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정치 문화 중심지 강도(江都)
강화 나들길
연미정 가는 길
청춘은 영원하지 않다
흔히 나이가 그 기준이 되지만,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가르켜 특히 그걸 꽃다운 시절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항상 그러하듯, 꽃답다는 것은 한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이다. - 젊은날의 肖像 中에서 -
세상을 살면서 가장 소중하고 제일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꽃잎지고 시들기 전까지 열심히 달리자.
연미정 가는 길 전체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370
산다는것은 바람이고, 사랑이다.
▲ 안녕하세요 '한국의산천' 입니다. 지금부터 김포 대명리 포구에서 강화도 연미정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뿌잉 뿌잉~ ⓒ 2012 한국의산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길이 있으며
길과 사람 사이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자전거가 있다.
나는 오늘도 열심히 내가 맡은 일에 충실했다. 휴일에 자전거를 열심히 타기 위해서~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 천 상 병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 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강화도는 섬 전체가 '지붕없는 역사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문화유적이 산재한 곳이다. 몽골 침입때까지 40년 가까이 고려의 수도였던 이곳은 경주 못지 않은 문화 유적이 많은 곳이다.
걷기 코스 강화나들길 1코스
한 걸음 떼면 유적지요, 또 한 걸음 떼면 호젓한 숲길 / 노천박물관’의 유적지와 숲길, 산골마을, 돈대 잇는 심도역사 문화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강화지석묘
강화도는 노천박물관이자 우리 역사의 축소판이다. 덮개바위 무게만 해도 50톤에 이르는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를 비롯해 섬 곳곳에 있는 지석묘는 선사시대의 유물이다. 전 세계에 약 6만여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중 절반이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다.
섬 내 최고봉 마니산(摩尼山·469.4m)은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해 참성단을 세운 곳이고, 전등사(傳燈寺)는 단군이 세 아들(三郞)들을 시켜 쌓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하는 토성 위에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세워진 고찰이다.
또한 읍내 송악 기슭에 자리잡은 고려궁지는 몽골의 침입으로 천도한 고려 고종과 원종이 도합 39년간이나 숨죽인 채 지냈던 곳이다. 해안에 구축되어 있는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는 조선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자 망대였다. 그러나 월곶돈대 위의 연미정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씁쓸한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강화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역사문화자연 도보여행길이다. ‘나들’이란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드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이 길 따라 나들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강화나들길은 테마에 따라 총 9개 코스로 나뉘어 있다.
제1코스인 심도역사문화길은 강화버스터미널~갑곶돈대 18km 코스로 6시간 정도 걸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한다. 답사 방향은 강화우체국 사거리→동문→ 성공회 강화성당→용흥궁→고려궁지→북관제묘→강화향교→성곽길→북문→북장대→오읍약수→대월초교→숲길→연미정→월곶돈대→옥계방죽→갑곶돈대로 이어진다.
강화도는 볼것이 너무 많아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코스가 많은 곳이다.
이곳 연미정 또한 그렇겠지만, 이곳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 3년 정도 되었나? 그 당시만해도 연미정 바로 앞쪽에 민통선(민간인 통제소) 검문소가 자리 하고 있었기에 이곳에는 오를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해안을 따라 도로도 잘 나있기에 한가롭게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 대명리 평화누릿길 입구에서 ⓒ 2012 한국의산천
강화
강화읍은 고려전기에 강화현에 속하였고 고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천도 한후 강도의 소재지였으며 1377년(우왕 3) 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 부치(府治)가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이래 부내면(府內面)이라 칭하다가 1938년 강화군의 이름을 따라 강화면으로 개칭하였고 1973년 7월 1일 강화읍으로 승격되었다.
강화는 강과 연관된 지명으로 강(한강, 임진, 예성)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 강하(江下)라 부르다가 강아래 아름다운 고을이란 뜻으로 강화(江華)로 개명한 듯 하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더 좋은 날을 기다리며 길을 떠난다.
여행이란 무시로 빈집을 드나드는 바람처럼 그렇게 떠나는 것이다.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 마음과 세상이 한줄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삶의 길은 열린다.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 이 태 수
마음을 씻고 닦아 비워내고
길 하나 만들며 가리.
이 세상 먼지 너머, 흙탕물을 빠져나와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아득히 흔들리는 불빛 더듬어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가리.
