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허세의 제국이 문을 닫았다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8.12.12 03:19 | 수정 2018.12.12 10:27
[147] 을사조약과 군함 양무호
박종인 기자
제국, 군함을 도입하다
1903년 1월 25일 대한제국 군부대신 신기선이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과 군함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군함 이름은 훗날 양무호(揚武號)라고 지었다.
석 달 만인 4월 15일 양무호가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했다. 규모는 3000t이 넘었고 배에는 80㎜ 대포 4문과 소포 2문이 장착돼 있었다.
제국주의 세력이 호시탐탐 대한제국을 노리던 때이니 군비 증강은 필연이었다.
그해 7월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이 황제 고종에게 상소했다.
"당당한 우리 대한제국은 삼면이 바다인데도 해군 한 명, 군함 한 척이 없어 오랫동안 이웃 나라의 한심스럽다는 빈축을 사고 있으니
이보다 수치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1903년 7월 29일 '고종실록')
16세기 말 이순신이 만든 조선 해군을 부활시키자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여론이 이상했다.
'시국을 볼작시면 시급한 일을 정리하지 않아 위급하게 되었으니 군함 같은 일은 때를 기다려도 늦지 않으리라.'(1907년 6월 1일 '황성신문', '군함 사건을 논함')
황현이 쓴 '매천야록'을 본다. '고물인 데다가 누수까지 되어 빨리 항해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인을 고용하여 수선 작업을 벌이는 바람에 전후에 걸쳐 거액의 비용이 소모되었다(又敗漏不可駛 雇倭補苴 前後費巨額).'('매천야록', '1903년 일본군함 양무호 구입')
쓸데없는 고물선을 샀다는 것이다.
수수께끼의 군함
1903년 대한제국과 일본 미쓰이물산이 맺은 군함 ‘양무호’ 계약서.
‘군기는 적당히’ ‘즉위 40주년용 접객실 특설’ ‘미려한 서양 요리 기구 30인분’ 따위가 계약 조건이었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소문을 들은즉, 정부에서 일본인과 계약하고 군함 한 척을 구입한다는데,
그 가격은 50여만원이라 하고 신품 여부와 톤수(其艦軆新舊與噸數)는 아직 모른다더라.'
1903년 2월 9일 자 '황성신문'은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해오던 군함 도입 계획을 특종으로 보도했다.
이미 1월 25일 군부대신 신기선이 일본 미쓰이물산과 군함 도입 계약을 완료한 상태였다.
3월 18일 이 신문은 "황제 폐하가 군함을 '양무(揚武)'라고 명명했다"고 전했다.
배 이름은 원래 가치다테마루(勝立丸), 총톤수 3435t에 263마력짜리 엔진을 달고 있다는 기사도 튀어나왔다.
4월 15일, 계약 석 달 만에 군함이 인천 제물포에 입항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신제품이 아니오, 기십 년 전 일본의 고물인데
누차 파손돼 일본 해상에 세워뒀던 배를 정부가 고가에 매입했더라.
해군이 사용하려면 본래 연로하고 파손된 물건이라 곤란하다더라.'(1903년 4월 25일 '황성신문')
며칠 뒤 황성신문 기자가 배에 올랐다. '본래 영국에서 제조한 것인데 일본에서 구매한 지 8년이라.
소문과 대단히 다르게(逈殊) 극히 완전 양호하여 우리 한국에 처음 있는 신함(新艦)이니 굉장하더라.'(5월 4일 자 '황성신문')
중고품이지만 '신동급(新同級)'이라는 말이었다.
군졸 처소와 식당, 기계, 공구, 의약, 전등, 측량 기구, 병기, 무장 등 군함이 갖출 바를 완비하고
양총 150정, 칼 100자루, 육혈포 22정, 대포 4문, 소포 4문도 기자 눈에 완벽해 보였다. 겉은 그러했다는 말이다.
'명품으로 치장한 군함'
다음은 1903년 1월 25일 군부대신 신기선과 미쓰이물산을 대신한 임시대리공사 하기와라 모리이치(荻原守一)가 맺은 계약 부속 명세서 일부다.
'군기(軍器)는 적당히 완비할 일' '순양함 혹은 연습함의 목적에 변통(變通)함을 위함' '식당에는 미려(美麗)한 서양 요리 기구 30인분'
'사령관 이하 함장 사관 25인 침구는 화려(華麗)한 서양 물품으로 완비' '일체 무기는 적당히 탑재' '각 구경 대포 실탄 외에 예포(禮砲) 연습용 공탄과 소총 탄환도 물론 적당히 둘 일'.
1903년 대한제국은 일본 미쓰이물산으로부터 ‘군함’ 양무호(揚武號)를 구입했다. 포 4문을 단 케케묵은 화물선이었다.
110만원짜리 배는 그해 예정된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용 의전함이었다. 군함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는 애당초 없었다.
그해 대한제국 군사 예산은 412만원이었다. 사진은 1907년 부산세관 선원훈련선으로 전용된 양무호.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융통해서 쓰려는(變通)' 목적이었으니 대한제국 정부는 이 배가 신품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미려한 서양 요리 기구'와 '화려한 침구'가 조건이었으니 군사 전용선을 주문한 것도 아니었다.
