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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가을 억새 정일근

by 한국의산천 2017. 11. 9.

내가 좋아 하는 詩 



▲ 시월이 지나며 점점 야위어가는 억새 ⓒ 2017 한국의산천


▲ 잘가라 손 흔들어 주는 억새 ⓒ 2017 한국의산천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 흘려주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억새

 

                         - 정 일 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이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 흘려주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


내 생에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정일근 시집  <나에게 사랑이란 > - 시선사




유행가 가사처럼 "잊혀진 계절" 시월이 지나고

겨울 초입의 바람을 맞으며 억새가 야위어 가고 있다


정일근 시인의 "가을 억새"를 읽노라면 연인의 사랑과 이별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전만 해도 사랑도 어려웠고 이별 또한 어렵고 가슴깊이 저미는 슬픔이었는데

요즘 사랑과 이별은 쉽고도 무덤덤한 느낌이 든다. 


들판과 논뚝에 가득한 억새를 보며 다시금 인간의 팍팍한 삶과 이별을 돌아본다

시인의 말처럼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모두가 바삐 제 갈길로 돌아선다

그렇다 사랑이 없으므로 이별을 해도 눈물을 흘릴 일이 없다고 시인은 말한다.


산 능성이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은발의 억새처럼

헤어짐이 아쉬워 뒤돌아보며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그러한 감성이 다시금 그리움 요즘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이별의 아픔을 참고 끝까지 뒤돌보며 손 흔들어주는 가을 억새의 교훈을 배운다


산 능성이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은발의 억새처럼

헤어짐이 아쉬워 뒤돌아보며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그러한 감성이 다시금 그리움 요즘이다


정일근 : 경남대 석좌교수


경남대학교교수, 시인
출생1958년 7월 28일, 경상남도 진해출생

경남대학교 국어교육학과 학사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1984년 실천문학에 시 ‘야학일기’ 발표.

2003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2013년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 특별상
경남대학교 언론출판원 원장


29826

백년의 약속 - 김종환

내가 선택한 사랑의 끈에 나의 청춘을 묶었다
당신께 드려야할 손에 꼭 쥔 사랑을 이제서야 보낸다

내 가슴에 못질을 하는 현실의 무게 속에도
우리가 잡은 사랑의 향기속에 눈물도 이젠 끝났다

세상이 힘들 때 너를 만나 잘해 주지도 못하고
사는 게 바빠서 단 한 번도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백 년도 우린 살지 못하고 언젠간 헤어지지만
세상이 끝나도 후회 없도록 널 위해 살고싶다


삼십 년쯤 지나 내 사랑이 많이 약해져 있을 때
영혼을 태워서 당신 앞에 나의 사랑을 심겠다

백 년도 우린 살지 못하고 언젠간 헤어지지만
세상이 끝나도 후회 없도록 널 위해 살고싶다

이 세상에 너를 만나서 짧은 세상을 살지만
평생동안 한 번이라도 널 위해 살고싶다 널 위해 살고싶다



정일근 시 모음.


쑥부쟁이 사랑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 꽃과 처음 인사 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라색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꽃잎 낱낱이 셀수 있을 것 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있어도 보인다

 

 


가을이 오면 그대에게 가렵니다


가을이 오면 기차를 타고

그대에게 가렵니다

낡고 오래된 기차를 타고 천천히

그러나 잎속에 스미는

가을의 향기처럼 연연하게

그대에게 가렵니다

차창으로 무심한 세상은 다가왔다 사라지고

그 간이역에 누구 한 사람 나와 기다려 주지 않는다해도

기차표 손에 꼭 잡고 그대에게 가렵니다

그대가 기다리는 간이역이 이미 지나쳤는지는 몰라도

그대 이미 저를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덜컹거리는 완행기차를 타고 그대에게 가렵니다

가을이 나뭇닢 하나를 모두 물들이는 무게와 속도로

그대에게 가렵니다



가을 부근


여름에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돌아갈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나에게 사랑이란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마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종-경주 남산


종이 울리는 것은

제몸을 때려가면서까지 울리는 것은

가 닿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려는 것은

이목구비를 모두 잃고도

나팔꽃 같은 귀를 열어 맞아주는

그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소리의 생이 다하려 하면

뒤를 따라온 소리가 밀어주며

조용히 가 닿는 그곳

커다란 소리의 몸이 구르고 굴러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그곳.




봄소식


감옥소가 보이는 언덕에서

보내지 못하는 편지들을 모아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진종일

황사바람만 속절없이 하늘을 덮었다

친구여 그대가 사는 나라에도 봄은 오는가

이 눈물 같은 봄은 오는가

나는 언덕에 서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볼가강 위에 배가 떴구나

그 러시아 민요를 낮은

더욱 낮은 휘파람으로 불러보며

아아 내가 날리는 종이비행기들이

그대가 홀로 사는 나라에 닿아

봄소식을 전하여 줄 수 있을까

문득 눈을 돌려 마을을 바라다보니

바람에 퍼럭이는 흰 빨래들이 눈부셨다




상처

감은사지


사라지는 것들은 상처를 남기지 않지만

절은 사라지고 절터만 남은 이 저녁 감은사처럼

사라질 수 없는 것들은 상처로 남아 슬픔을 만드네

무너지는 세월의 무거운 몸을 안고

아픈 허리를 곧추세우고 섰는 동서 쌍탑과

땅 속에 두 발을 묻고 잠들어버린 깨어진 모퉁잇돌

알 수 없는 바다 깊숙이 달아나버린 목어의 숨소리와

유사(遺事)의 행간 사이사이 뱀처럼 숨어 바스락거리는 신화 곁에서

나는 보네, 사라진 절터가 남긴 천 년 세월의 상처를

신라사람들이 남긴 쓸쓸한 상처의 저 아름다운 흉터를!

진주조개의 상처가 영롱한 진주를 빚듯

시간의 상처는 눈물 같은 슬픔으로 독한 술을 빚어

세상 모든 그리움들을 불러 저녁놀로 불타고

슬픔이 내 마음이라면, 저녁 감은사여

마음의 우주에 칼금 그어진 깊은 상처 같은 별을 보네

서쪽 밤하늘 붙박이별로 반짝이는 그대를 보네


▲ 물왕리 흥부저수지의 노을과 억새 ⓒ 2017 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