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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강릉 가는 길 [태강릉]

by 한국의산천 2014. 5. 31.

50년만에 열린 태릉에서 강릉 가는 길 [2014 · 5 · 31 · 무지하게 더운(섭씨 34도) 하늘 맑은 토요일]

어머니와 아들, 50년 만에 '숲길'로 만나다

조선왕릉 태릉~강릉 숲길 1.8km 조성…태릉선수촌이 갈라놓은 역사 50년 만에 복원

 

  한여름 날씨를 방불케하는 뜨거운 날씨 하지만 50년 세월의 뒤안길을 걷는 가슴 떨림, 조용한 숲길에서 역사를 다시 돌아보며 진지하게 자신을 되돌아볼 정도의 여유를 느끼고 왔다.

 

  태릉은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유명하다.

태릉 선수촌, 태릉 갈비, 태릉 사격장, 육사 등등... 하지만 태릉이 누구의 묘인지 알지 못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알아서 나쁠것 또한 없지 않은가

 

  저 역시 책을 펼치고 인터넷을 뒤지며 공부하고 찾아 갔습니다.

 

  태릉은 문정왕후의 묘,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이자 조선의 13대 왕 명종과 인순왕후의 묘다.

명종(1534~1567)은 34살에 승하한 문정왕후의 아들이지만, 이 두 묘지 사이의 숲길 1.8km는 반세기동안 끊겨 있었다. 이 길이 개방됐다. 일 년에 딱 두 번, 태릉에서 강릉까지 이어지는 숲길을 걸을 수 있게 됐다. 개방일은 4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다. 오늘이 전반기 개방일의 마지막 날이다.

 

 어머니 문정왕후의 태릉(泰陵)과 아들 부부 명종·인순왕후의 강릉(康陵)은 조선 시대부터 강태릉(康泰陵) 또는 태강릉으로 불리며 꾸준히 관리되어왔다. 그러나 태릉선수촌(1966년 건립)이 들어서면서부터 현재와 같이 태릉과 강릉의 권역으로 분리된 상태가 되어 50여 년 동안 본연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 강태릉(康泰陵)이라는 명칭은 명릉향대청술회(明陵香大廳述懷, 조선 영조 32년)에 수록되어있으며, 명릉향대청술회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음

 

▲ 강릉에는 주차장이 없으며 태릉에는 앞에 보이는 주차장이외에 매표소 옆으로 들어가면 매우 넓은 주차장이 있다 ⓒ 2014 한국의산천

 

▲ 태릉에서 입장하여 산길을 넘어서 강릉까지 둘러보고 원점회기하기 ⓒ 2014 한국의산천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을 잇는 숲길이 조성됐다.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는 그간 관람이 제한됐던 조선왕릉 태릉과 강릉을 잇는 1.8㎞ 길이의 숲길을 조성해 4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4개월간 시범 개방하고 있다.

강릉은 지난해부터 개방하였지만 태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도로를 따라서 태릉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두 능을 잇는 숲길을 조성하여 4월부터는 태릉과 강릉을 직접 갈 수있게 하였다

 
  오늘 태릉에서 시작되는 1.8㎞의 숲길을 따라 걸었다. 왕복 3.6㎞ 숲길은 요즘 회자되는 둘레길과 비슷하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산길 양쪽에 있는 숲들은 호젓한 길을 따라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었다. 숲길을 조성하면서 주변에 소나무 등 수목과 자생식물 등을 자연 그대로 살렸다. 의자와 같은 편의시설 설치는 최소화했다.

 

 

 

▲ 지난 2009년 조선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왕릉은 이제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 2014 한국의산천

    태릉과 강릉은 조선시대부터 ‘태강릉’이란 명칭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1966년 태릉선수촌이 들어서면서 태릉과 강릉은 약 50여 년간 분리돼 있었다. 그러면서 강릉과 태릉 간 동선이 단절되고 태릉에 비해 관람할 수 있는 휴식공간도 매우 비좁은 편이었다. 그러나 2009년 6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강릉은 더 이상 개방을 미룰 수 없게 됐다. 왕릉이 시공을 초월해 세대를 막론하고 누구든 즐길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강릉의 복원과 개방은 시대적인 요구이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강릉을 개방한 데 이어 올해는 강릉과 태릉을 잇는 숲길을 조성해 시범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숲길 조성과 개방은 두 능간의 역사적 관계성을 복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하지만 강릉을 걷는 사람은 예상보다 적었다. 주차장 같은 편의시설이 부족하고 능침 주변에서 쉬면서 관람할 수 있는 여유공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릉을 관람한 뒤 태릉을 관람하려면 다시 출구로 나와 일반도로를 돌아 입장해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이렇듯 태강릉은 본래 하나의 공간이었지만 두 능을 관람하는 데는 여간 불편이 따르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 나온 대안이 강릉에서 태릉을 잇는 숲길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두 능을 하나로 잇는 생명줄이 탄생한 셈이다. 숲길이 조성됨으로써 강릉 입구로 들어온 관람객은 숲길을 거쳐 자연스럽게 태릉을 둘러보게 됐다. 태릉 관람객 또한 강릉을 바로 구경할 수 있게 됐음은 물론이다. 

