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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서산기행

by 한국의산천 2011. 2. 15.

제가 자주 찾는 곳 중에 또 한곳 충청도 그 중에서도 서산

이 글은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서산편을 제가 촬영한 사진과 함께 재 구성한 글입니다. [정리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 2000년에 개통된 총길이 7,310m의 서해대교 ⓒ 2011 한국의산천 

서해대교가 개통되며 충청도가 가까워졌다. 그렇기에 이곳 저곳 이산 저산 충청도의 거의 모든 산을 배낭 메고 오르고 차를 타고 문화유적지 답사와 사진 촬영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넘고 들판을 달렸습니다. 그중 서산 일대를 소개합니다. 

 


천수만과 가로림만, 그리고 금북정맥이 빚은 철새의 고향
"백제의 미소 반가운 ‘서산’ "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황봉(1,058m)에서 갈라진 금북정맥이 금강 이북 땅의 근간을 이루며 서해로 가다가 세력을 다하기 전에 예산과 서산 사이에 힘을 쏟아 빚은 산이 바로 가야산(伽倻山·678m)이다. 전통적으로 이 가야산 둘레의 여러 고을을 내포(內浦) 지방이라 불렀고, 이 일대를 내포평야라 불렀다.

 

▲ 삼준산에서 바라 본 가야산 ⓒ 2011 한국의산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현을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구석에 막히어 끊기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병자년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넉넉해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고 적고 있다.

 

내포지방은 딱히 눈길을 끌 만한 빼어난 절경은 없어도 부드러운 구릉과 들판, 풍요로운 갯벌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그 순박한 말씨처럼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충청도 중의 충청도’로 꼽히면서, 오래 전부터 살기도 좋고 인심도 좋은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허나 이중환의 지적대로 만(灣)에 길이 끊겨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2000년 총길이 7,310m의 서해대교가 개통되자 모두 옛말이 되고 말았다. 내포지방의 대표 고을인 서산도 그렇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 넓게 펼쳐진 내포평야 ⓒ 2011 한국의산천

충청도는 전라도와 경기도 사이에 있다.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에서 첫글자 한자씩 따왔다고 한다. 서쪽은 바다에 닿았고 동쪽의 동북편 모퉁이가 되는 충주,제천,단양 등은 강원도 남쪽에 불쑥 들어가 있으며 그 아랫녘은 백두대간을 경계로 경상도의 접경지역이다. 금북정맥과 금남정맥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일부분은 금북정맥 북쪽에 있기 때문에 경기도와 가깝다. 

  

금북정맥은 칠현산에서 부터 시작되어 안성의 서운산과 천안의 흑성을 지나 국사봉에서 광덕산과 치유령으로 이어진다. 청양 일월산까지 내려온 금북정맥이 오서산, 보개산, 덕숭산쪽으로 북상하며 가야산에서 우뚝 솟은 뒤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태안반도로 향한다  성황산, 백화산을 지나 태안반도로 이어진 금북정맥은 반도의 끝 안홍진에서 서해로 몸을 숨긴다.

 

이중환은 "충청도에서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 라고 했다. (내륙 깊숙히까지 만이 들어와 있기에 내포라고 부른다)

가야산 앞뒤에 있는 예산, 당진,서산,홍성 등을 열 고을을 일컬어 내포라고 부른다. 지세가 산모퉁이에서 멀이 떨어져 있고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차례의 난리때에도 이곳에는 적군이 쳐들어 오지 않았다 한다. 이중환이 살았던 당시에는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고 땅이 기름지고 넓기 때문에 여러 대를 이어가는 사대부 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 백제의 미소가 있는 용현리로 들어서기 전 마음 입구에 서있는 미륵불 ⓒ 2011 한국의산천

이 돌부처는 마을앞의 고풍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그곳에 있던 것을 마을 입구로 옮겨온 것이다. 마을 입구에 서있으면서 마을 안쪽을 향해 서있는것이 이채롭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나들목으로 나와 덕산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를 타고가다 상왕산(307.2m)과 수정봉(453m) 사이의 계곡으로 들어서면 ‘백제의 미소’가 반긴다. 먼저 용현계곡 입구의 돌무지 위에 자리잡은 석상이 눈길을 끈다.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겨있는 석상은 머리에 관(冠)을 썼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불상이 분명하다. 고려 말기의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그런데 왜 여기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일까. 그것도 마을 입구 서낭의 돌무지 위에.

이 석상의 원래 자리는 지금보다 좀더 하류인 고풍리다. 1972년 고풍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하게 되자 지금의 자리로 이사왔다.

 

민간신앙의 상징인 서낭당 돌탑 위에 불교의 석불을 세워 놓으니 이 석상은 미륵불과 장승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그래서 ‘미륵석장승’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민간신앙과 불교가 어울리는 장면을 보여주는 석상인 것이다. 그런데 보통, 마을 입구의 장승은 길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있거나 마을 바깥을 향해 서있게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이 석상은 입구쪽에 등을 보이고 있어 찾아오는 길손을 모른 채 하는 형국이다. 가까운 덕산 상가리의 미륵불은 남연군묘를 보기 싫어 등을 돌리고 있다는데, 두 석상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이 석상의 시선은 자신의 뿌리인 보원사지와 서산마애삼존불을 향하고 있으니, 이 또한 크게 흠잡을 일도 아닌 성싶다.

 

▲ 가야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남연군묘 ⓒ 2011 한국의산천

가야산 능선을 배경으로 옥녀봉 줄기에 자리잡은 최고의 명당이라 일컫는 2대에 걸쳐 황제를 배출한 남연군 묘. 본래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지관이 점지해준 묘자리에는 금탑이 서 있었다.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며 스님들을 쫓아낸 후 이곳에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훗날

대원군은 이건창(李建昌)에게 장례 치를 때의 일을 말하길 " 탑을 쓰러트리니 그속에 백자 두개와 단지 두병 , 그리고 사리 세알이 있았다. 사리는 작은 머리통만 구슬이었는데 매우 맑게 빛났다.  물속에 잠겼지만 푸른 기운이 물속을 꿰뚫고 끊임없이 빛나는 것 같았다." 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조선왕조는 500년의 사직에 막을 내리게 된다.

 

남연군의 묘는 고종 5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불만을 품은 독일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했으며, 천주교도들은 그 일로 인하여 또 한차례 수난을 겪어야 했다.  

 

남연군 묘의 지세는 한마디로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은 모두 다 갖추었다. 뒤로 가야산 서편 봉우리에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는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오른쪽으로 옥양봉과 만경봉이 덕산을 거치면서 30리에 걸쳐 용머리에서 멎는 지세가 청룡이 되며, 왼쪽으로 백호지세는 가사봉,가영봉을 지나 원화봉으로 이어지는 맥이 금천봉 원봉을 감싼 자리다.

 

▲ 가야사를 불태운 후 돌아앉았다는 돌부처 ⓒ 2011 한국의산천

 

안동김씨의 세도에 밀려 젊은 시절을 파락호(破落戶)로 불우하게 보낸 야심가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오랜 시절을 공들여 시작한 일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南延君, ?~1822)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흥선군은 당대의 지관인 정만인(鄭萬仁)에게 명당 자리를 부탁하여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를 얻는다. 우선 그는 임시로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를 탑뒤의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때 마지막으로 옮겼던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고, 그 상여가 중요민속자료 31호로 지정되어 남은들에 보존되어있다.   

