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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예산 향천사 대휴문

by 한국의산천 2011. 2. 10.

[바람의노래] 장돌뱅이 - 곽성삼

 

부초(浮草)처럼 떠돈 하! 많은 세월

 

우리의 생은 단 한번 핀 섧도록 고운 꽃이구나

취해도 좋을 삶을 팔고 찾는 장돌뱅이로 산천 떠도세
가야겠네 가야겠네 이 땅을 위한 춤을 추며

어우아 넘자 어우아 넘자 새벽별도 흐른다  

 

 

▲ 예산역에서 가까운 곳에 고찰 향천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부초(浮草)처럼 떠돈 하! 많은 세월

1.

꽃이 만발한 계절 가고 휑한 바람부니 부초처럼 떠돈 하! 많은 세월 아리랑 고개 무심코나
어디메요 어디메요 내 가는 곳 어디메요 텅빈 저자 거리위로 초저녁 별만 반짝인다

 

2.

내 어릴적 장대들고 별을 따던 손엔 의미없는 욕망으로 찌들어진 나날들이
푸르고저 푸르고저 내 쌓은 것 무엇이요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길 빌던 영혼의 노래 듣자꾸나

 

3.

슬기로운 영혼은 어김없이 타야할 꽃마차의 꿈꾸시며 얽히고 설힌 삶의 애증들을 애착의 매듭 푸시겠지
뉘 말할까 뉘 말할까 내 이룬것 영원하다 한끼면 족할 우리삶이 움켜쥔 것 무엇이오

 

4.

우리의 생은 단 한번 핀 섧도록 고운 꽃이구나 취해도 좋을 삶을 팔고 찾는 장돌뱅이로 산천 떠도세
가야겠네 가야겠네 이 땅을 위한 춤을 추며 어우아 넘자 어우아 넘자 새벽별도 흐른다

  

 

▲ 마을 앞에 있는 일주문을 지나 향천사로 들어서는 길 ⓒ 2011 한국의산천

봄에는 백일홍이 붉게 핀 천불전이 아름다우며, 가을에는 단풍이 향천사 일대를 붉게 물들인다. 

이 절은 방영웅의 소설 ‘분례기’ 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름도 선(禪)스러운 ‘대휴문(大休門)’ 안쪽의 천불전에 똥례가 신랑점을 치던 불상들이 있으나, 문이 잠겨 있기에 확인 할 수 없었다. 

 

▲ 이른 아침 빗질할것도 없는 마당을 빗질하시는 스님 ⓒ 2011 한국의산천  

 

▲ 천불선원입구의 현판 대휴문 ⓒ 2011 한국의산천 

 

이 門을 들어서는 者, 크게 푹 쉬거라.... 그런 뜻 아닌가요? 저의 생각입니다  -한국의산천

 

고려 후기를 살다간 백운스님은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원제목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의 저자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뛰어난 선시를 많이 남긴 스님으로 불교사에 각인되어 왔다.

 

스님은 여러 편의 시에서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飢食困來眠)는 구절을 남기고 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거니 한결같이 생각 없어 온갖 경계가 고요하다
옳고 그름을 가지고 나를 비판하지 마라 뜬세상 사람 일에는 상관하지 않느니.’
 
그래서 대휴문인가?
대휴문이란. '크게 마음을 쉬라, 모든 생각을 쉬라는 뜻'으로 '세상 공부는 거의가 보고, 듣고, 배우면 알 수 있지만, 참선공부는 듣고, 보고,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수참구(實修參究)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생각, 모든 알음알이를 쉰 상태에서 정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참선에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지만, 참선을 통해 빠져나오는 문이기도 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세계가 이렇게 어렵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행복과 慾望이라는 전차의 종점은 없다.

진실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속에서 幸福이라는 단어를 잊을 때만이 진실로 '행복'할 수 있다. -한국의산천-   

 

 

▲ 이 門을 들어서는 者, 크게 푹 쉬거라.  대휴문ⓒ 2011 한국의산천

스님들께서 공부하시는 천불선원의 대문에 걸린 대휴문 현판. 몸도 마음도 크게 쉰 다음에야 무언가를 이룰수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라 너무 좋다.

 

잠시 쉬면서...

용서는 모래에 새기고 은혜는 바위에 새겨라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아까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 적었는데, 지금은 왜 힘들게 돌에다가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데 돌아보면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은혜는 흐르는 강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놓고 이를 갈며 두고 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은혜를 마음에 새기면 고마움이 남아 누구를 만나도 무슨 일을 만나도 즐겁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원수를 자신의 마음에 새기고 나면 그것은 괴로움이 되어 증오를 낳고 스스로를 옥죄는 불편한 나날의 연속이 됩니다. [좋은 글 중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여서 은혜를 새기든 원수를 새기든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아봅니다.

내 마음 가득히 원수를 새기고 쓴 뿌리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은혜를 새기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지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겠다.

