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탐방
강화 해양관방유적 5진 7보 53돈대 둘러보기 출발!
강화 나들길 2코스 : 호국 돈대길 라이딩
[ 2019 · 4 · 6 · 토요일 / 흐리고 오후에 비 내림]
▲ 초지진
초지진 ~갑곶돈대~ 초지진 왕복하기
강화도 나들길 2코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로써 해안가 철조망은 남북대립의 상징물이며
5진7보53돈대의 옛 군사적 방위시설을 잇는 국방유적인 호국 돈대길.
이 코스는 몇번 달렸던 길이지만
오늘은 라이딩과 더불어 돈대에 입장하여 직접 걸어서 답사하기로 했다
외침의 역사가 스민 53돈대
그길이 질기고 멀어도
전 구간을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찾아서 돌아 볼것이다
▲ 강화도 53개소 돈대 지도 ⓒ 2019 한국의산천 우관동
오랜시간에 걸쳐서 강화도 돈대 53개 위치를 찾아 다시 기입하였다
흔적이 희미한 곳도 있고 어명을 받아 폐쇄된 곳도 있고 흔적조차 사라진곳도 있지만
위치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지도상에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지만
일단은 길을 나섰다
비가 내리면 다시 돌아오면 될것을...
제법 쌀쌀한 날씨
비에 대비하여 고어텍스 상의를 입고
대명리에서 출발하여
초지대교를 건너서 초지진을 시작으로 라이딩 시작
강화에 남아있는
5진 7보 53돈대 둘러보기 출발.
돈대(墩臺)
본래는 평지보다 높직하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이란 뜻인데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요새로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을 말한다.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며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강화도 해안가에는 1679년(숙종 5) 5월에 48돈대가 세워졌으며 그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강화 해양관방유적 5진 7보 53돈대
진이 규모가 크며 돈대는 보에 속해있는 작은 규모이다.
1.강화 5진
1)월곶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월곶리.
2)제물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갑곶리.
3)용진진 : 강화5진의 하나. 선원면 연리. 향토유적 제8호.
4)덕진진 : 강화5진의 하나. 불은면 덕성리. 사적 제226호.
5)초지진 : 강화5진의 하나. 길상면 초지리. 사적 제225호.
2.강화 7보
1)광성보 :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7보의 하나. 사적 제227호.
2)선두보 : 강화7보의 하나. 길상면 선두리.
3)장곶보 : 강화7보의 하나. 화도면 장화리.
4)정포보 : 강화7보의 하나. 내가면 외포리.
5)인화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인화리.
6)철곶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철산리.
7)승천보 : 강화7보의 하나. 송해면 당산리.
3.강화 53돈대
가리산돈대, 갈곶돈대, 갑곶돈대, 건평돈대, 검암돈대,
계룡돈대, 광성돈대, 광암돈대, 굴암돈대, 귀등돈대,
낙성돈대, 덕진돈대, 동검북돈대, 망양돈대, 망월돈대,
망해돈대, 무태돈대,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분오리돈대,
불장돈대, 빙현돈대, 삼암돈대, 석각돈대, 석우돈대,
섬암돈대, 소우돈대, 손돌목돈대, 송강돈대, 송곶돈대,
숙룡돈대, 양암돈대, 염주돈대, 오두돈대, 옥창돈대,
용당돈대, 월곶돈대, 의두돈대, 인화돈대, 작성돈대,
장곶돈대, 장자평돈대, 적북돈대, 제승돈대, 좌강돈대,
천진돈대, 철북돈대, 초지돈대, 초루돈대, 택지돈대,
화도돈대, 후애돈대, 휴암돈대 - 이상 53개소.
정리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과거의 사실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역사란 긴 세월에 걸쳐서 쌓여진 금맥(金脈)이다. 그 금맥은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황금사다리가 되어준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역사가 없는 미래를 생각 할 수는 없다.
역사를 단순히 옛날 이야기나 지나간 일로 치부할 때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조상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 후손에게 물려 줄때에 우리의 미래는 빛날것이다.
오늘 답사지
초지진
덕진진, 남장포대, 덕진포대,덕진진 경고비
광성보,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 돈대, 신미순의총,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 초지대교 중간에서 내려다본 초지진
수도권에서 가깝고 접근성이 좋은 섬 강화도
그렇기에 주말에는 많은 차량으로 다소 정체가 심하지만 그래도 좋은 곳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는 노천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적지가 많으며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볼거리와 먹을거리 많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곳이다.