 

이곳 명당으로 이장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고,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런데 그 명당터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지관이 점지해준 묘자리에는 금탑이 서 있었다.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며 스님들을 쫓아낸 후 이곳에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절은 폐허가 되고 금탑만 남는데, 탑을 헐기로 한 날 밤에 네 형제가 똑 같은 꿈을 구게 된다. "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았으려 하느냐. 만약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면 내 너희를 용서치 않으리라 "

 

겁에 질린 형들은 모두 그만두기를 원했으나 대원군은 " 그렇다면 이 또한 진실로 명당이다". 라고 말한뒤 탑을 부수자 도끼날이 튀었다. 이에 대원군이 " 왜 ..나 라고 왕의 아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가? "라고 소리치자 도끼가 튀지 않았다고 전한다.  정만인의 예언대로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었으며 고종,순종 등의 2대 에 걸쳐 황제를 배출한다.

  

▲ 가야사를 불태운 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앉았다는 미륵.  ⓒ 2011 한국의산천

돌아서있는 미륵상 뒤편으로 남연군묘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로 멀리 가야산 능선과 석문봉이 하늘금을 그리고 있다

 

마애불을 조각하던 석공이 쉬었을 용현계곡의 가을빛이 제법 짙다. 절경은 아니지만 무더운 여름이라면 ‘백제의 미소’를 만나고 내려온 탐방객들이 맑은 계류에 잠시 발을 담그고 땀을 식히고 가는 곳이다. 마애삼존불은 인암(印岩)이라 불리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흔히 마애불은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이 마애불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계곡 안쪽에 자리 잡았다. 그런 탓에 1,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조용히 숨어 있다가 1959년에야 발견되었던 것이다.

 

▲ 백제의 미소가 가득한 삼존마애불상 ⓒ 2011 한국의산천

 

역사적으론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이라는 평가도 받는 모양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빼어난 조각솜씨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주불인 여래입상의 미소는 부드럽고 푸근하다. 어찌 보면 장난스레 웃는 것 같기도 하다. 오른손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이요, 왼손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여원인(與願印)이다. 이 불상을 제작할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에 밀리면서 국가적 위기에 빠져있었다. 허나 여래입상의 넉넉한 미소에서 백제의 재부흥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던 옛 백제인들의 희망이 엿보인다. 마애불은 미소 지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으니 너무 두려워 말라!’

 

‘백제의 미소’를 뒤로한 뒤 서산, 해미 선비들이 놀러와 시를 짓던 방선암(訪仙岩)을 지나 상류로 1.5km 오르면 계곡이 한껏 넓어지며 펑퍼짐한 들녘이 나온다. 보원사(普願寺)터다. 폐사된 절터만큼 쓸쓸한 게 또 있을까. 잡초 우거진 황량한 터에 덩그마니 서있는 석탑과 당간지주 등은 보는 사람의 심사를 쓸쓸하게 만든다. 이런 감정은 자연의 무대장치가 완벽한 늦가을에 더욱 고조되게 마련이다.

 

▲ 현재 발굴이 한참 진행중인 보원사터ⓒ 2011 한국의산천

 

땡감 하나 달려있지 않은 늙은 감나무 너머로 바라보는 절터는 정말 스산했다. 최대 전성기인 고려 초기엔 으리으리한 전각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넘쳐나는 샘물로 승려와 길손의 목젖을 적셔주었을 석조는 깨어진 채 한쪽에 뒹굴고 있다. 가을바람 싸늘하게 불어대는 이 황량한 들판에서 한때 1,000명이나 되는 승려가 머물렀던 흔적을 찾긴 쉽지 않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세워져 있는 당간지주 너머로는 5층석탑이 보인다. 이 석탑은 고려 때 작품이면서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곳이 백제의 옛 땅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터 중간엔 피라미 헤엄치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방화(防火)를 위해 시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징검다리가 놓여있지만 한때 다리와 누각이 세워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그렇다면 5층석탑 기단에 새긴 팔부중상(八部衆像) 다듬는 솜씨를 봐서 제법 화려했음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상상으로 그려보는 보원사는 이렇듯 대단한 절집인데, 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하니 더욱 기이하다.

 

▲ 상왕산 개심사 ⓒ 2011 한국의산천

상왕산 기슭의 개심사(開心寺)는 언제나 조용하다. 답사 열기 때문에 제법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음에도 아늑한 맛은 한결같다. 거의 완공된 일주문을 지나면 숲길 입구에 자그마한 표석 두 개가 반긴다. 왼쪽엔 세심동(洗心洞), 오른쪽엔 개심사 입구(開心寺 入口)라고 새겨져있다. ‘마음 씻는 골짜기’ 세심동의 돌계단은 아이가 혼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낮다.

 

 

또 굽잇길에선 절묘하게 태극 문양으로 계단을 휘어 쌓았다. 비록 짧은 길이지만 이처럼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사람이 걷기에도 편한 길도 흔치 않다. 걷다보면 마음이 반쯤 열린다. 계류의 수량이 많지 않은 게 아쉽지만, 홍송(紅松) 들어찬 솔숲의 돌계단 길은 이런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해주고도 남는다.

 

그 길 끝에 연못이 있다. 경지(鏡池)다. 풍수상 뒷산인 금북정맥의 상왕산(象王山·307.2m) 코끼리가 목이 말라하니 물이 떨어지지 말라고 일부러 파놓은 비보(裨補) 연못이다. 기(氣)를 모으는 역할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원 조성법의 하나로 경치를 끌어들이는 인경(引景)이 돋보인다. 하늘의 구름과 앞산의 숲과 꽃을 수면으로 가깝게 하는 것이다. 봄이면 신록이 반갑고, 여름이면 붉은 배롱나무 꽃 그늘 아래 수련이 말간 얼굴을 내밀어 좋고, 오늘 같은 늦가을엔 붉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 정취가 제법이다.

 

▲ 좁은 통나무 다리를 건너면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듯한 개심사 앞마당에 자리한 경지(鏡池) ⓒ 2011 한국의산천

 

수면 위에 걸린 외나무다리를 건너 계단을 올라 좁다란 해탈문을 지날 때면, 어느새 마음의 문이 거의 열린다. 개심사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절집이다. 1941년 수리 당시에 1484년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나왔는데, 바로 그 해에 지어진 대웅전은 다포계와 주심포계 양식을 함께 갖춘 건물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개심사는 전망이 아주 빼어나진 않아도 금북정맥의 험하지 않은 산세와 내포의 넉넉한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절집이다. 과장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내포 사람들의 심성을 그대로 닮았다. 무엇보다 심검당(尋劍堂)은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살린 기둥이 자연스런 파격미를 드러낸다.

