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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임진각 라이딩

by 한국의산천 2011. 5. 22.

분단의 아픔이 서려있는 임진각 라이딩 [2011 · 5 · 22 · 일요일 · 날씨 맑음 멤버 : 참교육님 한국의산천 2명] 

 

땀이 나는 얼굴을 스치는 오월의 푸른 바람이 참 좋았던 하루 

 

임진각

임진각 국민관광지는 경기도 파주시에 소재한 관광지이다. 임진각 본관뿐만 아니라 평화누리공원, 평화의 종, 망배단 등의 소재지 일대를 통칭하고 있다.

통일대교로 개성과 연결되기 전에 국도 제1호선 및 통일로의 종점이었다. 또한 현재 경의선의 실질적 종착역인 임진강역이 위치해 있다. 실제 경의선의 종착역은 도라산역이지만, 민간인출입통제구역내에 위치해 있어 대부분의 열차는 임진강역이 종착지이다.
역사가 임진각 근처에 위치해 있어 흔히 임진각역으로도 불리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며, 정식 명칭은 임진강역이다.
주요 행사매년 망배단에서 실향민들이 설날과 추석 때 모여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2~3월 중에는 '임진강 민속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이 외에도 매년 '파주 장단콩 축제' 등이 개최되었으며, 한시적으로 '2006 세계평화축전', 'MBC 가요대제전' 등의 행사도 개최되었다.

 

▲ 간절하고 애절한 사연과 소원이 고스란히 리본에 적혀 임진각 철책에 붙어있다 ⓒ 2011 한국의산천

 

▲ 우리는 달린다. 왼쪽부터  한국의산천 & 참교육님 ⓒ 2011 한국의산천    

  

 

 

 

 

▲ 몸과 얼굴을 스치는 오월의 푸른 바람이 참 좋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 임진각에 도착하여 갈증이 나기에 폴라포 2개를 사서 먹었습니다. 가슴속까지 시원한 그맛 정말 좋아요 ⓒ 2011 한국의산천

 

 

 

 

▲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곳이기에 다시 길을 떠난다 ⓒ 2011 한국의산천

우리는 공간들을 하나씩 지나가야 한다. 어느 장소에서도 고향에서와 같은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하늘을 보면 하늘이 마음에 펼쳐지고
꽃을 보면 꽃이 내 안에서 피어난다.
바람을 안는 이 새가 되어 허공을 날고
구름은 품은 이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신다.

 

 

▲ 조용하게 인기척없는 산하를 이리저리 흐르는 철책 너머에 있는 임진강 ⓒ 2011 한국의산천 

임진강은 함경도, 황해도의 내륙 산악을 파행하며 내려와 비무장지대 구간을 S자로 흘러서 경기도 연천군 왕진면 고잔하리 배터거리(현재 필승교가 있는곳)에서부터 남한땅으로 유입한다.

 

강물에 마음이 홀린 사람이 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유(流)이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연(蓮)이다. 맹자에 나온다. 끝까지 가버린 사람들의 뒷소식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물을 따라간 사람들의 실종 사건은 영구 미제다.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강은 상류와 하류 양쪽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상류의 끝은 시원(始原)이과, 하류의 끝은 소멸이다. 물은 시원에서 소멸 사이를 잇대어가면서 흐른다. 하류의 소멸이 상류의 시원을 이끌어내서, 신생은 소멸 안에 있다. 그러니 흐르는 강가에서 유와 연은 흐르고 싶은 인간의 자기 분열일 뿐, 강 물속에는 다만 진행중인 흐름이 있을 뿐이다. 

 

 "흘러가는 것은 저러하구나"라고 공자는 강가에서 말했다. 흘러가는 것은 그러하다. 젊은 날에는 늘 새벽의 상류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제는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류의 저녁 무렵이 궁금하다. 자전거는 하류로 간다. 하류의 끝까지 가겠다. 거기서 새로운 시원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맹자의 책을 덮어두어도 좋은 것이다. -김훈-

   

▲ 방촌영당과 월헌사를 배경으로 ⓒ 2011 한국의산천 

반구정 입구에 들어서면 방촌 황희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방촌 영당과 월헌사가 있다.