대명리에서 초지대교를 넘어서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00m 정도 가면 초지진이 나온다
역사의 상처를 간직한 곳, 강화도 초지진
강화도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효종 7년에 구축한 요새이자,
고종 8년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로저스 아세아 함대와 고종 12년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성곽의 둘레는 500m정도 밖에 되지 않은 작은 규모이지만 적군의 침략을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수 많은 전투로 성곽이 모두 허물어져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았다가 1973년 성곽을 보수하였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의 격전지 였던 초지진은 역사적 아픔이 있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바라 보이는 풍경은 김포와 강화도를 이어주는 초지대교와 함께 염하강 앞바다가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초지진
초지진은 1656년(효종 7)에 안산에서 옮겨왔다.
초지진에서 초지돈대·장자평돈대·섬암돈대를 맡아 지휘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미군과 충돌했던 격전지이다.
1875년(고종 12) 일본 운요호 사건 때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당시 초지진을 지키던 조선군은 일본군을 격퇴했다. 패퇴한 일본군은 철수하면서 영종도를 해코지했다.
이후 초지진은 허물어졌고, 초지진이 관할했던 초지돈대만 남았다.
정비된 초지돈대 안에는 대포가 전시돼 있다.
돈대 옆 소나무에는 신미양요 혹은 운요호 사건 때 포탄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길
- 이 영 춘
문득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본다
왠가 꼭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이 길
가는 곳은 저기 저 계곡의 끝
그 계곡의 흙인데
나는 왜 매일매일
이 무거운 다리를 끌며
가고 있는 것일까
아, 돌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이 길.
▲ 덕진진 문루인 공조루 (사적 226호)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하는 덕진진은
강화에서 가장 큰 화력과 중요한곳을 지키는 곳이었다
강화군 불은면에 위치한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은 내성, 외성, 돈대, 진보 등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덕진진이다.
실제로 1866년 프랑수군의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의 부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으며,
강화도 덕진진에 외국 선박 항해 금지 선언비를 세웠다.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극동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페리 제독의 외손자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조선 강화도 염하(鹽河)에 진입했다.
조선 수군이 김포와 강화 양안에서 선제 포격을 퍼부었다.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돌아보면 각성과 준비와 실천의 부재가 만든 전사들의 안타깝고도 장엄한 죽음이었다.
원래 덕포진이 강화에 있었는데 1666년(현종 7)에 통진(지금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 덕진진이 설치됐다.
덕진진은 손돌목돈대와 덕진돈대를 관할했다.
숙종 대에 이곳에 덕진정사라는 행궁을 지었다. 이후 행궁이 읍내에 새로 건립되면서 덕진정사는 폐지됐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지금 덕진진에는 문루인 공조루, 남장포대, 덕진돈대 그리고 대원군이 세운 해문방수비가 있다.
해문방수비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졌다.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 덕진진에서 염하 건너로 보이는 덕포진 포대
덕포진 상세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344
▲ 남장포대
강화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였던 포대이며
강화 12진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 덕진돈대
▲ 봄꽃이 피면 더욱 멋진 덕진진 공조루
▲ 멀리 진입로에서도 웅장하게 보이는 광성보 안해루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강화 광성보는 강화도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중 하나로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바닷길을 따라 돌과 흙을 이용해 강화외성을 쌓았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한 곳이다
성내에는 쌍충비각, 무명용사비, 신미순의총 등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어재순 형제의 충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탑들도 조성되어 있다.
▲ 멋진 위용을 자랑하는 광성보의 안해루
광성보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로, 1658년(효종 9)에 설치됐다.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어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했다.
이미 병인양요 때 광성보에 근무한 바 있던 어재연이 포격을 피할 안전한 장소에 군사들을 숨겼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미군은 광성보 전투 후 소득 없이 물러갔다. 미군의 처지에서 볼 때 신미양요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한 사건이었다.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으며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이 있다.
▲ 1871년 신미양요 때 미 해군이 빼앗아 미 군함에 걸려있는 '어재연 장군기'. 일명 '수자기(帥字旗) (출처:Chosun.com)
수자기는 조선시대 각 군영이 훈련을 할 때 지휘권의 상징으로 내걸던 삼베로 만든 장수의 깃발이다.