 

▲ 봄이면 겹벚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꽃동산 개심사 ⓒ 2011 한국의산천

 

▲ 자연 그대로의 휘어진 나무를 사용하여 지어진 심검당(尋劍堂) ⓒ 2011 한국의산천

심검당이라는 이름은 "칼을 찾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칼은 무명을 끊는 지혜의 칼을 의미하니 심검(칼을 찾다)이라는 말은 위앙종의 영운 지근(靈雲 志勤) 선사의 오도송에서 유래하였다.

 

영운지근선사는 위산(潙山)에서 복숭아꽃이 피는 것을 보고 깨달았는 데, 그 때 남긴 오도송은,

三十年來尋劍客 (삼십년래심검객) 삼십년 동안 칼을 찾던 나그네

幾迴落葉幾抽枝 (기회락엽기추지) 잎 지고 가지 트기가 그 몇 번이던가?

自從一見桃花後 (자종일견도화후) 복사꽃을 한 번 본 그 이후로부터,

直至如今更不疑 (직지여금경불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시 더 의심하지 않았네. [ 선문염송집 제15권 / 한국의산천 정리]

 

마음껏 휜 나무의 곡선을 전혀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돋보이게 살린 솜씨에서 대범함과 비범함을 동시에 느낀다. 굽은 나무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심검당에서 찾을 지혜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심검당뿐만이 아니고 무거운 지붕과 종을 휘어진 네 기둥이 너끈히 받치고 있는 범종각도 신비하다.

 

▲ 개심사 종각 ⓒ 2011 한국의산천

 

개심사를 벗어나면 길은 해미읍성으로 이어진다. 성벽 위를 걸으며 금북정맥 마루금을 완상하기 위해 서두르다보면 도중에 이국적인 풍광을 만나게 된다. 삼화목장. 어떻게 보면 제주의 오름을 닮기도 한 언덕들이 둥글게 둥글게 어깨를 맞대고 펼쳐져 있고, 나무로 만든 울타리 안에선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누구나 가던 길을 멈춰 사진 한 컷 찍게 만드는 그런 풍경이다. 1969년 금북정맥의 산줄기를 깎아내고 초지를 조성하면서 생긴 목장으로 원 명칭은 ‘축협중앙회 개량사업본부 한우개량부 목장’이지만 원래 이름인 ‘삼화목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끝없는 구릉위이 펼쳐지는 삼화목장 ⓒ 2011 한국의산천

 

삼화목장 풍경은 역시 봄날이 최고다. 푸른 새싹이 돋는 목장의 언덕에 길게 이어진 벚꽃 띠 때문이다. 연분홍 꽃구름이 둥근 언덕에 피어나고, 금북정맥을 넘어온 해풍이 언덕을 스치면 나풀나풀 휘날리는 벚꽃 이파리…. 이런 정경은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떼와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이 땅에 벚꽃 명승지는 많아도 이렇듯 자신만의 독특한 풍광으로 봄날을 노래하는 곳은 드물다. 허나 벚나무의 진홍빛 이파리도 모두 떨어진 늦가을에 어찌 그런 호사를 누릴까.

 

한때 어두운 정치적 배경 때문에 주목을 받기도 했던 이 삼화목장은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으로 이름을 날린 천수만 간척지의 서산목장과 함께 서산의 대표적인 목장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는데, 서산 고을에서 목장의 역사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산을 비롯한 주변 고을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관할하는 목장이 있었다. 낮은 구릉지가 대부분이고 해안과 접하여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은 온난한 기후라 목축업에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대산·홍주·면천·태안의 목장이 그것인데, 그 중 대산목장이 가장 컸다. 당시엔 소보다는 대부분은 말을 길렀다. 기록에 의하면 대산목장에는 말을 기르는 목자만도 100여 명에 달했고, 서산 전체를 합하면 수백 명에 이르렀다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말들이 무리 지어 물을 마시면 냇물이 마르고 풀을 뜯어먹으면 들판이 붉게 변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 ⓒ 2011 한국의산천

개심사에서 승용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해미읍성은 보존 상태가 좋다. 예전엔 성안에 면사무소, 초등학교, 민가 등이 있었지만, 1973년 성안의 건물들을 모두 헐어내고 일부를 복원했다. 순천의 낙안읍성보다 사람의 냄새도 적고, 답성놀이가 전래되는 고창읍성보다 덜 정겹지만, 성벽 위를 걷다보면 잠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해미읍성 돌틈에 아프게 새겨진 역사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무려 1세기 동안 이곳에서 일어났던 대대적인 살육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당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잡혀와 고문 받고 죽음을 당했는데, 주로 인근의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신자들이 많이 잡혀왔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숫자를 1,000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이전인 1790년대부터 희생된 사람을 모두 합하면 3,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조정에서 신자들에게 내린 판결은 정법(正法), 곧 참수형이었다. 그러나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고, 글로 전달하기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다.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돌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묶어서 눕혀 놓은 사람들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도 하였으며,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도 조여 죽였다. 또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키기도 했고, 나무에 매달고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기도 했다. 병인박해 때는 많은 사람을 단기간에 죽이기 위해 십수 명씩 생매장하기도 했다. 실로 끔찍한 일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지만 어찌 흔적이 남지 않을 것인가. 성안 광장에는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있던 감옥터와 모진 고문을 당했던 늙은 호야나무(회화나무)가 서 있다.

▲ 읍성 내에 자리한 감옥과 회화나무 ⓒ 2011 한국의산천

감옥터에서 질퍽한 옛 저잣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서문은 순교자들에겐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신도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도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올려 자리개질하여 머리를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 이 자리개돌은 서문 밖에 보존하고 있다. 또 성밖엔 신자들을 묶은 채 밀어 넣었던 ‘진둠벙’이 있고, 현재 순교성지가 된 ‘여숫골’은 생매장 당하던 신도들이 죽으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외쳤다는 곳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성안에서 그토록 잔인한 일이 불과 1~2세기 전에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오싹 돋는다. 바람이 불자 당시 피로 붉게 물들었을 자리개돌에 샛노란 은행잎 몇 개 떨어진다. 대살육 당시에도 가을은 이렇게 해미읍성을 어김없이 찾아왔을 것이다.

 

▲ 수당리에 위치한 안국사지의 돌미륵 ⓒ 2011 한국의산천

 

갯벌이 그리웠던 것은 그래서였다. 서산 시내를 지나 가로림만으로 서둘러 방향을 잡았다. 가면서 일부러 목청 높여 노래를 불렀다.

 

“굴을 따랴 전복을 따랴 서산 갯마을 / 처녀들 부푼 가슴 꿈도 많은데 /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 사나운고 / 사공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구나.”