 

태릉은 조선시대 11대 임금인 중종의 둘째 부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이다.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거대하고 웅장한 느낌을 자아낸다.

능침은 주말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 오후 2시에 공개합니다 ( 변동이 있을 수 있으니 홈페이지 참고하세요)

 

강릉은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 씨를 모신 능이다. 

 

 

 

 

▲ 태릉 주변의 송림, 좌우 능선과 계곡에 있는 굴참나무 숲과 진달래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생태 경관이다 ⓒ 2014 한국의산천

 

 

정자각 (丁字閣)
  정자각은 능에서 제례를 지낼때 정자각 내부에 제례 음식을 차리고 모든 의식을 진행하는 곳으로 홍살문을 지나 어도를 따라서 곧장 걸어 들어가면 정자각을 만나게 된다.

  능의 중심 건물인 정자각(丁字閣)은 형태가 '정(丁)'자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정자각이라고 하며,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띄고, 단청이 되어 있다. 정자각은 대부분의 정면 3칸에 측면 2칸 그리고 벽이 없이 기둥만 있는 앞 부분은 정면 1칸에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 높낮이가 다른 길 ⓒ 2014 한국의산천

왼쪽 높은길은 신로이며 오른쪽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이다. 신하들은 돌길 양옆으로 다녔다  

참도는 정자각의 오른쪽(동쪽)으로 이어져서 신도는 왼쪽 계단으로, 어도는 오른쪽 계단으로 따로 오르도록 구분되어 있다. 신도에서 연결되어 오르는 왼쪽 계단을 신계(神階)라고 하며, 어도에서 연결되어 왕이 오르는 오른쪽 계단은 동계(東階)라고 한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호젓한 숲길이 있는 조선왕릉

조선왕조의 왕릉은 역시 웅장하고 기품이 넘친다 

 

▲ 오후 2시에 홍살문 앞에서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능으로 이동 ⓒ 2014 한국의산천

 

 

▲ 계단에도 신로와 어로가 있다 ⓒ 2014 한국의산천

 

건물 양쪽으로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하여 동쪽에 올라가는 계단[신계神階와 동계東階]이 있고, 서쪽에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있다. 신계와 동계는 신도ㆍ어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홍살문에서 신도ㆍ어도를 따라 걸어온 선왕의 영혼과 왕은 동계를 통해 정자각에 오른 뒤 제향이 끝나면 선대왕 영혼은 정자각 뒷면의 신문으로 나가 신도를 따라 능으로 올라가고 왕만 정자각을 내려오므로 서쪽에는 계단이 하나밖에 없다. 정자각 뒷면의 신문과 신교 그리고 신도는 영혼이 봉분을 향하는 상징적 통로이다.

 

 

▲ 능침에 오르기 위해서는 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와 함께 올라야 한다 ⓒ 2014 한국의산천

 

 

 

 

조선 왕실의 측천무후 50여 년간 국정을 쥐락펴락한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태릉

조선시대 수렴청정,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 여인천하 왕비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 태릉은 장엄하고 우람하여 문정왕후 생전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태릉(泰陵)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의 제2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의 능호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23-19에 있으며 사적 제201호로 지정돼 있다. 훗날 사가들은 문정왕후를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종종 비교한다. 그는 중종,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50여 년간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권력욕이 강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표독하고 독살스러운 인물로 그려졌다. 그래서인지 문정왕후의 능은 일반 왕후의 능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특이하게 조영됐다.

 

  태릉의 능침은 양주 노원면 대방리(현 노원구 공릉동)에 종산을 수락산으로 하고 주산을 검암산으로 한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 형국에 자리 잡았다. 앞에 흐르는 공릉천이 명당수다. 능침은 북서에서 남동향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 언덕에 단릉(單陵)으로 예장돼 있다. 능역의 왼쪽에 태릉선수촌, 명종·인순왕후의 강릉, 삼육대가 이어지고 전면에는 육군사관학교, 오른쪽에 사격장과 놀이동산, 서울여대가 있다.