이 세상 안개 헤치며, 따스하고 높게
이마에는 푸른 불을 달고서,
▲ 덕포진을 지나며 ⓒ 2012 한국의산천
덕포진은 신미양요, 병인양요 때 서구열강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유서깊은 곳이다. 포대, 파수대가 복원돼 있고 고려시대 뱃사공 손돌공의 묘가 있다.
길처럼
- 박 목 월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 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 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 염하강 옆길로 철책을 따라 달리고 산길을 오르고 내리며 강화도로 이동합니다 ⓒ 2012 한국의산천
하늘을 보면 하늘이 마음에 펼쳐지고
꽃을 보면 꽃이 내 안에서 피어난다.
바람을 안는 이 새가 되어 허공을 날고
구름은 품은 이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신다.
▲ 손돌묘에서 강화도와 염하강을 배경으로 ⓒ 2012 한국의산천
길 위에 서다
- 정 연 복
세상의 모든 길은
어디론가 통하는 모양이다
사랑은 미움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생명은 죽음으로
그 죽음은 다시 한 줌의 흙이 되어
새 생명의 분신(分身)으로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가만히 머무르지 말라고
길 위에 멈추어 서는 생은
이미 생이 아니라고
작은 몸뚱이로
혼신의 날갯짓을 하여
허공을 가르며 나는
저 가벼운 새들
▲ 김포CC업힐을 오르며 ⓒ 2012 한국의산천
인생처럼
허벅지의 근육이 팽팽히 부풀어 오르고 거친 호흡에 가슴이 터질듯해도 힘든 고통을 참고 이겨내지 못한다면 가슴 벅찬 감동의 희열을 맛볼 수없다.
▲ 염하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김포cc 언덕에 올라 ⓒ 2012 한국의산천
휴일에는 뒹굴거리다가 조금 늦게 일어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린다. 그렇기에 일요일에는 더욱 일찍 일어나 움직이면 하루를 두배로 지낼수가 있다.
휴일이면 평일보다 더 일찍 눈을 뜬다. 내 자신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기 싫은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춥거나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하늘색은 더욱 푸르다는 것을 알기에...
▲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 2012 한국의산천
강화대교를 건너서 인삼센터에서 바로 우회전하여 염하강을 끼고 연미정 가는 길 (약 4.5km)
트레킹으로 갈시에는 강화터미널에서 용흥궁을 거쳐서 그 일대를 둘러보고 시계바늘 방향으로 트레킹하는것을 추천합니다.
바다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차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목적지를 향하여 페달링하고 달리면서 달리는것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음은 몰입이고, 그 몰입이 세상사에 지친 몸과 뇌를 쉬게해준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무리 추워도 즐거운 일이다. 이일을 시켜서 해봐라. 누가 좋아서 하겠는가.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자징거 타는 사람과 안 타는 사람
▲ 옥계방죽으로 철책 따라 바다가 보이는 호젓한 연미정 가는 길 ⓒ 2012 한국의산천
파란하늘과 푸른 파도에 눈이 시리고 코끝이 찡하도록 바람부는 바닷가
푸르고 푸른 하늘빛과 짭조름한 갯내음과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더욱 더 퍼져가는 그리움
세상은 오직 두 색깔뿐이네
▲ 더 갈수없는 민통선 검문소 앞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왼쪽부터 맑은샘님/ 행복한도전님 / 흰구름님 / 관동인님 / 따듯한 가슴님 / 건이님 / 한국의산천 7명
▲ 텅빈 들판 너머 억새 사이로 보이는 월곶돈대와 우뚝솟은 연미정 ⓒ 2012 한국의산천
가을 억새
-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
마지막 상행성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 월곶돈대 ⓒ 2012 한국의산천
강화도에는 5진 7보 8포대 54돈대를 설치하였는데, 섬 전체가 마치 톱니바퀴가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정자는 그후 1744년(영조 20)에 중건하였고, 1891년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강화도 해안에 구축되어 있는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는 조선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자 망대였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요,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쓸쓸한 벌판에 있는 마을을 가로질러 연미정에 올라선다.
월곶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에 53개 돈대가 지어질 때 축조되었고, 연미정은 고려 고종(1213-1259) 때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이 공부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연미정의 연조가 훨씬 앞선다.
▲ 월곶돈대 안에 자리한 연미정 ⓒ 2012 한국의산천
연미정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함경도 야인을 진압한 황형장군에게 조정에서 하사한 정자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이곳에 세워진 정자를 연미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로 가는 배들은 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갔는데 달이 뜨면 그 광경이 더욱 멋져 강화 팔경의 하나이기도하다
연미정은 높은 석주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파주시, 동으로는 김포시 한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정자는 주위에 석축이 둘러쳐져 있고, 평지 위에 사방 8m의 바닥을 높이고 10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얹어 만들었다. 정자 양쪽에는 약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그 정취를 더해 주고 있다.