무기는 '적당히' 완비하고 예포용 공포탄 또한 적당히 두라 했으니 더욱 엉성했다.
양무호 가격은 '일화(日貨) 55만엔', 110만원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군부(軍部) 예산은 세출 기준으로 412만3582원이었다.
한 해 국방예산 26.7%를 투입한 배가 군함으로 봐줄 수 없는 것이었다.
중고라는 사실을 알면서 써 재낀 돈이 그러했다.
오직 황제 기념식을 위하여
지금이라면 방산 비리로 줄줄이 사법 조치될 일이었으나 만사형통으로 넘어간 이유가 있었으니,
명세서 둘째 항목에 세 줄로 적혀 있는 조건 덕분이다.
'접객실을 특설하여 대한국 황실 경절 때 봉축에 공할 일.'
당시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은 이렇게 기록했다.
'1903년 1월 군부대신 신기선이 약 55만원(엔) 상당 전함(戰艦)을 일본으로부터 구입하는 발주 계약을 체결함.
이는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위해 발주한 것임.'(호러스 알렌, '근대한국외교사연표', 1904년)
때는 1903년, 고종이 나이 열한 살에 조선 26대 왕에 등극한 지 40년이 되는 해였다.
만 쉰한 살이 된 망육순(望六旬) 해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만방에 알리고 문명국가임을 자랑하려는 칭경예식 행사가 곳곳에 예정돼 있었다.
해군과 무관했다. 자주국방과도 무관했다. 군부대신이 주장한 '삼면이 바다인 당당한 제국'과도 무관했다.
오로지 40주년을 맞은 고종 황제 폐하 등극 기념식에 황제를 선상에 앉혀놓고 예포 몇 방 쏘려는 게 상고물 양무호를 수입한 이유였다.
기왕에 거액으로 구입한 배이니 기념식에라도 썼다면 다행이었으되, '군함 양무호'는 그 어느 바다에도 떠다닌 적이 없었다.
대신 양무호는 가난한 대한제국 곳간을 바닥까지 싹싹 훑어내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군복은 외제(外製)로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선포됐다.
사흘 뒤 탁지부대신 박정양이 의정부찬정 심순택에게 5만원 지급 요청 업무 연락을 띄웠다.
'(즉위식) 제반 비용을 결제해야 하는데, 금고가 텅 비었으니 이 어찌 군색하지 않으리오.'
이보다 열흘 전 박정양이 보낸 또 다른 업무 연락 제목은 '황제 도장(御寶) 제작용 황금 1000냥 구매 요청'이었다.
비용은 4만5000원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세출 예산 419만427원 가운데 52만원이 국채(國債)였다.
한번 솟구친 허세는 꺾일 줄 몰랐다. 고종은 군복에 쓸 철모를 독일 세창양행을 통해 수입했다.
대한제국은 이 철모를 대량으로 주문했다.(1899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 하인리히 왕자 증언, 이경미, '사진에 나타난 대한제국기 황제의 군복형 양복에 대한 연구' 재인용)
1900년 육군참장 백성기가 이렇게 상소했다.
"우리나라 군복을 꼭 외국에서 사와야 하겠는가?"(1900년 4월 17일 '고종실록')
3년 뒤 군부대신 신기선이 상소를 올렸다.
"육군 장교 군복 옷감을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은 장구한 미래를 위한 계책이 아니다."(1903년 1월 18일 '승정원일기')
1903년 대한제국 세입 예산은 1076만6115원이었다. 이 가운데 98만8250원이 그해 갚아야 할 빚이었다.
1903년 여름 콜레라가 창궐했다. 10월로 예정된 40주년 기념식은 이듬해 4월로 연기됐다.
1904년 4월 고종 막내아들 이은이 천연두에 걸렸다. 기념식은 무기 연기됐다가 취소됐다.
미쓰이물산은 제물포에 정박해 있는 양무호의 관리비와 원금, 이자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경비가 고갈되고 연례적인 지출도 걱정인데 긴요하게 쓸 것도 아닌 것에 거액을 소비한다는 말인가."(1904년 7월 27일 '고종실록', 의정부찬정 권중현 상소)
해군 창설도 취소됐다.
1905년 을사조약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덕수궁) 중명전 1층 회의실에서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11월 15일 일본 특명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에게 일본 천황 친서를 내밀며 승낙을 강요했다.
고종이 "사신 왕래 같은 형식은 보존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이토는 "외교에는 형식과 내용 구별이 없다"고 거부했다.
고종은 "외부대신에게 교섭, 타협에 힘쓰라고 하겠다"고 답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신명호,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재인용) 17일과 18일 사이 심야에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속칭 '보호' 조약이 체결됐다.
22일 이토가 탄 열차에 원태근이라는 사내가 돌을 던졌다. 원태근은 곤장 200대와 금고 2개월 형을 받았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1월 27일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가 "조약을 폐지하고 역적을 처단하라"고 상소했다.
