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남한산성 행궁

by 한국의산천 2012. 5. 28.

105년만에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 찾아가기  [2012 · 5 · 27 · 흐리고 비내린 일요일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주춧돌만 남아 있던 남한산성 행궁이10년 공사후 복원이 되었다

 

지금으로 부터 372년전 병자년(1636년·인조14년) 그해 겨울 이곳 남한산성에는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이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행궁 (行宮)

행궁은 조선시대 임금이 도성 밖으로 행차했을 때 임시로 정무를 집행하기 위해 머무르던 별궁(別宮).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 고려 및 조선 시대의 역대 임금들은 본궁 이외에 전국에 행궁을 세우고 지방순행시 처소로 사용하거나 전란 발생시 피난처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삼경설(三京說) ·삼소설(三蘇說) 등 지리도참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행궁들이 세워졌다.

 

고려 시대의 행궁으로는 문종 때의 좌우궁(左右宮), 예종 때의 용언궁(龍堰宮), 인종 때의 대화궁(大花宮), 의종 때의 수덕궁(壽德宮)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의 행궁으로는 세조 때의 온양행궁(溫陽行宮), 인조 때의 광주행궁(廣州行宮)·강화행궁(江華行宮), 숙종 때 남한산성의 행궁, 정조 때의 수원의 화성행궁(水原行宮) 등이 있다.

 

조선의 행궁은 모두 23곳이 있었는데, 남한산성 행궁은 그중 유일하게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을 갖춘 곳이다. 종묘와 사직은 곧 나라를 뜻하니, 왕이 이 곳에 오는 것은 나라 전체가 옮겨오는 것과 같다.

 

 

병자호란 47일간의 항전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일제에 의한 훼손 등 굴곡진 역사를 안은 남한산성 행궁이 10여년의 공사를 끝내고 복원되어 24일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5월 24일부터 28일까지 5일 동안 남한산성 행궁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구에서 무료 입장권을 받아가지고 가셔야 무료로 입장을 할 수 있습니다 . 자전거는 당근 행궁 정문 한남루 앞에 알아서(?) 잘 묶어두고 입장하셔야 합니다.

 

▲ 막바지 10여km의 도립공원 남한산성 오름길을 쉬지않고 달리는 하니님 ⓒ 2012 한국의산천 

 

택리지의 기록처럼 남한산성은 광주,성남이요 성남하면 남한 산성이 떠오르는 곳이다. 남한 산성(사적 제 57호) 은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 등을 지키는 4대 외곽 가운데 동쪽에 자리한 성으로 북한산성과 함게 도성을 지키는 남부의 산성이다. 

 

흔히 남한산성을 위락지 또는 유원지 정도로 생각하지만 남한산성은 우리민족의 자존심이고 가슴아픈 사연을 지닌 곳이다.그리고 생각보다 크고, 높고, 가파른 산이다.

 

택리지를 보면 여주 다음으로 광주가 소개되고 있다. 

여주 서쪽은 광주(廣州)로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쭉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성안은 험하지 않지만, 성 바깥 산 밑은 살기를 띠었다. 또 중요한 진(鎭)이므로 만약 사변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전투가 벌어질 지형이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 되었기 때문이다. - 택리지에서- 

 

 

▲ 시나브로 짙어져가는 오월의 숲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날에 남한산성에 올랐습니다.

 

오르막을 오를 때 기어를 낮추면 다리에 걸리는 힘은 잘게 쪼개져서 분산된다. 자전거는 힘을 집중시켜서 힘든 고개를 넘어가지 않고, 힘을 쪼개가면서 힘든 고개를 넘어간다.

집중된 힘을 폭발시켜 가면서 고개를 넘지 못하고 분산된 힘을 겨우겨우 잇대어가면서 고개를 넘는다.

 

 

▲ 남한산성으로 들어서기전 계곡에는 많은 사람들이 초여름을 즐기고 있다 ⓒ 2012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 서문 (2007년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서로의 대립각을 세웠다. 


"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수 없다" 청음 김상헌과 " 굴복을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지천 최명길. 두분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신 두분 말의 표현은 달랐어도 마음에 담은 애국심 그뜻은 같지 않았을까?

