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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무능한 정권이 자초한 전쟁… 백성들의 붉은 피

by 한국의산천 2017. 9. 8.

[박종인의 땅의 歷史] 무능한 정권이 자초한 전쟁… 백성들의 붉은 피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90] 강화도 경징이풀의 비밀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한겨울 47일간 벌어진 병자호란
최고 지도자 인조와 인조반정 공신들… 북방에서 힘 키운 여진족을 오랑캐라 무시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 자기를 멸시한 조선 정복 준비
남한산성 들어간 지도자들 적 앞에서 춤추며 明 경배

功臣 출신 사령관 김류, 부하들 사지로 내몰아
강화도 수비 대장 김경징, '내 아버지 군수품'이라며 군사들 맨주먹 출정
나라는 망했지만 권력층 여전히 明 숭배
강화도 갯벌에는 백성들 피처럼 붉은 나문재풀 한가득… '경징이풀'이라며 원망

 

박종인의 땅의 歷史
 

  1636년 겨울 47일 동안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한다.

비현실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인 권력자들 탓에 고생한 백성들 이야기다.

강화도 갯벌을 뒤덮은 나문재 풀밭이 저리 붉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40년 전 압록강변

임진왜란 와중인 1596년 음력 2월 13일 명나라 사신 여희원과 조선 통역사 하세국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 전해 조선 영토 안에서 인삼을 캐다 벌어진 여진족 27명 살해 사건에 대한 협상단이다.

협상단이 3열로 서 있던 보병 6000여명을 사열할 무렵 사령관 구령에 맞춰 3000여 기마군이 일제히 부동자세로 정렬했다.

협상단이 흠칫했다.

전쟁 초 "왜적을 물리칠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했던 여진족의 청이 떠올랐다.

명과 조선은 "오랑캐 진위를 알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었다.


여진족 추장 노을가적(老乙可赤)이 말했다.

 "호인(胡人)이 함부로 인삼을 캤으니 우리가 먼저 잘못을 범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사람이 마음대로 호인을 죽였으니 어찌 분개한 마음이 없겠는가. 그 원수를 갚고자 한다."


간이 콩알만 해진 협상단 앞에 추장 노을가적이 몸을 낮춘다.

 "천조(天朝·명나라) 어르신이 이처럼 누추한 곳에 왕림한 것은 전고에 없었던 경사다.

내 어찌 감히 함부로 병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범하겠는가.

" 협상단 얼굴에 미소가 올라오던 그 순간 분을 삭이던 추장이 소리를 높였다.

 "풀 한 뿌리를 훔치는 게 죄가 얼마나 크다고 다 죽인단 말인가.

 일찍이 군사를 동원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조-명 협상단 얼굴이 흙빛이 됐다. 


남한산성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984


인천광역시 강화도 갯벌에는 붉은 나문재 초원이 많다.

해 뜰 녘이면 하늘 나는 백로 떼와 함께 선경을 이룬다. 이 붉은 선경 속에 380년 전 벌어진 병자호란의 비밀이 숨어 있다. /박종인 기자
 
 침묵을 깨고 여진 추장이 결론을 내렸다.

 "지금 천조의 명령이 있으므로 중지한다."

협상단은 오랑캐 추장 하나 잘 구워삶았다고 안도하며 다시 압록강을 도강했다.

임진왜란은 여진의 도움 없이 종료됐다.


그 며칠 전 이 추장은 선물을 들고 찾아온 조선 사신 김희윤에게

"나라 대 나라로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제안은 거절당했다.

'희윤은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말을 빨리 달려 되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이 오랑캐 추장이 훗날 명을 멸망시키고 대청 제국을 건설한 청 태조, 누르하치다.


청을 오랑캐라 배척하다

김희윤의 두려움은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조는 명나라 은혜를 잊지 못했다.

명나라는 그때 군사를 일으켜서 조선을 돕지 않았던가.

전쟁 당시 왕이던 선조는 이순신 '따위' 조선 장수들과 의병 대신 황제국 명나라에 모든 공을 돌렸다.