 

▲ 반구정 옆에 서있는 앙지대 ⓒ 2011 한국의산천

 

앙지대(仰止臺)

앙지대는 반구정이 있던 원래 위치에 세워진 정자다. 1915년 반구정을 현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현위치에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고 이름하였다.   

앙지문 상랑문에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仁)아라는 뜻으로 취했다" 라고 적고 있다.

 

반구정에서 내려오면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이 있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년(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반구정 옆에 앙지대와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영당은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 반구정에서 손이 닿을 듯 내려 보이는 임진강 ⓒ 2011 한국의산천

나라 안에서 일곱번째로 긴 임진강은 함경남도 마호비령에서 부터 시작되어 물살이 어느강보다 빠르고 그 강가에 톱날처럼 깎인 바위가 늘어서 있어서 경치가 유달리 아름답다. 그래서 당고(唐皐)라는 옛 시인은 "뱃놀이는 임진에만 알맞다"고 말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어질고 슬기로우며 청렴결백했던 명정승 황희 (黃喜) 선생은 임진강가의 반구정에서 인생을 마무리하였으며, 율곡 이이 역시 이곳에 묻혔다.  

이곳 가까이에 있는 임진 나루는 서울에서 개성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의 나루였기에 임진진을 두었으며 병자호란때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이 강을 건너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간 슬픈 역사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 청백리(淸白吏)의 얼이 깃든 곳 반구정 ⓒ 2011 한국의산천

 

방촌 황희 ( 厖村 黃喜, 1363~1452) 

본관장수(長水) 호방촌 별칭자 구부(懼夫), 초명 수로(壽老)

출생지 황해도 개성(開城) 주요저서 <방촌집>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서른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70여명의 고려 유신(遺臣)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문동의 고려 유신들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풀 뿌리와 나무 껍질로 연명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고 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갖은 방법으로 이들을 설득했으나 끝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흔히 말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결국 태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협박하기에 이르고,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고려 유신들은 충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 것 역시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황희가 조선 조정에 홀로 출사(出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청백리 (淸白吏) 란?
관직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임금의 재가를 얻어 의정부에서 뽑아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다.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선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총 219명이 배출되었으며, 대표적 인물로는 황 희,맹사성, 이원익, 이현보,이황,김장생,이항복 등이 있다. 

 

▲ 참교육님 뒤로 보이는 앙지대 ⓒ 2011 한국의산천

임진 나루를 건너면 옛 장단 도호부인 장단에 이른다. 장단을 지나서 40리를 가면 고려의 도읍지 였던 개성이 나온다. 개성은 개성인삼과 개성상인의 본고장이다.

 

▲ 반구정 ⓒ 2011 한국의산천

 

 

◀ 몇해전 집사람과 딸과 함께 차를 타고 드라이브 왔던 곳인데 지금은 자전거를 타고 먼길을 왔다. ⓒ 2011 한국의산천  

 

 

반구정(伴鷗亭)   

소재지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

경기문화재자료 제12호.

 

황희(黃喜:1363∼1452)가 1449년(세종 31)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449년(세종 31) 황희(黃喜)가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전국 8도의 사림들이 선현을 추모하는 승적(勝蹟)으로 수호하여 내려오던 곳이었는데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그후 황희의 후손들이 복구하였으며, 1967년 6월 옛 모습으로 다시 개축하였다. 문산의 임진강변에 자리하여 앞에는 널찍한 모래톱이 있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

 

 

 

 

 

 

방촌 황희 ( 厖村 黃喜, 1363~1452)

고려말 조선초의 대표적인 정승이자 청백리로 개성(開城) 가조리 출생으로 초명은 수로(壽老). 호는 방촌(厖 村). 본관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시호 익성(翼成)이다.