 

▲ 칸에게 치욕과 수모를 당한 서문 (2007년 여름 촬영) ⓒ 한국의산천  

 

살을 에는듯한 북풍한설 몰아치는 정월. 城안의 말 먹이는 동이난지 오래며, 한마리 두마리 허연 콧바람을 내뿜으며 허덕이다 쓰러지고, 성을 지키는 병졸은 가마때기 한장 없이 눈보라를 맞으며 통나무 쓰러지듯 하나 둘 스러져갔다. 지금으로부터 372년전 이곳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1월30일, 왕은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흰말을 타고는 이곳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가야 했다. 서문은 작고 낮아서 말을 타고서는 도저히 지나 갈 수 없는 문이다. 또한 서문을 지나서 내려가는 길은 좁고 매우 가파른 길이기에 말을 타고 내려 갈수없는 곳이다. (몇해전 제가 이곳 남한산성을 한바퀴 돌때 유심히 관찰했던 곳입니다) 

 

삼전도에 다다라 칸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칸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상이 파할 무렵 칸은 두 마리의 개에게 상에 차려져 있던 고기를 베어서 던져 주었다고 하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밭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왕에게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칸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해거름이었다. 

 

소파진(所波津)으로 한강을 건넌 왕을 향해 사로잡힌 백성들은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라고 말이다.

 

▲ 자전거길은 고사하고 인도조차 없는 좁은 편도1차선 차도옆으로를 달려야하는 마음은 늘 조마조마하다 ⓒ 2012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 ⓒ 2012 한국의산천

 

남한산성(南漢山城) 

성과 성벽 건축물

지정종목 : 사적 제13호 
제작시기 : 1395년(태조 4) 건립, 1704년(숙종 30) 중수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9km이다.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과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73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을 이 때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이쯤되면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안이 유치 가능 인구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만 2,700명이었다. 그러나 성곽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되었지만 근래에 행궁을 예전 모습 그대로 새로이 복원하였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문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이서 장군사당, 숭렬전,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외부에서는 성 내부를 볼수없는 잘 만들어어진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 2012 한국의산천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 되었기 때문이다. - 택리지에서-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 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9.05km, 높이는 7.3m 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왕 때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를 신라 문무왕 때 다시 쌓아 '주장성'을 만들고,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겨졌다. 남한산성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특히 조선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한산성의 축성과 몽진,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오늘날의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부터 축성되어 인조 4년(1626)에 완공 되었으며,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숭열전, 청량당, 지수당, 연무관 등이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복원공사가 한참인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4문(門)과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현존하는 사찰은 장경사뿐이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후금의 위협이 커지고 대내적으로는 이괄(李适)의 난 등으로 어려웠던 조선 인조대에 남한산성은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하였다. 이 때의 공사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되었다.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이곳으로 피란하였는데, 이 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所)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동문
산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좌익문이라 한다.

성문의 폭은 3.1m, 높이는 4m이다. 다른 문에 비하여 동문은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고 계단을 구축하여 우마차의 통행은 불가능하였다. 


 

 

 

 

 

 

 

 

서문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우익문이라 한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 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했던 문이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이다. 


 

 

 

 

 

 

 

남문
성의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다.

산성수축(인조 2년│1624)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고 지화문이라 하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구분되며, 홍예문은 높이 4.75m 너비 3.35m 길이 8.6m로 원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건축 양식이 잘 갖추어져 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북문
북문은 해발 367m 지점으로 인조 2년(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다.

전승문이라 칭하며, 문의 폭은 3.25m, 높이는 3.65m이다.

 

 

 

 

 

 

 

 

 

▲ 매우 추웠던 2008년 한겨울 남한산성따라 한바퀴 돌기 ⓒ 2012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 행궁 전경 ⓒ 2012 한국의산천 

온갖 영욕의 세월을 극복하고 인류의 세계유산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마친 남한산성 행궁

 

 

경기도는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33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킬 계획이다. 2014년 6월에 등재여부가 최종 판가름 될 예정이다. 

연간 320만 명이 찾는 남한산성은 용인에 있는 놀이공원인 에버랜드에 이어 경기도내에서 두 번째로 방문객이 많은 곳이다. 시민들은 낙성연 기간인 이달 24일부터 28일까지 5일 동안 남한산성 행궁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또 행궁내에서 펼쳐지는 풍류음악회(26일), 광지원 농악(27일)과 전통무예 시연 등 전통문화공연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관람 시간은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 105년만에 복원된 행궁과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 2012 한국의산천  

 

1906년 일제는 남한산성의 승군들을 토벙한다는 명분아래 성곽내에 있었던 사찰 20여곳을 모두 없애면서 행궁마져도 파괴해 버렸던것을 그동안 105년동안 기다리다 10년에 걸쳐서 완공을 본것이다.

