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sun.com 사회 [박종인의 땅의 歷史]
"하늘이 백성을 버리면 그 하늘을 갈아치우라"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8.10.17 03:00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맹자)
[140] 삼봉 정도전(鄭道傳)과 유배지 소재동(消災洞)
건원릉 신도비
경기도 구리에는 조선 왕 아홉 명이 잠들어 있다. 동구릉(東九陵)이다.
태조 이성계도 여기 묻혀 있다. 건원릉(健元陵)이라고 한다.
잔디 대신 억새 뗏장을 입혔다.
섬뜩할 정도로 위풍당당하다. 그 아래에 신도비가 있다.
이성계가 죽고 1년 뒤인 1409년 태종 9년 윤4월 13일에 세웠다.
앞면에는 이성계 일대기가, 뒷면에는 함께 조선을 만든 혁명 동지, 개국공신들 이름이 적혀 있다.
누가 뭐래도 일등 개국공신은 정도전(鄭道傳)이다.
혁명 조직을 구성하고 민본(民本)이라는 통치 이념과 정부 시스템을 완성한 사람이다.
하여 비석에는 '奉化伯 鄭道傳(봉화백 정도전)'이라 새겨져 있다.
'伯(백)'은 고려 시대 작위 등급이고 봉화는 정도전 친가가 있는 땅이다.
앞면을 본다.
이렇게 새겨져 있다. '姦臣 鄭道傳(간신 정도전)'.
비석도 하나요 사람도 한 사람인데 어찌 이리 평가가 모순적인가.
600년 전으로 가본다.
유배당한 친명파 정도전
때는 고려 말이었다. 대륙 주인은 원(元)에서 명(明)으로 바뀌고 있었다.
정도전은 당시 선진 이념인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 사대부였다.
친명파 정도전은 젊었고 야심만만했다.
'군졸, 선비, 소민(小民)까지 송곳 꽂을 땅도 없어
가족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흩어지는(1388년 7월 '고려사', '식화·食貨') 세상을 뒤집으려는 욕망이 가득했다.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모르는(不知取舍) 어둡고 어리석은(昏愚) 백성(下民)'
('삼봉집3', '정달가에게 올리는 글·上鄭達可書')을 구원하려는 의지가 충만했다.
▲ 전남 나주 회진리 영산강 물안개 위로 아침이 왔다.
유배지인 회진 소재동에서 정도전은‘백성(百姓)’을 접하며 혁명철학을 체계화했다.
백성을 거스르면 하늘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은 정쟁에 밀리며 조선 500년 내내‘간신’으로 낙인찍혔다. /박종인 기자
1374년 9월 21일 밤 개혁군주 공민왕이 살해됐다.
측근 최만생과 홍윤이 술 취해 자고 있던 왕을 여러 차례 칼로 찔러 죽였다.
피가 병풍에 튈 정도였다.(1374년 공민왕 23년 9월 21일 '고려사절요')
친명 외교와 개혁 정책을 실시하던 영민한 왕이었지만,
아내 노국공주가 죽은 뒤에는 술에 찌든 중년 사내에 불과했다.
권력은 기존 친원파에게 넘어갔다.
이듬해 친원 정권은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라고 지시했다.
정도전은 "가서 사신들 목을 베겠다"고 거부했다. 서른셋 먹은 정도전은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지는 머나먼 호남땅 나주였다.
소재동(消災洞) 이야기
'도전(道傳)이 소재동(消災洞) 황연(黃延) 집에 세 들어 살았다.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 거평 땅이다.
남쪽은 들판이 평평하고 숲속에 연기가 나는 초가 10여 채 있으니 회진현(會津縣)이다.
금강(錦江)은 나주 동남쪽을 경유해 회진현을 지나 남서쪽 바다로 들어간다.
산 아지랑이와 바다 바람 독기가 사람 살에 침입하면 무시로 병이 나지만
아침저녁 어둡고 밝을 적에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화하니 구경할 만하다
(其山嵐海瘴之氣 中人肌膚 病作無時 然朝夕晦明 氣象萬千 亦可翫也).'(정도전, '삼봉집', '소재동기·消災洞記')
소재동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었고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았다.
서안길은 모든 사투리, 속담, 여항(閭巷)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김성길은 글자도 약간 알았다.
모두 손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는데 날이 오랠수록 더욱 공손했다.
두 칸 초사(草舍)를 지을 때는 사람들이 도와 며칠이 못 되어 완성되었다.
정도전은 농사꾼 또는 늙은이를 만나 싸리 포기를 깔고 앉아서 서로 위로하기를 옛 친구처럼 하였다.
한편으로 부끄럽고 한편으로 감동이 되었다.('소재동기')
문득 그가 깨달았다. 백성이 '어둡고 어리석지(昏愚)'가 않은 것이다.
정도전이 3년 유배 생활을 한 나주 백동마을 소재동.
시골 사람(野人) 하나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느 날 우리 고을 사람이 떠들썩하게 '유자(儒者)가 왔다, 유자가 왔다' 하기에 보니 선생이었다.
유자가 무엇인가."
"음양의 변화와 오행의 분포, 초목의 크고 시듦, 귀신의 정(情)과 유명(幽明)의 이치까지 통달해 아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가 대답했다.
"자신이 어질다 자처하고 남을 대하면 남이 허여하지 않고, 자신이 지혜롭다 자처하면 남이 도와주지 않는다.