 

어릴 적 동네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나 조미미의 노래 ‘서산 갯마을’을 들으며 서산이란 곳에 대해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물론 대학시절에 들은 ‘스산’이라는 한 마디에 서산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서산 하면 명색이 ‘갯마을의 대명사’가 아닌가. 허나 1980년 남쪽의 천수만이 간척지로 바뀌면서 서산에서 갯벌은 많이 사라졌다. 거기에 1989년 태안이 서산에서 분리되면서 한반도 최고의 리아시스식 해안인 태안반도도 갯벌도 철새 따라 떠나버렸다. 어쩌면 이 세월 동안에 ‘서산 갯마을’이란 단어는 고스란히 사어(死語)가 된 감도 없지 않다. 사정이 이런데 서산 북쪽의 가로림만에 바다가 아직 남아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 서산 팔봉산에서 바라본 가로림만 전경 ⓒ 2011 한국의산천

 

21세기 초, 서산에서 진짜 제대로 옛 갯벌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팔봉·지곡면과 대산읍을 끼고 있는 가로림만뿐이다. 물론 간척지가 있는 천수만의 간월도 등에서도 갯벌을 만날 수 있긴 하지만, 손때를 덜 탄 순박한 어촌 갯마을 풍광을 즐기려면 아무래도 북쪽의 가로림만으로 가야한다.

 

그래서 찾아간 섬이 웅도(熊島)였다. 이 섬은 육지와 700m쯤 떨어져 있는데, 섬과 육지를 잇는 콘크리트 포장길은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만 오갈 수 있다. 서울서 가까워 인기 있는 제부도와 비슷하지만, 제부도가 명함 내놓기 어려운 매력이 있으니 바로 소달구지와 인심이다. 충청도 순박한 인심에 20여 대의 소달구지가 갯벌로 나가는 광경은 오로지 이곳 웅도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웅도를 제대로 느끼려면 섬 입구에 차를 놓고 물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걸어서 들어갔다 와야 한다. ‘느림의 미학’으로 발품을 팔아야 마을 사람들과 제대로 호흡할 수 있는 섬인 것이다.

 

▲ 웅도는 밀물과 썰물로 인하여 물때를 보고 들어가야합니다 ⓒ 2011한국의산천

 

자그마한 언덕을 넘자 바다로 나가는 소달구지 행렬이 보였다. 길이 끝나고 갯벌이 펼쳐졌다. 소들은 멈추지 않고 갯벌로 나갔다. 갯벌의 끝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간혹 바퀴가 갯벌에 박혔지만 소는 힘들이지 않고 달구지를 끌고 잘도 전진했다. 웅도 주민들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게 지고 갯벌로 나갔으니 소달구지의 유래는 그리 오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엔 아낙네들이 갯벌에서 바지락을 잡아 삼태기에 담으면 남정네들은 바지게에 옮겨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려운 갯일도 갯일이지만, 캐낸 바지락을 지게로 지고 푹푹 빠지는 갯벌을 나오는 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던 1960년대 초의 어느 날, 누군가 소달구지를 몰고 직접 바다로 들어갔다. 지금은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당시엔 팔팔한 30대 중반이었던 김희곤 노인이다. 김 노인은 처음엔 지게로 갯벌 밖으로 져낸 바지락을 실어오려 달구지를 끌고 나갔다가 갯벌 안으로 몰고 들어갔던 것이다. 잘못하면 전 재산인 소까지 잃을 수 있는 모험이었는데, 소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소가 이래 뵈두 영물이유. 뻘강으루 해서 질을 알아서 찾아간다니깨유.”

 

섬사람들은 또 같은 갯벌이라 해도 물이 흐르는 수로쪽은 섬에서 흘러나간 모래가 적당히 섞여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 작은 갯강이 소가 다니는 길이 된 것이다. 김노인은 그 해에만 열 대 가까운 달구지를 만들었다고 기억한다. 이후 섬사람들은 모두 소달구지를 끌고 갯벌로 나갔다.

 

한참 산업화 바람이 불 때 경운기와 트랙터가 보급되면서 소달구지 대신 기계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뻘 씻어내는 일도 보통이 아니고, 갯벌도 오염되어 꺼렸다. 무엇보다 소금물에 기계가 쉽게 부식하는 바람에 수명도 아주 짧았다. 결국 소달구지로 돌아왔다. 모든 게 급하고 편리하게 돌아가는 산업화 사회에서 기계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소중한 사실도 깨달았다.

 

한 가구당 정해진 하루 수확량은 80kg. 오랜 경험으로 눈대중해 수확량이 되었다 하면 저마다 바지락을 소달구지에 싣고 갯벌을 되돌아나온다. 소가 힘들어하면 사람은 내려서 걷기도 한다. 소달구지가 갯벌 입구의 ‘동동바위’ 앞에 도착하면 바지락 계량작업이 이뤄진다. 거의 들어맞지만 혹 부족하면 이웃에서 한 바가지 나눠줘 80kg을 맞춘다. 바지락 가격은 계절 따라 들쭉날쭉하지만, 대체로 1kg에 2,000원 정도. 그리고 바지락 계량을 마치면 소달구지를 타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주민들은 외지인들을 별로 반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엔 일년 내내 외지인 그림자 보기도 힘들던 작은 섬이었건만, 소달구지가 소문이 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드는 외지인들이 섬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외지인들은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비닐 옷과 장화에 뻘이 잔뜩 묻어있는 주민들을 양해도 없이 찍어댔다. 순박한 노인들이라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말은 못해도 참 불편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따로 없다는 게 젊은이들의 불평-.

 

“다음에 올 땐 사진 찍지 말구, 기냥 와유.”

 

웅도는 분명 소달구지의 풍광과 함께 따뜻한 인정도 넘치는 섬이다. 누구 말마따나 이 섬은 카메라 내려놓고 욕심도 버리고 그렇게 들어가야 하는 섬이다. 웅도 입구에 잠시 서있는 사이, 어느새 물이 들어차더니 콘크리트 길은 금새 바닷물에 잠겼다. 그리고 웅도는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웅도를 빠져나와 대산읍에서 77번 국도를 타고 남진한다. 부석면은 천수만을 향해 튀어나온 작은 반도다. 동아반도라 불리던 그곳엔 도비산(351.6m)이 우뚝하다. 마늘밭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문득 아담한 부석사(浮石寺)가 나타난다. 이름이 귀에 익은 이 절집은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특이하게 한자도, 유래도 저 영주의 부석사와 너무 똑같다. 아니 차이가 있다. 영주의 부석사가 백두대간 내륙의 조망이 좋은 절집이라면, 이곳은 부남호 너머로 보이는 서해의 일몰 풍광이 너무 아름다운 절집이라는 점이다. 또 영주의 부석사만큼 자랑할 만한 거창한 보물은 없어도 전망 좋은 산기슭에 아기자기 자리 잡은 당우들이 제법 특색이 있다.

 

부석사는 창건 이후 쇠락한 것을 조선 초기에 무학(無學)대사가 중건하였고, 근대에는 경허(鏡虛·1849-1912)를 이어 한국불교의 커다란 선맥을 형성한 만공(滿空·1871-1946)이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떨치기도 하였다. 통쾌한 필채로 써 내려간 부석사 편액은 만공의 글씨다. 강직한 성정과 담대한 기상이 잘 드러났다는 평이다.

 

▲ 도비산에 자리잡은 부석사. 영주 부석사와 창건설화가 비슷한곳입니다 ⓒ 2011 한국의산천

 

부석사를 내려서면 드디어 천수만(淺水灣). 수천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천수만은 한때는 한국 제일의 황금어장이었다. 물이 얕아 새우며 갖가지 어족의 산란장이기도 했던 이곳은 갯벌에서 캐고 주울 수 있는 갯것들이 워낙이 풍부해서 힘없는 아녀자들도 조금만 노력하면 어렵지 않게 목돈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현대가 해외건설에서 남아도는 장비를 이용하고, 좁은 땅에서 식량증산이라는 명분이 맞아떨어지면서 간척지로 만들고 난 뒤엔 모든 게 변했다.