 

 경기도는 24일 10여년에 걸친 남한산성 행궁권역 복원을 축하하기 위한 낙성연(落成宴)을 가졌다. 낙성연은 조선시대에 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잔치를 뜻한다.

일본은 1907년 우리나라의 군대 해산령을 내리고 남한산성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파괴했다. 당시 행궁을 비롯한 사찰과 문화재 등이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는 2002년 상궐(침전)의 내행전 등의 복원을 시작으로 2004년 좌전, 2010년 하궐(정전)의 외행전 등을 복원했다. 올 들어 하궐 단청과 남한산성 안내 전시시설까지 복원 공사를 완료했다. 10여년에 걸쳐 총 215억 원이 투입됐다.

 

이날 낙성식은 조선 정조 시대 때 발간된 수원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등의 고증을 바탕으로 전통 낙성연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경기도지사, 경기도의회 의장, 광주시장 등과 주민들이 현판 제막식 및 낙성연에 참가했다. 

남한산성은 2010년 1월 10일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정식으로 등재됐다. 2011년 2월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내 13곳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가운데 우선 등재 추진 대상으로 선정됐다.

 

▲ 1982년 촬영된 남한산성의 정문인 한남루 ⓒ 2012 한국의산천 

 

 

 

▲ 행궁안으로 들어서면 왕이 다니는 중앙계단 어도(御道)와 양옆의 계단에서 높낮이의 차이가 있음을 볼수있다 ⓒ 2012 한국의산천

 

▲ 사진 전시전이 열리고있는곳에서 ⓒ 2012 한국의산천

 

 

 

 

 

 

 

남한산성內 인구 4천여 명 유지

 

인조는 산성 수축을 마친 후 1626년 11월 현재의 하남시에 있던 광주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기고 광주 주민 및 주변 지역의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해 산성으로 이주시켰다.

당시 남한산성에 모집한 호구 수는 모두 300호 정도였는데 이들에게는 국가에서 부과하는 신역(身役)과 전세(田稅)를 면제해 주었다. 그러자 산성 안의 인구가 1천여 호에 이르게 됐고, 이후 산성 안의 주민 수는 19세기 말까지 4천여 인구가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고 한다.

 

▲ 참괘정 ⓒ 2012 한국의산천 

 

 

 

 

 

 

 

 

▲ 행궁 안에 있는 어좌(왕의 자리)와 일월오봉병 ⓒ 2012 한국의산천

 

일월오봉병

어좌의 배경으로는 ' 일월오봉병 '이 있다. 일월오봉병은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흰 달, 청록색의 다섯 봉우리의 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폭포, 붉은 수간(樹幹)에 녹색의 무성한 잎을 가진 소나무, 그리고 파도와 포말이 출렁이는 물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오일월오봉병이란 국왕의 용상뒤에 치는 병풍이다. 국왕은 정전에 앉았거나 멀리 능행을 떠나도, 궁중의 실내용 뿐만 아니라, 왕이 거동하여 임시로 머무는 장소, 예컨대 전시(殿試)를 치르는 과거 시험장 등 야외에도 혹은 죽어서 빈전에 누웠거나 어진이 벽상에 걸렸을 때에도 반드시 일월오봉병을 친다. 이렇듯 일월오봉병은 왕의 주변을 장엄하는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월오봉병'은 왕이 임하는 장소이면 어떤 곳이든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던 장엄용 그림이라 말할 수 있다

 

일월오봉병은 현재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하여,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 창덕궁 인정전 등 각 궁의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쪽 뿐만 아니라, 창덕궁의 대조전 대청, 그리고 신선원전 감실(龕室) 등 정전이 아닌 침전이나 선왕을 모시는 영전(靈殿)과 행궁에 설치되어 있다.

 

일월오봉병 

일월오봉병을 세심히 보면 하늘 오른편에 붉은해, 왼편에 흰달이 떠있다. 자연현상이전에 원리 곧 음양이다.중앙에 다섯봉우리가 층차를 이루며 웅장하게 솟아있다. 오행을 뜻한다.  

