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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나그네 박목월

by 한국의산천 2008. 3. 12.

봄이 오는 날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를 외우며 나룻터 돌아보기

[2008 ·3 ·12 수요일(맑음) 한국의산천]  

 

 

▲ 이포나루 ⓒ 2008 한국의산천  

 

▲ 양평 두물머리(양수리) ⓒ 2008 한국의산천  

 

한반도의 중심을 적시고 흐르는 큰 물줄기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양수리. 우리 조상들은 이곳 양서면 양수리 일대를 큰 줄기 두곳이 머리를 맞대는 곳, 즉 '두물머리(兩水里)'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렀다. 

 

두물거리·두머리·두거리·양수두·양수 등으로 불렸던 양평의 두물머리는 적어도 남한에선 규모가 가장 큰 합수점이다.

이곳은 강폭이 아주 넓은 탓에 마치 제법 큰 호수에 온 듯 고요한 물결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여기서 부터 발원지까지의 거리가 남한강 줄기가 394.25km, 북한강 줄기가 325,5km 에 이른다. 

 

 

▲ 양평 두물머리(양수리) ⓒ 2008 한국의산천 

 

한말당시에는 느티나무가 있는 이곳을 말죽거리로 불렸다. 강물을 건너 말에 죽을 먹이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고 주막에서 목을 축이는, 서울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느티나무 아래를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의 말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말에서 내려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두물머리의 지금 풍경은 한가한 수채화지만, 팔당호라는 인공호수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한강에서 제법 번잡한 편에 속하는 나루터였을 것이다.

그 옛날 삼남대로의 갈림길인 천안삼거리가 유명했다면, 물길에선 양평의 두물머리도 제법 큰 삼거리였다. 

서울과 강원·충청지방 간의 수송물자 나르는 배가 휴식하던 곳이며, 예전엔 술을 파는 객주집도 넘칠 정도였다. 

지금은 동네 주민이 운영하는 찻집과 간이 커피포장마차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두물머리(양수리) ⓒ 2008 한국의산천  

 

▲ 홍천강 황골나루 ⓒ 2008 한국의산천   

 

 

                                                                ▲ 일러스트=잠산

 

이 시는 박목월(1916~1978)이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펴낸 3인 시집 '청록집'(1946)에 실려 있다.

임시 정가 30원의 '청록집'을 발간한 이후 세 명의 걸출한 시인들은 '청록파'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 서정시의 큰 산맥을 이룬 이 3인은 모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경주에 살고 있던 박목월을 조지훈이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이 시는 박목월과 조지훈의 각별한 관계에서 태어났다.

'목월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조지훈의 시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으로 이 시를 썼기 때문이다.

'완화삼'의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의 한 부분인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를 부제로 삼았다. '완화삼'의 시어인 나그네와 구름과 달과 강마을과 저녁 노을을 그대로 받아서 썼다. 다만 '완화삼'이 나그네의 구슬픈 우수(憂愁)를 더 드러내면서 가야 할 앞길의 정서적 거리를 '물길은 칠백리(七百里)'로 표현했다면, '나그네'에서는 물처럼 바람처럼 걸림 없이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의 길을 표표히 가는 나그네의 심사를 부각시켰다.

 

이 시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접한 최초의 시였다. 외할머니가 벽에 붙여져 있던 이 시를 '가갸거겨'를 배우던 방식으로 흥얼흥얼하는 것을 곁에서 들었다. 그처럼 이 시는 우리말의 가락이 아주 잘 살아 있다. 

 

조지훈은 박목월의 시에 대해 "압운(押韻)이 없는 현대시에도 이렇게 절실한 심운(心韻)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시를 읽으면 역시 그 평이 그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시를 쓸 때에는 꼭 연필을 깎아 썼다는 박목월. 아이들에게 공책을 사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한지를 묶어 공책을 만들어줄 정도로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던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山)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산이 날 에워싸고')고 노래한 박목월. 시를 알게 되면서부터 본명 박영종(朴泳鐘) 대신 '木月'이라는 큰 자연의 이름을 스스로 붙였던 그. 식민지 현실을 외면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박두진의 말대로 청록파에게 자연은 "온갖 제약을 타개하기 위한 시의 유일한 혈로(血路)"였는지 모른다. 그 한가운데에 '애달픈 꿈꾸는 사람' 박목월이 있다. 문태준·시인 [출처 ⓒ Chosun.com] 

 

 

 

▲ 목계나루 표석 ⓒ 2008 한국의산천

 

목계나루    

충주땅 들머리 목계교. 남쪽으로 충주 역사 여행의 출발점이다. 목계교 옆엔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가 서 있다. 예로부터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내륙항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량했던 남한강 목계나루. 지금은 '목계나루터'라는 입석이 그 옛날의 번창했던 그 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을뿐이다.

