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이 천국에서 미소짓는 그날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역사라는 이름의 장강대하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니, 기억 또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그 기억을 적어두는 기록이다
-이현상 평전 발문(김성동)에서-
이땅의 성장 원동력을 일으킨 정치인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인간 노무현을 가슴에 깊이 담는다
그리고 파르티잔(Partizan) 이현상의 생애를 아쉽게 생각하고 그분을 인간미를 존경한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비극의 지리산.
다음 주 잔차를 타고 지리산을 오른다. 달궁 그리고 빗점골을 갈 수 있으련지...
1953년 9월 18일 11시5분 드디어 남한 빨지산의 총수 이현상이 전투경찰 제2연대 소속 33명의 매복조에 빗점골 합수내 근처 절터골 돌밭어귀에서 10여발의 총탄을 맞아 벌집처럼 되어 쓰러졌다.
남한 빨치산중 가장 완강했던 무력집단이 이로서 막을 내리고 궤멸하였다. (내부 갈등으로 모든 직책과 명예를 벗어버린 직후였다)
남과 북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혁명가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조선인민 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이던 공화국 영웅 이현상은 지리산의 가을과 함께 마침내 파란많은 생애를 마쳤다. 이때 그의 나이 49세.
이현상의 시신은 10월 8일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경찰 토벌대장 차일혁에 의해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졌다. 이로서 지리산 유격대, 제2병단, 남부군, 독립4지대, 제5지구당으로 이어져온 이현상 부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차일혁과 이현상
경찰청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 등에서 전사하거나 위험한 직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경찰관에게 1계급 특별승진을 추서한다고 17일 밝혔다. 1945년 경찰 창설 이후 전사하거나 순직한 경찰관은 1만3319명으로 이번에 경찰이 인사기록을 확인해 전사나 순직으로 추서하는 경찰관은 709명이다.
이번 추서로 6·25전쟁 당시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전공을 세우고 숨진 차일혁 총경(1920∼1958)은 경무관으로, 1951년 무장공비와 전투 중 전사한 김태주 순경(당시 21세)은 경장으로 추서됐다.
경찰은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경찰의 묘비에 승진한 계급을 새로 명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가족에게 연금 등 금전적 보상은 추가로 지급하지 않을 계획이다.
또 전쟁 중 숨진 경찰관뿐 아니라 범인을 추격하거나 음주운전 교통 단속을 하는 등 직무를 수행하다 순직하거나 격무로 숨진 경찰관도 특진을 추서할 계획이다. 경찰은 이번에 추서 결정이 내려진 709명 외에 인사기록이 전산화되지 않은 전사·순직자도 빠짐없이 확인한 뒤 특진시킬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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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반드시 적대되는 이데올로기를 낳기 마련이다. 악착같은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이에 못지 않은 투철한 반공(反共)이데올로기를 낳으며 서로간에 총부리를 겨누며 쫓고 쫓기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무서운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이념과 반대되는 세력에 대해서는 폭력적이고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땅에 전쟁이 없기를...
고독한 혁명가, 외로운 파르티잔(빨치산)의 영웅 火山 이현상 [글,사진 한국의산천 우관동]
이현상(1905-1953)은 한국 현대사의 격류를 건너 갈 때 반드시 딛고 가야 할 전설적인 민중혁명가이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해 왔지만 일제 치하 모진 고문과 회유 그리고 12년간의 옥살이에도 어느 한순간 변절하지 않았으며, 해방 후 더욱 가혹해진 탄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조차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였다. 외로운 투쟁 빨치산의 영웅 이현상.
▲ 남부군(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 ⓒ 2008 한국의산천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 그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옆 모습은 지금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소설 <남부군>저자 이태-
北이 버리고 南이 저주한 최후전선 빨치산 항전대.
한동안 금기시 되어있던 빨치산에 관한 책들이 한두권 나오기 시작하였다. 벌써 20년전의 이야기다 남부군 상하권이 1988년 7월 11일 나오고 행림출판사에서 '빨치산'이 1988년 8월 20일 출간되었다.
1988년은 이데올로기 해금시대인가.... 그리고 이번 2007년 7월 출판된 이현상 평전(評傳) 을 구입하고 숨가쁘게 읽었다. 이현상 평전을 읽으며 지리산을 생각했고 지리산에서 스러져간 불쌍한 영혼 수많은 빨치산을 떠올렸다.
▲ 1988년 이태 著 남부군 소개 기사를 보고 스크랩한다음 서점에 가서 구입하였다. 꼭 20년전의 일이다. ⓒ 2008 한국의산천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휴머니스트이자 사회주의가 火山 이현상 남부군(이태著)을 읽으며 사상적 대립에 의한 동족간의 싸움이 얼마나 무섭고 치열했으며 피아간에 수많은 상처를 남긴 세월을 보았다 .
그 때 남부군의 총사령관 이현상에 대해 알게되었으며 그의 성품에 대해 몹시 궁금해졌다.
말이없고 극좌적이기보다는 온화한 성품의 따듯한 가슴을 가지고 천부적인 대범함과 지도력, 이를 바쳐주는 두뇌와 인품이 없었다면 이후 수년간 수많은 난관속에서도 빨치산 사령관으로존중받고 살아남는것은 불가능했으리라. 거칠고도 용감무쌍한 부대장들이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상 평전을 읽으며 그를 다시 기려본다.
▲ 지리산 천왕봉의 아침 ⓒ 2008 한국의산천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철쭉꽃 지천으로 피어나는 봄부터 계절마다 을긋불긋한 복장의 등산객으로 온산이 붐비는 지리산지리산 이 능선 저 계곡에서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를 참아가며 쫓고 쫓기는 전쟁. 과연 반백년전에 이산 구석 구석의 능선과 계곡에서 원치않은 전쟁에 운명처럼 차출되어 피를 흘리며 죽어간 젊은 나이 또래들의 빨치산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49년 이래 5년여에 걸친 소백·지리지구 공비토벌전에서 교전회수 실로 10,717회 전몰 군경의 수 6,333 명, 빨치산측 사망자수 줄잡아 1만 수천명등 피아 2만 여명의 생명이 희생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민족의 비극이다.
이데올로기, 이념이란 각자의 종교적 신념과 같은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좋고 나쁘다를 평하는것은 종교적인 싸움과 다를바 없는것이다. 문제는 이데올로기를 실현코자 하는 행위가 얼마나 올바른길을 택하는냐에 따라 문제는 달라진다.
이현상은 투철한 항일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혁명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지도자임에 분명하다. 먼저 그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며 끝까지 투쟁한 독립운동가였다. 그와 함께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이승엽등이 한때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거나 협조하는 모습을 보인데 반해 그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면은 아니지만, 그는 상당히 민족적 정서를 가진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에게 있어 진정한 해방은 일제로부터의 조국독립과 계급해방이 함께 하는 것이었다. 또, 그는 조선공산당, 후에는 남로당이라는 해방전후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 혁명가였다.
당시 공산당에는 남로당과 북로당, 해외파와 국내파등 수많은 계파간의 갈등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변화해갔다. 이런 환경속에서 이현상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며 지리산으로 찾아들었고 지리산에서 죽어갔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이견들이 있지만, 그는 죽기전에 '제5지구당 위원장'직을 박탈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 그는 이런 결정을 수용하였으며 조선공산당 내부의 갈등속에서 정해진 길을 걸어간 것이다.