그때 명나라 인구는 1억명 정도였다. 만주 땅 여진족은 다섯 부족 다 합쳐 100만명 정도였다.

그 무렵 걸출한 추장 누르하치가 여진족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전쟁 후 왕이 된 광해군은 국가 생존을 위해 이 새로운 세력에 친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명에 대한 배신자라는 핑계로, 그때 야당 세력이던 서인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등극시켰다.

쿠데타 명분이 친명(親明)이었다. 인조 또한 당연히 친명이었다. 친명은 즉 배청(排淸)이었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626년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된 홍타이지는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명나라 잔당 모문룡을 조선이 보호하고, 교역 요청을 거듭 거부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강화도까지 도망갔다가 올라온 인조 정권은 배청 정책을 강화했다.

문신(文臣)들은 전쟁 불사를 외쳤고, 무신(武臣)들은 협상을 요구했다. 인조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반정 공신인 문신들 말을 따라야 했다.


전쟁의 징조들

1636년 2월 후금 권력자 용골대와 마부대가 조선에 입국했다.

가지고 온 서류에 인조 정권이 경악했다. '후금이 황제국임.' '용골대를 죽이고 머리를 잘라 명나라로 보내자'는 상소가 올라왔다.

 2월 26일 사신 일행이 창덕궁을 찾았다. 조선 정부는 창덕궁 금천교 옆에 천막을 쳐놓고 그리 인도했다.

푸대접에 분을 삭이고 있는데, 강풍에 천막이 날아갔다. 중무장한 궁궐 수비대가 천막을 에워싸고 있었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서둘러 원대 복귀했다.


남한산성 사령관 김류가 어이없는 작전으로 군사 200명을 몰살시킨 북문. 훗날 이 문에 전승문(全勝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잊지 말자 6·25’라는 구호와 비슷하다.


남한산성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984
 
전쟁 냄새를 맡은 조선 정부는 3월 1일 국경 지역에 '오랑캐와 절교하니 방어 태세를 갖추라'고 왕명을 내렸다.

3월 7일 왕명 문서를 들고 가던 전령이 원대 복귀 중이던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

4월 11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심양에서 열린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조선 사신 두 사람이 참석했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는데, 두 사람은 절을 하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이 둘에게 '형제국을 무시한 행위'라는 국서를 들려 보냈다.

조선 정부는 국서를 가지고 온 두 사람을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라며 귀양을 보내버렸다.


5월 26일 인조가 교서를 내렸다.

"우리 국토가 수천 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6월 17일 또 내린다. "우리는 명의 동쪽 신하국으로, 명이 땅을 잃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 하지도 않는 정권이었다.


그해 10월 청 태종이 선언했다.

 "11월 25일 전 화친을 결정하라. 아니면 동정(東征)하리라.

나는 큰길을 통해 곧장 경성으로 향할 것인데, 산성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지만 내가 팔도를 유린하면 일개 섬으로 나라가 되겠는가.

귀국 유신(儒臣)들이 붓을 들어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청 태종이 말하는 그대로 전쟁이 시작됐고, 끝났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터졌다.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10여개 성은 그대로 놔두고 청군은 순식간에 서울로 진입했다.

청 태종 예언대로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그 속도에 눌려 숭례문 대신 시체들을 운반하는 문인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일을 나열해본다.


적 앞에서 춤춘 임금과 세자

산성에 들어간 지 13일째. 성 안에 말 먹일 풀이 떨어져 말들이 굶어 죽었다. 그 말을 거둬 군사들이 먹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성 밖에 있는 청군에 술과 소를 대접했다.

관료들은 "고위직을 보냈다가 억류되면 창피하니 아랫사람을 보내자"고 했다.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하급 관리가 갔다.

청 태종이 말했다. "굶주린 그대들이 나눠 먹어라. 팔도의 술과 고기는 우리 맘이다."

관료들은 "술을 보내자는 놈 목을 베자"고 주장했다.(인조실록)

심열(沈悅)이라는 유생이 화친하는 계책을 세우기를 청했다. 조정이 격분해 상소문을 불살라버렸다.


