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끝 강원도의 시작 여주를 가다
오늘 라이딩은 3개의 강 (남한강/ 섬강 / 삼산천)을 거쳐서 아름다운 간현을 둘러보았습니다
하늘은 파랗고 강바람은 시원하였습니다. 깨끗한 대지의 공기를 마음것 호흡하고 다녀왔습니다
오늘 라이딩 코스
여주 ~ 남한강 강천보 ~ 흥원창 ~ 섬강 ~ 문막 ~ 간현유원지 왕복 ( 76km)
1. 여주 은모래 유원지에서 여강(남한강)을 따라 강천보 가기
2. 간현으로 달려가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391
3. 간현에서 돌아오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390
▲ 명성황후 생가 앞에서 왼쪽부터 흰구름님 / 따듯한 가슴님 / 맑은샘님 ⓒ 2012 한국의산천
명성황후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1], 본관은 여흥이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 명성황후 생가 앞에서 왼쪽부터 한국의산천/ 흰구름님 / 따듯한 가슴님 ⓒ 2012 한국의산천
사월은 나가서 노는 달. 나가 놀아라.
'활주로 옆 풀숲에 몸을 숨기고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렸다.
DC-3쌍발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면서 나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출발 준비를 했다. 알루미늄 동체의 번쩍이는 리벳 수를 셀 수 있을 만큼 비행기를 가까웠다. 드디어 엔진 두 개가 굉음을 내기 시작하자 나도 일어서서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근육은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비행기는 캘리포니아의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심장이 고동쳤다.
나는 자전거에 올라 탄 다음 머리를 잔뜩 숙이고 활주로를 따라 온 몸의 체중을 페달에 실어 힘껏 달렸다.
인간 게놈 지도를 최초로 완성한 크레이거벤터의 성장기 모습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가득 찬 '창의적 악동'이었다. 그는 늘 강과 산으로 망아치처럼 뛰어다니며 모험과 도전을 즐겼다.
그의 부모님이 날마다 한말도 "나가 놀아라"였다. 이같은 성장환경과 자유로운 기질은 그가 세계적인 '유전자 왕'으로 성공한 밑거름이 됐다.
활주로를 벗어난 '커다란 새(비행기)'를 따라잡겠다고 미친 듯이 자전거 페달을 밟던 소년시절부터 그의 삶은 놀이와 지적탐험의 연속이었다.
그의 자서전 <크레이그 벤터 게놈의 기적>에 나오는 고백처럼 그는 학업에 흥미가 없어 그다지 주목받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모든 경험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배웠다.
과학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교육제도의 '딱딱한 상자'속에 갇히지 않고 호기심을 마음껏 풀어 낼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가 자유 방임의 즐거운 놀이터에서 한층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간 계기는 해군의무병으로 참전한 베트남 전쟁이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그는 인간 생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고 이 때 정립된 가치관 때문에 대한 시절 반전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과학과 의학의 매력에 푹 빠져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생리.약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재능있는 과학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국립보건원에서 연구를 시작한뒤 1991년 발현 서열 꼬리표 (EST)를사용하는 혁신적인 기술로 신속한 유전자 분석에서 성공하고 1995년에는 자신의 연구소에서 최초로 생물 게놈을 해독했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전체 인간 게놈해독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벤처기업 셀레나 지노믹스를 창립했다. - 그레이그 벤터/ 게놈의 기적에서 -
▲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맑은샘님 ⓒ 2012 한국의산천
은모래 유원지에서 신륵사를 배경으로.
여강(驪江)
여주군을 관통해 흐르는 남한강을 여주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르며 수천년을 누대로 애지중지 모셔오고 있다. 여강은 여주를 라말려초(新羅末高麗初)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었던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주의 강이라는 자부심과 애착이 오롯이 그 이름에 담겨있다.
이규보는 황려가 여주의 이름이 된 유래를 ‘웅(雄)하고 기특한 쌍마(黃馬, 驪馬)가 물가(마암 馬巖)에서 나오매 현 이름을 이로부터 황려(黃驪)라 하였네. 시인은 옛 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물으나, 오가는 고기잡이 늙은이는 어이 알리’라고 시로써 이르고 있다.
황려(黃驪)의 여강(驪江)은 섬강과 청미천이 남한강에 몸을 담그는 세 물머리(삼합리)부터 이포대교 아래 전북리에 이르기 까지 100리의 물길을 말한다. 남한강에서도 특히 여강은 고려시대부터 이규보, 이색을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들이 머물렀고 나루터만도 12군데, 정자만도 10여 곳이나 자리할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이름 높았다.