▲ 어느해 겨울이 끝나가는날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왼쪽부터 한국의산천· 승덕· 종식·운산의봄) ⓒ 2008 한국의산천
1953년 7월 그 민족적 비극을 마무리하는 휴전협정문서에는 각 상대방 후방에 남겨진 물자와 장비의 철거, 심지어 전사자의 시체발굴과 반출에 관한 조문까지 있지만 그 무렵 남한의 험준한 산악에는 아직도 수백명의 인간들이 일체의 정보도 차단된채 절망적인 항전이 계속되며 쓰러져기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北이 버리고 南이 저주한 최후전선 빨치산 항전대.
智異風雲當鴻動 지리산에 풍운일어 기러기떼 흩어지니
伏劍千里南走越 남쪽으로 천리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 오직 한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적 없고
胞有萬甲心有血 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속엔 끓는 피 있네 -火山 이현상
이현상은 전투가 없는 날에는 비트(은거지)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이백자 원고지로 120장에 이르는 장문의 메이데이 기념 성명을 쓰기도 했으며 당 기관지에 장문의 사설과 성명서를 자주 게재하였다.
▲ 국립공원 1호 지리산 표석 ⓒ 2008 한국의산천
지리산
-김지하-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이현상 평전을 읽고나서...[한국의산천]평전(評傳)이란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라고 나온다.
▲ 이현상 평전 실천문학사 2007년 7월 출간 ⓒ 2008 한국의산천
빨치산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에서 나온 말로 적의 배후에서 비정규전(게릴라전술)을 펼치며 통신,교통 시설을 파괴하거나 무기나 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별동대 비정규군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전후에 각지에서 활동했던 공산 게릴라를 이른다.
빨치산은 당시 토벌당국에 의해 남부군, 남부군단 또는 이현상부대 또는 나팔부대로 불리워지던 게릴라부대의 명칭이며 그 정식호칭는 독립제 4지대였다.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부대였으며 순수 유격부대였고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이현상이 총사령관으로 있었다.
▲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이현상 사진 뉴스메이커 1994,12.8일 ⓒ 2008 한국의산천
노동혁명을 통해 혁명가의 길을 걸은 이현상한국전쟁이 끝난지 두달 후 1953년 9월 18일 오전 11시경 지리산 반야봉 남쪽 빗점골에서 한 사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한국 전쟁이 터지기전 1948년 10월 하순 천여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가 5년간 수천명의 남한의 군경과 대치하며 게릴라 활동을 벌인 빨치산 총사령관 이 현상의 공식적인 죽음 이었다. 이현상의 죽음을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의 죽음으로 한국전쟁은 비로소 완전히 종식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대남공작 즉 남한의 게릴라식 유격투쟁과 지하당을 총괄하는 박헌영과 이승엽.
1950년 이승엽의 지시에 따라 남진명령을 받은 제 4지대 남부군은 50년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가치는 겨울 일체의 정보에서 차단된 가운데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소백산맥을 가고 있었다.영주의 자갈도 날려버린다는 그 겨울의 소백산을.. 이현상의 보성전문학교 시절은 불과 4개월 밖에 되지 않으나 항일 운동가 사회주의 혁명가로서의 자리를 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명맥이 경각에달렸던 1901년 그는 충남 금산국 군북면 외부리의 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수만평의 논에서 해마다 나는 400 가마니의 벼를 거두는 이현상 집안은 조선의 왕손인 전주이씨 가문이자 군북면 제일의 부자였다.
멀리 공주와 무주에 까지 땅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이면배는 과거에서 본시까지 붙었으나 나라가 망하면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진사로서 주민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이면배는 아내 김행정과 사이에 육남매를 두었는데 이현상은 남자 4형제중 막내였다. 이현상이 만 5살 되던 해 1910년 8월 22일 한일 합병조약으로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현상은 고창고보에서 좋은 성적으로 학교를 다녔으며 그의 학적부란에는 침착하며 집요한데가 있다'라고 적혀있다.
그 후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한 그는 뛰어난 학습능력으로 우등생이 되며 그곳을 중퇴하고 1928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1925년에는 박헌영의 밑에서 김삼룡 등과 더불어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했다. 러시아에서 볼쉐비키 혁명이 성공한 지 8년 후의 일이다.
▲ 1925년 6·10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첫 감옥살이에 들어간 젊은 이현상
이현상 (공산주의 운동가)
출생지 : 충남 금산(錦山)
1906년 충남(당시는 전북) 금산(錦山)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때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산하 학생부원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반일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일제의 대규모 공산당 검거 때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박현영(朴憲永) 김삼룡(金三龍)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고, 8 15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공산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개편된 뒤 연락부장 등의 요직을 맡아 활동하다가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하였다.
1948년 북조선노동당의 결정에 따라 다시 남한으로 내려왔다. 지리산으로 들어가 6· 25 전쟁을 거치면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1951년 북한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의 조직인 남부군(南部軍)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각 도당 유격대를 남부군 사령부에 소속시키는 등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다가 1953년 휴전 이후 군경 합동으로 실시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때 사살당하였다.
이현상은 그가 살아있던 51년, 이미 북한에서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고, 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53년 2월에는 영웅칭호를 받았다. 김일성은 지리산에 있는 이현상에게 영웅훈장 약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후 이현상이 죽은후인 68년, 북한은 '혁명 애국열사'로 정식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이현상은 열사증 000001번으로 첫 열사증을 추서받아 혁명열사릉에 안장(가묘)되었다. 또 이현상은 90년 8월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 1994년 '금수강산'에 공개된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 ⓒ 2008 한국의산천
북한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일등서기관이 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문 당시,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을 안내했다.
이현상은 최문기와 결혼, 1남3녀를 두었다 큰딸은 무영(茂永.23년생), 둘째는 외아들 극(剋.27년생) 둘째딸 문영(文永.34년생), 셋째딸이 상진(尙鎭.40년생)이다. 한때 남한에 그의 딸이 살고 있다는 설이 있었으나, 확인된 바로는 이현상의 가족은 월북하여, 북한에 정착하였다.
그는 평범한 키로, 언제나 과묵하고 우수에 잠긴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원들을 지극히 아끼고 솔선수범하였으며, 남부군뿐 아니라 빨치산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그가 축지법을 쓰고 날아다니기도 한다는, 신비한 인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이런 민간의 소문들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빨치산 투쟁을 했는가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조국독립운동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혁명을 위해 투쟁하다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였다. 비운의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었고 지리산에서 자신의 삶을 불태운 혁명가였다.
이현상의 가족들은 북한으로가 그곳에 정착한 것이 북한에서 발간되는 월간지 [금수강산] 10월호에 실림으로서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현상의 외아들 이극은 이현상이 죽기전인 1948년 북한으로 갔으며, 이때 김일성을 만났다.
1992년 10월 7일자, [로동신문]의 기사에 따르면"당시 이현상은 남한에서 공산당의 불법화로 박헌영과 함께 평양에 있었고, 가족은 모두 남한에 있었다.
