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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여주 조포나루 신륵사

by 한국의산천 2009. 4. 12.

여주 조포(潮浦) 나루 강변유원지 [2009 · 4 · 12 (일요일) 한국의산천]

 

이중환의 택리지 '경기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온다.

물길은 충주에서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원주 여주 양근을 지나 광주 북쪽 회룡진에 이르러 한양의 면수(面水)가 된다. 여주읍은 강 남쪽에 위치하여 한양과의 거리는 물길이나 육로로 200리가 안된다.

 

읍과 백애촌은 한들로 통하여 동남쪽이 넓게 트이고 기후가 맑고 서늘하며 여러대를 이어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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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북쪽에는 신륵사가 있으며 절 곁에는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강을 임한 바윗돌이 기이하다. (을유문화사 택리지 참고)

 

 

 

▲ 신륵사 앞에 자리한 강변 유원지 ⓒ 2009 한국의산천 

여주에는 이호나루, 조포나루, 새나루, 흔암나루, 찬우물나루, 상자포나루 등 수많은 나루터가 있었다. 그중에서 조포나루는 고려 시대 이후 남한강 5대 강항의 하나로서 세곡운반과 물자수송의 물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 

 

▲ 신륵사 강 건너에 위치한 오토캠핑장 강변 유원지  ⓒ 2009 한국의산천 

봄이 오는듯하더니 날씨는 벌써 여름 날씨처럼 덥다. 캠핑장에서는 야영객들이 벌써 텐트촌을 이루고 있다.

 

▲ 오토캠핑장 강변 유원지 ⓒ 2009 한국의산천

목은 이색은 그의 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들이 펀펀하고 산이 멀다"라고...

조선 초기의 학자 서거정은 " 강의 좌우가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백리에 가득하여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데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데 적당하며, 모든것이 다 넉넉하다"고 하였다.

   

 ▲ 강 건너로 보이는 강월헌과 전탑 ⓒ 2009 한국의산천

강가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본래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그의 당호를 따서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본래의 정자는 1972년의 대홍수로 떠내려가고 이후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것이다.  

 

▲ 신륵사와 강가에 자리한 강월헌(江月軒) ⓒ 2009 한국의산천

신륵사가 자리한 경기도 여주는 조선시대 4대 나루(광나루·마포·조포·이포) 중 조포(潮浦)와 이포(梨浦), 이렇게 두개를 가지고 있을 만큼 사람과 물자가 수시로 드나들던 수운 요지였다. 강월헌 아래가 바로 조포가 있던 곳이다. 사람을 실어나르던 황포돛배와 영월과 정선에서 뗏목을 만들어 서울로 가던 떼꾼, 소금을 싣고 강원도로 가던 소금배가 조포와 이포를 이용했다. 번성하던 나루는 사라졌지만, 여주는 여전히 경기도와 충북, 강원도가 만나는 접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 강가에 자리한 절 신륵사와 강월헌 ⓒ 2009 한국의산천 

태백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 내리며 만든 물굽이 중에 푸근하며 너르게 강폭을 유지하며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한군데라면 이곳 신륵사 부근일것이다. 한강의 상류인 이곳을 이곳 주민들은 여강(驪江)이라고 불렀다. 또한 주변 풍광이 빼어나 예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 여강과 신륵사 강월헌 ⓒ 2009 한국의산천

조선 초기의 학자인 김수온은 그가 지은 신륵사기에 "여주는 국도(國道)의 상류지역에 있다"라고 썼는데 국도란 바로 충청도 충주에서 부터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을 말한다. 신작로나 철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의 물산들이 한강의 뱃길을 타고 서울에 닿았으므로 한강 뱃길을 '나라의 길'로 불렀던 것이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띄운 뗏목이 물이 많은 장마철이면 서울까지 사흘이면 도착했는데 1973년 팔당댐이 생기고 1978년 부터 충주댐 건설에 들어 가면서 '나라의 길'이라고 부르던 뱃길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 나의 애마 '바람의 자유' ⓒ 2009 한국의산천 

 

여강의 유래

 

여주군을 관통해 흐르는 남한강(南漢江)을 여주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르며 수천년을 누대로 애지중지 모셔오고 있다. 여강은 여주를 라말려초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었던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주의 강이라는 자부심과 애착이 오롯이 그 이름에 담겨있다. 
 
이규보는 황려가 여주의 이름이 된 유래를 ‘웅(雄)하고 기특한 쌍마(黃馬, 驪馬)가 물가(마암 馬巖)에서 나오매 현 이름을 이로부터 황려(黃驪)라 하였네. 시인은 옛 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물으나, 오가는 고기잡이 늙은이는 어이 알리’라고 시로써 이르고 있다.

