 갈등을 빚으면서 설립된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로 출발했다. 성공회는 영국뿐만 아니라 지금은 세계로 전파되어 각 나라별로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 개혁 시기에 성립된 성공회는 구교와 신교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여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로마교회와 그리스정교회의 분열 이전의 초대교회의 신앙을 지키려 하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성공회는 우리나라에는 1890년 영국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선교 초기부터 우리 문화에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썼다.

 

 

▲ 현재도 미사를 드리고 있는 성당 내부입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운치있는 성당이라 미사도 더욱 엄숙한 느낌이날듯 ~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250에 위치한 성공회 성당 ⓒ 2014 한국의산천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이라고도 한다. 1896년(고종 33)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11월 15일 이곳 강화에 한국 최초의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 사적 제 424호 성공회 성당 ⓒ 2014 한국의산천

 

   성공회(聖公會, The Anglican Domain)는 1890년 9월 조선에 처음 전파되었는데, 강화에는 1893년 봄에 코프(C. J. Corfe) 주교가 갑곶에 거점을 마련하면서부터이다. 그렇지만 같은 해 7월 워너(L. O. Warner) 신부가 파송되어 본격적으로 강화에서 성공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현재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트롤로프(趙瑪可, M. N. Trollope) 주교가 설계, 감독하여 건축한 것이다. 건물의 배치는 외삼문과 내삼문, 성당, 사제관으로 구성된 한옥건물이다.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졌는데, 위에는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고려궁지로 가기위해 성당 후문에서 나와서 바라본 성당 풍경  

 

 

▲ 성공회 성당 뒤편에 세워진 이 굴뚝 어디서 보았더라? ⓒ 2014 한국의산천

그렇다 경복궁 답사때 교태전 뒤편 후원 아미산에 세워진 보물 810호의 굴뚝과 매우 흡사하다 (아래 사진 참고) 

 

 

▲ 경복궁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 아미산에 세워진 굴뚝 (보물 810호) ⓒ 2014 한국의산천   

- 굴뚝 위를 자세히 보면 연기가 빠져나가는 집 모양의 장식인 연가(煙家)가 있다.

 

  교태전 후원의 굴뚝 몸통이 이렇게 굵은 이유는 굴뚝 제일 상단에 있는 연가(燃家)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연가가 4개이므로 4군데의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를 내보내는 것을 각각 한군데로 모아서 만들어 놓은것이다.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 경복궁內  교태전의 후원 아미산 에 세워진 아름다운 굴뚝 ⓒ 2014 한국의산천 

 

  굴뚝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으로 쌓고 육각의 각면에는 네 가지 종류씩의 무늬를 구성하였다. 제일 아랫부분은 벽사상을 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 십장생, 사군자 또는 만자문을 조각했다. 그 위에 다시 봉황과 귀면 등이 부조된 네모 반듯한 벽돌을 끼웠고,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으로 구성하였다.

  이들 무늬 위로는 목조 건축물의 소로와 창방, 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를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물론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이지만, 그 형태나 위치가 마치 정원과 어울어진 환경조각품과 같이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계속해서 고려궁지로 이동합니다

 

 

▲ 북문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고려궁지. 승평문 ⓒ 2014 한국의산천 

고려 고종 이후 외적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뒤 39년 동강화의 작은 궁궐 고려궁지. 이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승평문은 궁의 정 남문 이었다. 즉 지금의 선원비각 주위에 있었다 하며 왕이 거동할 때에 전용 하였고 환궁할 때에는 조정대신 이하가 문 밖에서 하마(下馬)하여 영입하도록 되었다. 이 문루는 삼문으로 되었으니 가장 광대하였고 오직 임금만이 출입하며 외국사신도 옆문으로 통용케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하세한 후 다음해 태자(太子) 전이 몽고로부터 환도함에 있어 승려(僧侶) 대강화상(大康和尙)과 함께 승평문(昇平門)으로 들어오게 하셨다고 전례에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 고려궁지를 지나며 ⓒ 2014 한국의산천 

고려궁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官廳里)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로서 사적 제133호)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開城)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이다.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 기단(基壇)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 있었으나 후에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건물이 세워졌으며, 1976년에는 3문의 출입문을 세우고, 돌담을 돌려 국방유적으로 정화하였다. 

 

 고려사절요에 최우가 이령군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을 지었다고 한다. 비록 작은 규모였지만 궁궐의 풍모는 송도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다.
각 건물의 명칭을 전부 송도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 뒷산도 송악산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모두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고려궁지는 정문인 승평문과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고 동쪽에는 광화문이 있었다.

 

 

▲ 북문으로 오르는 길은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은 꽃잎이 져서 아쉬운 풍경만... ⓒ 2014 한국의산천 

 

  고려궁지의 인근에는 오읍약수터와 잘생긴 관청리 은행나무가 있는데, 은행나무는 고려궁지 대형 주차장 옆 30m 지점에 있다. 그리고 약수터는 고려궁지 입구에서 왼쪽으로 고려궁지 담을 끼고 시멘트 포장된 오르막길을 5분 여 걸어서 강화산성 북문을 지나 다시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다. 물맛이 아주 좋고 또 산책삼아 걷기에 좋아 인근의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계속해서 강화산성으로 이동합니다

 

 

▲ 북문은 현재 보수공사중입니다 ⓒ 2014 한국의산천 

 

강화산성 사적 제132호

고려궁지 앞길로 산비탈을 올라가면 고려산성이 있다.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착공하였는데,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여 2년 후인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 성은 내성(內城)·중성·외성이 이루어져 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3,874자(1,174m),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쌓았고, 외성은 1233년에 지었다. 이 성들은 모두 흙으로 쌓은 토성인데,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仙源面)의 토성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길이가 3만 7070자(1만 1232m)였다. 그러나 1270년 다시 개경(開京)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 성벽 옆으로 난길을 따라 북장대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강화산성은 조선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고, 1677년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돌성[石城]을 쌓았다.