 

  문정왕후는 1565년 4월 6일 아침 삼정승 등 조정의 대신을 모이게 한 뒤 언서유교(諺書遺敎·한글 교서)를 내리고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했다. 보기 드문, 그러나 문정왕후다운 대왕대비의 교서였다. 문정왕후는 교서에서 명종이 허약하고 후손이 없음을 염려하며 자신의 상례에는 고기를 먹지 못하는 예를 무시하고 주상의 몸을 보양케 하라고 명했다. 중년의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밖에 교서에는 왕실에 대한 충성과 그녀가 중흥한 불교의 보존, 자신의 친정 일가로 장경왕후 딸인 효혜공주의 제사를 모시는 윤백윤 일가의 면죄를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이 교서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승하 당일 문정왕후의 정치적 간섭을 탓하면서 ‘서경(書經)’의 목서(牧誓) 편을 예로 들며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비난했다.

 

 

 

왕릉을 능가하는 웅장한 능

  문정왕후는 16세에 중종의 중전이 돼 28년간 왕비를 지내고 아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이렇듯 50여 년간 왕실의 어른 노릇을 하며 국정을 쥐락펴락한 여장부였으니 중국의 측천무후나 서태후에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정왕후는 1501년 영돈령부사 윤지임의 딸로 태어났다. 1518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요절하자 급히 왕비로 책봉됐다. 왕실에 들어와 딸만 넷을 낳은 문정왕후는 어린 세자(장경왕후의 아들, 훗날 인종)를 기르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 왕비가 된 지 거의 20년 만에 중종과의 사이에 경원군을 낳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싶었다.

세자를 앞세운 윤임 일파(대윤)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 일파(소윤) 사이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대윤 쪽이 유리한 듯 보였다. 죽은 장경왕후의 아들인 세자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이 약한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주도권은 소윤에게 넘어갔다. 일설에는 인종이 문정왕후가 전한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그토록 바라던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12세의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동시에 윤원형 일파에 의한 ‘외척 전횡시대’가 도래했다. 이들은 정적을 제거하고, 부정축재를 일삼아 원성이 자자했다. 어린 명종은 어머니와 외척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의 소개로 봉은사 승려 보우를 만나 불교에 심취했다. 보우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승과제도를 도입하는 등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에 앞장섰다. 봉은사는 문정왕후 시아버지인 성종의 선릉과 남편 중종의 정릉의 능침 사찰이었다.

미약한 왕권을 이용해 조정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리사욕을 채우자 사회는 어수선해지고 병들어갔다. 설상가상 흉년마저 들어 굶주린 백성이 도적 떼가 되기도 했다. 양주의 임꺽정이 민란을 일으켰고, 이를 틈타 왜구가 쳐들어왔다.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명종은 민란을 평정하고 왜구를 퇴치하느라 곤욕을 치렀고, 백성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문정왕후 세력은 정적 제거에만 몰두해 1547년 음모를 꾸몄다. 양재역 부근에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들이 날뛰니 곧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벽서를 붙인 뒤 윤임 등이 역모를 기도한 증거라고 몰아세웠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다. 이때 희빈 홍씨(중종의 후궁)의 소생인 봉성군이 반역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은 지금의 태릉 터에 모셨다. 당대의 지관이며 예언가였던 남사고(南師古)가 “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라고 한 말에 따라 문정왕후를 태릉에 모시고 훗날 자신도 바로 옆 강릉(康陵)에 안장됐다.

 

  문정왕후는 생전에 남편 중종(1488~1544)의 능을 옮겼다. 원래 중종은 고양시 서삼릉 내에 있는 희릉(장경왕후의 능)의 오른쪽에 묻혔으나, 1562년(명종 17) 중종과 같이 묻히기를 원했던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현재의 강남구 정릉(靖陵) 터로 천장했다. 그러나 정릉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오고 세자가 죽는 일이 잇따르자 명종은 “천장 후 나라에 좋은 일이 없고 변고가 생기니 다시 가서 산릉을 찾으라”고 명령해 결국 공릉동에 안장됐고, 문정왕후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국가안정론을 이유로 1950년대 현 육군사관학교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태릉은 왕비의 능이지만 웅장해서 여장부였던 문정왕후의 모습을 짐작게 한다. 능호도 크고 편안하다는 의미에서 태릉이라 했다. 특히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조선 능원 가운데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岡·언덕)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왕후의 정권욕을 잠재우려 했던 왕과 신하들의 뜻이 아닐까?