 1363년 (공민왕 12년)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열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전한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 사헌감찰(司憲監察), 우습유(右拾遺), 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형조, 예조, 이조 등의 정랑(正郞)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 병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南原)에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어느 날 황희는 집에 온 손님을 맞아 조촐하게 술상을 차려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아이 몇명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며 황희의 상투와 수염을 잡아당기고 상 위에 놓인 음식까지 마구 집어 먹는 게 아닌가! 그러나 황희는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아이고, 이놈들 보게. 오냐, 오냐." 하면서, "손님이 계시니 너희들은 나가 놀아라." 하고 아이들을 달래서 내보내고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화를 계속했다.

 

손님은 내심, '정승 집에서 아이들을 버릇없이 키우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대감께서는 손자들을 굉장히 귀여워하시나 봅니다." 하고 짐짓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황희는 "아까 그 놈들은 우리 집 노비의 자식들인데 나를 아주 잘 따른다네. 결례가 되었다면 미안하이." 하고 대답했다. 

 

황희의 말을 들은 손님은 종의 자식에게까지 친부모처럼 자상한 그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복했다고 한다.

 

또 하루는 당대 명필 중의 한사람인 이석형(李石亨)이 황희의 집에 들러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황희가 책 한권을 꺼내 놓고 새로 표지를 만들었으니 제목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석형은 몇번 거절을 하다가 황희가 하도 정중하게 부탁하는지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제목을 써 주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저 혼자 놀다가 방금 이석형이 제목을 써 준 책 위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이것을 본 황희는 노여운 기색도 없이 아랫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직접 방바닥과 책에 묻은 오줌을 닦았다. 그러고는 아이의 옷을 벗겨 둘둘 말아 아이의 손에 쥐어 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이제 엄마한테 가서 옷을 갈아 입혀 달라고 하거라." 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서 내보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석형이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자, 황희는 미안한 개식으로 이석형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방문 밖에서 여종이 황망한 목소리로 죄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황희의 방에서 오줌을 싼 아이는 제 어미가 일하는 틈에 그 방으로 들어온 종의 아이였던 것이다. 황희는 사죄하는 여종에게 오히려, "철없는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하고 따뜻한 말투로 위로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석형은 황희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져 그의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고 한다.

   

사실 황희는 천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천역(賤役)을 가볍게 해 주려는 방안에 골몰하였고, 면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이렇듯 귀천을 따지지 않고 타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양반들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황희는 당시 노비 출신 중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관직에 발탁하기도 했는데, 조선이 업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던 것이다.

 

실제로 황희는 자기 집에서 부리던 어린 노비가 학문에 자질을 보이자, 그 아이를 면천시키고 경제적 도움까지 주면서 이르기를, "너는 열심히 공부하면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있으니,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학문을 연마하여라. 그리고 지금부터 너와 나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니, 나중에 혹 만나게 되더라도 절대 아는 체를 하면 아니 된다." 하고 다짐을 하여 내보냈다.

 

십 수년 후, 그 노비는 과거를 보러 나왔다가 마침 그곳에 시험관으로 나와 있던 황희와 만났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서 황희에게 자신을 밝히고 인사를 하려고 하자, 그를 알아본 황희는 시험관에게 잘 보이려고 인사를 하는 것은 받아 줄 수 없다면서 그를 꾸짖고 뿌리쳐 버렸다. 이것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의 10년 공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황희의 깊은 뜻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노비 출신의 젊은 선비는 시험에 급제하였으며, 황희는 그를 다로 불러내어 "다시는 나를 아는 체하지 말 것이며, 나도 너를 잊었노라. 그러니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정진하여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일에 노력을 다하라." 하고 거듭 당부한 후 돌려보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일화

사적으로는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로 일과했던 황희였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엄격하기가 서릿발 같았다.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6진을 개척한 공로로 병조판서에 오르자, 어느 날 황희는 김종서를 축하하러 병조에 들었다. 그런데 김종서는 황희를 보고도 그냥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김종서가 미처 자신을 못 본 것인지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그의 태도에는 자만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에 황희는 김종서를 수행하던 병조의 관리들에게 "너희 판서께서 앉아 계신 의자의 다리가 잘못된 것 같다. 한쪽이 기울어졌으니 속히 고쳐 드리도록 해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김종서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서는 황희의 발 앞에 엎드려 "소인이 미처 대감께서 오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라옵니다." 하고 사죄하였다.