▲ 수령 500년의 노거수 느티나무와 함께 자리한 연미정 ⓒ 2012 한국의산천
이곳 정자의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1244년에 왕이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조선시대에는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全羅左道防禦使)로 왜적을 물리친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황형은 그후 도총관을 거쳐 1512년 함경도지방의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이를 진압하였으며, 공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정자 밑에 반쪽으로 갈라진 작은 비석에는 ‘고공신장무공황형택(故功臣莊武公黃衡宅)’이라고 새겨져 있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마지막 강물이 더렵혀진 뒤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인간들은 돈을 먹고 살수 없다는 것을 - 인디언 명언 -
▲ 한강 하류를 건너로 바로 눈앞에 동토의 땅 북한의 개풍군이 손에 잡힐듯 보입니다 ⓒ 2012 한국의산천
▲ 월곶돈대 올라서자 한강 바로 건너 북한땅이 손에 잡힐듯 바라보인다 ⓒ 2012 한국의산천
500년생 느티나무 두 그루가 지붕 위로 멋들어지게 가지를 늘어뜨린 연미정에 올라서자 한강을 건너 바로 코앞에 북한땅이 손에 잡힐듯 보였다.
▲ 연미정 ⓒ 2012 한국의산천
연미정은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로 피난을 와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에 조선에서는 강화에 5진 7보 8포대 54돈대를 설치하였는데, 섬 전체가 마치 톱니바퀴가 감싸고 있는 모습이 된 것이다. 정자는 그후 1744년(영조 20)에 중건하였고, 1891년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 동문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연미정에서 내려와서 동문을 지나서 강화읍내에 자리한 용흥궁으로 이동합니다
▲ 강화도령 철종이 거처하던, 궁이라고 하기에 그렇고 작은 한옥집같은 용흥궁 앞에서 ⓒ 2012 한국의산천
강화 나들길 첫 번째 코스. 역사와 함께 걷는 ‘심도로 드는 길’
첫 번째 코스인 ‘심도로 드는 길’은 천년을 넘나들며 시간여행을 떠나는 길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근대까지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길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출발은 철종이 거처하던 용흥궁(龍興宮)에서 부터다.
철종 조선의 제25대 국왕 (재위 1849년 ~ 1863년)
왕비 철인왕후
부친 전계대원군, 모친 용성부대부인
이전 왕 헌종 ' 다음 왕 고종
철종(哲宗,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의 제25대 임금(재위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이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은언군과 상계군 사건과 이복 형 원경의 옥사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였다. 그 뒤 농업과 나무꾼, 행상으로 살던 중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진 뒤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다.
초명은 원범(元範), 휘는 변(昪), 자는 도승(道升), 별칭은 강화도령,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며, 사후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며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된 1908년(융희 1년)에 장황제(章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
그가 서출인데다가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있다가 왕이 되었다 하여 재위기간 중 반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다. -위키백과 참고-
▲ 용흥궁 ⓒ 2012 한국의산천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임금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잠저(潛邸)로, 당시에는 초가집 이였으나 1853년 강화 유수 '정기세'에 의해 한옥으로 바뀐 집이다. ‘철종실록’에 따르면, 철종이 등극하기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이곳에 빛이 비쳐서 사람들이 ‘용이 승천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용흥궁’ 이름의 유래가 됐으며, 현재 인천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걸어서 심도로 드는 나들이 길은 7, 8월 한여름에는 고려궁지에서 북문으로 곧장 이어지는 숲길을 따르고, 숲이 거의 없는 연미정~갑곶돈대 구간은 생략하는 게 바람직하다. 약 4시간.
이밖에 제2코스 호국돈대길은 갑곶돈대~초지진 17km 5시간50분, 제3코스 능묘가는길은 온수공영주차장~가릉 16.2km 5시간30분, 제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은 가릉~망양돈대 11.5km 3시간30분, 제5코스 고비고개길은 강화버스터미널~ 외포여객터미널 20.2km 6시간40분, 제6코스 화남생가 가는길은 18.8km 6시간, 제7코스 갯벌보러 가는길은 화도공용주차장~갯벌센터~화도공영주차장 20.8km 6시간40분, 제7-1코스 동막해변 가는길은 화도공영주차장~분오리돈대 23.5km 7시간30분, 제8코스 철새보러 가는 길은 초지진~분오리돈대 17.2km 5시간40분 걸린다.