황려(黃驪)의 여강(驪江)은 섬강과 청미천이 남한강에 몸을 담그는 세 물머리(삼합리)부터 이포대교 아래 전북리에 이르기 까지 100리의 물길을 말한다. 남한강에서도 특히 여강은 고려시대부터 이규보, 이색을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들이 머물렀고 나루터만도 12군데, 정자만도 10여 곳이나 자리할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이름 높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는 ‘곧 한강 상류이며 주 북쪽에 있다. 객관(客館)을 강을 베 개하여 지었다’ 하였으며, 여강가 청심루와 객관에 들었던 시인묵객들은 여강풍경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숱한 시문(詩文)을 남겼다.

고려의 문신이요 재상이었던 이규보(李奎報·1168∼1242)는 ‘계수나무 노와 모란(木蘭) 배로 푸른 물결을 가로지르니, 붉은 단장이 물 가운데의 하늘에 아름답게 비치네. (중략) 10리의 연화(煙花)는 참으로 그림 같은데, 한강의 풍월은 값을 논하지 아니하네.’ 라 하였고, 고려 말의 문신이요 학자였던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시에는 ‘여강의 형승은 천하에 드문데, 사시(四時)의 풍경이 천지의 비밀을 헤쳐 보이누나. 내가 처음 와 놀 때는 여름철이어서,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배에 불어 옷에 가득 서늘하였네. 백 척 높은 군루(郡樓)에 두 눈으로 멀리 바라보니,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어 부슬부슬한데 연기가 걷히네’ 라고 노래하였다.         

목은 이색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태동하던 역성혁명의 과도기에 명나라에 외교하여 이성계의 세력을 축출하려 한 죄를 받아 유배길에 올랐다. 그는 불사이군을 명분으로 이성계의 출사종용을 끝내 고사하고 이리저리 유배당하다가 여강(驪江)위에서 독주를 마시고 생전에 애착하던 여강의 귀신이 되었다.


삼도의 세물머리 삼합리(三合里)


삼합리는 섬강과 청미천, 남한강의 세물이 합수하는 지역으로 삼합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하며, 경기도 점동면과 원주시 부론면, 충주시 앙성면의 삼도가 만나서 삼합리라 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 지역이 땅 길과 물길 모두 셋이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삼합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더욱 당연해 보인다.

삼합리에서 강 하구쪽으로 가장 아래인 마을을 단진개라 하는데 남한강 수운이 왕성하던 시절에는 매우 번창했던 마을로 청미천의 하류에 있다. 또한 오갑산 능선의 끝자락에 봉우재라는 산이 있는데 경사가 급한 산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고 깊은 소가 있다하여 이곳을 공양소라 부른다. 공양소는 고려 공양왕이 손곡리를 거쳐 삼척으로 유배를 갈 때 이곳에서 쉬어갔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청미천을 거슬러 올라 장호원에 이르면 청미천을 경계로 감곡1리 매산마을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곳에는 천주교 성모순례지의 명소인 감곡 매괴성당이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한채 청미천을 굽어보며 서있다.  최초의 성당은 현재의 매괴성당 아래로 임오군란때 명성황후가 잠시 피신하기도 하였던 민응식의 집터이며 일본군이 불태워 잿더미가 된 터 위에 세워졌다가 현 위치로 옮겨 세워진 것이다.  매괴성당은 111년 전인 1896년에 성모님께 봉헌된 이후 수만은 신비한 일들이 있었다고 하며 한국 최초의 성체현양대회가 개최된 장소이기도 하다.

서해나 마포 등지의 서울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들은 소금, 새우젓, 생필품 등 각종물자를 남한강에 산재한 포구에 부렸으며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장시가 성황을 이뤘다. 규모가 작은 평저선들은 청미천과 섬강 등 지천를 통해 장호원, 문막 등 상류로 짐을 옮겼고 다시 봇짐과 나귀등에 실려 인근으로 퍼져나갔다.

고려와 조선의 1번 국도이자 경제의 통로인 남한강 뱃길을 따라 사회와 문화가 형성되고 소통되면서 소금배에 실려 종교도 함께 들어왔다. 19세기를 전후하여 기독교와 천주교 등 서양의 종교는 내륙으로 손쉽게 통하는 물길을 따라 선교사를 실어 올렸다.
강천교회와 매괴성당, 감리교와 성결교, 천주교는 모두 새우젓 냄새를 맡으며 남한강유역에 들어와 처음으로 십자가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여주를 가로지르는 여강의 유래 작성자 : 코난보이

 

▲ 2005년 7월 19일 촬영한 옛 조포(潮浦)나루터의 황포돗배 선착장  ⓒ 2009 한국의산천

▲ 바람따라 바람처럼 길을 달립니다 ⓒ 2009 한국의산천

 

가고 싶었던 길 http://blog.daum.net/koreasan/15604144

남한강 부론면 흥원창지 : http://blog.daum.net/koreasan/15604143 

강천리 아름다운 강마을 :  http://blog.daum.net/koreasan/15604142

길에서 만난 사람과 사람 : http://blog.daum.net/koreasan/1560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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