 

사실 김종서보다 먼저 북방을 살피고 돌아온 사람은 칠순에 가까운 황희였으며 세종에게 6진 개척의 적임자로 김종서를 추천한 것도 바로 황희였다. 황희는 김종서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그릇임을 알고 그를 중용하도록 건의하였으나, 김종서의 성격이 다소 거칠고 자신감이 지나친 것을 경계하기 위해 한바탕 혼을 내 준 것이다. 

 

김종서는 훗날 이때의 일에 대하여, "내가 한창 북방을 경영할 때는 오랑캐의 화살이 코앞에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는데, 영상(領相)이 큰소리로 꾸짖었을 때에는 오금이 저리고 등에서 진땀이 다 흘렀다." 하고 회고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의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정승의 지위에 24년간, 그 중 영의정에 18년간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을 쌓았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세종을 보필하며 명정승으로 이름을 떨친 황희는 서얼(庶孼·첩의 자손) 출신에 세종의 왕위 등극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세종은 탄핵 상소가 끊이지 않은 황희를 감쌌고, 황희는 탁월한 사태파악 및 인재 발굴 능력과 함께 국왕과 신료 사이에서 저울추 같은 중용의 정치로 세종에게 보답했다.

 

 

황희 정승의 일화 (황희 정승의 일화는 기념관에 전시되어있습니다)

 

황희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여름날, 시골길을 지나던 황희는 잠시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때마침 한 농부가 누런 소와 검은 소 두마리를 데리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희는 뙤약볕에서 고생하는 농부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잠시 쉬었다 하라며 말을 건냈다. 농부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황희는 별 뜻 없이 이렇게 물었다.

 

"두마리의 소 중에서 어떤 놈이 더 일을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황희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황희는 뜬금없는 농부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곡절이 있겠거니 하고 농부를 따라갔다. 밭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이르자, 농부는 황희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누런 놈은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는데, 검은 놈은 꾀가 많아 다루기가 힘들답니다."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줄 알고 따라온 황희는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다.

"아니 노인장,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된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말씀하시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저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안답니다. 내가 만일 아까 그 놈들 근처에서 이 얘기를 했다면 그 놈들이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의 말을 짐승이 알아들으랴 싶지만, 나는 내 집일을 애써 해 주는 그 놈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

 

농부의 사려 깊은 행동에 감동을 받은 황희는 그의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했다고 한다. 그냥 가볍게 흘려 버릴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인생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황희는 공적인 일에는 엄격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온후하고 자상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관련된 일화로, 하루는 어린 종 둘이 다투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황희와 마주쳤다.

민망해진 그 중 하나가 상대방이 잘못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일렀다. 어린 종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들은 황희는, "그래, 네 말이 옳구나." 하고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다른 종은 주인이 상대의 편을 드는 줄 알고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렇다면 네 말도 맞구나." 하고 둘을 타일러 돌려 보냈다. 이때 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인이 타박하기를, "아니, 대감께서는 이 놈도 옳다, 저 놈도 옳다 하시니 어찌 그러십니까? 옳고 그름을 확실히 밝혀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정승께서 그리도 사리가 분명치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황희는 "맞소. 부인 말씀도 참으로 맞소." 하고 대답하여, 그만 부인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고 한다. 

집에서 부리는 어린 종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황희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젊은 시절 깨달은 삶의 자세를 일생 동안 잃지 않고 지켜온 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황희의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일화는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 자전거를 타면서 바람을 너무 많이 들이 마셨나? 배가 조금 부었네 ⓒ 2011 한국의산천

 

 

▲ 화석정 ⓒ 2011 한국의산천

임진강이 내려보이는 산위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 뒤로는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며 임진강의 동쪽부터 서쪽 강의 끝까지 한눈에 내려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다.