이현상이 빨치산 투쟁을 위해 다시 남으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이현상이 남쪽으로 내려가기 직전, 김일성은 이현상을 만났다. 김일성은 이현상에게 "하고 싶은 말과 부탁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하라"고 했다. 이에 이현상은 흘러내리는 안경을 바로잡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띄엄띄엄 "저의 아들딸 4남매의 앞날을 오직 김일성에게 의탁합니다"고 부탁했다. 이에 김일성은 이현상의 손을 잡으며 "어서 아이들을 보내라, 아들도 보내고 유망한 청년들도 보내라"고 말했다.
이현상이 북한을 떠난 지 두 달 후인 48년 8월, 이현상의 아들 이극과 몇몇 청년들이 평양으로 왔다. 이현상이 먼저 아들만 북한에 보낸 것이다. 그때 이극은 21살의 청년이었다. 김일성은 이현상의 아들을 만났다.
김일성은 같이 온 청년들과 나이가 엇비슷해 누가 이현상의 아들인지 몰랐다. 김일성이 "누가 이현상 동지의 아들인가"고 물었다. 이극이 정중히 일어나 인사하자 김일성은 "동무가 이현상 동지의 아들이라. 그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이현상 아들이 "이극"이라고 대답하자 김일성은 "항상 이긴다는 뜻이구먼, 이름이 좋다"고 말했다."
이현상의 죽음이후, 이승만 정부는 이현상의 가족을 찾기위해 노력한 것 같다. 이현상의 남은 가족들은 경찰등의 수색을 피해 갖은 고생을 하다 1953년~54년 사이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현상의 아내 최문기와 세 딸, 그리고 셋째형(이현식)의 아내와 자녀 중 두 아들과 딸이 북한으로 갔으며, 이들이 어떻게 북한으로 갔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현상의 가족들은 북한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물론 그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각별한 지시에 의해서였다. 이현상의 부인 최문기는 72년 사망, 김일성의 지시로 이현상의 가묘가 만들어진 혁명열사릉에 합장됐다. 이현상의 형수는 92년 1백살로 김일성이 직접 보낸 생일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현상의 외아들 이극은 김일성의 직접 지시로 유학을 다녀와 김일성 종합대학 교원 등 여러곳에서 근무했다. 인민사서라는 명예칭호를 받았으며, 정년을 넘겼지만 현재 인민대학습당에서 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큰딸 이무영은 중앙당 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정치부와 노동당에서 일했다. 지난해 70살을 맞았는데, 김일성이 직접 잔치상을 보냈다고 이 잡지는 밝히고 있다.
둘째딸 이문영은 혁명유자녀들이 다니는 만경대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중앙의 한 기관에서 일하다가 김일성의 배려로 당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막내딸인 이상진은 대학졸업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의 첫 여성 1등 서기관이 됐다. 이상진은 이 잡지에서 "남편은 대외부문사업 에서 일하고 있으며 자신은 현재 경공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만수대 의사당(국회의사당)방문때, 소개를 맡았던 안내자가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남한에 남아있던 이현상의 어머니 김씨는 "우리 현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만 되뇌이면서 90살이 넘도록 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도 75년 세상을 떠났다. 남한에는 이현상의 사촌 등 몇몇 일가친척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신분을 숨기거 나 이현상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94. 11 이현상과 그 후손들(원희복)' 정리.-
▲ 더 많이 알고싶은 사람 이현상 ⓒ2008 한국의산천
이현상은 그 수많은 난관을 겪으며 이끌어온 유격대에서 자기 비판과 상호비판이 강조될때도 그는 특정인을 두고 야단 친적이 없으며 간부에게는 엄격했고 부하들에게는 다정다감한 아버지로서의 역활을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부하들을 잘 이끌수 있는 비결은 스스로의 인품이었다. 총알이 머리위로 핑핑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의연했고 부상당한 부하들을 먼저 챙기고 전술을 짜는데도 뛰어난 전략을 발휘하여 아래 부대장들을 감탄시킨곤했다 전한다.
이현상은 교전이 아닌이상 포로로 잡힌 군인이나 경찰을 절대 죽이지 못하게 했다. 인정이 많은 이현상은 이로 인해 온정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웬만한 성악가를 능가하는 우렁찬 음량을 가진 이현상을 지리산 자락의 마을 사람들은'아주 잘생기고 젊잖은 선생님'으로 불리웠다. 이태의 <남부군>을 통해본 그의 투쟁과 죽음.
▲ 빨치산 수기 <남부군>의 저자 이태
자신이 빨치산 대원 출신이며, 최초의 빨치산 수기인 <남부군>을 쓴 '이태'는 이현상의 삶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과북의 역사에서 처참하게 말살된 비운의 군상들이 있다. 이른 바 남로당..박헌영.이승엽.조일명.임화.정태식.이강국..그중의 한사람, 남부군의 영웅 이현상.그가 지상에 남긴 흔적은 안개처럼 희미하고 그죽음 조차 수수께끼에 묻혀있다.
아직도 지리산 빗점골 자락에 숨겨진 그진실은? 이현상은 현재 북한 열사능 1호 묘역에 묻혀있으며 그의 자녀들은 건재하게 북한에서 살고있다.
... (중략) ...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중 반김일성파로 지목되어 다시 서울로 피신해왔 던 이현상은 북한정권의 요직에 참여한 동료들을 외면하고는 48년 11 월 겨울이 휘몰아쳐 오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경성 콤 클럽 시절부터의 동료인 이승엽이 일제시대 전향과 타협의 굴 절된 경력을 가진 데 대해 이현상은 그 가혹한 일제 탄압하에서도 일 체의 전향이나 타협을 몰랐고, 이승엽이 한때 평양 김일성 정권의 각 료반열에 올라있는데 비해 이현상은 김일성을 거부하여 자진해서 남한 빨치산에 투신한 터였다. 그리고 5년 후 그 지리산에서 파란많던 생애를 마친다.
북한정권은 53 년 2월 5일 이현상에게 '공화국 영웅'의 칭호를 수여했다.
히틀러가 롬멜장군에게 '국장'의 영전을 내린 고사를 연상케 하는 서훈이었다.남한 빨치산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이현상... 그는 그가 남긴 수다한 '전설'과는 달리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대표한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지구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이루지 못할 아집속에 죽어갔고, 그 주검조차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 받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원래가 과묵했던 그가 더구나 그 때의 환경 속에서 어떤 반권적 언동을 내색한 적은 물론 없었을 것이다. 방랑객처럼 산맥을 표류하다 전 남유격대의 총탄에 쓰러진 남해여단장(이청송), 그 사람처럼 모든 것 이 수수께끼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외로운 방랑자였다는 것이다.
빨치산이라는 배경이 사라지고 일체의 발언권을 상실한 국내파(남로당 계)는 참으로 어이없게 소멸되고 말았다. (월북한 박헌영 이승엽 등은 김일성에 의해 반란음모 혐의로 체포 사형된다) 그러나 아득히 전선 후방의 산악을 가고 있는 빨치산 대열 속에서 그것을 상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혹은 이현상만은 그것을 예측했었을 지도 모른다. 예측했다 해도 그가 갈 길은 산맥 이외에는 없었다.
