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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정약용 생가

by 한국의산천 2010. 12. 28.

정약용 생가

벽계구곡 이항로 선생 유적지와 소나기 마을 돌아보기 [ 2010 ·12 · 28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가끔 들리는 곳이지만 언제가도 좋은 강마을 마재

신도로를 벗어나 구도로 팔당수원지를 따라 양수대교 방향으로 강변을 끼고 달리다 보면 중앙선의 능내역이 보이고, 조금 더 지나쳐 가다 철길 밑을 지나칠 무렵 ‘정약용 묘소’라는 안내판이 나붙은 삼거리를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1.6㎞ 남짓 가면 강변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가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마재(馬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마재'로 불리던 이곳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오르기 전까지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18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을 겪어야 했다. 나이 쉰을 넘긴 1818년에야 귀향해 병마에 시달리며 만년을 지냈고, 마을 뒷산에 묻혔다. 다산의 생가였던 여유당은 1925년 대홍수로 떠내려갔고, 팔당댐이 생기면서 옛 마을은 모습을 잃었다. 그러나 1975년에 복원하면서 유적지로 다시 태어났다.

다산 유적지에는 여유당과 함께 묘소,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사당(문도사) 등이 들어서 있다. 주차장에서 다산 유적지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다산의 저서를 본뜬 조각과 거중기 모형, 목민심서 등을 새긴 동판이 눈길을 끈다. 또 여유당의 오른편을 돌아 뒷동산에 올라서면 다산 선생 내외의 묘소가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위인중 존경하는 분 정약용(丁若鏞, 1762~1836)님.  방대한 저술 한가지만으로도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 당시 주 학문이던 성리학, 주자학, 유학등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학설에 정면 대응하고 나서서 정치, 경제등 실제 생활에 필요한 학설을 주장하신 실학의 대가.

이 당시 실학을 주장한다는 것은 목숨을 포기하는 행위와 다름 없었지만 극진한 정조의 사랑으로 잠시 자리보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끝없는 귀향살이로 이어지게 된다.   

 

 

유배의 고통을 달랜 저술작업  

정약용 선생은 학문적 수양과 저술에 전념하며 세계 정세와 서구 과학에 관한 서적들을 구해 연구하며 철학 지리 역사 법률 정치 문학 군사 등 광범한 영역에 걸쳐 역사상 유래가 없는 5백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가 있다.  

"여유당전서"에는 2천여편의 詩歌가 들어 있고 또한 정치·경제에 대한 개혁구상을 밝힌 이른바 이서일표 (二書一表 : 목민심서(牧民心書:48권), 흠흠신서(欽欽新書:30권), 경세유표(經世遺表:48권 미완)가 있다. 주요한 철학 저서로는 "대학강의" "중용강의보"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주역사전" "역학서언 등이 있다.
 

그가 죽은지 74년 후인 1910년 조선 정부는 당시 사회 신진인사들의 여론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정약용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증직하고 시호를 내렸다.

 

 

정약용(나주 정씨, 자는 송보, 호는 다산 당호 여유당)
영조 38년(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윤씨 사이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남


4형제

정약현(첫째 아들) : 첫째 부인 의령 남씨 소생
정약전(둘째 아들) :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소생(신유사옥으로 귀양 간 후 흑산도에서 사망)
정약종(셋째 아들) :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소생(신유사옥 때 아들 철상과 함께 순교)
정약용(넷째 아들) :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소생(신유사옥으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저술활동을 하다가 마재로 돌아와서 만년을 지내다가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성세를 받고 복권되지 않은 상태로 7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남) 

 

 

흔히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 탄압사건은 신유사옥 또는 신유교옥이라고 호칭되고 있으나 다산의 입장에서는 신유사화라고 명명하였다. 그 이유에 대하여 다산은 상세하고 명백한 논리의 기록을 남겼다.신유년의 천주교 탄압은 그 발생동기나 사건의 계기가 반드시 천주교 때문만은 아니었다. 벽파가 집권하여 시파를 억누르는 데서 벌어진 정치적 이유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공서파 일당이 말하기를 ...

"천명을 죽이더라도 정약용 한명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도 죽이지 않은것과 같다."

 

 

또 다시 유배길로 누릿재를 넘어가며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 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쪄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정약용-

 

※ 정말로 월출산의 암릉이나 도봉산의 암릉 너무도 흡사합니다. 

누릿재: 영암에서 강진으로 넘어가는 지금의 양호한 도로 풀치재(草嶺) 

 

북쪽 바람 눈 휘몰듯이 나를 몰아붙여 

머니먼 남쪽 강진의 밥 파는 집에 던졌구료 - 정약용 -

 

1801년 음력 11월 22,3일쯤 유배지 강진에 도착하여 쓴 첫 시이다. 당시 그곳의 주민들은 유배온 사람 보기를 대독(大毒)으로 보고 상대를 안하였으니....

그러니 강진읍 동문 밖 밥파는 집이자 주가(酒家)의 노파가 가련히 여기고 방을 내 주었다.

 

다산은 그 술과 밥을 파는 오두막을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하고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을 거주하는데 ,이제사 겨를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학문과 저술활동을 시작하며 전념하게 된다.

 

 

※ 사의재(四宜齋)

1.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한다.

2.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한다.

3.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도록 해야한다.

4. 동작은 마땅히 후중해야하니 후중하지 못한다면 곧바로 더디게 하도록 해야 한다.

 

이 때문에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바르게 해야하는 방으로서 " 四宜之齊"라고 하였다.

마땅함이라 함은 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義로 규제함이다. 나이만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 둔 사업은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때는 가경(嘉慶)8년(1803) 11월 10일 동짓날...... -정약용- 

 

 

 

 

 

 

 

유적지 생가에서 길을 따라 강쪽으로 약 500m정도 나가면 시원하고 잔잔한 팔당호의 은빛 물결이 보이는 평화롭고 고요한 강마을이다.

 

▲ 얼어 붙은 강건너 보이는 수종사가 자리한 운길산 ⓒ 2010 한국의산천

 

▲ 저도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책을 좋아해서 자주 읽는 편입니다 ⓒ 2010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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