 

사랑으로 가득한 나날이기에......... 

 

 

▲ 향천사(香泉寺)  내력 ⓒ 2011 한국의산천

향천사는 충남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57번지 금오산(金烏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655년(백제 의자왕 16년 서기 650년) 무렵 의각(義覺)스님이 창건했다.

652년 의각은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사(百濟寺)에 잠시 머무른 다음, 이 해 다시 당나라로 들어가서 오자산(五子山)에서 3년 동안 석불 3,053위 및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16나한상 등을 조성했다.

 

655년 의각은 사신을 따라 귀국하면서 이들 석불을 돌배에 싣고 백제 오산현 북포 해안 (지금 예산읍 신암면 창소리)에 이르러 알맞은 절터를 잡지 못해 몇 달을 머물렀다.

이 때 배 안에서 치는 종소리가 강촌을 진동했다고 하여 인근 마을 이름을 종성리(鐘聲里)라고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금오(金烏) 한 쌍이 날아와 배주위를 돌고 사라지기에 뒤를 밟아보니 지금 향천사 자리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를 기이하게 여겨서 주위를 살펴보니 향내음이 그윽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고 이름 짓고 절이름을 향천사라고 지어 창건했다고 한다.

부속 암자로는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는 부도암(浮屠庵)이 있다.

 

 

향천사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동선당(東禪堂), 승방, 천불전, 삼성각, 선방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1359년(고려 공민왕 8) 4월에 조성되었다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었으며, 양식 또한 특이하다.

 

 천불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안에는 현재 불상 1,516위가 봉안되어 있다. 토단(土段) 3면에 높이 15cm 이상의 크고 작은 좌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소불은 거의가 석고상이고 대불은 석재로 만든 것도 있다.

나한전 앞에는 구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이 있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괴되어 완전하지는 않지만, 절의 연혁을 말해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또 부도 2기가 있는데, 이 중 1기(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는 이 절을 창건한 의각의 부도라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다른 1기는 임진왜란 때 이 절의 승려 50인을 이끌고 계룡산 갑사(岬寺)에 있던 기허 영규(騎虛 靈圭)의 승병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찌른 혜희(惠希)의 것이다. 이 밖에도 당간지주가 있다. 

 

 

▲ 대휴문이 있는 천불선원으로 오르는 길에서 ⓒ 2011 한국의산천

 

향천사 창건 설화

 

백제 의자왕때 칠척 키에 인물이 준수하며 법의에 뛰어난 보조국사 의각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평소 반야심경을 늘 지송했다. 스님이 중국에서 공부할 때였다.

취침에 들려던 혜의스님은 밖에서 심광이 일고 있음을 보았다.

「아니 이 밤중에 웬빛일까?」

놀란 혜의스님은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창틈으로 엿보았다.

「저곳은 의각스님 방이 아닌가.」

의각스님은 방에 단정히 앉아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는데 경구가 입에서 밖으로 흘러나을 때마다 광명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이튿날 의각스님은 대중을 모아 놓고 말했다.

「간밤에 내가 눈을 감고 반야심경을 백번 외우고 눈을 떠보니 사방 벽이 뚫린 듯 뜰 밖까지 훤히 보이더군요. 웬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만져 보았으나 벽과 창이 모두 달려 있어 다시 앉아서 경을 외웠는데 역시 뜰 밖이 보였습니다. 이는 반야의 부사의한 묘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은 반신반의 하는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도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이때 혜의스님이 일어나 간밤에 본 사실을 이야기 했다.

그 후 의각스님은 더 이상 중국에 머물 것이 아니라 고국에 돌아가 불법을 널리 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 포교의 원력을 세운 의각스님은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석불상 삼천오십삼위와 삼존불상을 모시고 지금의 충청도 예산 땅에 도착했다. 스님은 모시고 온 불상을 봉안키 위해 명당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황금빛 까마귀 한마리가 스님의 머리 위를 맴돌면서「까악까악」울어 댔다.

「오라, 네가 절터를 안내하겠단 말이지. 그래 내 따라갈 터이니 어서 앞장서거라.」

스님의 말귀를 알아차린 듯 까마귀는 얕게 떠서 서서히 날기 시작했다.

얼마 후 까마귀는 덕봉산 기슭에 내려앉았다. 스님은 그 자리에 절터를 닦기 시작했다.

어느새 인근 마을에는 소문이 자자했다.

「중국에 다녀오신 큰스님이 우리 마을에 절을 세우고 삼천불을 모신다지요?」

「우리 마을의 경사가 아니고 뭐겠어요. 작은 힘이지만 우리 모두가 뜻을 모아 법당이 속히 완성토록 불사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정성이 담긴 시물을 의각스님에게 전했다.

어느 날 아침, 떠꺼머리 총각이 의각스님을 찾아왔다.

