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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남한강 흥원창에서 조포나루까지

by 한국의산천 2009. 4. 12.

부론면 옛 흥원창 풍경 [2009 · 4 · 12 (일요일 새벽 03시 30분 흥원창 도착) 한국의산천] 

 

▲ 아주 캄캄한 밤에 조리개 2.8 셔터속도 10초를 놓고 촬영하니 건너 산이 어슴프레 나왔습니다 ⓒ 2009 한국의산천 

강 건너편 산아래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의 라이트 불빛 궤적이 나왔습니다. 10초간 이동한 궤적이.... 

 

흥원창지(興原倉址) - 고려시대

흥원창지(興原倉址)는 부론면 흥호2리 71번지 일대에 소재하고 있다. 흥원창은 조세미(租稅米)의 수송을 위하여 수로 연변에 설치하였던 창고로 강상수송을 맡았던 수운창이다.

조창 제도가 완비된 것은 고려 성종 11년(992)경 이었다. 세금으로 바치던 쌀의 수송은 국가재정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그 운영에 관하여 매우 철저하였다. 정종 때에는 12창의 수송선 수를 정하였는데, 이 당시 흥원창에는 2백섬씩을 운송하는 배를 21척 배치하였다고 전한다. 아울러 이러한 조창에는 횡령 등 각종 부정한 행위를 막기 위하여 조창을 감독하는 관리 즉, 창감(倉監)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때 흥원창에는 원주를 비롯하여 평창·영월·정선·횡성·강릉·삼척·울진·평해군의 세미(稅米)가 운송, 보관되었는데, 이들 지역에서 흥원창까지는 주로 육로로 운송되었고, 흥원창에서 뱃길로 한양으로 운반되었다.
이후 고려말에는 몽고 등의 침략으로 인해 조창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다시 정비가 이루어졌지만 이전처럼 활발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원주의 주요 관창(官倉)은 읍내에 있는 사창(司倉)과 별창(別倉)을 제외하고 북창(北倉)[안창(安倉)], 서창(西倉)[흥원(興原)], 동창(東倉)[주천(酒泉)]등 3개의 창고가 있었다.이 중에 서창(西倉)의 경우 흥원(興原)에 있었기 때문에 흔히 흥원창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12조창(租倉)의 하나로 문막쪽으로 흘러나오는 섬강이 남한강 주류와 합류되는 곳으로 '은담포'라고도 하였다.


조창이 주로 이용되었을 때에는 문막이 중간 포구(浦口)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문막이 원주보다도 경제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흥원창지는 지역적으로 섬강과 충주 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이 만나 여주쪽으로 흘러가는 합류(合流) 지점이다. 조선시대에도 흥원창은 그대로 이어졌지만 관선조운이 쇠퇴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 사선업자에 의한 임운이 행해지면서 조창의 기능을 점차 상실했으며 이곳에는 한국전쟁 직전까지 뱃터가 남아있어 장터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모두 사라졌다.

 

 

▲  흥원창지 안내문 ⓒ 2009 한국의산천

 

우리나라는 평야보다 산지가 많으므로 옛날에는 도로교통보다는 하천과 바다를 이용하는 수운교통이 발달하였다. 고려 초기부터 조세를 징수하였으며 조세로서는 미곡을 징수하였다. 이것이 세미(稅米)이다.
각 지방의 세미는 주로 하천을 이용하여 운반하고 하구에는 창고를 설치하여 집하하였다. 고려시대는 남도에 12창(倉)을 설치하여 각 창에는 판관(判官)을 두어 그 지방의 세미를 징수하였다. 12창에 모인 세미는 주로 서해안을 따라서 주운으로 중앙의 경창(京倉: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는 창고)으로 수송하였다. 당시 설치하였던 남도의 12창은 다음과 같다.