 

  태릉은 명종의 명으로 ‘국조오례의’에 나타난 대비의 상례가 아닌 대왕의 상례를 따랐다. 봉분 아래는 운채(雲彩)와 12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으로 두르고,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했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앞면 중앙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12간지를 문자로 새기는 것은 세조 때 능역 조성을 간소화하면서 병풍석의 신상(神像)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으로 등장했는데, 태릉에는 신상과 문자가 병용돼 주목을 끈다. 이 능역의 조성을 위해 상당히 많은 인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보인다.

 

 

 

 

 

 

 

 

 

수렴청정(垂簾聽政)에 대해서 
 역대 왕조에서 행해진 대리정치.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될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일을 말한다. 기록상으로 한국에서 제일 먼저 수렴청정을 한 것은 53년 고구려 제6대 왕, 태조왕이 7세로 즉위하자 태후(太后)가 수렴청정을 한 경우이다. 이보다 앞서 제3대 왕 대무신왕도 11세로 즉위하여 어느 누가 대리정치를 하였을 듯하나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없다.

 

  신라에서는 540년 법흥왕이 죽고, 그의 조카 진흥왕이 7세로 제24대 왕으로 즉위하여 법흥왕의 비(妃)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765년 경덕왕이 죽고, 태자가 8세로 제36대 왕 혜공왕으로 즉위하자 역시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백제의 경우 섭정(攝政)의 기록은 있으나 수렴청정의 기록은 없다. 고려시대에는 1094년(선종 11) 선종이 죽고, 태자가 11세로 제14대 왕 헌종으로 즉위하여 사숙태후(思肅太后:선종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1344년 충혜왕이 복위한 지 5년 만에 죽고, 태자가 8세로 제29대 왕 충목왕으로 즉위하여 충혜왕의 비가 역시 수렴청정을 하였다. 1349년 충목왕이 4년 만에 죽고, 그의 서제(庶弟)가 13세로 제30대 왕 충정왕으로 즉위하자 생모 희비(禧妃)와 충혜왕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원(元)나라에서는 3년 만인 1351년 제27대 왕 충숙왕의 둘째 아들 강릉대군(江陵大君)을 제31대 왕 공민왕으로 삼았다.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최만생(崔萬生) 등에게 살해되어 우(禑)가 10세의 나이로 뒤를 잇자 할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충숙왕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68년(세조 14) 세조가 죽고 태자 황(晄)이 19세에 예종으로 즉위하여 그의 어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예종과 동좌(同坐)하여 수렴청정을 하였다. 1469년 즉위 1년 만에 예종이 죽고 조카 성종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정희왕후가 7년 동안 계속 수렴청정을 하였다. 1545년 인종이 재위 1년 만에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제13대 왕으로 즉위하니 중종의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가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567년(명종 22) 명종이 죽고 선조가 16세로 즉위하자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1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0년(정조 24)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영조의 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4년(순조 34) 순조가 죽고 왕세손 헌종이 즉위하자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의 비) 김씨가 6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가 또 수렴청정을 하였고,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익종의 비인 조대비(趙大妃)가 약 2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역대 왕조의 수렴청정은 고구려에서 1회, 신라에서 2회, 고려시대는 4회, 조선시대는 8회 임금이 즉위 초에 나라의 정사를 모후나 대비에게 맡겨 외척의 정치 참여를 가져왔고, 특히 순조 이후 철종 때까지 60년간의 척신(戚臣)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조정의 문란, 부정부패, 매관매직의 성행 등을 초래하였다. 또한 탐관오리의 득세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민심이 흉흉하여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 일어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웠다.

 

▲ 날이 너무 더워서 잠시 쉬었다 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오늘 사용한 렌즈 (35mm 필름카메라로 환산하여) 24~70 (F 2.8) 과 70 ~ 200(F 2.8) 렌즈  

렌즈가 밝아서 셔터 속도가 빠르고 촛점이 매우 빠르게 잡혀서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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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신들 횡포와 국정 혼란 허수아비 왕권에 ‘눈물’
명종과 정비 인순왕후의 강릉

 

 

권신들 횡포와 국정 혼란 허수아비 왕권에 '눈물'
명종과 정비 인순왕후의 강릉 
  

 강릉은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의 동북쪽인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23-19에 있다. 오른쪽에 태릉선수촌이 있으며, 왼쪽에 삼육대가 인접한다

강릉(康陵)은 조선 제13대 왕 명종(明宗, 1534∼1567, 재위 1545∼1567)과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1575) 심씨의 능이다. 명종의 위(諱)는 환()이며 자(字)는 대양(對陽)이다.