 

어류의 산란장소가 사라졌고, 간척지 밖의 인근 어장도 황폐화되어 갔다. 갯벌에서 나던 조개와 게들, 낙지, 굴 등 수많은 종류의 갯것들은 간척사업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요즈음엔 천수만에 가창오리 등 철새들이 날아와 조금의 위안이 되지만, 간척 이전의 무진장한 효용성을 다시는 회복할 수는 없게 되었다.

 

덩달아 인간의 생태계도 변했다. 대를 이어 갯일을 하던 수천 가구의 어민들은 졸지에 ‘문전옥답’을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았다. 간척지를 주민들에게 불하한다는 원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어민들의 터전을 대신한 넓은 간척지는 대기업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누구는 고향을 떠나 외롭게 대처를 떠돌았고, 누구는 간척지 일꾼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주민들은 천수만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당시 옛 어민들이 바라는 차선책은 간척지를 불하받는 일이었다. 허나 약속을 지키지 않자 현대건설과 주민들의 갈등의 골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지역 어민들은 20여년간 현대건설과 격렬하면서도 지루한 분쟁을 계속해 왔다. 다행히 지난 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간척 당시 천수만 인근 지역에 거주했던 어민 5,700가구에게 가구당 1,500평씩 간척지 농지를 우선 매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간월도에 자리잡은 간월암 ⓒ 2011 한국의산천

 

천수만 간척지가 어민들의 손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들은 바지락 등 갯것 줍던 손으로 벼를 가꿔야 하고 새우 잡던 배 대신 트랙터나 경운기를 몰아야 한다. 천수만 어민들의 영원한 상실감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다시 둑을 무너뜨리긴 어렵다. 대신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바로 천수만을 세계적인 철새의 낙원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야 그 천혜의 갯벌을 잃어버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 간월도 부둣가. 배를 개조한 포장마차 ‘간월호’에서 싱싱한 천수만 대하로 입맛을 돋우고 가창오리떼를 보러나갔다. 녀석들은 야행성이다. 낮에는 안전한 호수 안쪽에서 잠을 자다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기 시작하면 서서히 활동을 시작한다. 따라서 육안으로 녀석들의 군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해질녘과 새벽녘 두 차례뿐이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시시각각 색다르게 펼쳐지는 녀석들의 군무(群舞)는 황홀했다. 사람의 간섭이 두려워 높게 날진 않았지만, 수면 위로 날아갈 때는 파도 같기도 하고, 용틀임하며 승천하는 거대한 용처럼도 보였다. 또 짙은 먹구름인가 하면 어느새 나지막한 산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가창오리의 군무를 보고 있는 사이 큰기러기떼 수십 편대가 날아갔고, 깜깜한 밤이 찾아왔다.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벌판에서 가창오리나 큰기러기 같은 철새떼의 울음소리와 퍼덕이는 날개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안다. 수십만 군사의 함성소리를 연상케 하는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생명력이 넘치는 에너지를 품고 있는지, 심장은 왜 그렇게 벌렁벌렁 뛰는지를.

 

 

거대한 회색빛 도시에서 작은 몸뚱이를 지탱하려 애쓰다 지치고 힘이 들 때면 길손은 천수만으로 다시 떠날 것이다. 시베리아로부터 그토록 먼 길을 날아오고도 싱싱한 생명력이 차고 넘치던 철새떼를 만나러. 그 달밤에 머리 위로 날아가며 힘차게 울어대던 철새의 울음소리가 또 그리워진다.[글 : 르포라이터 민병준]

 

[향토기행] 서산, 어떤 곳인가
충남 서북부에 있는 서산시(瑞山市)는 동쪽은 당진군·예산군, 남쪽은 홍성군, 서쪽은 태안군에 접하고, 북쪽은 아산만에 면한다. 금북정맥이 서산 북부를 동서로 지나고, 동남부에는 서산의 최고봉인 가야산(伽倻山·678m)을 중심으로 삼준산(三峻山·490m), 석문봉(石門峰·653m), 일락산(521.4m) 등 400~600m급 산들이 솟아 가야산군을 이룬다. 서부에는 금북정맥의 금강산(316m)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지맥을 뻗었다. 북부 지맥엔 연화산(蓮花山·234m), 팔봉산(八峰山·361.5m), 망일산(望日山, 302m)을 비롯한 150m 내외의 낮은 산지가 곳곳에 구릉지를 이루고 있고, 남부는 도비산(島飛山·352m) 등 낮은 구릉성 산지가 뻗어 각각 가로림만과 적돌만으로 태안반도와 내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가야산권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해발고도 100~3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완사면과 구릉지들이 있을 뿐, 큰 하천과 퇴적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다. 금북정맥 분수령을 중심으로 북부에는 40여 개의 소규모 하천이 곳곳에 산재해 인근 곡창지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대교천이 남서류하며 시 중앙을 적시며, 가야산 남쪽에서 발원한 해미천과 만나 간월호로 흘러든다.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굴곡이 심하며, 조석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수심이 얕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하나인 치리국국(致利鞠國)과 신소도국(臣蘇塗國)이 지금의 지곡(地谷)과 태안(泰安)에 있었다. 백제 때는 기군(期郡)이라 불렀고, 속현으로 성대혜현(省大兮縣·지금의 태안)과 지육현(知六縣·지금의 지곡)을 두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부성군(富城郡)이라 개명하였고, 성대혜현을 소태현(蘇泰縣)으로, 지육현을 지곡현(地谷縣)으로 고쳤다. 오늘날의 서산시 지역은 고려시대의 지곡현 땅이었다. 고려 인종 때 부성(富城)에 현령을 두었다가 읍치(邑治)를 지곡에서 오늘의 서산시로 옮겼다. 1284년(충렬왕 10) 다시 복군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안군·서산군·해미현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모두 합쳐 서산군이 되었다. 1989년 서산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서산은 서산시와 서산군으로 나누어졌고, 태안군은 서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1월 서산군과 서산시가 다시 서산시로 합쳤다.

 

2004년 현재 대산읍과 석남동·부춘동·동문동·활성동·수석동 및 지곡면·팔봉면·성연면·음암면·해미면·고북면·인지면·부석면·운산면의 1읍 5동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739.46㎢, 인구는 15만136명(2004년 현재)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고구마·콩·참깨·인삼·마늘·생강 등이다. 특히 마늘과 생강을 많이 생산하는데, 서산육쪽마늘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낮은 구릉지는 목축에 알맞아 대규모 농장이 많다. 주요 수산물로는 갈치·민어·농어 등의 어류와 꽃게·굴을 비롯한 각종 조개류가 많이 잡힌다. 간월도의 어리굴젓은 서산의 특산물로서 맛과 향기가 좋다.