▲ 1900년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성공화 강화성당 ⓒ 2012 한국의산천
용흥궁을 둘러본 후 뒷문으로 나와 돌계단을 올라가면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으로 이어진다. 강화성당은 고종 33년(1896년) 김희준이 강화도에서 처음 세례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세운 한국 최초의 성당이다. 한옥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혼합해서 지어 절에 온 듯한 느낌이 먼저 든다. 경복궁 중건에 참여했던 도편수(우두머리 목수)가 참여해 백두산에서 자란 백 년생 소나무를 구해 지은 성당이라 해서인지, 110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아름답고 견고하기 그지없다.
▲ 성공회강화성당 ⓒ 2012 한국의산천
성공회강화성당 (聖公會江華聖堂)은 고종 33년(1896년) 김희준이 강화도에서 처음 세례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세운 한국 최초의 성당이다. 한옥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혼합해서 지어 절에 온 듯한 느낌이 먼저 든다
▲ 고려궁지(高麗宮址) ⓒ 2012 한국의산천
성공회성당에서 북문으로 향하는 길에는 고려의 실날같은 운명을 지켜온 고려궁지(高麗宮址)가 있다. 이곳은 1232년 몽골침략으로 고려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위해 39년간 머무르던 궁궐터다. 그 뒤로도 여러 외세에 맞섰던 기록이 있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 도서도 바로 이곳에 있던 자료다. 역사는 그렇게 전쟁이 있을 때마다 나라의 보물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기록 문화의 꽃 외규장각
정조께서는 궁궐내에 규장각 설치하셨다. 외규장각도서는 의궤 어보 교명 어책 지도 그리고 고문서들로서 주로 왕실의 행사나 왕실과 관련된 중요 문서들이었다.
규장각이 왕실도서관.학술연구기관 성격을 띄고 있는데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하고 중요문서들을 거기다가 보관했습니다.
규장각의 분소성격을 띈곳이라 외규장각이라고 불렀으며 전쟁으로 인한 약탈이나 분실을 막기위해서 강화도에다가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함대의 침략으로 외규장각이 약탈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 145년만에 다시 고국땅에 돌아왔습니다 대여라는 형식의 이름을 빌어서...
고려궁지 옆에는 그런 세월의 아픔을 한 곳에 서서 빠짐없이 보고 있는 수령 680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앞으로도 언덕아래서 역사를 내려다 볼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이정표를 따라 주택가로 발걸음을 옮기니 한옥마을이 나온다.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넓은 공간에 강화향교가 마치 촬영 없는 날의 셋트장 같이 조용히 잠자고 있다. 강화향교 옆의 숲길을 올라 긴 오솔길의 끝을 벗어나니 또 하나의 성이 나타난다. 강화북문인 진송루. 강화가 발아래에 펼쳐진 시원한 광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 고려궁지 앞에서
이곳은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재위: 1213 ∼ 1259)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하여 1234년에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1637년 병자호란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은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 고려궁지는 지금으로부터 760여년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쳐하시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하였습니다.
강화로 천도해온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궁궐은 몽고와의 화친에 따라 허물었으며 현재 궁지 내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가 있습니다. 또한 고려궁지 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으며 병인양요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 얼마전 일부 반환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도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입니다. 고려궁지에는 오래된 역사와 함께 그 자리를 지켜온 고목들이 많으며 아름다운 꽃나무들로 봄 가을이면 더욱 아름다운 정원이 됩니다. -강화도 관광홈페이지 참고-
▲ 고려궁지 內에 자리한 외규장각 (2005년 9월 20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1781년 정조(正祖)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일부 서적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프랑스군이 이때 약탈해 간 도서 가운데 현재까지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도서는 191종 279권에 달하며, 이 중에는 한국에 필사본이 없는 63권의 유일본이 포함되어 있다. 얼마전 대여형식으로 145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규장각 의궤란 무엇인가
의궤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이다. 의궤는 국왕의 동정과 행사 내역 일체를 기록하여 공개함으로써 국왕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하고 국가 재정이 낭비되는 것을 막는 효과를 낳았다. 국왕의 명령서, 관청 공문서, 업무 분장 상황, 행사 동원 인원·명단, 소요 물품, 경비 내역 등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어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또 행사의 모든 과정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와 도설(圖說)이 수록되어 행사장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의궤는 중국 등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책이다.