이현상이 사살된 53년 현재 그는 북에서도 남에서도 버림받은 천애의 고아가 돼 있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이승엽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평양에서 사형대의 이슬이 되는 바로 그 시각에 이현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박영발(전남도당위원장) 등 교 조주의자들에 의해 단죄되고 평당원으로 강등당한 다음 뒤이어 수수께 끼의 총탄에 쓰러진다. '미국간첩 운운'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이 되느니 보다는 빨치산 수령으로 최후를 마친 것이 소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평생을 그 길로 살아온 그로서는 오히려 소망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는 비운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훗날 토벌 군경들 혹은 지리산 주변 주민들 사이에서 이현상이 축지법을 쓰느니 몇 길 담장을 훌훌 뛰어 넘느니 하고 무슨 신통력을 가진 사람처럼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그냥 중후한 인상을 주는 평범한 중키의 사나이였다. 그냥 묵직하고 과묵한 중년신사일 뿐이었다.
그는 모든 남부군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언제나 절대적인 신의 계시처럼 대원들에게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누구도 듣는 데서나 안듣는 데서나 그의 이름은 커녕 직함조차 부르는 법이 없었고 그저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그가 사용 했던 노상명, 혹은 노명선(산중에서 사용)이라는 가명조차 아는 대원이 거의 없었다.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 그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옆 모습은 지금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에서...
▲ 참고한 책들 ⓒ 2007 한국의산천
남한 빨치산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이현상..... 그는 그가 남긴 수다한 '전설'과는 달리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대표한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지구상의 모든 것으러부터 버림받은 채 이루지 못 할 집념 속에 죽어갔고, 그 주검조차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원래가 과묵했던 그가 더구나 그 때의 환경 속에서 어떤 반권적 언동을 내색한 적은 물론 없었을 것이다. 방랑객처럼 산맥을 표류하다 스러져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고독한 혁명가이며 외로운 방랑자였다는것이다.
▲ 지리산의 일출 ⓒ 2008 한국의산천
이현상은 제주항쟁이 터지기직전 1948년 3월 하순. 4월 14일 평양에서 열기로한 남북 연석회의에 남노당 대표로 참가하기위해 월북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이현상은 연석회의가 끝난 후에도 북한에 남았다. 그리고 박헌영의 천거에 의해 소련으로 유학을 가게되어 있었으나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국내 정세로 그 후 이현상은 1948년 가을 강동 정치학원에 들어간다. 이는 이현상으로 하여금 남부지방 유격대를 총지휘하려는 것이었다.
강동 정치학원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오르면 강동군에 설치된3개월에서 6개월간의 군사훈련 교육장으로 유격전술과 폭파기술, 공병학, 사격훈련과 청치교양과목을 가르치는 남로당 간부 훈련소였다. 이곳에서 전술학은 물론 대민정책에서도 배웠다.
유격대는 군사적으로 후방을 교란하고 정치적으로는 주민을 선전 선동하여 혁명으로 이끄는 것이 목표였기에 유격대는 물고기요 인민은 물이라는 모택동의 말대로 주민들에게 위협을 가거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또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그들로 부터 물자와 인력을 수송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1948년 6월 이현상은 간부부장으로 남한행을 명령받으며 전국에 흩어진 야산대를 조직하는 작업을 맡긴것이다.
▲ 지리산의 아침 ⓒ 2008 한국의산천
해방과 더불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은 시작되었다. 그해 11월 10일 이리저리 떠돌며 유격대 활동을 하던소규모 부대를 모아 정식으로 남부군이 창설되었다.총사령관에는 이현상. 박종하가 총참모총장이 되었다. 정치위원은 김일성 대학 교수였던 차일평이 맡았으며 약 860명이 이르는 규모였다.
민폐를 끼치지 않고 교전중인 적이외에는 죽이지 않는다는 이현상 선언은 이후 지리산 유격대의 최고 지침으로 강조되었다. 그렇기에 북한이나 소련으로 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빨치산이 고립무원의 산악지대에서 수년간 살아남을 수있는 원천이었던 것이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그 당시 잔돌평원(세석평전)에서 거림으로 연락원을 접선하기 내려가는 도중 점심을 먹고 있는 농부를 만났지만 농부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욕보요"하고 웃음 섞인 인사를 했다고 전한다. 그렇듯 그 당시 주민과 빨치산 사이에는 서로가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 지리산 ⓒ 2008 한국의산천
이현상 최후까지 버티던 은거지 빗점골 그곳에서 사살된 이현상의 주머니에속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智異風雲當鴻動 지리산에 풍운일어 기러기떼 흩어지니
伏劍千里南走越 남쪽으로 천리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 오직 한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적 없고
胞有萬甲心有血 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속엔 끓는 피 있네 -火山 이현상 -
지리산 내에서도 지역당이 아닌 남부군은 어느 지역이고 자유로이 이동했지만 주로 세석을 중심으로 백무동·거림골· 대성골을 주로 이용하였으며 경남도당부대는 경남 관내인 천왕봉 동쪽 중산리골에서 대원사 일대를, 전북 도당은 남원관내인 뱀사골· 달궁골을 전전했다.전남도당은 칠갑산· 유치산· 백아산 ·광양 백운산· 등지가 주요 거점이었다.
▲ 지리산 빨치산 아지트 안내문 ⓒ 2008 한국의산천
국내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항일운동을 할때 1932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이현상은 이재유와 김상룡을 주축으로 사회주의 기본 조직인 경성 트로이카를 결성하였다.
▲ 지리산 트레일 안내판 ⓒ 2008 한국의산천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서
빨치산하면 이현상이요 이현상하면 곧 빨치산이 연상될만큼 이현상은 빨치산의 대명사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라 북에서조차 외면 당하면서 고립무원속에 끝까지 버틴 외로운 빨치산 이현상-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겠는가?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의 글
당시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는 '견벽청야 작전'명에 공비토벌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으로 인하여 명절을 즐기고 있던 지리산 주변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 등지서 무려 705명의 양민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양민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
견변청야(堅壁淸野)
작전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걷어들인다는 뜻으로, 적의 양식 조달을 차단하는 전술의 하나.
적이 주둔한 주변일대를 깨끗이 청소하여 적으로하여금 고사하는 작전으로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해온 방어전술의 하나이다.
해자(垓子)를 깊이 파고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들어 있는 모든 곡식을 모조리 성내로 걷어들여 공격해 오는 적의 군량미 조달에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이러한 전법은 우세한 적에 대한 수단으로 흔히 약자가 사용한다.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의 공격을 영원성(寧遠城)을 사수(死守)함으로써 패퇴시켰던 원숭환(袁崇煥)의 견벽청야 작전은 유명하다.
▲ 지리산 빨치산 아지트 안내문 ⓒ 2008 한국의산천
지리산이 아무리 크다해도 반경 50km의 고립된 공간이다. 빨치산은 물이외의 콩한조각도 먹지못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깊은 골이라도 반나절만 걸으면 마을이 나오는, 상대적으로는 아무리 깊이 숨어도 국군이 반나절만 밀고오면 드러나 버리는 손바닥만한 지역에서 이리저리 토끼몰이를 당하며 죽어가는 처지였다.
