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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세종대왕릉 영릉과 성주 왕자 태실의 비밀

by 한국의산천 2017. 9. 14.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일 중독자 세종 사후 19년, 그 무덤을 옮겼더니…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 2017.09.14 03:04


[91] 세종대왕릉 영릉과 성주 왕자 태실의 비밀


'성군' 칭송받는 세종대왕, 태종이 걱정할 정도로 비만에 고기 편식 즐겨… 운동 않는 저질 체력
스스로 일에 중독된 임금… 요로결석… 안질… 당뇨병… 관료들도 과로에 시달려
사후 왕실에 변고 잇따라… 맏아들 문종은 요절
둘째아들 수양은 쿠데타… 조카 단종 죽이고 다섯 형제도 함께 죽여

잇단 흉사에 이계전, 이인손 묘 옮기고 여주로 왕릉 이장 '조선 역사 100년 연장'
왕자들 태실 조성 때는 이장경 무덤 강제 이장

 
 

박종인의 땅의 歷史
 

뚱뚱한 우리 임금님

 친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냉정한 권력자 태종이지만, 아들 건강에 관한 한 그저 아버지였다.

왕위를 물려받은 셋째아들 세종이 육식만 밝히는 데다 운동도 하지 않는 책벌레이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왕이 되었으니 직접 말은 하지 못하고 신하들을 불러 따로 조언을 한다.

'내 아들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습니다. 절대로 채식은 안 합니다.'

'내 아들은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아 뚱뚱해졌으니 운동을 시켜야 합니다(主上不喜游田 然肌膚肥重 須當以時出遊節宣).'

그리하여 성군(聖君) 세종대왕은 왕위 등극 두 달 만에 아버지를 따라 강제로 사냥과 군사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임금님 수라상과 건강은 이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가뭄에 절식하겠다는 세종에게 의사들이 이렇게도 말한다.

 "'내 아들은 고기나 생선 없이 찬을 줄여 내면 먹지 않는다'는 태종 임금 말씀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어찌 이러십니까."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루에 네 끼를 먹는데, 이걸로 족하다."


채식 또한 편식을 했다. 성현(1439~ 1504)이 쓴 용재총화에 따르면 '지금까지 궁궐에 가득 찬 앵두는 문종 임금이 손수 심은 것이다.' 왕세자 시절 문종이 후원에 손수 심은 앵두를 아버지 세종에 올리니, "바깥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世子)의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며 기뻐하였다.(문종실록)


53년 인생, 재위 32년 동안 세종은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행했다.

편식을 줄이고 공부 또한 조금만 게을렀다면 환갑 지나고 고희 지나 더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태종이 '장엄하고 엄중한(莊重)' 사람이라 평했던 아들이었지만, 건강을 돌볼 줄 몰랐다.


고생하는 관료들

최고 권력자가 건강을 팽개치고 국사를 돌보는데, 그 신하들이 게으를 수가 없다. 황희 정승 사직서 제출사를 본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왕릉인 영릉. 세종은 셀 수 없이 많고 판단할 수 없이 큰 업을 이룬 왕이다. 하지만 후손들 가족사는 비극적이었다. 결국 서울 헌릉 옆에 있던 세종릉은 19년 만에 이곳 영릉으로 이장됐다. /박종인 기자
 
 1427년 음력 10월 7일 부모상을 당해 3년 동안 휴직계를 낸 정승 황희를 100일 만에 업무에 복귀시켰다. 황희는 64세였다.

11월 27일 세종은 세 번 복직 명령 철회를 신청한 황희를 기어이 복직시키며 직접 불러 고기를 먹였다.

황희는 결국 "어찌 감히 따르지 않으오리까"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자리에서 나아가 울면서 고기를 받아먹었다.