황제는 "크게 벌일 일이 아니니 귀가하라"고 답했다.(1905년 11월 27일 '고종실록')
상소가 이어졌다. 고종은 "다 잡아들이라"고 명했다.(11월 28일 '고종실록')
11월 30일 쫓겨난 민영환이 집에서 자결했다. 황제는 그날 민영환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의정대신을 추증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2월 1일 조병세가 자결했다. 고종은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민영환의 시호도 충정으로 바꿨다.
을사 역적들이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모양 좋게 조처하라'는 폐하 명령대로 했을 뿐"이라고 상소했다.
고종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고 답했다.(1905년 12월 16일 '승정원일기') 세월이 갔다.
중명전 기념사진과 고종
정미년인 1907년 7월 19일 고종이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나흘 뒤 정미조약이 체결됐다.
군사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소령 박승환이 자결했다.
그날 남대문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최초로 맞붙은 시가전이었다.
전투는 반나절 만에 일본군 승리로 끝났다.
그해 12월 어느 날 을사조약이 체결됐던 중명전에서 을사조약과 정미조약 당사자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황태자 은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옛 황제가 촬영 장면을 구경했다. 사진가도, 내각도 황제에게 비키라고 하지 못했다.
1909년 11월 29일 대한제국은 양무호를 일본 오사카의 원전상회(原田商會)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110만원짜리 군함의 재판매 가격은 4만2000원이었다.('고종시대사' 6집)
※2018년 '땅의 역사'는 147회를 끝으로 쉽니다. 2019년에 다시 시작합니다.
[태평로] 高宗의 세 가지 罪
조선일보 김기철 논설위원
입력 2018.12.18 03:15
국제 정세 오판하고
국가보다 皇室 이익 앞세우며
제 편·남 가르는 '진영 정치' 앞장
낭만적 고종觀은 역사 誤導
김기철 논설위원
지금 덕수궁엔 1905년 9월 조선을 찾은 미국 고위급 사절단에게 준 고종 사진이 전시돼 있다.
지난달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의 미술'전(展)을 위해 113년 만에 돌아온 유물이다.
고종은 황룡포에 보라색 익선관을 쓴 황제 차림이다.
황실 사진가 김규진이 촬영한 이 사진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맏딸인 앨리스와 함께 온 기업인 에드워드 해리먼이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빌려왔다.
고종은 당시 러일전쟁 강화를 중재한 미국 도움을 기대하며 스물한 살 앨리스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성대한 오찬을 베풀고 황실 가마로 모셨다. 떠나는 앨리스 일행에겐 고급 피나무 함에 담아 사진을 선물로 줬다.
황제가 다스리는 독립국 대한제국을 기억해달라는 취지였다.
앨리스는 냉정했다.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
앨리스의 평가는 대한제국을 향한 외부의 시각을 솔직하게 담은 것이다.
고종이 '미국 공주'에게 매달렸을 때 게임은 이미 끝난 뒤였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친(親)러시아 정책은 영국·미국 등 대서양 세력의 경계심을 촉발했다.
이 틈을 탄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일전쟁 승리의 포석을 깔았다.
앨리스 방한 2주 전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쓸 만큼 대한제국을 불신했다.
고종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루스벨트 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릴 만큼 국제 정세에 무지했다.
고종은 청일전쟁 때는 미국 공사관, 러일전쟁 때는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다.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에 구출됐고 을미사변 후엔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러일전쟁 직전 중국 칭다오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틈만 나면 외국 공사관 피신·망명설(說)이 도는 국가 지도자를 어느 나라가 제대로 인정해줄까.
고종은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놓쳤다.
그의 재위 44년은 한·중·일 삼국이 생존(生存)을 위한 필사의 근대화 경주(競走)를 벌이던 때였다.
하지만 국가 개혁을 서두르기보다 군주의 위신을 앞세우며 예산을 탕진했고 갑신정변·동학혁명 같은 고비마다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다.
러일전쟁 때는 중립국 선언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휴지 조각이 됐다.
스스로 지킬 능력이 없는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은 세계의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고종이 국력을 모아 헌법과 의회, 근대적 사법체제를 마련하고
나라 살림을 키워 근대 문명 국가로 전환했다면 그토록 무력하게 식민지 신세로 추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국가 개조를 위해 손잡아야 할 우호 세력인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탄압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가 군주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힘을 합해도 벅찬 시기에 고종은 철저히 자기편과 남을 가르는 진영(陣營)정치의 선두에 섰다.
고종이 각국에 밀사를 보내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는 비밀 외교를 펼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약육강식 시대에 힘없는 나라를 도와줄 선의의 이웃은 없었다.
최근 드라마와 연극, 전시로 고종에게 '개혁' '항일' 코드를 입히는 재조명 열기는 사실을 오도할 위험이 크다.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간 길을 근대 국가를 꿈꾼 '고종의 길'로 미화한다고 해서 망국으로 이끈 죄(罪)는 줄지 않는다.
35년간의 일제(日帝) 지배를 부른 1차적 책임은 고종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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