․충주의 덕흥창, 아주의 하양창(아산), 보안의 안흥창(부안), 영광의 부용창, 성주의 해룡창, 나주의 해능창, 원주의 흥원창, 부성의 영풍창(서산), 임파의 진성창, 영암의 장흥창, 사주의 통양창(사천), 합포의 석두창(창원)

이 이외에 서해도(황해도) 장연현에 안활창이 있었다. 각 지방의 창고에 모인 세미는 선박으로 서해안과 예성강을 거쳐서 수도인 송악의 경창으로 수송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조운선(漕運船)은 북한강의 소양강창(춘천)과 남한강변의 가흥창(충주) 그리고 흥원창(원주)에 집하한 세미를 한강을 따라서 서울의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특히 한강, 대동강, 낙동강 등의 대하천은 물자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하천의 주운은 한일합방 후, 도로와 철도의 발달로 급격히 쇠퇴하였다. 

 

▲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 2009 한국의산천

산 스스로 물을 나누는 고개가 된다. 그렇기에 산의 능선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市·道의 경계지점이 되기도 한다. 

산은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이곳은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 이루어진 합수물로 '은담포'라고도 한다. 그 당시 이곳에는 2백섬씩을 운송하는 배 21척이나 배치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고 한다.

 

▲ 흥원창 팔각정에서 바라 본 강 건너편 ⓒ 2009 한국의산천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의 금대산 북쪽 기슭 검용소에서 발원하여 정선을 지나 영월에서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류한 뒤 충청북도 단양을 거쳐 충주로 흐른다. 충주의 충주댐을 지나 달천과 제천천 등을 만나 북쪽으로 흐르며, 강원도 남서부를 흐른 섬강줄기를 만나 여주군 관내에 들어서며 여강이라 불린다. 이후 여강은 여주와 양평을 지나 팔당댐 상류인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거대한 한강(큰강)을 이루게 된다.


남한강이 섬강을 만나는 지점이 바로 흥호리 흥원창 창말 지역이다. 행정지명으로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며, 건너편에는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 인근지역에는 충청북도가 있다.

흥호리는 지명 그대로 잔잔하면서도 넓은 남한강이 산중 호수의 모습을 연상케 하며, 여강에 저녁 해가 떨어지는 해질녁 장관은 장엄하기조차 하다. 

 

 

둑에 올라서자 흥호리(興湖里)라는 이름 그대로 깊이를 알 수 없는 강은 호수처럼 넓고 잔잔했다. 굵은 남한강 줄기에 비하면 냇물 같은 섬강은 슬그머니 호수와 같은 강에 몸을 섞어 여주로 향한다. 한때 이곳에도 나라의 조곡(租穀)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충주의 가흥창과 더불어 남한강의 중요한 창이었던 흥원창(興原倉)이 그것이며 가흥창의 전신인 덕흥창과 함께 고려 초에 만들어진 12조창(租倉) 중 하나였다. 주로 평창이나 정선 그리고 횡성, 원주와 같은 강원도 영서내륙지방의 전세(田稅)가 모이던 곳이다. 

 

▲ 조리개 2.8 셔터속도 10초 ⓒ 2009 한국의산천 

 

멀수록 가까운 산

다가가면 더욱 멀어져 가는 산.

 

하냥 다짐하듯 그리워라

더듬듯 기어들면,

 

우리가 어머니라 부르는 조국의 품 안

그 갈매빛 속고갱이.

 

산은 그래서

발로만 오르는 것이 아니다.

머리로 아니 가슴으로 헤쳐 올라야 한다.  

 

 

 

 

 

▲ 남한강 뚝바위 ⓒ 2009 한국의산천

남한강과 섬강의 합수목을 이루는 강변을 따라 약 1km 폭으로 암벽이 형성돼 있는 뚝바위는 단일 암장으로서는 드물다 싶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클럽8848팀은 현재 3개 지역으로 나뉜 예솔암 중 맨 좌측 소암(小岩)에 쉐펠(5.10a)을 비롯해 11개 루트를 내고, 중앙 하단부가 오버행을 이룬 중암(中岩)에 8848(5.10c)과 하이라이트(5.12b)를 비롯해 12개, 그리고 표고 120m 높이의 대암(大岩)에 ‘FM의 전설’(5.9~5.11b)과 예솔(5.9~5.10b) 등 6개 루트를 냈다. 이에 따라 예솔암에는 90년대 초 여주 FM산악회가 개척한 6개 루트 등 총 35개 등반로가 새롭게 선을 보였다.

