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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이항로 선생 유적지 황순원 소나기 마을

by 한국의산천 2010. 12. 28.

벽계구곡 이항로 선생 유적지와 소나기 마을 돌아보기 [ 2010 ·12 · 28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흔히 구곡하면 화양구곡,선유구곡,용하구곡을 떠올린다. 그러나 서울 근교에 벽계구곡이 있는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않다.

 

1985년 사진동호회에서 찾았던 곳

그 당시 최고의 명기라고 말하던 니콘F4와 FM2를 가지고 그간 표준렌즈와 망원렌즈를 마스터(?)하고  그 전날 새로 구입한 24mm 광각렌즈를 끼우고 출사를 나갔던 북한강가 서종면,문호리.. 그리고 둘러본 벽계구곡은 서울 근처에 그야말로 이런곳이 있었나 하는 신선한 충격에 잊혀지지않아 그 후로 가족들과 비포장길을 마다하고 그곳으로 자주 물놀이를 가기도 했던 곳이다(현재는 완전 포장도로)  

 

눈이 많이 내린 오늘 방학을 맞은 딸과 둘이서 카메라만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오늘 점심 식사는 양평에서 먹기로 하였습니다.

 

화서 이항로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속에서 찬란한 빛을 떨치는 유학계의 거성입니다. 그 학문의 깊이가 넓고 정신이 순수하였기에 국가의 상황이 어려울수록 그리워 지는 민족의 스승입니다. 서양문물의 침투를 배격한 외로운 방파제였으며 대원군의 정책을 정면으로 공격한 당대의 직언자였습니다

화서 이항로 선생은 일생을 바쳐 민족정기  수호와 한민족의 주체성을 굳게 지키셨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와 민족투사들이 바로 선생의 사랑하는 제자들이었으나, 사대주의 풍토가 도도한 오늘날 화서 이항로 선생의 참된 민족 주체의식 앞에 새삼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 이항로 선생 생가 (유형문화재 제105호) ⓒ 2010 한국의산천

 

86번 국지도를 따라 양평의 여느 지류와 같이 맑고 깨끗한 수입천을 거슬러 오르면, 이번엔 대나무처럼 곧고 아주 꼬장꼬장한 한 명의 선비를 만나 뵙게 된다. 바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위정척사운동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재야지식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 선생이다.

전형적인 사대부의 주택 구조를 따르고 있는 선생의 생가는 노문리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생가가 자리하고 있는 마을은 그리 넓지 않고, 마을 앞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는 맑은 수입천이 휘감아 흐르고, 한강기맥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들이 첩첩으로 펼쳐진다. 화서는 이곳을 무척 사랑하여 벽계구곡을 이름 짓고 즐겼다. 

 

이 집은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이항로(1792 1868)선생이 살던 곳이다. 선생은 순조8년(1808) 한성시에 합격했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고종3년(1866) 병인양요때는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 화서집, 화동역사합편강목등이 있으며 이 집은 선생의 부친 때 지은 집으로 약 300여년이 되며 선생이 탄생하여 일생을 보낸 곳이다.

 

▲ 벼슬보다 학문을 선택한 이항로 선생 ⓒ 201 한국의산천

 

이항로(李恒老, 1792년~1868년)는 조선의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본관은 벽진이며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팔사략'을 배웠다고 한다. 1840년 헌종 때 경사(經史)에 밝은 선비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 벽계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864년 고종 때 좌의정 조두순의 추천으로 장원서 별제·전라도 도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저서로 '화동역사 합편강목' 60권과 '벽계아언' 12권, '주자대전 잡의집보' 등이 있다.

 

 

화서 이항로 선생의 생존 시기는 정조 16년 부터 고종 5년에 이르는 우리 민족 최대의 격변기였다. 사림의 유교입국으로 500년간 지탱하여 온 조선조가 18~19세기로 넘어 오면서 서세의 동점이라 일컬어 지던 군사적 위협과 함께 실학의 대두,동학의 발생, 서학의 전래라는 혼란속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방법론을 두고 개화 세력과 수구세력의 정치적인 갈등이 심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화서 선생은 벼슬을 외면하고 초야에 묻혀 문도들에게 도학적 의리사상을 전수하고 실천케 하였던 것이다. 내적으로 도덕의식이 피폐하고 외적으로 외세의 침략이라는 국가 존망지추의 위기 상황에서 순선을 지향하고 대의를 실천하는 교육에 전념한 화서 선생은 우국충정의 일심으로 직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의리론의 대표자로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의 불을 지피게 되는 것이다.      