 

리아시스식 해안의 여러 만(灣)과 금북정맥의 가야산군이 가로막아 지리적으로는 교통이 불편한 편이었으나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수도권과의 연계가 편리해졌다. 당진~서산~태안을 연결하는 32번 국도가 시를 동서로 관통하고, 대산~서산~해미~홍성을 잇는 29번 국도가 남북을 관통한다. 가로림만과 천수만이 가로막긴 해도 각 면 단위로 지방도가 잘 나있어 자체 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 서산 가야산에서 ⓒ 2011 한국의산천


주요문화재와 둘러볼 곳

 

가야산

충청도 금강 이북 지방의 근간을 이루는 금북정맥이 서해로 빠져 세력을 다하기 전에 남은 힘을 쏟아 예산과 서산 사이에 빚은 산이 바로 가야산(伽倻山·678m)이다. 봄이면 아기자기한 암릉 곳곳에 피어 있는 연분홍 진달래가 곱고, 가을이면 한들한들 흔들리는 억새풀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요즘 같은 초겨울이라면 전망 좋은 능선에서 널따랗게 펼쳐진 내포지방의 산야를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봉인 가야봉 정상 부근은 군사보호구역이라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산행은 석문봉(658m)으로 한다. 상가리의 남연군묘~옥양봉~석문봉~남연군묘로 돌아오는 회귀코스는 4시간쯤 걸린다. 옥양봉에서 석문봉까지의 암릉구간이 압권으로, 좌우 깎아지른 절벽에 서면 전망대가 따로 필요 없다.

문화유적을 겸한 답사산행에 좀더 치중하고 싶다면 황락리 해미읍성~일락사~석문봉~남연군묘 코스와 상가리~석문봉~일락산~개심사 코스가 적당하다. 산행은 4~5시간 소요된다.


서산마애삼존불상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 계곡 층암절벽에 새겨진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국보 제84호)은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잎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에서 당시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보원사지

운산면 용현리 보원 마을에 있는 절터. 보원사(普願寺)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요즘은 백제 때의 절로도 보고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

10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조(石槽·보물 제102호)와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103호)·5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제106호)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 있다. 1968년에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9.5㎝)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7.5㎝)이 발견되었다. 사적 제316호.

 

개심사

운산면 신창리에 있는 개심사(開心寺)는 649년(백제 의자왕 9)에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1475년(조선 성종 6) 불탄 것을 1484년에 중건한 뒤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보물 제143호)과 명부전·팔상전·심검당 등이 남아 있고,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4호)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 배치는 조선 초기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으며, 건축 양식은 다포계(多包系)·주심포계(柱心包系)·익공계(翼工系)의 형식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부석사

부석사(浮石寺)는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며, 조선 초기에 무학(無學)대사가 중건하였다. 근대에는 만공(滿空)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기도 하였다. 경내에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같은 건물로 연결된 심검당, 무량수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전 앞에 안양루가 서해를 향하고 있다.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는 건축물이다.

 

일락사

상왕산 남쪽 기슭에 있는 일락사는 663년(신라 문무왕 3)에 의현선사가 세웠고, 1487년(조선 성종 18)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명부전이란 현판이 달려있는 대웅전은 1993년에 건물을 해체하여 원래 자리 오른편에 세웠는데, 이전 자리에는 대적광전을 새로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을 한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전체적으로 조각을 가하여 단정하고 아담한 형태미를 보여 주고 있는 건물이다. 기록으로 미루어 일제시대 초기인 1919년에 고쳐 세운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적광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 일부가 부서지고 탑신의 3층 몸돌이 없어지는 등 보존상태가 좋지 않으나, 원래의 옛 모습은 단아함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 일락산에 자라한 고찰 일락사 ⓒ 2011 한국의산천

 

간월암

부석면 간월도리 작은 바위섬에 있는 간월암(看月庵)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無學)대사가 창건한 암자다. 무학이 이곳에서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간월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폐사된 절터에 만공이 다시 세우고 간월암이라 불렀다. 법당에는 무학대사를 비롯하여 이곳에서 수도한 고승들의 인물화가 걸려 있다.

간월도는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 때는 길이 열린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보낸 어리굴젓이 진상품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또한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 때 간월도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열린다. 이곳에서 보는 서해의 낙조가 유명하다.

 

팔봉산

팔봉면에 솟은 팔봉산(361.5m)은 채 400m도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아기자기한 암릉과 주변 조망이 좋다. 능선에 오르면 북쪽으로 가로림만의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특히 바위에 붉은 노을이 물드는 저녁 시간의 풍경이 장관이다. 팔봉산 산행에서는 제1봉에서 제3봉 사이에 펼쳐진 암릉구간이 백미다. 암릉을 오르내리며 걷다보면 현란한 암릉의 조화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요즘엔 위험한 곳에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가족산행을 하기에도 별 무리가 없다. 팔봉산만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데는 3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 조방이 좋은 아기자기한 바위산 서산 팔봉산 ⓒ 2011 한국의산천

 

도비산

부석면 추평리 동아반도에 우뚝 솟은 도비산(桃肥山·352m)은 조망이 뛰어나다. 부석사 같은 유서 깊은 절집이 있어 등산인들의 발길이 잦다. 정상에 오르면 천수만 간척지를 비롯해 너른 들판과 그 너머로 서해바다와 드넓은 간척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이면 간월호와 부남호의 철새도 볼 수 있다. 옛 서산군지인 ‘호산록’엔 날씨가 쾌청할 때 도비산에서 서해를 바라보면 해로가 분명하게 보여 중국 청제의 지경을 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행은 보통 추평리 부석사 입구에서 시작하고, 부석사에서 30여 분이면 정상에 설 수 있다. 부석사~도비산 정상~석천암~부석사를 도는 회귀 코스와 부석사~정상~산동리로 넘어가는 두 코스가 있다. 총 산행시간은 어느 코스를 이용하나 3시간 정도 걸린다.

 

해미읍성

해미면 읍내리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하여 1491년(성종 22)에 완성되었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이라고도 했다. 읍성은 지방 행정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며,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 형태로서, 평시에는 행정중심지가 되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가 되었다.

해미는 1414년(태종 14)부터 1651년(효종 2)까지 군사 중심지였다. 이 성은 동문·서문·남문의 3문 가운데 남문인 진남루만 원래의 모습이고,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다시 쌓은 것이다. 성 안의 시설은 1980~81년에 일부가 발굴되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다.

한편,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1866(병인)년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가 1,000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는 3,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남아 있는데, 이 회화나무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하였으며,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전화 041-660-2540

 

 

안견기념관

조선 초기의 화가인 안견(安堅·?-?)을 기념하여 세운 박물관으로 지곡면 화천리 언덕에 있다. 1619년(광해군 11)에 기록한 서산의 지방지 <호산록>에 안견의 출신지가 서산 지곡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1991년 10월 서산시가 사업비 2억2천여만 원을 들여 지었다.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견의 작품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실측 크기로 제작한 영인본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적벽도(赤壁圖)’ 등 총 18점의 작품을 향토 작가들의 미술품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매년 10월 안견 탄신기념 학생미술사생대회를 개최한다.