▲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흰구름님 ⓒ 2012 한국의산천
▲ 순진 무궁하고 따듯한 가슴을 가진 따듯한 가슴님 ⓒ 2012 한국의산천
▲ 오늘은 제가 개척코스를 가느라 여러사람을 고생시킨 한국의산천 입니다 ⓒ 2012 한국의산천
봄 햇살에 맑은 여강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부터 이포대교 부근 금사면 전북리까지 지나는 남한강 물길을 ‘여강(驪江)’이라 부른다. 규모로 보자면 총 38.9킬로미터, 약 일백리다.
목은 이색은 그의 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들이 펀펀하고 산이 멀다"라고...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던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은 여주 남한강에 대해 “멀리 동쪽에서 몇백 리 흘러 내려온 강물이 여주에 이르러 강폭이 점점 넓어져 여강이 되었는데,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고 했다. 또한 " 강의 좌우가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백리에 가득하여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데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데 적당하며, 모든것이 다 넉넉하다"고 하였다.
여강이란 이름은 여주의 옛 이름인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려의 문신이자 재상이었던 이규보는 ‘웅(雄)하고 기특한 쌍마(黃馬, 驪馬)가 물가에서 나오매 현 이름이 황려(黃驪)가 되었네’라는 시를 통해 여주 지명의 유래를 밝힌 바 있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은 ‘긴 강이 동남방에서 동북방으로 흘러들어 마을 앞에서 띠를 둘렀는데 이곳이 강가 중에 제일가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배로 장사하는 데 힘써 농사에 대신하는데, 그 이익이 농사하는 집보다 낫다’고 여주 지방을 묘사하기도 했다.
옛 문헌에서는 여강을 상류부터 단강, 여강, 기류로 나누었다. 여강 위의 단강 부근은 물이 깊어 수려한 경관을 간직하고 있으며, 여강 아래는 금사면 지역으로 넓은 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경치가 좋아 예로부터 사대부뿐만 아니라 시객들이 선호해 온 곳으로 유명하다.
▲ 여주 조포나루에서 바라 본 신륵사 ⓒ 2012 한국의산천
신륵사는 강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절이다. 바다를 보고 앉은 사찰은 많지만 절 앞에 강이 흐르는 사찰은 아마도 이곳이 유일할것이다.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며,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다층 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은 강가의 멋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생동감있는 봄기운이 대지에 뽀샤시하게 가득한 날에 꿈길처럼 아름다운 강길을 따라 강마을을 지나 간현까지 다녀왔습니다.
여주팔경
1. 神勒暮鍾 (신륵모종)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2. 馬巖漁燈 (마암어등) 마암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
3. 鶴洞暮煙 (학동모연) 강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4. 燕灘歸帆 (연탄귀범) 강 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5. 洋島落雁 (양도낙안) 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 모습
6. 八藪長林 (팔수장림)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7. 二陵杜鵑 (이릉두견)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8. 婆娑過雨 (파사과우) 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강가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본래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그의 당호를 따서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본래의 정자는 1972년의 대홍수로 떠내려가고 이후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것이다.
신륵사가 자리한 경기도 여주는 조선시대 4대 나루(광나루·마포·조포·이포) 중 조포(潮浦)와 이포(梨浦), 이렇게 두개를 가지고 있을 만큼 사람과 물자가 수시로 드나들던 수운 요지였다. 강월헌 아래가 바로 조포가 있던 곳이다. 사람을 실어나르던 황포돛배와 영월과 정선에서 뗏목을 만들어 서울로 가던 떼꾼, 소금을 싣고 강원도로 가던 소금배가 조포와 이포를 이용했다. 번성하던 나루는 사라졌지만, 여주는 여전히 경기도와 충북, 강원도가 만나는 접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 여주 조포(潮浦) 나루와 은모래 강변유원지 ⓒ 2012 한국의산천
이중환의 택리지 '경기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온다.
물길은 충주에서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원주 여주 양근을 지나 광주 북쪽 회룡진에 이르러 한양의 면수(面水)가 된다. 여주읍은 강 남쪽에 위치하여 한양과의 거리는 물길이나 육로로 200리가 안된다.
읍과 백애촌은 한들로 통하여 동남쪽이 넓게 트이고 기후가 맑고 서늘하며 여러대를 이어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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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북쪽에는 신륵사가 있으며 절 곁에는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강을 임한 바윗돌이 기이하다. (을유문화사 택리지 참고)
여주에는 이호나루, 조포나루, 새나루, 흔암나루, 찬우물나루, 상자포나루 등 수많은 나루터가 있었다. 그중에서 조포나루는 고려 시대 이후 남한강 5대 강항의 하나로서 세곡운반과 물자수송의 물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
여주를 가르켜 목은 이색은 그의 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들이 펀펀하고 산이 멀다"라고...