12월 29일 전시 사령관 김류가 산성 북문 밖에서 전투를 벌였다.

적은 싸우려 하지 않고 소와 말을 두고 물러났다.

김류가 비장 유호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 베게 하였다.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였다.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갔다. 매복한 적에게 200명이 몰사했다.

11일 뒤 밤에 한 장교가 성 밖에서 적의 목을 베어 들고 왔다.

김류가 목을 받아 인조에게 올리자 옷감 세 필을 상으로 주었다.

머리에 피가 한 점 없어 기이했다. 잠시 뒤 보니 북문 전투에서 적에게 죽은 사람 목이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연려실기술) 김류가 왕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구했으나 왕은 그대로 두었다.(인조실록)


김류는 인조반정 일등공신이다. 또 다른 일등공신인 조선군 총사령관 김자점은 청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 또한 전후 무사했다.

설날이 되었다. 인조는 명나라 수도 북경을 향해 예를 올렸다. 망궐례라고 한다.

망궐례 격식을 두고 관료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인 뒤 임금과 세자 부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산성 동쪽 벌봉에서 대포를 겨누고 지켜보고 있었다.(인조실록)

이튿날 청 태종이 사신에게 말했다. '자식이 거꾸로 매달린 듯 위급한데 아비로서 구원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아비처럼 섬기던 명이 어떻게 너희를 구원할까?'(연려실기술)

정권을 창출한 공신은 무능력해도 개의치 않았고, 중화기로 무장한 적 앞에서 최고 지도자가 춤을 추었다. 전쟁이 되겠는가.


백성을 사지로 내몬 야전사령관


  경기도 가평 조종암에 새겨져 있는 선조 어필 '萬折必東(만절필동)'. 

'만번 구부러져도 명나라를 섬기리'라는 뜻이다.
 
김경징은 남한산성 사령관 김류의 아들이다.

그리고 강화도 수비 총책임자였다.

그런데, '…(김포 나루에서) 경징이 배를 모아 그의 가속과 친구를 먼저 건너가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사족 남녀(士族男女)가 수십 리나 뻗쳐 있었으며,

빈궁 일행이 나루에 도착해도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한 채 이틀 동안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


 사녀들이 온 언덕과 들에 퍼져서 울부짖다가 적병이 들이닥치니 차이고 밟혀 혹은 끌려가고 혹은 바닷물에 빠져 죽어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으니 참혹함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연려실기술)


쓰러진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이럴 수 있느냐…'


김경징은 추위를 이긴다는 핑계로 술을 마셨고, "바다가 꽁꽁 얼었으니 배가 뜰 수가 없다"며 청군의 공격을 무시하였다.


청군이 바다를 건너자 "우리 아버지가 마련한 무기이니 함부로 쓸 수 없다"며 군사들을 맨손으로 출정시켰다.


달아난 김경징 대신 부관 강진흔이 분전했으나 결국 청나라 전군(全軍)이 성으로 들어왔다.


강화도 함락 소식과 함께 남한산성 농성전도 끝났다.

47일 만이다. 조선 국왕 인조는 잠실 한강변 삼전도로 나가서 땅에 이마를 찧고 군신의 맹세를 했다.


전쟁 후 강진흔은 패전을 이유로 유배형을 받았다가 벌이 가중돼 처형됐다. 군졸들은 친척을 잃은 것같이 슬퍼하였다.(병자록)


1684년 경기도 가평군수 이제두는 가평 조종천변 바위를 조종암이라 이름 붙이고 글자 22자를 새겼다.


그중에 '萬折必東 再造藩邦(만절필동 재조번방)'이라는 선조 어필이 눈에 띈다. '황하가 일만 번 굽이쳐도 동쪽으로 흐르니, 명나라가 도와서 나라를 되찾았네.'


명이 망하고 40년이 지난 뒤였다. 강화도 갯벌에는 나문재가 가득 피었다. 노인들은 붉은 나문재를 '경징이풀'이라 부른다. 전쟁은 끝났으되 그 상처는 매우 깊었고, 여전히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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