관람시간은 09:00~18:00(동계 17:00), 공휴일에는 쉰다. 관람과 주차는 무료. 전화 041-660-2536.

 

김기현 가옥

음암면 유계리 평야마을에 있는 김기현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9호)은 북동향하고 있는 기와집으로, 지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一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7칸 규모로 왼쪽 끝에 바깥대문이 설치되어 있고, 부엌과 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향한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서 안마당의 오른쪽에 있다. 이는 대부분의 중·상류 주택이 몸채를 안마당 건너편에 두는 것과는 달리, 일조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간결한 구조를 한 3칸집으로, 사랑채 남쪽에 단 차양지붕이 돋보인다. 차양지붕은 사랑채 1칸 앞에 팔모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얹은 것이다. 앞면에는 겹처마를, 뒷면에는 홑처마를 달아 앞쪽을 더 길게 처리하였다.

안채의 뒤뜰에는 3칸의 초가집이 있는데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공간의 짜임새가 빈틈없이 구성되었으며, 호두나무나 감나무 등이 어우러져 소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무학대사 출생지

조선 건국의 정신적 스승인 무학(無學·1327-1405)대사의 출생지는 경남 합천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산 사람들은 인지면 애정리 쑥댕이가 무학대사의 출생지라 여기고 있으며, 서산시에서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경상도 합천이 고향으로 알려진 무학대사가 사실은 여말 왜구들에게 붙잡혔던 그의 부모가 안면도 부근에서 탈출하여 이곳에서 정착하면서 갈대로 갓을 엮어 파는 생활을 하다가 무학대사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 후 무학대사는 간월도 바위섬에 암자를 짓고 불경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서산엔 무학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정순왕후 생가

음암면 유계리에 있는 정순왕후 생가는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順王后·1745-1805)가 출생한 곳.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조선 효종이 김적에게 내린 집으로 1649에서 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은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앞면 5칸 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 해미순교성지 ⓒ 2011 한국의산천

 

해미순교성지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둔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하던 곳이다. 내포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명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 성지를 약 7천 평 확보하였고, 그리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하였고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웅도

가로림만 안에 있는 섬들 가운데 가장 큰 섬인 웅도(熊島)는 면적 1.58㎢이고,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하며 농업도 겸한다. 장골, 큰골, 동편말 등의 갯마을에 사는 주민은 54가구에 190여 명. 근해에서 새우·조기의 어획이 많고, 김·굴·바지락 양식업도 활발하다. 경지면적은 36ha로 쌀·보리·마늘·무 등을 생산하며 자급자족하고 있다. 소달구지를 타고 갯일을 나가는 풍경 때문에 유명해졌다. 섬 안에 민박은 물론 매점도 없으므로 대산읍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만 드나들 수 있다.

 

고파도

가로림만 안에 있는 고파도(古波島)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드문 섬이다. 주요산업은 어업으로 해태가 많이 잡히고 굴·김 양식도 같이 한다. 북서해안에는 형제염전·고파도염전이 있다. 길이 4.5㎞. 면적 1.04㎞², 인구 92(1999). 해안선길이 4.5㎞에 이른다.

고파도는 섬이름에서부터 파돗소리가 풍기지만, 가로가림만에 안겨있어 파도는 높지 않고 잔잔한 물결만이 밀려온다. 이 물결에 실려온 결 고운 모래는 고파도 해변에서 백사장을 이룬다. 여름에 피는 붉은 해당화는 다른 곳보다 색깔이 더욱 곱고 건강하다. 청정지역으로 해산물이 많이 잡혀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구도포구 선착장(017-216-3496)에서 고파도행 여객선 이 1일 2회(07:30, 16:10) 출항한다. 45분 소요. 여름철에는 2회 증편 운행.

 

천수만간척지

서산 남쪽에 있는 만으로 동쪽은 홍성군 서부면과 보령시 천북면, 서쪽은 태안군 남면과 안면도, 북쪽은 서산시 부석면과 접하고 있다. 입구는 2km, 만의 길이는 40km로 전형적인 익곡만(溺谷灣)이다. 천수만(淺水灣)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심이 10m 이내로 얕고 작은 섬들과 암초가 많아 대형 선박이 출입하지 못하는 반면 갯벌이 매우 넓어 바지락, 김·굴 양식과 천일제염이 이루어진다.

서산 A·B지구 간척지는 1979년 간석지 매립허가를 받은 현대건설이 1980년 5월부터 16년 동안 6,470억 원을 들여 서산시와 홍성군, 태안군 일대 천수만(15,409㏊)을 매립해 조성했으며, 담수호 면적은 4,174㏊(총 저수량 20억867만톤), 농경지 면적은 10,121㏊이다.

비행기로 볍씨를 뿌릴 정도로 끝없는 논은 새의 먹이인 낟알이 풍부하고 주변엔 새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우리나라 최대의 철새 휴식처로 꼽히고 있다. 천수만 일대에선 해마다 100만 마리가 넘는 겨울철새들이 월동하는데, 우아한 자태의 고니를 비롯해 청둥오리, 가창오리, 기러기 등이 수만 마리씩 날아들고, 최근엔 ‘겨울철의 진객(珍客)’으로 전 세계에 6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황새(천연기념물 제199호)를 비롯해 노랑부리저어새, 재두루미 같은 희귀조도 목격할 수 있다. 오리 중에서 가장 작고 아름답다는 40여만 마리의 가창오리가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벌이는 군무가 일품이다.

 

겨울 철새가 날아들기 시작하는 매년 11월 한 달간 간월도와 천수만 간척지 일원에서 천수만 철새기행전이 열린다. 이 기간 중엔 천수만 간척지와 간월호를 한 바퀴 도는 탐조투어에 참가하면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

 

적돌만

현재 부남호가 있는 부석면과 태안 남면 사이의 적돌만(積乭灣)은 천수만 북서쪽 깊은 곳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만이었다. 부석면의 서쪽 끝 송리 해안가에 ‘검은여’라는 바위가 있어서 이를 ‘적돌’이라고도 불렀고, 그 강을 적돌강(積乭江)이라 했다.

한편, 여는 본래 물속에 잠겨 있는 바위를 말하지만, 검은여는 밀물이나 썰물에 관계없이 언제나 그만한 상태로 드러나 있는 바위라 멀리서 보면 마치 돌이 물위에 떠 있는 것같이 보인다 하여 부석(浮石)이라고도 했다.

그 검은여 밑에는 온 국민이 석 달 먹을 양식이 거기 잠겨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서산 B지구 매립지 공사로 1982년 검은여 주변은 육지로 변하였다.

 

가로림만

천수만 반대쪽으로 만입하는 가로림만은 서산의 대산면·지곡면·팔봉면과 태안의 태안읍·원북면·이원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는 덕적군도가 있다. 부근 해안에서 성행되는 어업의 중심지로 연안 일대는 어류의 산란장으로 적합하며 굴, 바지락, 김 등의 양식이 성하다. 대산면을 중심으로 염전업이 발달하였다. 가로림만 안에는 웅도, 고파도 등의 섬이 자리하고 있다.