조선 초기의 학자 서거정은 " 강의 좌우가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백리에 가득하여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데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데 적당하며, 모든것이 다 넉넉하다"고 하였다.
조선 초기의 학자인 김수온은 그가 지은 신륵사기에 "여주는 국도(國道)의 상류지역에 있다"라고 썼는데 국도란 바로 충청도 충주에서 부터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을 말한다. 신작로나 철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의 물산들이 한강의 뱃길을 타고 서울에 닿았으므로 한강 뱃길을 '나라의 길'로 불렀던 것이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띄운 뗏목이 물이 많은 장마철이면 서울까지 사흘이면 도착했는데 1973년 팔당댐이 생기고 1978년 부터 충주댐 건설에 들어 가면서 '나라의 길'이라고 부르던 뱃길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여주를 가로지르는 여강의 유래
여주군을 관통해 흐르는 남한강(南漢江)을 여주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르며 수천년을 누대로 애지중지 모셔오고 있다. 여강은 여주를 라말려초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었던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주의 강이라는 자부심과 애착이 오롯이 그 이름에 담겨있다.
이규보는 황려가 여주의 이름이 된 유래를 ‘웅(雄)하고 기특한 쌍마(黃馬, 驪馬)가 물가(마암 馬巖)에서 나오매 현 이름을 이로부터 황려(黃驪)라 하였네. 시인은 옛 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물으나, 오가는 고기잡이 늙은이는 어이 알리’라고 시로써 이르고 있다.
황려(黃驪)의 여강(驪江)은 섬강과 청미천이 남한강에 몸을 담그는 세 물머리(삼합리)부터 이포대교 아래 전북리에 이르기 까지 100리의 물길을 말한다. 남한강에서도 특히 여강은 고려시대부터 이규보, 이색을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들이 머물렀고 나루터만도 12군데, 정자만도 10여 곳이나 자리할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이름 높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는 ‘곧 한강 상류이며 주 북쪽에 있다. 객관(客館)을 강을 베 개하여 지었다’ 하였으며, 여강가 청심루와 객관에 들었던 시인묵객들은 여강풍경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숱한 시문(詩文)을 남겼다.
고려의 문신이요 재상이었던 이규보(李奎報·1168∼1242)는 ‘계수나무 노와 모란(木蘭) 배로 푸른 물결을 가로지르니, 붉은 단장이 물 가운데의 하늘에 아름답게 비치네. (중략) 10리의 연화(煙花)는 참으로 그림 같은데, 한강의 풍월은 값을 논하지 아니하네.’ 라 하였고, 고려 말의 문신이요 학자였던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시에는 ‘여강의 형승은 천하에 드문데, 사시(四時)의 풍경이 천지의 비밀을 헤쳐 보이누나. 내가 처음 와 놀 때는 여름철이어서,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배에 불어 옷에 가득 서늘하였네. 백 척 높은 군루(郡樓)에 두 눈으로 멀리 바라보니,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어 부슬부슬한데 연기가 걷히네’ 라고 노래하였다.
목은 이색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태동하던 역성혁명의 과도기에 명나라에 외교하여 이성계의 세력을 축출하려 한 죄를 받아 유배길에 올랐다. 그는 불사이군을 명분으로 이성계의 출사종용을 끝내 고사하고 이리저리 유배당하다가 여강(驪江)위에서 독주를 마시고 생전에 애착하던 여강에서 생을 마감했다.
▲ 강천리 유래비 ⓒ 2012 한국의산천
강천리(康川里)는 섬강과 남한강의 합류지로 배가 편안하게 쉬었다가 가는 곳이라하여 편안할 강 (康)을 사용하여 강천리라고 하였고 일설에는 개울물이 땅속으로 스며 흘러서 늘 건천이 되므로 간천 또는 강천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고종32년(1895)에 여주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새말, 다리골, 풀무골을 병합하여 강천리라 하였다. 가끔 강가 야영을 가던곳이기에 낯이 익어 반가운 곳입니다.
▲ 은모래 가득한 강다운 길, 강스러운 길을 달려 간현으로 갑니다 ⓒ 2012 한국의산천
▲ 간현에서 얼큰한 메기매운탕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합니다 ⓒ 2012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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