 

  서문인 첨화루(瞻華樓)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세웠고, 남문인 안파루(晏波樓)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했고,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할 때 세웠고,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는 200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암문(暗門) 4개소와 수문(水門) 2개소가 남아 있다. 

 이 산성을 지나 조금 내려가면 임진강과 북녁땅이 보이고 물맛이 좋은 약수터가 있다.

 

 

 

 

▲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가는 일행도 생겼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모든 대지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며 걷는 존재성의 의미를 느낄 때 걷는 이는 진정 걷기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걷는 이들에게 길은 하나의 생명으로 숨쉰다. 낯선 여행지를 가듯 길을 걸으면, 만나게 될 자연과 사람 그 외 모든 것들이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존재가 되고 길 곳곳엔 새로움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산재하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 멋지게 생긴 느티나무 아래 송악골 빨래터를 지나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빙~고 ~ !!!! 연초록 색깔의 나뭇잎과 공기가 상쾌한 숲길입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삼림욕

  최근에 삼림욕(山林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 삼림욕이라는 용어도 목욕이나 일광욕이라는 단어처럼 일상생활에 친숙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삼림욕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 후 전국의 주요 숲에 많은 삼림욕장이 조성되었고, 삼림욕을 하는 일반인들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삼림욕이 급속히 붐을 일으킨 요인은 공해와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들이 자연 속에서 자기를 보호하고 몸을 살리고자 하는 욕구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도심을 탈출하여 자연 경관을 감상하며 기분을 전환하고 시각적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것을 넘어서, 건강증진과 치유적인 효과를 거두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산을 찾는 웰빙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삼림욕을 다른 말로 녹색샤워(Green Shower)라고도 한다. 삼림욕은 숲과 나무가 주는 녹색효과(Green Effect)-뇌의 알파파 증가, 녹색의 심리적 안정 효과 등을 몸으로 체험하는 자연건강법 입니다. 삼림욕을 통해 우리는 숲의 정기를 온몸으로 마시고 접한다. 삼림욕의 효과는 활엽수보다는 소나무, 잣나무, 편백나무 같은 침엽수 숲에서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산을 넘어서 농로를 지나고 가끔은 도로를 따라 가기도 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산에는 벚나무가 피어서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길에서 만난 하얀 민들레와 노란 민들레 ⓒ 2014 한국의산천  

 

 

 

 

▲ 이제 연미정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대산리에서 길을 위쪽으로 들어서 왔기에 민통선 검문소 위쪽에서 검문소를 역으로 지나서 왔습니다 ㅎ ⓒ 2014 한국의산천

 

 

▲ 연미정 바로 아래 자리잡은 조립식으로 지은 식당에서 식사를 부탁하면 직접지어서 해줍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이곳에서 식사를 먼저 주문하고 연미정에 오르고 내려오면 밥을 새로 지어서 내줍니다. 누룽지와 숭늉과 함께 참 맛있는 백반입니다  

 

 

▲ 식사를 주문하고 연미정으로 올라 갑니다 (식사는 15~20분정도면 준비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이곳에 오르면 북녁땅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보입니다 ( 밖으로는 촬영금지구역이기에 촬영을 안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24호인 연미정(燕尾亭)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정자로 민통선 안에 북한 땅이 마주 보이는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월곶돈대 내에 위치해 그동안 군부대의 검문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돼었으나 2008년에 완전 개방되었다.

 

연미정은 고려 고종이 학생들을 이곳에서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조선 중종 7년(1512)함경도 지방의 야인들의 반란을 진압한 순변사 황형에게 정자를 하사했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燕尾)라 하였으며,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곳이기도 하다.

 

 

 

 

 

 

▲ 연미정 주변에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고풍스러움과 한껏 멋스러움을 더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몇해전일까? 친구들과 산악자전거를 타고 이곳까지 달려왔다 ⓒ 2014 한국의산천  

 

 

▲ 언젠가 자전거 타고 이곳을 찾은날. 뒤로 가깝게 보이는 땅이 북녘땅이다 ⓒ 2014 한국의산천

 

 

 

 한끼의 검소한 식사가 때로는 최고의 만찬보다 더 나은 것이니 그 포만감과 유쾌함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다. 온종일 걷고 난 뒤의 허기와 달콤한 피로가 뒷받침하게 되면 별것 아닌 음식이 침을 고이게 하는 미식으로 변한다.

 

 

▲ 연미정을 돌아보고 내려오니 맛갈스럽게 식사가 준비되어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막 지어낸 밥, 백반에 찌게 2가지 그리고 나물, 냄비의 누릉지에 물을 부어 다시 끓여서 구수한 숭늉을 만들어줍니다 (1인분 5,000원) 

먼길을 걸어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밥이 구수하고 정말 맛있습니다.

 

 

 

 

▲ 식사 후 잠시 휴식하고 출발하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상호는 할머니 식당 월곳 매점입니다

 

 

▲ 이제 연미정을 떠나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출발지로 돌아가는 길은 주로 도로변을 따라 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동문을 지나서 용흥궁으로 이동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용흥궁 공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성공회 성당이 반겨줍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출발지점으로 안전하고 즐겁게 원점회기하였습니다 (오늘 코스:10km / 점심,간식시간 포함 4시간) ⓒ 2014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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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