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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삼전도비와 백제적석총 답사

by 한국의산천 2012. 5. 27.

남한산성 행궁 답사전에 들려본 삼전도비와 백제 적석총 답사하기 [2012 · 5 · 27 · 흐리고 비내린 일요일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병자년(1636년·인조14년) 그해 겨울, 남한산성에는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이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인조는 결국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항거를 포기하고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淸)나라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와의 전쟁으로 남한산성에서 잠시 버티다가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또는 줄여서 삼배구고(三拜九叩 : 세번을 절하고 아홉번을 조아린다)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는 치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삼전도비가 있다. 그곳을 찾아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 송파구에 위치한 석촌호수 ⓒ 2012 한국의산천

본래 삼전도비가 세워져있던 곳은 이곳 석촌 호수로 변해버린 이곳이었다.

 

 

 

▲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몇번의 이전끝에 현재는 석촌호수 송파대로변에 자리하고 있는 삼전도비 ⓒ 2012 한국의산천

삼전도비는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 어린이 놀이터에 있다가 스프레이 테러를 당한 후 다시 원상 복구하여 현재의 위치 석촌호숫가로 자리를 옮겼다.

 

삼전도비(三田渡碑) 일명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당시 경기도 삼전도)에 있는 청나라의 전승비이며 송덕비(頌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도 부른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국왕 인조는 만주족에 패해 머리를 땅바닥에 9번을 찧는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러야 했으며, 삼전도비는 그것을 증언하는 역사적 산물이자 기념비다. 이후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명칭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만주어: Daicing gurun i Enduringge Han i gung erdemui bei()
몽골어: Dayičing ulus-un Boɤda Qaɤan-u erdem bilig-i daɤurisɤaɤsan bei
중국어: Daqing Huangdi Gongde Bei (大清皇帝功德碑)

 

370년 전 남한산성의 그 겨울은 매우 추웠습니다.  

1637년 1월 30일 조선왕 인조(仁祖)는 성문을 열고 세자와 백관(百官) 등 500여명과 함께 삼전도(三田渡)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청(淸) 태종 홍타이치의 20만 대군에 포위된 지 45일 만이었다. 삼전도(現 송파)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벌써 수항단(受降壇)을 높이 쌓아 놓고 거기서 인조는 평민의 옷을 입고, 황옥(黃屋)을 깔고 앉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해야했다. 그러나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몇십번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그렇게 항복의 예(禮)를 올렸습니다.

또한 청태종은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라고 조선에 명하게 되고 비석은 당시 대제학이던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참판 오준이 글자를 썼으며 참판 여이징이 전자(한자 서체의 하나)를 새겼다

 

조선 왕조가 창업한 지 246년,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패(敗)하면 치욕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60여만명의 남녀가 만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청에 끌려갔고,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 환향녀는 이혼문제를 낳았다. 서서히 화냥녀로 구개음화되었다)


삼전도의 비극을 놓고 훗날 두고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갔습니다만, 항복밖에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20만 대군에 둘러쌓인 성 안에는 1만 3000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밖에 없었습니다. 그 병사들마저 배를 주리고 추위에 떨며 몸으로 새벽 서리를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성밖에선 청병(淸兵)들이 어미는 진중(陣中)에 붙잡아 두고, 그 어미 앞에서 갓난아이를 언 땅에 굴려 죽이는 짐승 같은 짓을 심심풀이로 해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항복 하지 않을 수 없었었던

오늘에도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와 받침돌 조각이 정교해 조선 후기의 뛰어난 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치욕비(삼전도의 욕비(辱碑))라고도 불리며, 비를 만들 당시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 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조정의 명으로 조선에서 건립하였다.

 

비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의 높이는 3.95m, 폭은 1.4m이고 무게는 32t이다. 비문은 1637년 11월 25일 인조 15년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다시 세워놓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에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1983년에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옮겼다.이후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에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수중에서 30여m 떨어진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

 

▲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더니 비가 내리고 잠시 후에 큰비는 그치고 이슬비가 내린 휴일입니다 ⓒ 2012 한국의산천

 

삼전도비

사적: 제101호(1957.2.1)
규모: 총고 5.7m, 신고3.95m, 신폭1.4m, 재료 대리석

삼전도비는 이곳 지명을 딴 것으로 원명은 대청황제 공덕비이다. 병자호란시(1636) 청태종이 조선을 침략하고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처음에는 삼전도에 세워졌으나 1895년(고종32) 청.일전쟁 후에 메몰된 것을 다시 세웠다가 한강변이 침식됨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비문을 쓴 대제학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더없는 명문이나 치욕의 내용이라 세세히 읽어 보는 이가 없고, 비 앞을 지날 때는 다들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1595년 11월 18일 ~ 1671년 9월 24일)

이경석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성리학자이자 서예가로,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시호는 문충(文忠), 충청도 제천 출신이다.