 

▲ 남한강 뚝바위 ⓒ 2009 한국의산천
 
남한강과 섬강 합수머리에 솟구친 암벽

남한강과 섬강이 합쳐지는 뚝바위 일원은 고려 때부터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 일원의 조곡(租穀)을 모아 한양으로 운송하는 거점이었다. 뚝바위 건너편 강둑 아래 있는 흥원창(興原倉) 빗돌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운송거점이자 6·25 이전까지 장이 서고, 나루터로 이용되기도 했던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유적지를 마주하며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절경을 뽐내며 솟아오른 뚝바위에 바윗길이 탄생한 것은 90년대 초. 당시 전문등반을 추구하던 여주 FM산악회 회원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중암에 5개, 소암에 1개 루트를 개척한 후 개척등반을 주도해오던 회원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뚝바위는 또다시 단지 강변의 자연경관으로 남게 됐다. 그러다 2006년 말 원주에서 활동 중인 전양표(원주클라이머스) 회원을 통해 뚝바위에 대해 알게 된 클럽8848팀에 의해 하드프리 대상지인 예솔암으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월간山 참고)

 

 

 

강둑에 설치한 조그마한 정자 안에는 부론면 인근에 있는 문화유적지를 소개한 그림과 안내문구가 있었다. 이 안내판에는 조선중기 문신이자 영의정을 지닌 노수신의 '흥원 배 가운데서 이달에게 주다'라는 한시가 적혀 있다.

 

먼산에는 아름다운 기운 감도는데/긴 물굽이에 해빛이 걷히는 구나/친한 벗이 눈속에 오직 하나 보이는데/향기로운 풀은 주변에 충만하구나/글모임에 그(이달)의 시를 당할 자가 없고/맑은 이야기속에는 술이 멀지 않도다/어찌 벼슬을 근심하겠는가/종일 흥원창 풍파와 함께 있으니.

허균의 스승인 노수신이 흥원창을 소재로 지은 한시다. 

 

 

충주, 원주, 여주를 잇는 수운의 흐름은 수운을 따라 많은 절과 창의 흔적을 남긴다. 충주쪽으로 청룡사, 정토사, 억정사 등과 가흥창이 있고 하류로 가면 신륵사, 고달사가 있다.

 

수운교통이 발달했던 부론면에는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59호),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78호), 거돈사지 3층석탑(보물 750호), 서돈사지(사적 168호), 흥원창, 법천사지 당간지주, 원성법천리 고분 등 유물유적이 널리 있어 당대에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에서의 대사가 떠오른다.

그를 이해 할 수 는 없어도 사랑 할 수 는 있다.

 

오른쪽의 산을 끼고 흐르는 섬강은 앞에서 남한강과 합류됩니다. 섬강(蟾江)은 홍천군 둔내면과 정일면 일대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남서부 횡성과 원주시, 문막 등을 거치며 계천과 원주천, 서곡천, 삼산천, 이리천, 일리천, 옥산청 등이 합수되어 남한강에 합류됩니다. 

 

▲ 너무 한적한 도로 ⓒ 2009 한국의산천 

봄볕 따사로운 날에 개나리 만발한 한적한 도로를 달렸습니다. 마치 꿈결같은 아주 좋은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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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었던 길 http://blog.daum.net/koreasan/15604144  

강천리 아름다운 강마을 :  http://blog.daum.net/koreasan/15604142

여주 조포나루 강변유원지 http://blog.daum.net/koreasan/15604141

길에서 만난 사람과 사람 : http://blog.daum.net/koreasan/1560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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