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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삼성산 라이딩

by 한국의산천 2013. 6. 16.

삼성산 라이딩  (6월 16일 일요일 / 사진촬영 : 맑은샘님 / 한국의산천)

 

함께 달린 사람들 : 흰구름님 / 맑은샘님 / 행복한 도전님 / 한국의산천 4명 

 

우리는 왜 자전거를 타고 헉헉대며 산에 오르는가?

 

운동하기 위해서?

친구들 만나기 위해서?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

친구들과 만나서 함께 운동하며 대화를 나누고 한잔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

 

▲ 왼쪽부터 한국의산천  / 맑은샘님  / 행복한 도전님 / 흰구름님 (4명) ⓒ 2013 한국의산천

등촌동 출발 ~ 가양대교 ~ 안양천따라 ~ 구일역 ~ 경인교대앞 도착. 계속해서 삼성산 오른길 라이딩 하기 

 

"There is nothing like returning to a place that remains unchanged to find the ways in which you yourself have altered"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아직 변하지 않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Nelson Mandela -

 

▲ 흰구름님 ⓒ 2013 한국의산천

 

▲ 행복한 도전님  ⓒ 2013 한국의산천

 

▲ 맑은샘님  ⓒ 2013 한국의산천

 

▲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의산천입니다   ⓒ 2013 한국의산천

 

▲ 아침부터 더운 날씨다.  ⓒ 2013 한국의산천 

인생 뭐있어?  우리는 날씨에 상관없이 달린다. 울트라 캡숑 삐빠빠룰라 진진바라 고고씽 ~!!! 

 

▲ 챌린지팀 참석 복장 ⓒ 2013 한국의산천

챌린지팀의 복장은? (자전거 기종은 상관없습니다)

편안한 복장에 안전모(헬멧)을 쓰고 클릿착용, 등허리(척추)를 충분히 감쌀 수 있는 두 어깨에 거는 배낭(물과 공구, 예비튜브 1개 이상 지참)을 메야 합니다.

 

▲ 의도와는 상관없이 노출값과 타이밍을 놓쳐도 나름 괜찮네요 ⓒ 2013 한국의산천

 

우리는 힘차게 달린다

 

Citius, Altus, Fortius !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 7개의 아름다운 홍예가 있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만안교 ⓒ 2013 한국의산천

 

효성이 지극하시고 성군이셨던 정조

아버지(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보며 살얼음판을 딛듯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세손(정조).

이 아름다운 다리를 보니 정조대왕이 떠오른다. 

 

  만안교(萬安橋)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1776~1800 재위)가 당파싸움 사이에 끼어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참배 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과천, 수원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 노변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의 형(兄) 약로(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시흥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정조가 만안교를 지난 것은 7번째 능행부터이다. 이 다리는 처음에는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경기관찰사 서용보에 의해 돌로 이를 대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795년(정조 19)에 당시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길이 31.2m, 너비 8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長臺石)을 깔아 축조하였다. 축조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다.

 

원래 위치는 남쪽 200m 지점의 안양천에 있었으나 국도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에 이곳 만안구 석수2동의 삼막천으로 이전하였으며, 다리 앞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쓴 만안교비가 있어 이 다리의 연혁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만안교 다리밟기가 펼쳐진다.

 

▲ 만백성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만안교라고 이름지어졌는가? ⓒ 2013 한국의산천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에 위치한 만안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38호 지정되었다.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갈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하기 위해 축조하였다.

길이 31.2m, 너비 7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깔아 축조하였으며, 축조 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이다 

 

만안교....이곳을 지날때면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생각난다.

 

세종에 버금갈 만큼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 

 

조가 83세로 승하한 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1776년 3월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엿세만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했다. 그리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서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하지 않는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즉위 일성(一聲)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물어넣었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다. 14년전 뒤주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듯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노론이 가장 두려워한것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즉위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어찌 그 아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세손(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서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고립무원의 길에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 조심 두렵게, 위태 위태하게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왔다.

 

정조는 열흘 후인 3월 20일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올리고 묘호는 영우원, 사당은 경모궁이라 높혔다. 그리고 그 5일 후 홍인한등과 결탁해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환완공주의 양아들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향 보냈으며, 이어 정후겸의 양모이자 자신의 고모이기도한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시켰다. 화완은 이후 정치달의 부인을 뜻하는 '정처(鄭妻')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정조가 선왕의 대를 이어 왕이되고 비운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릉을 화성으로 이장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노론과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사도세자의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열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한을 지닌 시신이 27년만에 임금이된 자신의 아들 정조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나는 날. 이날 이 행렬을 호위한 사람은 사도세자를 살리지 못했다고 꾸짖고 그 이유로 귀향을 떠났던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어가와 잉여가 함께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떠나는 행렬은 웅장했다. 경기 관찰사가 선도하고 담당 신하들은 예법에 따라 좌우로 늘어섰다. 취타수 18명과 붉은 군복을 입은 4백여명의 군사들이 세줄로 늘어섰으며, 사도세자와 잉여 곁에는 호위군사 200여명이 겹줄로 늘어섰고 가가각 50여개의 만장이 앞뒤로 하늘을 수놓았다. 노제 장소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했으며, 수백리 밖에서 어가와 영가의 행렬을 보기위해 몰려 들었다. 이 행렬을 호위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날 정승들에게 세자를 구하라고 명한죄로 홍봉한의 주청으로 인해 탄핵당해 해남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한림 윤숙이었다.다시 사도세자를 구하려던 자의 호위를 받으며 안식처로 길을 떠나고 있다.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키고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한림) 임덕제-'나의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내 손이 짤릴 지언정 나를 끌어낼수는 없다'고 외쳤다-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 으로 가고 있었다.

 

'부주(父主)여 살려주소서!' 했던 아버지와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했던 세손이 왕이되어 함께 떠나는 길. 

각영마다 늘어선 깃발, 그리고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북소리와 취타소리는 사도세자의 혼이 펄럭이고 울부짓는 소리였다. 

 

사도세자의 고백 / 클릭 => http://blog.daum.net/koreasan/13737026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http://blog.daum.net/koreasan/13691642
지지대비와 정조의 효심 => http://blog.daum.net/koreasan/13675557

 

 

 

 

 

 

 

 

 

 

 

 

▲ 쉬지 않고 이어지는 숨가쁜 Up Hill ⓒ 2013 한국의산천

 

 

 

 

▲ 경사진 길을 돌아 돌아서 뒤편으로 보이는 통신탑이 있는곳까지 올라야 한다 ⓒ 2013 한국의산천

 

 

▲ 삼막사로 오르는 길에서 우연히 산에 함께 다니던 오랜 산 친구를 만나다 ⓒ 2013 한국의산천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 으로 가고 있었다.

 

'부주(父主)여 살려주소서!' 했던 아버지와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했던 세손이 왕이되어 함께 떠나는 길.

각영마다 늘어선 깃발, 그리고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북소리와 취타소리는 사도세자의 혼이 펄럭이고 울부짓는 소리였다.

 

 

 

 

▲ 점심식사하며 ⓒ 2013 한국의산천

 

세상을 사노라면
둘이지만 하나임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부부 사이에서,
친구 사이에서,
교우 사이에서...
마치 하나의 막대기 양 끝을 잡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듯, 외모는 달라도 생각이 같을 때
그런 순간을 느낀다.
살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 오늘의 행복을 위하여 中에서 -

 

 

 

 

 

 

 

 

 

▲ 맛있는 점심식사를 준비해주신 주인장님과 함께 ⓒ 2013 한국의산천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MTB #에 들려서 브레이크 점검 교환 ⓒ 2013 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