어재연 장군기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진 지휘 장수였던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장군이 사용했던 깃발로
미군이 그 당시 가져간 수자기는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4.5m나 된다.(그 당시 우리나라는 국기가 없기에 장군기를 성루에 게양했다)
미군측의 기록을 보면 당시 포대에 꽂혀있던 수자기를 조선군 포수 네댓명이 몸으로 꽁꽁 묶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신미양요)으로
이 전쟁에서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긴 미국 해군은 조선군의 대포 등 상당수의 전리품을 함대에 싣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수(帥)자기였다.
[매천야록 내용] 미국 군함의 침입을 막다가 어재연 전사하다.
신미년(1871 고종8년) 여름에 미국인들이 강화도를 침범했는데, 전병사 어재연(魚在淵)이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나가 싸우다가 패해 죽었다.
어재연은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로 들어가 배수진을 치고도 척후병을 세우지 않았다. 적군은 안개가 낀 틈을 타 엄습했으며, 보(堡)를 넘어 난입했다.
어재연은 칼을 빼들고 맞서 싸웠지만 칼이 부러졌다. 그래서 연환(鉛丸:납탄)을 움켜지고 던졌는데, 맞은자들은 그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연환마저도 다 떨어지자 적들이 그를 창으로 마구 찔렀다.
그가 반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자 적들이 그의 머리를 베어갔다. 어재연은 죽었지만 적들은 또 다른 방비가 있는 줄 알고 곧 달아났다.
패보가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에서는 깜짝 놀랐다.
조정에서는 그를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이라고 했다.
그의 상여가 돌아오자 모두 조정을 비우고 나가 맞았는데, 이를 맞이하는 수레와 말이 수십리나 이어졌다.
어느 노인이 말했다.
"순조 계유년(1813 순조13년) 충장공 정시(鄭蓍)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어재연의 아우 어재순도 백의 종군 했다가 형과 함께 죽었다. 그도 이조참의에 추증 되었다. [매천야록 1권 상]
어재연 장군과 수자기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4094837
▲ 마을 앞 도로에 있는 어재연 장군 생가터 이정표ⓒ 2008 한국의산천
중부고속도로 일죽IC에서 나가 왼쪽 남동 방향 306번 도로를 타고 생극 방향으로 가다보면 중간 지점 율면에 있다.
▲ 춘설이 내리는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1리 소재 어재연(1823~1871) 장군의 생가 ⓒ 2008. 3. 4. 한국의산천
지정번호:중요민속자료 제127호 (지정연도:1984년 1월 10일.시대:조선시대 )
소재지:경기 이천군 율면 산성리 74 / 크기:안채 7칸, 사랑채 4칸
▲ 광성보 안해루
광성보는 강화의 모든 진보 돈대중에서도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경관또한 좋기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곳이다
키크고 우거진 소나무 숲길과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
바다를 향해 길게 벋어나간 용두돈대와 원형의 손돌목 돈대는 보는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광성돈대를 둘러본 후 안해루 안쪽으로 들어서면 산책로가 이어져 있으며,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강화군과 경기 김포시 사이에 위치한 해협인 강화해협을 볼 수 있다.
강화해협은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로 마치 강과 같다하여 염하(鹽河)라고도 불린다.
▲ 손돌목 돈대에서 염하 너머로 보이는 손돌의 묘 (위 사진 왼쪽)
▲ 자연지형을 따라 만들어진 아름다운 용두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면 강화해협과 바로 맞닿아 있는 용두돈대를 볼 수가 있다.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을 이용해 설치된 용두돈대는 고려시대부터 천연 요새로 중요시 되었으며, 1679년(숙종 5년)에 설치됐다.
비가 뿌린다
과거의 역사를 되새겨 보고 귀가하기
▲ 이슬비를 맞으며 귀가하기
비가 내린다
급한일은 없다
서둘러 바쁘게 가야할곳도 없다
오늘 못다본 곳은 다음으로 미루고 귀가하기
2018년 강화 나들길 2코스 라이딩
http://blog.daum.net/koreasan/15606650
강화 나들길 8코스 라이딩
http://blog.daum.net/koreasan/15606769
강화 나들길 15코스
'MTB등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말라야 화보] 세계의 지붕 속으로.히말리야 14좌 (0) | 2019.04.11 |
---|---|
순례길·올레길도 좋지만 고향길 만한 게 있을까 (0) | 2019.04.07 |
봄 산불통제 기간, 산행 가능한 산은? (0) | 2019.04.04 |
강화도 나들길 8코스 (0) | 2019.03.24 |
강화도 나들길 8코스. 개인사진 (0) | 2019.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