유격대 토벌작전을 위해 이승만의 특명으로 서남지구 전투경찰대가 설치되었고, 1951년 부터 백선협 장군이 이끄는 야전군 사령부가 남원에 설치되고 동계작전에 시작되며 유격대의 운명은 최후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 이현상이 죽기전까지 은신했떤 지리산 빗점골 아지트
1953년 9월 18일 11시5분 드디어 남한 빨지산의 총수 이현상이 전투경찰 제2연대 소속 33명의 매복조에 빗점골 합수내 근처 절터골 돌밭어귀에서 10여발의 총탄을 맞아 벌집처럼 되어 쓰러졌다. 남한 빨치산중 가장 완강했던 무력집단이 이로서 막을 내리고 궤멸하였다. (내부 갈등으로 모든 직책과 명예를 벗어버린 직후였다)
남과 북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혁명가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조선인민 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이던 공화국 영웅 이현상은 지리산의 가을과 함께 마침내 파란많은 생애를 마쳤다. 이때 그의 나이 49세.
이현상의 시신은 10월 8일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경찰 토벌대장 차일혁에 의해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졌다. 이로서 지리산 유격대, 제2병단, 남부군, 독립4지대, 제5지구당으로 이어져온 이현상 부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 그 옛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리산 자락은 억새와 푸른하늘을 배경으로 한가로운 풍경을 보이고 있다. ⓒ 2008 한국의산천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멤버의 한사람이었던 이현상. 남한 빨치산의 상징인 이현상 그가 남긴 숫한 전설과는 달리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하게 살다가 스러져 갔다. 지구상의 모든것으로 부터 버림받은 채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의 산속에서 이루지 못할 집념속에 역사의 미아가 되어 죽어갔다.
이현상은 1990년 8월 북한 정부로 부터 조국 통일상에 추서됨.
ⓒ 2008 한국의산천
인민해방이 그토록 중요했던가? 영웅? 이제는 그 빛바랜 외침들이 부각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격동의 시대에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다가 한많은 세상 살다간 혁명가 이현상...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역사라는 이름의 장강대하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니, 기억 또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그 기억을 적어두는 기록이다
-이현상 평전 발문(김성동)에서-
참고문헌
이현상 평전 안재성지음
남부군 이태지음.
남노당 이병주지음
태백산맥 조정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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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글 엄은화 대전문화찾기
빨치산 大將 이현상의 삶과 鬪爭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가진 이현상....
그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실제로 그의 삶, 투쟁, 죽음은 여전히 수많은 수수께끼에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자료들을 모아, 이 문서를 정리한다.
<< 차 례 >>
1. 이현상의 생애
2. 이태의 <남부군>을 통해본 그의 투쟁과 죽음.
3. 군,경 토벌대의 설명에 따른 그의 투쟁과 죽음.
4. 이현상의 가족들의 삶.
5. 인간 이현상.
6. 참고자료
1. 이현상의 생애.
이현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전북(현재는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4남2녀중 다섯째(4남)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역에서 대를 이어온 전주이씨 양반가였으며, 그의 부친은 부농이었던 진사 이면배였다. 그는 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후 고창고보를 다니다, 서울로 전학 1927년 중앙고보를 졸업했다. 중앙고보 재학중이던 1925년부터 박헌영등과 함께 공산당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26년 6.10만세사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기도 했다.
보성전문에 진학하여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등에서 상무위원, 책임비서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 휴학중 상해로 건너가 망명 청년들의 모임 '한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1928년 8월 구속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총 12년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조선공산당이 해제되자 경성꼬뮈니케클럽(경성컴)을 만들기도 했으며, 해방직전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해방이후 지리산에서 나와 조선공산당 재건에 적극 가담하며, 남로당 연락부장, 간부부장을 맡았다. 미군정에 의해 공산당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박헌영등과 함께 월북하였으며, 월북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난다. 1948년 다시 서울로 내려온 그는 빨치산투쟁을 위해 그해 11월 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가 남한으로 다시 내려온 원인은 크게 두가지설이있다. 하나는 스스로 남한 빨치산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설이 있고, 당시북한정권과의 갈등을 피해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설이있다)
이후 그는 '조선 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으로서 지리산등지에서 치열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그에 대한 수많은 전설들을 만들어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후 경상도,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전역에 인공이 수립되자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에서 하산하였으나 미군의 인천상륙과 함께 다시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다. 1951년 7월 '남한 6개도당 위원장회의'를 주재하면서 그는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의 사령관의 위치에 오른다.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과 함께 북한에서는 남로당계열이었던 박헌영, 이승엽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된다. 그해 8월 6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와 결정서9호, 9월 6일의 결정서10호에 따라 당시 제5지구당은 해체되고 위원장이었던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된다. 또한 남부군의 핵심부대였던 제5지구당 요원들과 '김지회부대'를 각 도/군당에 분산시킴에 따라 그는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다. 당시의 조직위원회를 이끌던 이는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등이었다.
1953년 9월 18일(혹은 17일, 15일) 그는 지리산 빗점골 합수내, 너덜겅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의문의 총탄에 의해 사망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데, 크게 보면 1) 군토벌대에 의해 2)경찰토벌대에 의해 3)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치산에 의해 등의 세가지 설이있다. 그를 사살한 공적을 두고 남한에서는 법정다툼까지 벌어졌는데, 법원은 경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식적으로 남한에서는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경찰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빨치산 수기인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간접적으로 세 번째 설을 제기하고, 북한에서는 9월 17일 사망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죽음은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는 지리산 빗점골에서 총탄을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어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이현상은 그가 살아있던 51년, 이미 북한에서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고, 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53년 2월에는 영웅칭호를 받았다. 김일성은 지리산에 있는 이현상에게 영웅훈장 약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후 이현상이 죽은후인 68년, 북한은 '혁명 애국열사'로 정식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이현상은 열사증 000001번으로 첫 열사증을 추서받아 혁명열사릉에 안장(가묘)되었다. 또 이현상은 90년 8월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이현상은 최문기와 결혼, 1남3녀를 두었다 큰딸은 무영(茂永.23년생), 둘째는 외아들 극(剋.27년생) 둘째딸 문영(文永.34년생), 셋째딸이 상진(尙鎭.40년생)이다. 한때 남한에 그의 딸이 살고 있다는 설이 있었으나, 확인된 바로는 이현상의 가족은 월북하여, 북한에 정착하였다.
그는 평범한 키로, 언제나 과묵하고 우수에 잠긴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원들을 지극히 아끼고 솔선수범하였으며, 남부군뿐 아니라 빨치산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그가 축지법을 쓰고 날아다니기도 한다는, 신비한 인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이런 민간의 소문들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빨치산 투쟁을 했는가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조국독립운동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혁명을 위해 투쟁하다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였다. 비운의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었고 지리산에서 자신의 삶을 불태운 혁명가였다.
2. 이태의 <남부군>을 통해본 그의 투쟁과 죽음.
자신이 빨치산 대원 출신이며, 최초의 빨치산 수기인 <남부군>을 쓴 '이태'는 이현상의 삶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과북의 역사에서 처참하게 말살된 비운의 군상들이 있다. 이른 바 남로당..박헌영.이승엽.조일명.임화.정태식.이강국..그중의 한사람, 남부군의 히어로 이현상.그가 지상에 남긴 흔적은 안개처럼 희미하고 그죽음 조차 수수께끼에 묻혀있다. 아직도 지리산 빗점골 자락에 숨겨진 그진실은? 이현상은 현재 북한 열사능 1호 묘역에 묻혀있으며 그의 자녀들은 건재하게 북한에서 살고있다.... (중략) ...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중 반김일성파로 지목되어 다시 서울로 피신해왔 던 이현상은 북한정권의 요직에 참여한 동료들을 외면하고는 48년 11 월 겨울이 휘몰아쳐 오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경성 콤 클럽 시절부터의 동료인 이승엽이 일제시대 전향과 타협의 굴 절된 경력을 가진 데 대해 이현상은 그 가혹한 일제 탄압하에서도 일체의 전향이나 타협을 몰랐고, 이승엽이 한때 평양 김일성 정권의 각 료반열에 올라있는데 비해 이현상은 김일성을 거부하여 자진해서 남한 빨치산에 투신한 터였다. 그리고 5년 후 그 지리산에서 파란많던 생애를 마친다. 북한정권은 53 년 2월 5일 이현상에게 '공화국 영웅'의 칭호를 수여했다. 히틀러가 롬멜장군에게 '국장'의 영전을 내린 고사를 연상케 하는 서훈이었다.