 땅은 폭포가 쏟아져 이룬 못으로 좌우로 나뉘었다. 넉넉한 품새로 만물을 키운다. 그중 인간이 가장 신령하고 도덕적인 존재로 천지인 삼재(三才)를 이룬다. 그러므로 국왕이 병풍의 중앙에 똑바로 앉을때만 비로소 왕(王)자를 이루면서 삼재(三)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우주의 질서가 완성되는 것이다.  

 일월오봉병에는 음양오행뿐만 아니라 건태리진손감간곤의 팔괘도 들어있다. 건은 하늘,태는 못, 리는 해, 진은 좌우에 솟은 붉은 소나무, 손은 파도를 출렁이게하는 바람, 감은 달, 간은 산, 곤은 땅이다.

 

 

 

 

 

 

 

 

 

 

 

 

남한산성은 한번도 깨지지 않고 점령당하지 않은 선조들의 숨결이 지금도 살아 숨쉬는 우리 역사속에 단단한 성이다.

 

지금으로 부터 372년전 병자년(1636년·인조14년) 그 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둘이 아닌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서로의 대립각을 세웠다.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입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서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수 없다" 청음 김상헌과 " 굴복을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지천 최명길. 두분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신 두분 말의 표현은 달랐어도 마음에 담은 애국심 그뜻은 같지 않았을까 ?  


마침내 최명길의 화청정책이 받아 들여져서 1937년 1월 30일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청나라 칸앞에 무릅을 꿇게된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고 이후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는 약 200여년간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다. 한반도 안에서 성을 쌓거나 성을 보수 할 수 없었으며 군사시설을 만들수도 없었으며 수많은 공물과 여자와 포로를 바치고 살아야만 했다.

 

가노라 三角山(삼각산)아 다시 보쟈 漢江水(한강수)야
故國山川(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時節(시절)이 하 殊常(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 청구영언-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끝가지 척화 항전(斥和抗戰)을 주장하던 우국지사 김상헌이 패전 후 청나라로 잡혀가면서 부른 노래로, 비분 강개한 심정이 응어리져서 나타난 작품이다.

이 길이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르는 지은이로서는 다시 한 번 불러보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
이 절규 또한 우리 민족 모두의 아픈 가슴이었으리라. 임진,병자 양 난은 민족의 치욕이요 고난이었다.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남한산성에서의 독자들과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의 마지막에 '남한산성에는 아무일도 없었다'고 썻다가 지웠다고 말한다.

 

 

능선 아래로 이어져 있는 길도 겹친 산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 마음과 세상이 한줄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삶의 길은 열린다.

 

 

고고씽!

같이 왔으니 같이 가야제...

 

▲ 힘들게 올랐던 길을 빛의 속도로 하산을 한다 ⓒ 2012 한국의산천

 

이제 내려가야지?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 다운힐 하는 속도가 혹시 빛의 속도가 아닌지? ⓒ 2012 한국의산천

 

 

 

길은 저무는 산맥의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지고, 기진(氣盡)한 몸을 길 위에 누일 때, 몸은 억압 없고 적의 없는 순결한 몸이다. 그 몸이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길 앞에서 곤히 잠든다.

 

 

아래 페이지에 계속해서 석촌호수 삼전도비 답사가 이어집니다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426

 

한남루를 지나 안쪽 문으로 들어서면 하궐이다. 하궐의 중심은 왕이 정무를 보던 외행전. 외행전 오른쪽 건물은 조선시대 남한산성을 관할하던 광주유수부의 관아인 일장각이다.

외행전 뒤 계단으로 올라가 문을 지나면 왕의 침전인 내행전이 있는 상궐이다. 내행전 부속 건물인 좌우 행각 중 오른쪽 행각 바깥에 광주유수의 집무실인 좌승당이 있다.

남한산성 행궁의 종묘인 좌전은 내행전 뒤에 숨어 있는 후원 담장 너머 오른쪽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서 있다. 서울의 종묘처럼 정전과 영녕전을 갖췄는데 규모는 훨씬 작다

'MTB등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천 며느리고개 순환 임도 45km 갑니다  (0) 2012.06.01
홍천 연엽산 Study  (0) 2012.05.30
삼전도비와 백제적석총 답사  (0) 2012.05.27
대휴문  (0) 2012.05.25
아름다운 한국의 풍경 50선  (0) 201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