의궤는 조선 개국 직후부터 만들어졌으나 현재 전하는 의궤는 모두 17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특히 18세기에는 종류와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목판활자본 의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조의 마지막 의궤는 1926년 순종의 국장을 기록한 ‘순종효황제어장주감의궤’이다.
어떤 것이 있나
조선시대의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기록한 만큼 종류도, 숫자도 많다. 가장 많은 것은 국왕의 일생과 관련된 의궤다. 왕세자 책봉 과정을 담은 ‘세자책례도감의궤’, 왕실의 혼인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 국왕·왕비의 장례 절차를 기록한 ‘국장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 등이 그것이다. 1993년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에 가져왔던 ‘휘경원원소도감의궤’는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무덤을 조성한 사항을 기록한 의궤로, ‘산릉도감의궤’의 일종이다.
또 국가 행사와 관련된 의궤로는 ‘종묘의궤’ ‘사직서의궤’를 비롯해 ‘황단종향의궤’ ‘대보단증수소의궤’ ‘친경의궤’ ‘친잠의궤’ 등이 있다. 친경의궤는 국왕이 시범적으로 농사짓는 과정을, 친잠의궤는 왕실의 여인들이 궁중에서 누에 치는 행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밖에 ‘실록청의궤’ ‘실록수정청의궤’ ‘국조보감감인청의궤’ 등 편찬사업과 관련되어 의궤가 만들어졌으며, 궁궐이나 성곽을 지을 때에도 ‘영선도감의궤’ ‘화성성역의궤’ 등을 만들었다.
얼마나 되나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1,100여종, 4,000여책. 이중 서울대 규장각이 600여종, 3,000여책을 소장하고 있어 가장 많다. 규장각 소장본은 춘추관, 예조, 네 곳의 사고(史庫)에 보관된 도서를 이어받은 것으로 종류와 수효가 다양하고 풍부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300여종, 500여책은 적상산 사고본과 고종대 이후의 의궤가 주류를 이룬다.
이밖에 파리국립도서관에 191종, 297책, 일본 궁내청에 71종이 보관돼 있다. 파리도서관 의궤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것이며 궁내청 소장본은 일제 강점기에 유출된 것이다. 영국의 대영도서관에도 프랑스에서 흘러간 1종(기사진표리진찬의궤)이 소장돼 있다.
흔히 의궤는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린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의궤를 주목하지 못했다. 그 중요성을 일깨운 것은 역설적으로 프랑스의 약탈이었다.
학계는 반환 협상이 진행되면서 의궤의 중요성을 깨닫고 번역과 함께 연구를 진행했다. 현재 번역본은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와 ‘친경·친잠의궤’(박소동 역)가 나왔고 연구서로는 ‘조선조의 의궤’(박병선) ‘정조의 화성행차’(한영우)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신병주) 등이 있다.
▲ 고려궁지 바로 뒤편에 자리한 강화산성 진송루 (2005년 9월 20일 가족들과 함께 답사때) ⓒ 2012 한국의산천
강화산성 사적 제132호
고려궁지 앞길로 산비탈을 올라가면 강화산성이 있다.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착공하였는데,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여 2년 후인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 성은 내성(內城)·중성·외성이 이루어져 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3,874자(1,174m),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쌓았고, 외성은 1233년에 지었다. 이 성들은 모두 흙으로 쌓은 토성인데,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仙源面)의 토성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길이가 3만 7070자(1만 1232m)였다. 그러나 1270년 다시 개경(開京)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조선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고, 1677년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돌성[石城]을 쌓았다.
서문인 첨화루(瞻華樓)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세웠고, 남문인 안파루(晏波樓)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했고,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할 때 세웠고,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는 200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암문(暗門) 4개소와 수문(水門) 2개소가 남아 있다.
이 산성을 지나 조금 내려가면 임진강과 북녁땅이 보이고 물맛이 좋은 약수터가 있다.
고려궁지의 인근에는 오읍약수터와 관청리 은행나무가 있는데, 은행나무는 고려궁지 대형 주차장 옆 30m 지점에 있다. 그리고 약수터는 고려궁지 입구에서 왼쪽으로 고려궁지 담을 끼고 시멘트 포장된 오르막길을 5분 여 걸어서 강화산성 북문을 지나 다시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다. 물맛이 아주 좋고 또 산책삼아 걷기에 좋아 인근의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 고려궁지 내부 ⓒ 2012 한국의산천
고려궁지에는 오래된 역사와 함께 그 자리를 지켜온 고목들이 많으며 아름다운 꽃나무들로 봄 가을에는 더욱 아름다운 정원이 됩니다.
