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 둘레길 강추!
계양산 둘레길 트레일 (경인여대 또는 연무정에서 계양산 둘레 한바퀴돌기/ 느긋하게 약 2시간 30분 소요)
[2013년 1월 13일 포근한 일요일 계양산 둘레길 트레일 - 운산의봄 & 한국의산천 2名]
▲ 나무가 많은 계양산 북사면 ⓒ 2012 한국의산천
인천 부평의 진산인 계양산은 나의 오래전 어린시절 즉 국민학교 교가에도 나오는 산이다
유구한 반만년의 정기를 받은... 계양산... ~
오늘은 계양산의 둘레길을 돌기위해 우선 북사면(North face)쪽으로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북사면이라 눈은 그대로 있는 산사면이 아름답고 겨울다웠다
계양산의 북사면은 산사면이 비교적 완만하며 숲이 우거진 산길이 특징이다. 또한 트레일의 높낮이의 차이가 심하지 않기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이 찾는 코스이기도하다.
▲ 징메이고개와 자연생태통로 ⓒ 2013 한국의산천
징매이 고개
- 징메이 고개는 매를 징발해서 송도 서울 가는 큰 길목 -
계양구 계산동에서 서구 공천동으로 넘어가는 계양산 주봉 서쪽의 고개를 "징매이 고개(景明峴)"라 했는데 그 길이가 8㎞에 이르러 인천지역에서는 가장 크고 높은 고개이다.
고려 충렬왕은 몽고의 원나라 황제의 딸 제국공주와 정략결혼을 해서 원나라에 자주 드나들었고 원래 기질이 호탕한데다 원나라의 수렵행각을 본받아 재임시 매사냥을 즐겨 부평고을에 다섯 번이나 행차했다고 한다. 송도서울에 있는 국영매방(鷹房)을 "징메이 고개"로 이전했으니 그 매방이 있던 곳이 "징메이 고개" 정상에서 서쪽 50m 지점에 있어 그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근래 6차선 도로확장공사로 흔적마져 없어지고 말았다.
매(鷹)가 사냥을 하는데도 우리나라산 "해동청 보라매"가 가장 뛰어났다고 하여 몽고인 원나라까지 소문이 퍼져 이 곳 매방에서 징매(徵鷹)을 해서 "징매고개"라 한 것이 "징메이 고개"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충렬왕 34년(1308) 계양도호부를 93년 만에 없애고 한등급을 높여 참으로 길한 고을이라서 길주(吉州)란 목사고을로 승격시켰던 것이다.
이 징메이 고개길은 지금의 검안동 바름이 마을인 옛날 유명했던 발아장(發阿場)으로 해서 가현산의 광인원(廣因院)을 거쳐 통진의 조강(祖江) 나루터를 건너 송도서울로 갔던 국도였다. 이 바름이 마을 뒤의 계양산 낭맥이「허암산」에 이어지 고개를 발아현(發阿峴)이라 했는데 이를 일명 "작은 징메이"로 불러오기고 했다. 이 "징메이 고개" 정상에는 고종 20년(1883) 10월에 축조한「중심성」의 관문인 경명문루를 세워 그 이름 공해루(控海樓)라 현액(顯額)하였다. 이는 조정에서 연해의 관문인 이 고개에 성을 축조해서 인천과 부평의 외침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자 함에서 였다. 현재 중심성은 완전히 없어져 성을 쌓았던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성문인 공해루도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되고 다만 주춧돌 4개만 남아 있더니 그나마 이제는 없어지고 지금은 높은 고개를 푹 낮추어서 6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완공되어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있다는 속담과 같이 옛날 의적「임꺽정」의 소굴이었다는 심산유곡에 이와같은 큰 변화가 찾아 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치 못 했던 것이다. -출처 : 부평문화원
▲ 2006년 강화 이규보선생 유택답사시에 ⓒ 2013 한국의산천
이규보 선생 상세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8483258
이규보(1168~1241) 고려시대의 문신, 문인으로 본관은 황려, 호는 백운거사, 지헌, 시호는 문순이다.
주요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 , '백운소설'이 있다.
시, 술, 거문고를 좋아한다 하여 삼혹호선생이라고도 하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1207년(희종 3)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 참군사(參軍事)·사재승(司宰丞)·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1220년(고종 7) 예부낭중(禮部郞中)·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30년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蝟島)에 유배되었으며 1232년(고종 19) 비서성판사(??書省判事)에 승진하고, 이듬해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태자소부(太子少傅) 등을 거쳐 1237년(고종 24)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事)·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저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작품: 시(詩)에 '천마산시(天摩山詩)', '모중서회(慕中書懷)', '고시십팔운(古詩十八韻)', '초입한림시(初入翰林詩)', '공작(孔雀)', '재입옥당시(再入玉堂詩)' , 초배정언시(初拜正言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문(文) : '모정기(茅亭記)'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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