남한 빨치산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이현상... 그는 그가 남긴 수다한 '전설'과는 달리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대표한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지구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이루지 못할 아집속에 죽어갔고, 그 주검조차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 받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원래가 과묵했던 그가 더구나 그 때의 환경 속에서 어떤 반권적 언동을 내색한 적은 물론 없었을 것이다. 방랑객처럼 산맥을 표류하다 전 남유격대의 총탄에 쓰러진 남해여단장(이청송), 그 사람처럼 모든 것 이 수수께끼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외로운 방랑자였다는 것이다. 빨치산이라는 배경이 사라지고 일체의 발언권을 상실한 국내파(남로당 계)는 참으로 어이없게 소멸되고 말았다. (월북한 박헌영 이승엽 등은 김일성에 의해 반란음모 혐의로 체포 사형된다)
그러나 아득히 전선 후방의 산악을 가고 있는 빨치산 대열 속에서 그것을 상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혹은 이현상만은 그것을 예측했었을 지도 모른다. 예측했다 해도 그가 갈 길은 산맥 이외에는 없었다. 이현상이 사살된 53년 현재 그는 북에서도 남에서도 버림받은 천애의 고아가 돼 있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이승엽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평양에서 사형대의 이슬이 되는 바로 그 시각에 이현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박영발(전남도당위원장) 등 교 조주의자들에 의해 단죄되고 평당원으로 강등당한 다음 뒤이어 수수께 끼의 총탄에 쓰러진다. '미국간첩 운운'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이 되느니 보다는 빨치산 수령으로 최후를 마친 것이 소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평생을 그 길로 살아온 그로서는 오히려 소망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는 비운의 인물이었던 것이 다. 나는 훗날 토벌 군경들 혹은 지리산 주변 주민들 사이에서 이현상이 축지법을 쓰느니 몇 길 담장을 훌훌 뛰어 넘느니 하고 무슨 신통력을 가진 사람처럼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그냥 중후한 인상을 주는 평범한 중키의 사나이였다. 그냥 묵직하고 과묵한 중년신사일 뿐이었다.
그는 모든 남부군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언제나 절대적인 신의 계시처럼 대원들에게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누구도 듣는 데서나 안듣는 데서나 그의 이름은 커녕 직함조차 부르는 법이 없었고 그저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그가 사용 했던 노상명, 혹은 노명선(산중에서 사용)이라는 가명조차 아는 대원이 거의 없었다.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 그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옆 모습은 지금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에서...
이태의 <남부군>에 따르면, 그는 조선공산당의 한 축인 '남로당'의 핵심간부였으며, 북한의 김일성정권과 일정한 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되는 빨치산투쟁의 소멸속에서 이현상은 북한에서 있었던 '남로당'계열 인사들의 처단의 흐름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나름대로 예측하였다. 그는 북한의 소환명령을 거부하였으며 평당원으로 강등된후 연금상태에 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요원에 의해 지리산 빗점골에서 암살되었고, 그를 암살한 요원역시 군 수색대의 매복에 걸려 사망한 것이다. 북한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이현상의 사망일은 9월 17일로, 남한의 공식기록인 9월 18일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북한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그의 사망을 보고받은 것을 조심스레 집작하게 해준다.
그가 제9호, 제10호 결정서를 통해 빨치산 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잃고 평당원으로 강등당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이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확증을 가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는 생전에 북한정권으로부터 당원의 최고영예인 '영웅'칭호를 받았으며, 그의 가족들은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각별한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다. 이는 북한정권에서 '이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어느정도 추측케 해주기 때문이다. 이현상의 죽음에 대한 이태의 설명은 공산당 내부의 갈등 - 북로당과 남로당, 해외파와 국내파 - 속에서 공산당으로부터 제거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정치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명확한 사료가 공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므로 그의 의견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듯 싶다.
3. 군,경 토벌대의 설명에 따른 그의 투쟁과 죽음.
휴전후,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이현상을 잡지 않고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생포를 독려하며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었다. 이현상과 기백명의 잔존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1만8천명의 국군, 경찰부대가 지리산을 에워싸고 그의 사살에 불을 켜고 있었다. 이는 이현상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어느정도인지를 잘 알 게 해주는 일이라 하겠다.
이 작전에서 직접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하는 당시 서전사 2연대의 연대장 차일혁 총경의 아들 차길진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남겼다. 수기에 의하면,
'9월6일, 빗점골 부근을 수색하던 618부대는 원범리에서 빨치산 송덕룡 부대원 7명이 마을에 나타나 식량을 빼앗아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창기 1소대장은 이들을 추격해 아침을 먹고 있을 때 기습, 김진영과 김은석을 생포했다. 심문 결과 두 사람은 제5지구당이 해체되기 전 이현상의 7인조 호위병으로 있었다. 둘에게서 다시 한번 제5지구당의 해체와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돼 빗점골에 은신하고 있고, 조만간 경남도당으로이송될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나는 김진영과 김은석을 수색대에 편입시켰다.
9월17일, 나는 수색대로 하여금 빗점골 일대의 6개 지점에 매복케 했다. 수색대는 20시께 3∼4명의 공비들과 조우해 접전을 벌였으나, 공비들은 순식간에 도주하고 전과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빗점골에 공비들이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고, 이현상의 은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미 호위병이 없이 거의 감금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현상이지만, 평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몸바쳐 온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작전 상황을 보고 받았다.
다음날인 18일 상오 11시, 김용식이 지휘하던 수색대로부터 전과보고가 있었다. "연대장님, 어젯밤에 전투가 있었으나 공비들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방금 일대를 수색하다가 늙은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김진영과 김은석에 의하면 이현상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엎드려 있는 시체를 발견하고 몇 발의 확인 사격을 하긴 했지만, 이현상은 등에 총을 맞고 죽은 것 같습니다. 어제 야간 전투 중 총에 맞아 죽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뒤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것 같습니다."
이현상 외 5명의 공비 시체와 노획 무기를 쌍계사로 옮겨 놓았다. 김진영, 김은석에 의해 일차로 이현상을 확인한 바 있으나, 본부 수색대 양회근 외 여러명의 재확인으로 이현상이 틀림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을 때 나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이현상의 시체는 40대 후반 중늙은이의 모습이었다. 줄이 선 미제 군복 바지와 농구화의 깨끗한 차림이었다. 군복 안에는 일기와 한시가 적힌 수첩, 가래가 있었고, 호주머니에서 염주가 나왔다. 그리고 허리춤 깊숙이 소련제 권총이 들어있었다. 그 권총은 매우 작아서 호신용으로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보급이 전혀 없던 빨치산들로서는 그 특수 소제 권총은 실탄을 구할 수 가 없어서 무기로써는 전혀 가치가 없었다.'
