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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강화53돈대탐방

춘래불사춘 덕포진 손돌목 손돌묘 둘러보기

by 한국의산천 2016. 3. 12.

토요일 아침 덕포진을 찾았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걷기예찬 

도보여행자에게는 신발이 전부다.

모자니 셔츠니 명예니 덕목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 다음의 문제다.


춘래불사춘 ( 春來不似春) :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

 

 

"걷기는 가장 우아하게 시간을 잃는 법이다"

 

걸어서 행복해져라

걸어서 건강해져라 - 찰스 디킨스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온갖 세속적 얽힘에서 벗어나 산과 들과 산속의 숲속을 걷지 못한다면 나는 건강한 영혼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할 것 같다."

 

 

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 사적 제292호)

건립시기 :1679년 

소재지: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이곳은 돈대(墩臺)와 포대(砲臺) 및 파수청(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되었다.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와 싸웠던 격전지이다. 또,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는 파수청터가 있는데, 이곳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한 장소로 생각된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7개의 포탄과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고,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또, 돈대터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광성보와 맞서 있는데, 시야가 막힌데다가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르며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고려고종이 몽고병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에 배를 타고 이곳의 바닷길을 지나다가 위험을 느낀 나머지 사공이 흉계를 꾸몄다고 오해하여 그를 처형하였으나,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가자 잘못을 뉘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근에는 당시 사공이었던 손돌(孫乭)의 무덤이 있으며, 지금도 덕포진 앞의 좁은 바닷길을 손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 손돌이야기 ⓒ 2016 한국의산천

 

 

 

 

- 길위의 만찬

   먹기위해 잠시 멈추는 일은 언제나 축복의 순간이자 훌륭히 전진한데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 식사는 시간을 멈춘 명상의 순간으로서 일상의 습관을 떨쳐내기 위한 돌파구가 된다.

    식사에서 최고는 음식의 맛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음미한다는 사실이다. 버터를 바른 빵조각 몇개를 나누어 먹더라도 식탁을 함께 나누고 관계를 축하하며 들뜨면서도 평화로운 사회관계의 정점을 누린다

 

키에르케고르는 1874년에 제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쫒아버릴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생각은 하나도 없다."

 

니체는 '환희의 지혜'라는 한 아포리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 몫을 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들판을 가로질러서 때로는 종이위에서 발은 자유롭고 견실한 그의 역할을 당당히 해낸다."

또한  그의 불후의 명저인 '차라투스트라'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심오한 영감의 상태, 모든 것이 오랫동안 걷는 길 위에서 떠올랐다. 극단의 육체적 탄력과 충만이"


"걷는다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것에만 이 세계를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걷는 것은 헐벗음의 훈련이다. 걷기는 인간을 세계와 정대면하게 만든다."

"걷기는 시건을 그 본래의 조건에서 해방키켜 고간 속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속으로 난 길을 찾아 가게 한다." 결국 걷기란 인간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걷기는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경험하는 자는 그 순간 그 경험의 주도권이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목적이 없이 그냥 길을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재를 에돌아가서 길의 종착점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해 걷는다. 전에 알지 못하던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해 걷는다. 길이 거기에 있기에 걷는다. 걷기는 신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또 새로운 출발이 아닌가?

 

  "보행은 세계의 희열을 향한 자기개방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면적인 휴지와 평정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변 환경과 몸으로 만나는 일이므로 우리는 여러 장소의 감각적 조건에 끊임없이 혹은 거리낌이 없이 자신을 맡기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걷는 사람은 그렇게 바삐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아주 멋진 말을 남기며 글을 맺는다.

"지구는 둥글다. 그러므로 그 지구를 태연한 마음으로 한 바퀴 돌고나면 우리는 어느 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 덕포진 손돌묘에서 바라 보이는 초지대교 ⓒ 2016 한국의산천

 

춘래불사춘 출전 찾아보기 

 

漢道初全盛  한(漢)나라 국운 처음에는 융성했으니
朝廷足武臣  조정에는 무신도 넉넉했다네
何須薄命妾  어찌 꼭 박명한 여인이
辛苦遠和親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화친하러 가야 했던가

 

掩涕辭丹鳳  흐르는 눈물 가리고 단봉성을 떠나
銜悲向白龍  슬픔을 삼키며 백룡대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單于)는 놀라 기뻐했으나
無復舊時容  더 이상 옛날의 그 얼굴 아니었다네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 동방규(東方) 〈소군원(昭君怨)〉 삼수(三首)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唐)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에서 ‘춘래불사춘’이 유래했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의 〈원제기(元帝紀)〉와 〈흉노전(匈奴傳)〉, 그리고 《후한서(後漢書) 〈남흉노전(南匈奴傳)〉》에 간략하게 보이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다듬어 놓은 왕소군의 슬픈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BC38),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본명 왕장(王嬙))도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연수(毛延壽) 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버렸다. 왕소군은 입궁한 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원제 경녕(竟寧) 원년(BC33),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호한야는 왕소군을 지목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원제는 연회가 끝난 후 급히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한 원제는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흉노 땅에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여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호한야의 본처 아들인 복주루(復株累) 선우가 왕소군을 취하려 하자 왕소군은 한나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성제(成帝)에게 서신을 올렸으나 성제는 흉노의 습속을 따르라고 명했다. 왕소군은 다시 복주루의 연지(閼氏, 선우의 황후)가 되어 딸 둘을 낳았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다. 왕소군의 묘는 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남쪽 9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청총(靑塚)’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나온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한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소군의 미모를 ‘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등의 각종 문학 양식을 통해서 그 형상이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김성일 著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오래 전 둘러 본 덕포진 >>> https://koreasan.tistory.com/2745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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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