1623년의 알성문과와 1626년의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정묘호란 후 승지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1637년 12월 당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으로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항복하게 되면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인조 반정 공신들의 전횡에 맞서 산림학자들을 적극 천거하여 등용하게 했다. 글을 잘 지었고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등이있고 삼전도비외 여러 작품을 남겼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삼전도비를 쓰고서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지만 그 당시로는 누구라도 임금의 명을 받아 써야만 할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자학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또한 인조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는 청나라 풍습이었으니,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仁烈王后)의 국상을 조문 왔던 용골대 등도 삼배구고두를 하였었다. 묘소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1 속칭 대감능골에 있다.

 

그분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다시말해 주머니 속에 송곳을 넣어두면 반드시 삐져나오듯이 걸출한 인재는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 석촌호수로 옮기기전 2007년 삼전도비 훼손사건 ( 왼쪽이 전면 오른쪽이 비석의 후면)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사건2007년 2월 3일 오후 9시 40분경 백모(39)씨는 삼전도비 공원을 찾아 붉은색 스프레이로 비 몸체에 ‘철’ ‘거’ ‘병자’ ‘370’(인조가 항복한 지 370년이 지났다는 의미) 등의 글자를 써 놓았다.

 

7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비 앞뒷면에 붉은 스프레이로 낙서가 돼 있는 것을 구청 공무원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송파구청의 의뢰를 받아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370'이란 숫자가 인조가 청나라태종에게 항복한 뒤 370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전국의 유사 사건을 검색한 끝에 두 사건에서 같은 차량이 사용된 사실을 확인, 추적 끝에 백씨를 검거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정치인들이 나라를 잘못 이끌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 삼전도비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또한 '370'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꿇은 지 370년이 지났다는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문화재청이 3개월간의 복구작업을 전개한 결과 7월 15일 삼전도비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삼전도비 옆에 세워진 부조에 인조가 청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 새겨진 치욕의 현장 모습 2008년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왼쪽에 있는 삼전도비는 스프레이 테러를 당해 가림막으로 쳐져있었다. ( 석촌호수로 옮긴 후 이 부조는 보이지 않더군요) 

 

삼전도(三田渡)는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나루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 송파구 일대를 말한다.

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淸)나라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와의 전쟁으로 남한산성에서 잠시 버티다가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또는 줄여서 삼배구고(三拜九叩) 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삼배구고 (三拜九叩: 세번을 절하고 아홉번을 조아린다)
인류의 역사는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언제나 시련과 환란을 초래하기 마련, 삼전도비 역시 바로 그러한 우리의 암울한 역사를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637년 음력1월30일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1623 ~ 1649)가 삼전도에서 마침내 청태종 홍타이시에게 신하를 뜻하는 푸른색 관복을 입고 항복의 예를 올리게 된다. 인조는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의 예를 해야했다. 그러나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몇번이나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 石村洞百濟初期積石塚 ]

적석총
건립시기/연도 : 백제 초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43호
문화재 지정일 : 1975년 5월 27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백제 초기의 적석총.
사적 제243호. 서울 동남쪽 잠실대교를 지나 성남시로 통하는 큰 길가에 위치해 있다. 이 고분군은 이웃의 가락동고분·방이동고분과 함께 초기 백제연구의 중요한 유적과 유물을 제공하고 있다.

이 고분군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극히 간략하게 소개된 뒤, 1969년에 문화공보부 문화재연구소의 조사단에 의해 제1·2호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 서울대학교 발굴조사단에 의해 제3·4호분이 조사되었다.

 

 

[제1·2호분]
제1·2호분은 가락동 제1호분의 서북쪽 20m 위치의 평지에 축조되었다. 주민들의 경작지로 이용되어 파괴, 교란되어 내부구조와 유물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제3호분]
제3호분은 송파구 석촌동 61번지에 위치한다. 원래 기원 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무덤 형식인 기단식적석총 (基壇式積石塚)이다. 이 무덤은 약간 높은 지형을 평탄하게 정지작업을 하고 밑테두리에는 매우 크고 긴 돌을 두르고 자연석으로 층단을 이루면서 3단으로 쌓아올렸다.

규모는 옛 고구려지역이었던 만주 통구(通溝)에 있는 장군총에 버금가게 커, 동서 길이 49.6m, 남북 길이 43.7m, 높이 4m이다. 따라서 이 무덤은 고구려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유역에 백제를 세웠을 때의 절대권력자의 무덤으로 보인다.

 

[제5호분]
제5호분은 완전하게 발굴 조사되지 않아 묘곽의 구조와 유물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개 가락동 제1·2호분과 같은 구조로 추정된다.