세종은 "앞으로 국정에 관계되는 이가 아니면 상중에는 복직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5년 뒤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세종은 "갑자기 물러가 한가롭게 지내기를 청하는가"라며 거부했다.(세종실록)

7년 뒤 1439년 황희가 도승지 김돈을 시켜서 다시 사직의 뜻을 올렸다. 김돈이 "황희가 아래로 피를 흘리고 귀와 눈이 어둡다고 한다"고 넌지시 보고했다.

세종은 "진짜 그러한지 직접 봤나"고 따져 물었다. "귀는 어두우나, 정신은 혼미하지 않은 듯…"이라 우물쭈물하는 김돈에게 세종은 황희의 재택근무를 명했다.

황희 나이 76세였다. 1449년 5월 가뭄이 들었다. 황희 나이 여든여섯이다. 황희가 말했다. "나이가 구십에 가까운데 공이 없이 월급만 받으니 하늘이 노한 것이오. 그러니 사직서를 받아주시길." 이 또한 거부됐다. 세종은 그해 10월에야 은퇴를 허가했다. 이듬해 세종이 죽었다. 2년 뒤 황희가 죽었다.


1434년 12월 질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낸 판중추원사 허조(許稠)도 사직을 거절당했다.

5년 뒤 1439년 11월 21일 좌의정이 된 허조가 세 번째 사직서를 제출했다.

세종이 말했다. "근래 밤낮으로 근무하기에 병이 나은 줄 알았다. 그런데 과로가 병이 될 줄 몰랐다. 안심하고 몸 관리하시라." 사표는 반려했다.

실록에 따르면 허조는 한 달 뒤인 12월 28일 일흔한 살로 졸(卒)하였다.

세종 재임 기간 유능한 관료들에게 집안 상사(喪事)는 핑계가 되지 않았고, 고령과 질병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일이었다.

하지만 실록이나 다른 사료 어디에도 악덕 고용주급인 세종의 부당 노동행위에 대해 악담 한마디 찾을 수 없으니,

최고 지도자 스스로 보여준 덕목과 업적이 장중하고 큰 덕이다.


'종합병원' 같았던 세종


그 결과 늙은 관리들은 병에 시달렸다. 최고 지도자 세종은 심했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털어놓은 병만 다섯 가지였다.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팠고(그래서 별명이 단족(短足)대왕이었다),

등에 종기가 나고, 목이 자주 마르는 당뇨병이 있었고, 바늘로 찌르듯 아파져 오는 요로결석을 앓았고,

왼쪽 눈을 다쳐 안대를 했으며, 오른쪽 눈 또한 한 걸음 밖 사람 형체만 알아볼 정도였다.(세종실록, 세종 21년 6월 21일)


영릉을 조성하며 이장한 이인손(위)과 이계전의 묘. 조정에서는 이 문중들에 크게 사례를 하고 묘를 옮기도록 했다.
 

 세종이 마흔다섯 살인 1442년 겨울 창덕궁에서 대소동이 벌어졌다.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창덕궁(昌德宮)에서 거애(擧哀)하기를 무릇 3일 동안 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4년 11월 18일)

 '거애'는 장례 때 곡(哭)을 했다는 말이니, 모두가 세종이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병으로 누웠다는 말이다.

1450년 2월 15일 영응대군 집에서 생활하던 왕이 반역범과 강력범을 제외한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틀 뒤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했던(終始以正)' 왕이 훙(薨·왕의 죽음)하였다.(세종 32년 2월 17일) 쉰세 살이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이어지는 변괴와 천장(遷葬)


세종이 죽고 조정에서는 "아버지 가까이 묻으라"는 유언에 따라 태종 무덤인 헌릉 옆에 먼저 죽은 소헌왕후와 합장됐다.

맏아들 문종이 왕위 계승 2년 만에 요절했다. 38세였다.

1457년 9월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장남 의경이 가위에 눌려 죽었다. 열아홉 살이었다.

두 달 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였다. 열여섯 살이었다. 수양은 형제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도 죽였다.

수양의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형인 양녕과 효령이 살해를 부추겼다.

왕이 된 수양대군은 평생 피부병을 앓다가 51세에 죽었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가 아들을 낳다가 죽었다.