 

목계 충주구간의 남한강은 딱히 빼어나거나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 줄기 그자체만으로도 사시사철 풍광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히는 곳이다.

 

'다시쓰는 택리지'를 읽으며 

1권 후반부에 (344-347쪽)에 "남한강변의 나루들"에서 목계 장터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후기 5대 하항중의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때 호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서 100요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교회,목계반점,목계슈퍼 등 상호만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다시쓰는 택리지 중에서 -  

 

정약용이 쓴 글 중 한강 가에서 살기 좋은 몇 곳을 꼽은 것이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이 쓴 <택리지>를 읽고 쓴 발(跋)이 그것이다. 그 자신도 한강에 잇대어 있는 소내(苕川)에 살지만 그곳은 오로지 풍광만이 아름다울 뿐 생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강에서는 춘천의 천포(泉浦)와 지금의 설악면 일대인 미원(迷源), 그리고 남한강에서는 여주의 백애(白厓)와 충주의 목계를 꼽았다.  

산이 뒤를 막았는가 하면 앞으로는 여울소리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나루터였기에 장터는 언제나 북적거렸으니 그 아니 좋았겠는가.

 

표석  그옆에는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가 서있다.  

 

 

▲ 목계나루터 안내碑 ⓒ 2008. 한국의산천

남한강의 목계나루는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다.

곡식 사백 가마니를 실은 배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었고, 나루 건너편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가흥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과나무 몇그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목계나루 풍경 >>> https://koreasan.tistory.com/12777438

 

목계나루 거돈사지 법천사지

목계나루 답사 2007년 10월 16일.날씨 아침 안개 자욱 흐림, 맑음 지난 5월 목계나루터부터 - 봉황리 마애석불 - 장미산성 - 고구려비 - 중앙탑 - 누암리 고분군 - 창동 5층석탑 - 창동마애불 - 탄금대

koreasan.tistory.com

 

 

▲ 조포나룻터 옆에 있는 강월헌(江月軒) ⓒ 2008 한국의산천

우리나라의 큰강으로 일컫는 한강, 그 한강을 이루는 두 물줄기가 있으니 북한강과 남한강을 말한다.

태백에서 발원하여 충주댐을 지나 온 남한강의 물은 북한강과 합쳐지는곳 두물머리를 향하여 흘러간다. 

그 긴강 줄기 중간에 옥토를 이루고 있는것이 있으니 여주와 이천, 여주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는 남한강을 '여주의 강'이라는 뜻으로 '여강'으로 부르고 있다.     

 

▲ 여주 조포나루 ⓒ 2008 한국의산천 

 

수운이 중요시되던 예전부터 신륵사 앞 조포나루는 서울 마포나루와 광나루, 여주 이포나루와 함께 한강 4대 나루로 불리며 충주에서 한양까지 풍물을 실어 나르던 중간 기착지였다.

통행량이 너무 많아 신륵사 하류에 보제헌이 설치돼 숙박을 제공하기도 했다.

경기도 여주의 상징인 황포돛배는 말 그대로 누런 포로 돛을 달고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던 배를 가리킨다. 그러다가 1970년대 팔당댐 건설로 뱃길이 끊긴 이후 그런 모습은 자취를 감췄고 나루터 기능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 여강을 지나는 황포돛배ⓒ 2008 한국의산천 

 

여주팔경
1. 神勒暮鍾 (신륵모종)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2. 馬巖漁燈 (마암어등) 마암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
3. 鶴洞暮煙 (학동모연) 강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4. 燕灘歸帆 (연탄귀범) 강 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5. 洋島落雁 (양도낙안) 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 모습
6. 八藪長林 (팔수장림)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7. 二陵杜鵑 (이릉두견)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8. 婆娑過雨 (파사과우) 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 여주 조포나루에서 바라 본 신륵사 ⓒ 2008 한국의산천

 

신륵사는 강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절이다. 바다를 보고 앉은 사찰은 많지만 절 앞에 강이 흐르는 사찰은 아마도 이곳이 유일할것이다.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며,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다층 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은 강가의 멋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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