조사 중 토층변화로 보면 회(灰)가 섞이고 다져진 선이 중심을 향해 내경(內傾)한 것과, 서쪽 중앙 표토 하(表土下) 140㎝에 나타난 석렬(石列)로 보아, 석촌동 제2호분과 같이 2개 이상의 작은 분구(墳丘)를 뒤에 1개의 봉토로 덮은 형태로 가족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봉토에는 집석(葺石)을 덮었으며 봉분 외연(外緣) 주변에는 신라고분에서 볼 수 있는 호석(護石)과 같은 시설이 있는데, 큰 할석을 2단으로 쌓았다. 완전한 발굴조사가 아니므로 내부구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한 봉토 내에 설치된 다곽식(多槨式)의 목관토광묘 (木棺土壙墓)의 구조를 띠고 있다.

이 고분은 초기 백제시대에 이 지역 지배계층의 가족묘로서 주변에 축조된 적석총의 피장자보다는 하층의 사람들 같고, 옹관묘(甕棺墓)나 소형석실묘 (小形石室墓)에 묻힌 사람들보다는 조금 높은 신분계층의 사람들의 분묘로 보아도 무리한 해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05년만에 10년에 걸쳐서 새로 지어진 남한산성 행궁 찾아가기

병자호란 47일간의 항전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일제에 의한 훼손 등 굴곡진 역사를 안은 남한산성 행궁이 10여년의 공사를 끝내고 복원되어 24일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5월 24일부터 28일까지 5일 동안 남한산성 행궁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구에서 무료 입장권을 받아가지고 가셔야 무료로 입장을 할수있습니다 . 자전거는 당근 정문 앞에 알아서(?) 잘 묶어두고 입장하셔야 합니다.

 

행궁 (行宮)

왕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정무를 집행하기 위해 머무르던 별궁(別宮).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 고려 및 조선 시대의 역대 임금들은 본궁 이외에 전국에 행궁을 세우고 지방순행시 처소로 사용하거나 전란 발생시 피난처로 사용하기도 하였음. 특히 고려 시대에는 삼경설(三京說) ·삼소설(三蘇說) 등 지리도참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행궁들이 세워졌음. 고려 시대의 행궁으로는 문종 때의 좌우궁(左右宮), 예종 때의 용언궁(龍堰宮), 인종 때의 대화궁(大花宮), 의종 때의 수덕궁(壽德宮)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의 행궁으로는 세조 때의 온양행궁(溫陽行宮), 인조 때의 광주행궁(廣州行宮)·강화행궁(江華行宮), 숙종 때 남한산성의 행궁, 정조 때의 수원의 화성행궁(水原行宮) 등이 있다.

 

▲ 하니님과 함께 남한산성 동문 앞에서 ⓒ 2012 한국의산천  

 

▲ 105년만에 복원된 행궁과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 2012 한국의산천  

1906년 일제는 남한산성의 승군들을 토벙한다는 명분아래 성곽내에 있었던 사찰 20여곳을 모두 없애면서 행궁마져도 파괴해 버렸던것을 그동안 105년동안 기다리다 10년에 걸쳐서 완공을 본것이다.

 

 

경기도는 24일 10여년에 걸친 남한산성 행궁권역 복원을 축하하기 위한 낙성연(落成宴)을 가졌다. 낙성연은 조선시대에 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잔치를 뜻한다.

일본은 1907년 우리나라의 군대 해산령을 내리고 남한산성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파괴했다. 당시 행궁을 비롯한 사찰과 문화재 등이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는 2002년 상궐(침전)의 내행전 등의 복원을 시작으로 2004년 좌전, 2010년 하궐(정전)의 외행전 등을 복원했다. 올 들어 하궐 단청과 남한산성 안내 전시시설까지 복원 공사를 완료했다. 10여년에 걸쳐 총 215억 원이 투입됐다.

 

이날 낙성식은 조선 정조 시대 때 발간된 수원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등의 고증을 바탕으로 전통 낙성연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경기도지사, 경기도의회 의장, 광주시장 등과 주민들이 현판 제막식 및 낙성연에 참가했다. 

남한산성은 2010년 1월 10일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정식으로 등재됐다. 2011년 2월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내 13곳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가운데 우선 등재 추진 대상으로 선정됐다.

 

 

▲ 남한산성 행궁 전경 ⓒ 2012 한국의산천 

 

경기도는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33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킬 계획이다. 2014년 6월에 등재여부가 최종 판가름 될 예정이다. 

연간 320만 명이 찾는 남한산성은 용인에 있는 놀이공원인 에버랜드에 이어 경기도내에서 두 번째로 방문객이 많은 곳이다. 시민들은 낙성연 기간인 이달 24일부터 28일까지 5일 동안 남한산성 행궁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또 행궁내에서 펼쳐지는 풍류음악회(26일), 광지원 농악(27일)과 전통무예 시연 등 전통문화공연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무료 입장권을 받으셔야 합니다)

관람 시간은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계속해서 남한산성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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