 

 

옷깃을 여며 화서 이항로 선생을 기리며...

 

경은 난세를 다스리고자 하늘의 기운을 타고난 삼대시대의 순수한 인물로서 밝고 슬기로우며 강직하고 과감하여 뭇 사람을 초월하였도다

그러나 경의 학문은 땅과 바다같이 넓고 깊어서 그 몸은 이미 죽었으나 그 도는 더욱 오래 전해 질것이다.

산에 태산이 잇는것과 같고 북극에 북두성이 있는것과 같아서 훌륭한 선비들이 찾아가 강명하고 전수하였도다

나라가 안전하게 된것은 경의 아름다움을 힘입은 덕택이로다  - 고종 6년. 임금이 내린 재문중에서 -    

 

▲ 이항노 선생 생가 (유형문화재 제 105호) ⓒ2010. 한국의산천 

선생의 학덕은 점차 조정에 알려지면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눈썹 하나 꿈적이지 않았다.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다른 벼슬도 물리친 채 이곳 벽계에 머물며 오로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매월 한 차례씩 강론하였는데, 늘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의리에 관한 강론은 비유가 풍부하여 마치 용호가 뛰는 듯 통쾌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다.

1864년(고종 1) 장원서별제, 그 후 전라도사·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모두 완곡히 물리쳤다. 그러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생은 분연히 서울로 올라가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이 ‘항거 상소’로 화서는 공조참판으로 승진했으나, 곧바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조세제도의 실정을 비판하고, 만동묘의 재건을 주장하다가 결국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이태 뒤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유학은 성리학을 주류로 해서 양명학, 경학, 실학 등이 잇따라 등장하며 펼쳐졌다. 이 가운데 성리학은 크게 퇴계 이황을 잇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계승한 기호학파로 나뉘게 되는데, 19세기에 이르면 중요한 학자를 중심으로 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 당시 유림은 우두머리의 학문적 내용과 인적 구성을 바탕으로 기호 계열의 화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간재학파(艮齋學派)와 영남 계열의 한주학파(寒洲學派) 이렇게 4개 학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 화서학파의 태두인 화서는 서양 충격에 의한 서구 열강문화를 미개한 이질문화라고 보고 서구문화 수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다른 학파와 달리 화서학파의 유생들은 개항 전후 현실대응론부터 일제시대 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본격적인 이론을 체계화하고, 우국충절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 방법도 모색했다.

그 당시 항일운동에 몸 바친 많은 학자와 애국지사들 중에 화서학파 출신이 많았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을사조약 이후 1906년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군에 붙잡힌 뒤 일본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 최익현을 비롯해 조선 13도 의병도총재를 지낸 의암 유인석, 위정척사파 학자인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 외세 배척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능지처참 당한 문숙 홍재학, 병인양요 때 강화 삼랑성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양헌수 장군,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등이 대표적인 제자로 꼽힌다.  

 

 

벽걔구곡 이항로 선생 생가 가는 길

벽계구곡 가는 길은 팔당호반에 앉은 양수리에서 시작된다. 서울에서 양수리로 접근하는 길은 워커힐 뒷길을 타거나 88도로를 타고 팔당대교를 건너면 서울~양평을 잇는 호반길에 들어서게 된다. 몇개의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가 신양평대교를 타지말고 첫 인터체인지인 조안IC에서 내려 양수대교를 건너거나 호반길로 들어서 양수IC에서 내려, 우선 양수리로 들어가 본격적인 강변길을 타야 한다.
양수리 시장과 터미널이 있는 작은 사거리에서, 서종면 방향으로 접어 들어 363번 지방도를 타고 계속 북쪽으로 오르면 된다. 7km쯤 달려가면 서종면에 면소재지에 이르고, 이곳을 지나면 물경치와 함께 분위기 넘치는 까페와 야외음식점들이 줄줄이 이어지며 눈길을 잡는다.  이름난 북한강 까페촌이다.
길을 계속 이어달려 6.6km쯤 더 오르면 작은 다리를 건너고 두번째 수입리마을과 수입교를 건너게 된다. 수입교가 벽계구곡으로 들어가는 기점이다. 다리를 건너서면서 바로 우회전해 끝까지 들어가면 벽계구곡이다. 오른쪽으로 맑은 물줄기를 내려다보며 3km쯤 달리면, 수입2리 삼거리에 닿는데 어느 길을 택하든 상관이 없다. 명달리 마을을 종점으로 계속 이어 달리면 노산 이항로 선생의 생가가 있는 노문리를 거쳐 다시 되돌아 나오는 지점이다. 쉴 만한 곳은 이항로 선생의 생가가 있는 노문리 마을 뿐이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마을 매점 겸 토속음식점이 두 곳 있다.