「아직 이른 시각인데 어쩐 일로‥‥」

「벌써부터 스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시물을 마련치 못해 망설이다 오늘 용기를 내어 이렇게 빈손으로 올라왔습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흙을 파내고 나무를 나르는 등 불사 일을 돕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참으로 고맙소.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란 시물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것이라오. 나를 만나고 싶고 법당을 세우는 이 현장에 오고 싶은 그 마음엔 벌써 불심이 가득했으니 부끄러워 말게나.」

「스님, 제게는 몸져누워 계신 노모님이 계시옵니다. 이 몸 장가도 들지 못하여 변변히 모시지 못하니 불효가 크옵니다. 법당이 완성되면 제 모친의 병환이 속히 완쾌되길 부처님께 간곡히 기도 올리려 합니다.」

「그대의 효심이 그리 장한데 어찌 기도가 성취 되지 않겠소.」

스님은 그 총각에게 반야심경을 수지 독송토록 일러줬다.

종일 일하면서 한줄한줄 외우기 시작하여 어느새 총각은 반야심경을 줄줄 독송하게 됐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어머님 머리맡에 앉아 반야심경을 외우며 병환에 차도가 있길 기원했다.

법당 낙성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모두 새 절로 향했다.

떠꺼머리 총각도 그날은 깨끗한 옷으로 몸을 단정히 하고 어머니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올렸다.

그때였다.

「얘야, 나 좀 일으켜다오. 나도 법당 낙성식에 가서 부처님을 뵙고 싶구나.」

「어머님, 아니 되옵니다. 그대로 누워 계세요. 저 혼자 다녀오겠어요.」

「아니다. 이상스럽게 오늘 아침 몸이 아주 가볍구나.」

어머니 청에 못이겨 아들이 손을 내밀자 총각의 어머니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 거뜬히 일어났다.

떠꺼머리 총각은 자신의 눈을 의심 했다.

「어머님, 부처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 주셨어요.」

기뻐 어절 줄 몰라하며 부둥켜 앉고 울던 모자는 삼월의 햇살을 받으며 낙성식에 참석했다. 오랫만에 길을 걸어 갈증을 느낀 노파는 법당 옆 약수를 마시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들에게 물을 권했다. 약수에서는 전날과 달리 그윽한 향기가 풍겼다. 이를 확인한 스님은 그날 낙성식에서 절 이름을 향천사라 명했다. 그리고 덕봉산은 금 까마귀가 안내했다 하여 금조산으로 고쳐 불렀다.

훗날 마을 사람들은 의각스님이 처음 배를 댄 곳을 배논이라 불렸고, 스님이 타고 온 배가 포구에 닿았을 때 어디선가 한밤중에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 하여 마을 이름을 종성이라 명했다. 또 그 바닷가는 석주포라고 했으며 황소가 돌부처를 실어 나른후 바위를 고함바위라 부른다. 지금도 향천사 극락전에는 1053 위의 부처님이 계신다.

<한국사찰전서>

출처:http://buda.culturecontent.com

 

 

 

 

▲  당간지주 돌구멍으로 촬영도 해보고... ⓒ 2011 한국의산천

 

 ▲ 극락전 절 지붕 위로 잘 생기고 키 큰 소나무가 아주 많이 자라고 있다. ⓒ 2011 한국의산천  

 

 

충남 예산에 위치한 향천사는 백제 때 옛절이다. 읍내에서 가까우면서도 산이 제법 깊은 금오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예산 사람들에겐 가벼운 산책이나 산행 장소로 낯익은 곳이다.

대도시로 치면 경관 좋은 외곽지역에 속하는 곳이기도 하다. 

향천사에는 몇 기의 부도와 9층석탑이 있으며, 작은 절이지만 이름처럼 무척이나 깔끔한 분위기를 가진 절이다.

 

향천사는 백제의 국운이 다할 무렵인 의자왕 10년(650년) 의각스님이 세웠다. 스님이 중국에서 만든 부처를 돌배에 싣고 그 당시 오산현 불포해안(지금 예산읍 신암면 창소리)에 도착해서 절터를 마련하고자 배에서 한달동안 지극 정성으로 예불을 올리던 어느 날, 금까마귀 한쌍이 날아와 배주위를 돌고 사라지기에 뒤를 밟아보니 지금 향천사 자리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를 기이하게 여겨서 주위를 살펴보니 향내음이 그윽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 이름이 금오산이며 절은 향천사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 이 산천 저 계곡 너른 평야 누비며 부초(浮草)처럼 떠돈 하! 많은 세월 ⓒ 2011 한국의산천

 

우리의 생은 단 한번 핀 섧도록 고운 꽃이구나

취해도 좋을 삶을 팔고 찾는 장돌뱅이로 산천 떠도세

가야겠네 가야겠네 이 땅을 위한 춤을 추며

어우아 넘자 어우아 넘자 새벽별도 흐른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즐겁고 행복하게

한국의산천 일상탈출 더 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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