화석정은 풍광 좋은 임진강을 내려보고 있으며, 임진왜란때에 선조임금은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이 화석정에 불을 놓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80년만에 복원했으나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파주 유림들이 다시 지었다.   

  

화석정 

경기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

시대 조선시대
크기 정면 3칸, 측면 2칸
분류 누각

 

이 정자는 율곡이 작시, 연구와 묵상을 하던 곳이다. 1974년 9월 26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른 건물이다.
 
원래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다. 그후 1443년(세종 25) 율곡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강평공 이명신이 세운 것을 1478년(성종 9)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숙함의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때 재상 이덕유의 별장인 평천장의 기문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이이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 황홍헌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화석정에는 율곡이 이른바 ‘八歲賦詩’(팔세부시:8살때 지은 시)를 지은 곳이라는 만큼이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율곡은 花石亭(화석정)을 고치면서 관솔을 썼고, 이곳에서 默想(묵상)을 할 때면 항상 기름걸레로 기둥과 바닥을 닦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8년 전, 나라가 어려울 때 열어보라는 봉서를 남기고 서거하였다. 당시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임진년(壬辰年) 4월 그믐날, 퍼붓는 비를 맞으며 선조의 몽진(蒙塵) 행렬이 임진강에 도달한다. 비바람 때문에 등불을 밝힐 수 없어 지척을 분간할 길이 없었다.

이때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은 율곡의 유언을 떠올리며 화석정에 불을 놓는다. 관솔에 기름을 먹여두었기 때문에 억수 같은 비에도 훨훨 타올라 선조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전한다. 

 

율곡의 예지력을 보여주는 또 한편의 일화가 있다. 

 

이항복에게 ‘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좋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것이 8년 전.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딱한 처지에 놓였다.

이여송이 이끄는 4만 원군이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 이때 접빈사로 나선 이항복은 외교 관례상 감읍(感泣)하는 표정을 지어야 할 처지였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때 이항복의 뇌리에는 율곡 선생의 가르침이 전광석화처럼 스쳤다.

일부러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넣고 가니 저절로 눈물이 났다. 상대방의 눈에는 감격해 맞이하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율곡의 가르침을 뒤늦게 깨달은 회한의 눈물까지 겹쳤으니 말이다.

 

자운서원에 있는 율곡이이 신도비는 이이 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1631년 (인조9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이항복 선생이 글을 짓고 신익성 선생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은 김상룡이 썼다.

 

율곡 이이 선생은 파평 율곡리 출신이다.

과거를 아홉번이나 연거푸 장원한 천재적인 이이 선생은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6살까지 그곳에서 지내다가 , 그 후 아버지의 고향인 이 동네로 옮겨와 성장했다.  

이곳 파평 율곡리는 밤나무가 많은 동네인데 그 동네 이름을 따서 이이는 율곡(栗: 밤나무 율, 谷: 골짜기 곡)이라는 호를 붙였다.

 

 

율곡 이이(1536~1584)

조산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淑獻),호는 율곡(栗谷),석담,우재. 본관은 덕수로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출생했다.   

1564년 (명종14년) 생원시 식년문과에 장원한 이후 호조,예조,이조좌랑,지평 등을 거쳐 부교리,청주목사,직제학,대사간,대제학,형조판서,우참찬,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조선 유학계에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학자로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특히 학문을 민생문제에 직결시키는 경세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당쟁의 조정,10만대군의 양성 및 대동법, 사창(社倉) 실시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와 선조묘정에 배향되었고 자운서원외 전국 20여개 서원,사우에 배향되었다.

 

 

 

서두르지 말라 어차피 흘러가는 세월

그간 어떻게 살아왔나 이제는 정상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갈 수있는 만큼 달리고 오를만큼 오르는거야. 지쳐 더이상 오르지 못하겠다면 돌아서며 그곳이 자기가 선택한 종착지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 삶 또한 그렇게 살아야해. 자신의 영혼이 잘 따라오나 뒤를 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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