 

  

생가 오른쪽 언덕의 노산사(蘆山祠)는 화서가 살던 당시 그가 숭모하던 주자와 송시열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놓았던 사당이다. 사당 위쪽 언덕 전망 좋은 자리엔 화서의 묘소가 있다. 생가 왼쪽의 화서기념관에선 선생의 다양한 저서와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족적을 되짚어볼 수 있다.

화서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의 일가를 이룬 선비였다. 1808년(순조 8) 한성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고, 관리로 나아가는 데도 권모술수가 있음을 알고는 벼슬길을 단념했다. 25세가 되던 해인 1816년(순조 16)과 이듬해 잇달아 부모를 여의고 나서는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했다. 30세 무렵에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어 그의 강학(講學)을 들었다. 화서는 때로 너무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번잡함을 느낄 때면 쌍계사나 고달사 같은 산사를 찾아 사서삼경과 주자대전 등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통방산(650m)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벽계구곡은 여름철이면 더위를 피해 온 사람들로 제법 들썩대는 곳이다. 계곡이라고 하기엔 폭이 넓고 강이라고 하기엔 수심이 얕은 곳이다. (벽계구곡 입구를 수하구곡 또는 수하계곡이라 따로 부르고,상류 쪽을 명달계곡,곡달계곡이라 따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결국은 모두 같은 계곡이라 볼 수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노문리와 명달리는 수도권의 숨겨진 비경 가운데 하나이다. 노문리, 명달리 일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두메산골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오지 특유의 차분함과 신선함이 계곡의 바위 하나 하나에 배어있다.

 

구곡이란 제1곡 외수입(바깥 무드리), 제2곡 내수입(안무드리), 제3곡 형지터, 제4곡 용소, 제5곡 별소, 제6곡 분설담, 제7곡 석문, 제8곡 속야천(속샛부락 앞을 흐르는 내), 제9곡 일주암(갈문부락의 선바위)을 가리킨다. 가장 안쪽에 있는 일주암으로 가는 길은 약간 까다롭다. 노문리 마을 끝머리의 민박집에서 숲길을 10분 정도 헤치고 나가면 계곡 건너편에 등산로가 보인다. 이 길을 따라 다시 10여분 산길을 오르면 일주암을 찾을 수 있다. 일주암은 암자가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기암절벽이다.

 

 

 

명달리는 통방산(659m)과 중미산(834m) 사이에 있는 삼태골 서쪽 기슭에 파묻혀 있는 두메산골이다. 이 마을은 노문리에 살던 벽진 이씨들이 조선조 중엽 무렵 더 깊은 산골로 찾아들어 만든 마을로 지금도 심산유곡을 간직하고 있다. 노문교에서 자동차로 산길을 3.3km 달리면 지금은 폐교된 명달초등학교가 나타나는데 명달계곡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삼태골 기슭에서 시작되는 명달계곡은 망초 등을 비롯한 온갖 야생화와 울창한 잣나무 숲, 시원스런 폭포수 등이 잘 어루러져 선경을 빚어내고 있는 곳이다.

돌아오는 길은 왔던 길을 되돌아 수입리로 나오는 방법이 있으나 명달리에서 문호리로 나가는 산길도 경치가 강원도 심심산골 분위기를 나타낸다. 문호리로 나가는 길 중간에는 180도 커브길에서 조심운전을 해야 한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갑자기 물을 움켜 낸다. 고기 새끼라도 지나가는 듯. 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 을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단발 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 갈밭 사잇길로 들어섰다. 뒤에는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갈꽃뿐. -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

 

▲ 소나기 마을 징검다리 앞에서 ⓒ 2010 한국의산천

 

 

 

 

▲ 중미산 안부에 자리한 중미산 천문대 ⓒ 2010 한국의산천

중미산을 넘어 옥천으로 나와 하루의 여정을 마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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