이곳을 돌아보며 작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한귀절이 떠올랐다.
칸(Khan)이오면 성은 밟혀죽고, 칸이 오지 않으면 성은 말라 죽는다. 성이 열리는 날이 곧 끝나는 날이고, 열려서 끝나나 밟혀서 끝나나 깨져서 끝나나, 말라서 열리나 깨져서 열리나 다름이 없다.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입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서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둘이 아닌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마침내 최명길의 화청정책이 받아 들여져서 1937년 1월 30일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청나라 칸앞에 무릅을 꿇게된다.
고려의 정치 문화 중심지 강도(江都)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던 몽골은 1231년 고려를 침입했고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긴 뒤 싸움을 계속했다.
1270년 다시 개경으로 돌아 갈때까지 강화도는 39년간 '강도(江都)로 불리면서 고려의 정치 문화 중심지 역활을 했다.
▲ 고려 고종의 릉 (홍릉. 2007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초라하게까지 보이는 검소한 왕릉 홍릉
고려시대 왕실무덤 사적 제224호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180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5기중 석릉, 공릉, 홍릉, 가릉등 4기가 강화도에 있다는 것을 보면, 고려때 강화도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나를 알게된다.
▲ 오랜 풍상을 겪은 고종의 비석 (2007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묘이다.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4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 강화 나들이 코스 ⓒ 2012 한국의산천
강화나들길은 테마에 따라 총 9개 코스로 나뉘어 있다.
제1코스인 심도역사문화길은 강화버스터미널~갑곶돈대 18km 코스로 6시간 정도 걸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한다. 답사 방향은 강화우체국 사거리→동문→ 성공회 강화성당→용흥궁→고려궁지→북관제묘→강화향교→성곽길→북문→북장대→오읍약수→대월초교→숲길→연미정→월곶돈대→옥계방죽→갑곶돈대로 이어진다.
단 7, 8월 한여름에는 고려궁지에서 북문으로 곧장 이어지는 숲길을 따르고, 숲이 거의 없는 연미정~갑곶돈대 구간은 생략하는 게 바람직하다. 약 4시간.
이밖에 제2코스 호국돈대길은 갑곶돈대~초지진 17km 5시간50분, 제3코스 능묘가는길은 온수공영주차장~가릉 16.2km 5시간30분, 제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은 가릉~망양돈대 11.5km 3시간30분, 제5코스 고비고개길은 강화버스터미널~ 외포여객터미널 20.2km 6시간40분, 제6코스 화남생가 가는길은 18.8km 6시간, 제7코스 갯벌보러 가는길은 화도공용주차장~갯벌센터~화도공영주차장 20.8km 6시간40분, 제7-1코스 동막해변 가는길은 화도공영주차장~분오리돈대 23.5km 7시간30분, 제8코스 철새보러 가는 길은 초지진~분오리돈대 17.2km 5시간40분 걸린다.
강화대교 부근, 시외버스터미널 등지에 위치한 관광안내소에서 여권과 비슷하게 생긴 ‘도보여권’을 무료로 나눠주며, 구간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관광안내소나 식당·매점에서 완주도장을 찍어준다. 도보여권에는 강화 전도, 코스별 개념도, 여행포인트, 강화버스노선 등이 적혀 있다. 터미널관광안내소 032-930-3515.
입장료 고려궁지 900원, 갑곶돈대 1,300원. 고려궁지, 갑곶돈대,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역사관 일괄입장권은 2,700원. 문의 고려궁지 032-930-7078,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길
- 이 영 춘
문득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본다
왠가 꼭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이 길
가는 곳은 저기 저 계곡의 끝
그 계곡의 흙인데
나는 왜 매일매일
이 무거운 다리를 끌며
가고 있는 것일까
아, 돌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이 길.
▲ 우리의 단골집 대명리 포구횟집에서 라이딩 마무리를 하며 ⓒ 2012 한국의산천
▲ 지금은 폐쇄된 (구) 강화대교 너머로 지는 석양 ⓒ 2012 한국의산천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먼데 신발은 벗겨지고 서산 너머로 해가 진다.
살아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아득한 끝없는 길을 달려야 한다. 가야할 길이 멀어서 그런것만은 아니다.
우리네 삶 자체가 그런것 아닐까? 언제나 지난 시간을 후회하며 살아가는 회한의 세월 !
누구든 떠나갈 때는
- 류 시 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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