 

▲ 장쾌하게 하늘금을 그리는 가야산 능선 ⓒ 2011 한국의산천

연암산, 삼준산을 넘어서 일락산에 오른 후 가야산으로 가는 길 -한국의산천-


길에서 만난 별미

 

꽃게장 서해안의 황금어장인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거느린 서산은 오래 전부터 굴과 꽃게의 명산지로 이름 날렸다. 서산 최고의 관광지인 간월도는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유명한 서산의 어리굴젓 발생지로서 어리굴젓을 파는 상가와 반찬을 내놓는 식당이 많고, 또 옛날부터 주민들이 해먹던 굴밥을 밥상에 내놓는 식당도 즐비하다. 이런 서산에서 최고의 별미는 꽃게장이다.

 

봄가을로 꽃게 철이 되면 서산 바닷가 포구엔 싱싱한 꽃게가 수북히 쌓였고, 아낙네들은 이것을 사다가 게장을 담가 두고두고 먹었다. 간장에 마늘, 생강 등 갖은 양념을 버무려 담근 꽃게장은 그 맛이 아주 빼어나 원조 ‘밥도둑’으로 불린다.

 

간월도 입구의 서산횟집(041-669-4111)은 서산의 꽃게장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집이다. 꽃게장백반(1인분 18,000원)과 꽃게장양념찜(1kg 80,000원)이 별미로 꼽힌다. 최근 꽃게 어획량이 급감하면서 값이 많이 비싼 편이지만 별미로 한 번쯤 맛볼 만하다.

 

겟국찌  서산 사람에게 ‘서산 고유의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 ‘겟국찌’로 대답한다. 해미나 당진 등 내포 지방에서만 알아듣는 토종 음식으로, 흔히 ‘게꾹찌’ ‘깻국찌’ 등으로 발음되는 이 음식의 정확한 이름은 ‘겟국찌개’다.

가을에 담근 꽃게장은 겨울까지 먹었는데, 겨울이 되면 항아리 속의 게는 점점 줄어들어 게장 국물이 흥건히 고이게 된다. 이 게장 국물에 김치와 황석어젓, 새우 등의 재료를 넣어 끓여낸다. 게장 국물인 ‘겟국’을 넣고 끓였다고 해서 ‘겟국찌개’고, 이를 줄여 ‘게꾹찌’라 발음한다. 첫맛은 새콤씁쓸하고 짠 맛이지만, 뒷맛은 시원하게 입에 착 달라붙는다.

 

서산 시내 로터리 근처에 있는 ‘진국집(041-665-7091)’의 게꾹지백반(1인분 5,000원)이 유명하다. 또 대산읍의 웅도식당(041-663-8497)에서도 맛볼 수 있다. 이 집은 찌개백반 메뉴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굴된장찌개(1인분 5,000원) 등 다른 음식을 시키면 밑반찬으로 나온다. 또 겨울엔 겟국찌를 주문판매(1kg 4,000원)하기도 한다. 이곳은 신선한 낙지와 주인 부부가 직접 재배한 박을 넣어 맑게 끓여낸 박속낙지(3~4인분 3만원)도 맛이 일품이다.


일정별 길라잡이

서산시는 가야산권, 천수만권, 가로림만권 이렇게 세 개의 큰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그리 너르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알찬 일정을 잡을 수 있다.

금북정맥의 주요 산으로서 내포지방의 기둥이 되기도 하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가야산권은 ‘백제의 미소’를 만날 수 있는 권역이다. 서산마애삼존불, 보원사지, 개심사 등 서산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지가 이곳에 몰려있다. 또 오가는 길에 도로 주변으로 펼쳐진 널따란 삼화목장도 제법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천주교도들이 박해당한 유적인 해미읍성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천수만권은 바닷가의 정취와 간척지를 두루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매년 겨울 천수만간척지를 찾아오는 철새는 이제 서산의 명물이 되었다. 간월암이 있는 간월도는 서산 어리굴젓의 발상지로서 서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숙박업소는 많지 않지만 횟집과 토속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부석면의 부석사에 들러 서해를 바라보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다.

 

팔봉·지곡면과 대산읍에 접한 가로림만권은 손때를 덜 탄 순박한 어촌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 서쪽의 웅도는 썰물 때만 출입이 가능한 섬으로서 달구지를 타고 갯일을 나가는 광경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지곡면의 도성리, 중왕리 등의 갯벌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숙식을 해결하기 어려운 편이다. 고파도도 이 권역에 속한다. 대산 북쪽 끝은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대호방조제로 당진군과 연결된다.

 

●당일  서해안 고속도로로 연결할 수 있는 수도권과 충청·호남권은 당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한다면 가야산권과 천수만권을 모두 돌아볼 수 있다. 가로림만권까지 곁들이기엔 조금 벅차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였을 때의 추천일정은 다음과 같다. 서산 나들목~서산마애삼존불~보원사지~647번 지방도~개심사~해미읍성~29번 국도~갈산~40번 국도~96번 국지도~천수만간척지~간월암.

 

●1박2일  웬만한 지방에선 비교적 넉넉한 일정이다. 간월암이나 천수만간척지 일몰을 구경할 수 있어 좋고, 도비산 부석사도 자세히 둘러볼 수 있어 좋다. 또 가로림만권의 웅도도 물때에 맞춰 계획을 잘 짜면 다녀올 수 있다. 웅도엔 숙식할 곳이 없으므로 대산이나 서산에서 해결해야 한다. 일몰을 보고 숙식하기엔 간월도가 제일 좋지만, 숙박시설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2박3일  아주 넉넉한 일정이다. 해미읍성 한 바퀴 돌기, 갯벌체험 등이 가능하다. 또 탐조장비가 있다면 하루쯤은 온전히 철새를 관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갯벌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은 간월암 주변, 웅도 입구, 중왕리 갯벌, 도성리 갯벌 등이다. 마을의 바지락이나 굴 양식장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한다.

 

◈ 교통

서울 등 수도권에선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산 나들목, 해미 나들목, 홍성 나들목으로 접근할 수 있다. 수도권 서부나 남부는 1시간30분 전후, 동부와 북부는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면 접근 가능하다. 일요일 저녁엔 서울로 가는 길이 아주 많이 막히므로 점심 식사 후 귀갓길에 오르거나, 아니면 아예 밤 10시 이후에 고속도로를 타는 게 낫다.

호남권에서도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광주나 목포는 3시간, 전주는 2시간 정도면 접근 가능하다.

영남권은 고속도로를 연계하기가 조금 불편하고 먼 편이다. 부산 등 남부는 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 다음, 장성·정읍 나들목 등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로 붙는다. 6시간 내외 소요. 대구 등 북부는 5시간 소요.충청도 내륙지방에선 예전처럼 국도를 이용해야 한다. 대전서 2시간30분 소요, 청주서 3시간30분 소요.

강원권에선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연계하면 된다. 춘천서 4시간 걸린다.

 

*서산시청 홈페이지 www.seosan.chungnam.kr

*서산시청 대표전화 041-660-2114

*서산 관광안내 041-660-2498

 

 

손의 自由
발의 自由
정신의 자유를 꿈꾸며 높은 山을 오르고 넓은 들판을 달린다.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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