 

  11대 왕 중종과 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은 그의 이복형인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후사 없이 죽자 12세에 왕위에 올라,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왕의 종아리를 때릴 만큼 독선적이고, 정치적 야심이 컸다고 한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명종은 23년 동안 재위했으나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을사사화, 임꺽정의 난, 을묘왜변 등 국가적 혼란을 겪으며 성군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언적(1491∼1553) 등을 통해 주리성리학을 정립하게 하고 이황(1501∼1570) 등의 활동으로 성리학, 유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1545년 7월 1일 인종 승하 후 왕권을 이은 명종은 언제, 어디서 즉위했는지 기록이 없다. 인종이 승하하는 날 문정왕후가 바로 경복궁에 입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일 즉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중기 연산군 때부터 명종까지 신진사류(사림)가 훈구세력으로부터 받은 정치적 탄압으로 약 50년간 네 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다. 선왕인 인종 때는 25년간의 세자생활과 8개월의 재위 동안 외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파가 실권을 장악했으나, 명종의 즉위와 더불어 문정왕후 동생인 소윤파 윤원형 등이 득세해 대윤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것이 을사사화다.

 

  이후 약 20년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탓에 명종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의 권세가 크다 보니 노비 출신으로 정경부인까지 된 그의 애첩 정난정의 위세가 대단해서 뇌물을 받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생사여탈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명종은 윤원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인순왕후의 친인척을 가까이 두었으나 그들 역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해 부정축재를 일삼고 자기 세력을 키워 조정은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이 무렵 황해도 구월산에 본거지를 둔 의적 임꺽정이 난을 일으켜 3년간 조선의 행정은 마비되고, 을묘왜변 등 왜구의 약탈로 민간의 고통은 커졌다.

 

 

  혼란기에 왕권을 지키고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애쓰던 명종은 1567년(명종 22) 6월 28일 축시(새벽 1~3시)에 후임 왕을 점지하지 못하고 경복궁 양심당에서 세상을 하직할 기미를 보였다. 왕실과 조정은 선왕 승하에 대한 슬픔에 앞서 차기 왕(사왕·嗣王) 선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날 밤 상왕의 병이 위독해 두 정승을 부르나 이미 퇴청했고, 왕이 신음하면서 괴로워하니 뒤늦게 정승들이 들어와 내시들이 부축했으나 말을 잇지 못했다.

 

  사관이 두 사람의 이름을 써서 올렸으나 끝내 고명하지 못했다. 결국 신하들이 중전(인순왕후)에게 후계자 전교를 요구하자 “을축년(2년 전)에 하서(下書)한 일이 있는데, 그때 덕흥군의 셋째 아들 균(鈞)을 후사로 삼은 일을 경들도 알고 있다”고 말하니, 신하들은 양사의 장관(예조와 사관)들이 알아야 한다며 중전에게 재전교를 부탁했다. 그러나 인순왕후는 “밤이 깊어 미안하니 서간으로 전한다” 해서 신하들이 물러나와 경회지(慶會池) 다리에 둘러앉아 좌의정 이명 등에게 중전의 전교를 논의하다 사관들이 들으려 하자 못 듣게 하니 불안의 기색이 많았다고 실록은 전한다.

 

  의관이 왕의 수족이 식어간다 전하자 승지가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이명 등에게 주상을 봉영할 것을 큰 소리로 울부짖으니, 인순왕후가 “망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재작년(을축년) 서한한 사람으로 하라”고 명했다. 죽어가는 명종 앞에서 인순왕후가 덕흥군의 삼남 하성군을 사왕(차기 왕)으로 지명한 것이다. 곧바로 명종이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했다.

 

▲ 웅장하면서 견고한 병풍석과 난간석의 능침 석물 ⓒ 2014 한국의산천 

 

 

 

 

 

 

 

 

 

 

 

  강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동원(同原)쌍릉이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두르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돼 있으며,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긴 만석이 있다. 혼유석은 왕릉과 왕비릉에 각각 설치했다. 

 

  강릉의 정자각은 최근 보수한 태릉의 정자각보다 고풍스러운 느낌이고, 문무석인상의 인상과 형태는 전체적으로 태릉과 유사하다. 임진왜란 직전의 것들로 임란 이전의 능제시설 연구에 가치가 있는 능원이다.

 

▲ 강릉의 신로와 어로는 자연과 어우러져 고즈넉하다 ⓒ 2014 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