위태하구나." 야인(野人)은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정도전, '금남야인·錦南野人')
백성은 밝고 지혜로웠다. 정도전은 백성을 위한 새 세상을 꾸미게 되었다.
불온서적 '맹자'를 선물 받다
1372년 명 태조 주원장은 '맹자'를 읽다가 고함을 질렀다.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멀쩡할 것 같은가(使此老在今日 寧得免耶)?"(전조망, '길기정집 鮚埼亭集')
아예 맹자를 문묘에서 빼버리려 하기도 했던 주원장은
결국 85개 장을 삭제해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어 과거시험 교재로 배포했다.
('명사·明史', '전당전·錢唐傳') 이유가 있다.
'맹자(孟子)'는 송대에 마지막으로 '사서(四書)'에 포함된 불온서적이다.
맹자는 왕들 앞에서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폭군을 죽이는 일은 '시해(弑害)'가 아니라 '사내놈 하나를 죽이는 것(誅一夫)'이다.'(맹자, 양혜왕 장구 하)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맹자, 진심 하·盡心 下)
'백성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를 얻으면 제후가 되니, 제후가 사직을 위급하게 하면 제후를 바꾼다.'
그리고'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도 가뭄과 물난리가 터지면 하늘을 바꾼다(變置社稷).'
하늘을 바꾼다! 혁명을 조장하는 맹자를 주원장은 당연히 증오했다.
1363년 12월 정도전이 모친상을 당했다.
시묘살이 3년 동안 학문 선배 정몽주가 바로 그 '맹자(孟子)' 한 질을 보내주었다.
정도전은 매일 '한 장 혹은 반 장씩' 읽더니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時鄭圃隱送孟子一部 公日究一紙或半紙 甚精熟).('삼봉집' 부록, '사실·事實')
하루에 반 페이지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혁명서 탐독과 사색, 그리고 백성과 살을 맞대고 산 경험은 그를 혁명가로 바꿔놓았다.
정도전, 조선을 만들다
경기도 구리 건원릉 신도비.
뒷면에는‘개국공신 봉화백 정도전’(왼쪽), 앞면에는‘간신 정도전’이라 새겨져 있다.
1384년 정도전은 함경도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하던 이성계를 찾아갔다.
군령이 제대로 선 그 군사를 보고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라며 시 한 수를 읊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푸른 산 몇 만 겹 속에 자랐구나 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1398년 태조 7년 8월 26일 '태조실록', '함영 소나무를 짓다·題咸營松樹')
이성계의 호가 송헌(松軒)이었다.
두 사람은 혁명 동지가 되었고, 이윽고 8년 뒤 부패한 고려 정권을 타도했다.
정도전은 일등 개국공신으로 서훈됐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집필했다.
조선의 통치 시스템과 철학이 다 들어 있다.
민본(民本)이다. '임금은 높다면 높고 귀하다면 귀하다. 그러나 만민은 지극히 많다.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마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기게 되리라.
(人君之位尊則尊矣貴則貴矣 然萬民至衆也一有不得其心則蓋有大可慮者存焉)'(삼봉집, '조선경국전', '보위를 바르게 하다·正寶位')
그리고 부패 원인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첫째가 사병(私兵) 혁파였다. 고려 말 권문귀족들의 기초가 된 군사력을 회수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에 결사반대한 세력이 이성계의 아들이자 개국공신 이방원이었다.
게다가 태조 이성계가 혁명 동지인 아들 방원을 내치고 둘째 부인의 어린 아들을 세자로 삼기까지 했다.
이방원은 군사력도 잃고 권력과도 멀어졌다. 위기를 느낀 이방원이 군사력과 무력을 회수하기 위해 벌인 군사행동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다.
'간신' 정도전 죽다
1398년 8월 26일 저녁,
경복궁 서쪽 이방원 집에서 아내 민씨가 비축해둔 무기로
무장한 보병 9명과 기병 10명이 송현동으로 출발했다.
심복 이숙번(李叔蕃)의 철기(鐵騎)부대가 이미 무기고를 점령하고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대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성현, '용재총화·慵齋叢話') 이경(二更·밤 9시~11시) 무렵 이방원 군은 송현동에 있는 남은의 첩 집을 포위했다.
정도전은 등불을 밝히며 남은과 대화 중이었다.
정도전은 옆집으로 도망갔다가 체포됐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살려주소서(活之)"라고 애원했고,
이방원은 "어떻게 악한 짓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느냐"며 참수를 명했다.(1398년 태조 7년 8월 26일 '태조실록')
이방원은 "정도전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우려고 하여 나의 형제들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내가 선수(先手)를 썼다"고 했다.
비굴한 그 최후가 '삼봉집'에는 이렇게 묘사돼 있다. 최후의 순간 그가 썼다는 시(詩), '자조(自嘲)'다.
힘 다해 마음 다스려 고민했고
책 속 성현 저버리지 않았노라
삼십 년 이래에 근고를 다한 업이
송정에서 한 번 취해 허사가 되다니
操存省察兩加功
不負聖賢黃卷中
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
어느 정도전이 진짜 정도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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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고 467년이 지난 1865년 양력 9월 10일,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기념해 정도전을 사면했다.
'정도전이 전각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글을 생각해보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永念 鄭道傳定名頌祝之辭 不覺曠感).'(1865년 9월 10일 고종 2년 '고종실록')
건물 작명가로서 명예를 회복했을 뿐,
그는 여전히 간신이었다.
건원릉 신도비에 그가 간신과 공신으로 동시에 기록돼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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