이 차일혁의 수기는 이현상이 누구의 총에 의해 사살되었는지를 밝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사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한편, 국군 남경사 역시 이현상을 자신들이 사살했다는 내용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남경사 56연대 수색대원 오동식 상사가 이끄는 매복조가 9월 15일 빗점골에서 이현상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따라 국군은 경찰과 치열한 훈장다툼을 벌인다.
'달아난 공비들을 추적하던 오동식 상사는 큰 바위 위에 뛰어올라 사방을 둘러보다 바위 틈에 웅크리고 있는 공비 한명을 발견하고, "손들엇!" 하고 소리쳤다. 그 공비는 당당한 태도로 고개를 돌리고는 "군군이냐, 경찰이냐?"고 물었다. 오상사는 국군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장교를 불러라. 협상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권총을 빼들고 오상사 쪽으로 다가왔다. 오상사는 "권총을 버리라"고 경고했으나 그가 불응하자 위험을 직감하고 급히 카빈총을 발사하여 사살했다.
당시 남경사 측은 빗점골에서 경찰부대 수색대가 이현상을 사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한 결과 그것이 바로 오상사가 사살한 공비임을 뒤늦게 알았다면서 공은 자신들이 세운 것이라고 육군본부에 보고했다. 오상사가 이현상을 몰라 그냥 버려둔 시체를 며칠 뒤 가져갔다는 주장이었다. 대검(帶劍)이 없었던 오상사 일행은 정체를 알 수는 없으나 거물급으로 보이는 문제의 빨치산 목을 자르려고 목에 총을 난사했으나 떨어지지 않아 권총만 수습해 가지고 내려왔다는 보고와 함께 권총이 증거물로 제시되기도 했다.
결국, 이현상의 사살공로를 두고 군과 경찰이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고, 군경합동조사단이 파견되었다. 결과는 경찰의 손을 들어주었고 경찰 차일혁총경이 '태극무공훈장'을, 국군의 오동식상사가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한편, 당시 이현상의 은신처인 빗점골 아랫 마을인 의신부락에 살고 있는 정윤균은 이현상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현상부대는 53년에 빗점골에 거점을 두고 있었지요. 내가 속했던 화개면 유격대는 약초 캐는 사람으로 가장해서 빗점골 부근을 드나들며 정황을 살펴보았지만, 이현상의 거처는 도부지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아마 9월15일?)인가, 오후에 남경사 소속 벼락부대(오동식상사의 유격대)가 권총 7자루(?)를 노획하고, 사살한 빨치산의 머리를 베어 포대에 담아가지고 내려오는 것을 의신마을에서 봤지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더니, 빗점골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이동중인 적을 발견하고 교전 끝에 전과를 올린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적 중에는 다리에 총을 맞은 내의바람의 늙은이가 있었는데, 그 늙은이가 태연스럽게 '우리 얘기 좀 하자. 우선 목이 마르니 물을 좀 주고 짧은 총(권총) 찬 사람을 불러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날은 어두어오고 해서 끌고 오기가 곤란할 것 같아 그냥 사살해 버리고 온다고 했어요. 목을 베려고 했으나 잘 잘라지지 않아 마침 옆에 미끈하게 생긴 인물이 있기에 그 쪽이 더 그럴싸해서 그놈 목만 잘라가지고 메고 오는 길이라고 했어요.
나는 벼락부대 사람들과 같이 신흥까지 내겨갔는데, 마침 전투경찰 2연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어 마주쳤지요. 2연대는 이현상의 호위병을 잡아 앞세우고 이현상을 잡으러 나선 길이라고 했어요. 경찰대 사람들은 벼락부대 대원에게 술을 퍼먹여 매수한 다음, 사살자의 머리를 좀 보여달라고 했어요. 2연대의 생포자가 그 머리를 보더니, 이현상이 보좌관이라고 했어요. 결국 부상당한 늙은이가 이현상이란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말은 듣고 2연대가 달려 올라가더니 다음날(9월18일?) 이현상의 시체를 찾아갖고 내려와서는 자기들이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전과 보고를 올린 거지요. 이 때문에 군대와 경찰간에 공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 이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군과 경찰의 기록, 마을주민의 증언등을 종합해보면 결국 이현상의 시체를 두고, 이후 군경사이의 공로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군이 말하는 사살날자인 9월 15일과 경찰이 말하는 9월 18일 사이에 존재하는 3일의 시차는 시체를 수색하고 전공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착오인 셈이다. 처음으로
이현상이 사살된 장소(지리산 빗점골 너들지대)
4. 이현상의 가족들의 삶.
앞서 살펴본 것 처럼 이현상은 전북 금산군 출신으로, 그의 직계 가족은 아내 최문기와 큰딸은 무영(茂永.23년생), 둘째는 외아들 극(剋.27년생) 둘째딸 문영(文永.34년생), 셋째딸이 상진(尙鎭.40년생)이있다. 한때 이현상의 딸이 남한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듯 보인다. 이현상의 가족들은 북한으로 가 그곳에 정착한 것이 북한에서 발간되는 월간지 [금수강산] 10월호에 실림으로서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현상의 외아들 이극은 이현상이 죽기전인 1948년 북한으로 갔으며, 이때 김일성을 만났다. 1992년 10월 7일자, [로동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현상은 남한에서 공산당의 불법화로 박헌영과 함께 평양에 있었고, 가족은 모두 남한에 있었다. 이현상이 빨치산 투쟁을 위해 다시 남으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이현상이 남쪽으로 내려가기 직전, 김일성은 이현상을 만났다. 김일성은 이현상에게 "하고 싶은 말과 부탁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하라"고 했다. 이에 이현상은 흘러내리는 안경을 바로잡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띄엄띄엄 "저의 아들딸 4남매의 앞날을 오직 김일성에게 의탁합니다"고 부탁했다. 이에 김일성은 이현상의 손을 잡으며 "어서 아이들을 보내라, 아들도 보내고 유망한 청년들도 보내라"고 말했다. 이현상이 북한을 떠난 지 두 달 후인 48년 8월, 이현상의 아들 이극과 몇몇 청년들이 평양으로 왔다. 이현상이 먼저 아들만 북한에 보낸 것 이다. 그때 이극은 21살의 청년이었다. 김일성은 이현상의 아들을 만났다.
김일성은 같이 온 청년들과 나이가 엇비슷해 누가 이현상의 아들인지 몰랐다. 김일성이 "누가 이현상 동지의 아들인가"고 물었다. 이극이 정중히 일어나 인사하자 김일성은 "동무가 이현상 동지의 아들 이라. 그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이현상 아들이 "이극"이라고 대답하자 김일성은 "항상 이긴다는 뜻이구먼, 이름이 좋다"고 말했다."
이현상의 죽음이후, 이승만 정부는 이현상의 가족을 찾기위해 노력한 것 같다. 이현상의 남은 가족들은 경찰등의 수색을 피해 갖은 고생을 하다 1953년~54년 사이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현상의 아내 최문기와 세 딸, 그리고 셋째형(이현식)의 아내와 자녀 중 두 아들과 딸이 북한으로 갔으며, 이들이 어떻게 북한으로 갔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현상의 가족들은 북한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물론 그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각별한 지시에 의해서였다.