아들도 곧 죽었다. 예종도 열아홉 살에 요절했다.


소름 끼치는 변고의 원인으로 사람들은 세종의 묫자리를 꼽았다. 흉지라는 것이다.

결국 예종이 요절하기 전 세종릉의 이장이 결정됐다. 예종 즉위년 1468년 12월이다.

1급 지관들이 전국을 뒤져 찾아낸 땅이 지금 세종 능이 있는 경기도 여주 능서면 왕대리였다.

최고의 지관 안효례가 뒤지고 또 뒤져 제왕의 땅을 찾아내고 보니,

거기에 목은 이색의 후손이자 세조 반정을 도운 공신 한산 이씨 이계전과 역시 공신인 광주 이씨 이인손의 묘가 있지 않은가.

실록은 두 가문의 후손에게 지극 정성으로 사례를 하고 세종을 천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69년 3월이다.

안효례가 찍은 자리는 이계전의 묘였고, 이인손의 묘는 그 옆이었다.


이인손 문중에는 이런 말도 전한다. '이인손이 후손에게 일렀다.

내가 죽으면 여기 묻되, 묘 앞 개울에 다리를 놓지 말고 재실이나 사당 따위 건물도 짓지 말라고.

그런데 명당 덕에 가문이 번성하자 후손들이 큼직한 재실을 지어놓으니,

훗날 소낙비를 만난 지관 안효례가 비를 피하러 돌다리 건너 들어간 건물이 그 재실이요 거기서 본 언덕이 천하명당이었다.'


풍수가들에 따르면 '다리 짧은 대왕이 영원히 쉴 자리(短足大王 永乏之地, 단족대왕 영핍지지)'라는 비기가 무덤 속에서 나왔고,

영릉 천장으로 인해 조선 왕조가 100년 연장됐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이인손과 이계전의 묘는 각각 여주 땅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한산 이씨 이계전의 묘는 연산군 시대 폐비 윤씨 사건에 후손이 연루돼 봉분 파괴라는 횡액을 겪기도 했다.

세종은 죽어서 본의 아니게 두 이씨 가문에 민폐를 끼친 권력자가 되어버렸다.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자식 복이 많은 세종은 18남 4녀 가운데 아들들 태(胎)를 모아 한곳에 묻었으니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이다.

태실을 둠으로써 지역 세력가들을 위압하는 효과를 거뒀기에 역대 왕들은 모두 태실을 각처에 두었다.

맏아들 문종을 뺀 열일곱 왕자와 손자인 단종 태실이 있다.

열여덟 개라야 옳은데, 실제로는 열아홉 개다. '塘(당)'이라고 이름만 적힌 표석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


경북 성주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 가운데 있는 비석은 세조의 태실이다.
 
나중에 단종이 된 손자 홍위가 태어나자 세종은 그 태를 성주에 묻으라 명했다.

조정에서 풍수를 담당했던 사람은 태종의 서녀 숙혜옹주의 남편인 성주 이씨 이정녕이다. 세종의 서매제다.

그런데 하필이면 성주 태봉산에서 찾아낸 명당자리에 이정녕의 조상 이장경의 무덤이 있었다. 이정녕은 조상 묘가 있다는 사실을 누락하고 명당이라 보고했다.

차곡차곡 세종 아들들 태실이 그곳에 들어섰다. 훗날 보고 누락 사실이 발각됐다. 세종은 즉각 이장경 묘의 이장을 명했고, 이정녕은 해임됐다. 매제라 귀양은 면했다.

세조 태실 또한 이곳에 있다. "왕이 되셨으니 태실을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하들 주청에 세조는 "형제는 같이 있어야 한다"며 불허했다.

세조 태실 반대편 끝에 조카 단종 태실이 앉아 있다. 수양대군에 반대한 다섯 동생 태실 석물들은 계곡으로 던져지고 파묻혔다. 성군 세종에 얽힌 풍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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