이현상의 부인 최문기는 72년 사망, 김일성의 지시로 이현상의 가묘가 만들어진 혁명열사릉에 합장됐다. 이현상의 형수는 92년 1백살로 김일성이 직접 보낸 생일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현상의 외아들 이극은 김일성의 직접 지시로 유학을 다녀와 김일성 종합대학 교원 등 여러곳에서 근무했다. 인민사서라는 명예칭호를 받았으며, 정년을 넘겼지만 현재 인민대학습당에서 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큰딸 이무영은 중앙당 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정치부와 노동당 에서 일했다. 지난해 70살을 맞았는데, 김일성이 직접 잔치상을 보냈 다고 이 잡지는 밝히고 있다. 둘째딸 이문영은 혁명유자녀들이 다니는 만경대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중앙의 한 기관에서 일하다가 김일성의 배려로 당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막내딸인 이상진은 대학졸업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의 첫 여성 1등 서기관이 됐다. 이상진은 이 잡지에서 "남편은 대외부문사업 에서 일하고 있으며 자신은 현재 경공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만수대 의사당(국회의사당)방문때, 소개를 맡았던 안내자가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남한에 남아있던 이현상의 어머니 김씨는 "우리 현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만 되뇌이면서 90살이 넘도록 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도 75년 세상을 떠났다. 남한에는 이현상의 사촌 등 몇몇 일가친척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신분을 숨기거 나 이현상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이상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94. 11 이현상과 그 후손들(원희복)' 정리.
한편 그가 태어난 고향 금산군 외부리에서 이현상은 1953년 9월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됐다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아직 외부리에 살고 있다. 동네 어른들의 기억 속에는 물론이고, 면사무소 호적에서도 그는 산 사람이다. 전쟁이후 여러 집 살던 이씨네가 풍비박산 흩어져 나갔고 "이제까지 아무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해당 면사무소의 설명이다. 이같은 사실은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가 많은 만큼 어디에선가의 "생존설"까지 간혹 제기되게 한다. 그가 살아있다면 2000년 현재 95세가 됨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 시절을 보내면서 그의 얘기는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부분이다. 그가 태어난 고향인 충남 금산군 외부리(우리말로 바깥 가마실)에서는 그러나 그를 큰 사람으로 칭송한다. 우익이 자리한 내부리와 좌익동네 외부리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남과 북의 교전이 계속되면서 "톱질 당했다."는 표현만큼 상처가 많은 동네이다. 지서에 끌려가 맞았고, 죽움을 당했다. 한때는 과부와 외아들이 많은 동네라 했다. 또 빨갱이 동네, 모스크바로 불리며 "6.25 끝나고 숨도 못셨다."는 것이 동네 토박이 양현오씨(68)의 증언이다. 그럼에도 "큰 사람이 나다보니 아랫사람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지."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에 원망은 없다."는 게 외부리 정서이다. 전쟁후 한동안 이씨의 어머니와 형수가 살고 있을 땐 군수가 바뀔 때마다 인사를 다녀갔다는 주민들은 얘기를 들어보면, 금산 일원에서 이현상은 이단아 이기 앞서 지역의 영웅이었던 듯하다. (중략)
그러나 그에 대한 얘기는 유력한 증언자가 될 산중에서 측근들이 거의 죽었거나 찾아내기 어려워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토벌군 쪽의 기록도 가지각색이다. 이후 이씨의 가족은 아들 극(27년생)과 아내 최성녀 씨가 월북해 평양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을 뿐. 정작 본인은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주검조차 버림받은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후대 사람들의 평가만큼이나 지금은 그의 죽음을 정리하는 사람조차 없다. 누구도 앞서 말하기 꺼려하던 일련의 사건들. 50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6월이 되면 종결되지 않은 한반도 역사는 되살아난다. 정리되지 않은 그의 호적처럼......
- 이상 2000년 5월 18일 '엄은화의 대전 문화찾기(중도일보)' 중에서
5. 인간 이현상
앞서 살펴본 것 처럼, 이현상의 생애와 투쟁, 죽음은 아직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들을 살펴볼 때, 이현상은 투철한 항일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혁명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지도자임에 분명하다.
먼저 그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며 끝까지 투쟁한 독립운동가였다. 그와 함께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이승엽등이 한때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거나 협조하는 모습을 보인데 반해 그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면은 아니지만, 그는 상당히 민족적 정서를 가진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에게 있어 진정한 해방은 일제로부터의 조국독립과 계급해방이 함께 하는 것이었다.
또, 그는 조선공산당, 후에는 남로당이라는 해방전후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 혁명가였다. 당시 공산당에는 남로당과 북로당, 해외파와 국내파등 수많은 계파간의 갈등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변화해갔다. 이런 환경속에서 이현상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며 지리산으로 찾아들었고 지리산에서 죽어갔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이견들이 있지만, 그는 죽기전에 '제5지구당 위원장'직을 박탈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 그는 이런 결정을 수용하였으며 조선공산당 내부의 갈등속에서 정해진 길을 걸어간 것이다.
이현상에 대하여 이태가 남긴 '그는 분명 코뮤니스트였지만, 철저한 이론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라는 평가를 통해 그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추측해볼 수 있다. 또, 그가 죽을 때 가졌던 물품중 '염주'가 있었으며 어느정도 '불교'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빨치산 대장으로서 이현상은,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부대를 지휘하고 전투를 치러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남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이래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앞서서 부대를 지휘했다. 예리한 판단력과 전술을 갖춘 유격전 전문가였다.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그 어떤 문제를 놓고도 장황하게 말하는 법이 없고, 당 이론에 관한 것이면 안 읽은게 거의 없으면서도 토론을 즐기지 않았다는 분.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 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분.
- 조정래 <태백산맥> 10권 중에서...
또 그는 대원들에게 언제나 겸손하고 친절한 대장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유격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살아남아 민간에 무슨 신통력을 가진 영웅처럼 전해지기도 했지만, 실제 그는 과묵하고 진지한 표정을 잃지 않는 중년신사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현상은 엄혹한 시대를 살다간 '독립운동가'였으며 '혁명가'였고, 전쟁에 있어 용맹하고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 겸손한 '빨치산의 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시대가 준 것은 끝없는 시련이었고, 결국은 비극적인 죽음뿐이었다. 그는 엄혹한 시대를 자신의 신념으로 끝까지 밀고간 영웅이었고 동료와 부하들의 아픔을 함께한 따듯한 영웅이었다. 험준한 능선에서 고독한 표정으로 서있는 이현상의 모습은 '지리산'속에 서있는 또하나의 '지리산'인 것이다.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을 떠난 적이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 이현상이 남긴 詩
6. 참고자료.
- 이태 <남부군> <비극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 엄은화의 대전문화찾기(중도일보) http://my.dreamwiz.com/omana21
- 뉴스메이커 94년 11월회 '이현상과 그 후손들' (원희복)
- 대하르포 지리산 1994, 최화수 http://net-in.co.kr/dimout/
- 기타 각종 지리산관련 홈페이지들.
- 관련도서
조정래 장편소설 <태백산맥>
이병주 장편소설 <지리산>
권운상 장편소설 <녹슬은해방구>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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