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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추사고택

by 한국의산천 2007. 12. 3.

예산 추사고택    

 

꼭 1년만에 다시 찾은 추사고택 (작년 12월 10일 답사) 

답사일 : 2007. 12. 2. 비 내리는 일요일 [ 한국의산천 ]

답사코스: 도고산 성준경 가옥 - 추사고택 - 면천읍성. 

답사: 산정, 혜진, 추억의연가,평행선,한국의산천 5명. 

 

학문(금석학, 고증학, 실학)과 예술(추사체를 이룩한 서도의 대가)에서 경지를 이룩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추사는 제주도, 북청등에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대략 그 기간이 13년이었다고 하며, 귀양살이 하는 동안 허송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과 서도(書道)를 대성시키는 수련의 시간으로 삼아 일세를 대표 할만 한, 대학자로 서예가로 이름을 남겼다.

 

1840년 추사는 제주 대정읍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친구인 권돈에게 보낸 글귀를 보아도 그의 유배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알 수 있다. 

" 기력은 점차 쇠잔하여 가고 살이 빠져 이제 앉아있기 조차 어렵다" 

힘들고 고통스러울때 그에게 힘을 준것은 다름아닌 학문과 서도연구였다. 

유배형을 받은 김정희가 '추사체'라는 독특하고 기품있는 서체를 완성하고 선비의 곧고 강직한 심성이 집약된 유명한 그림 <세한도>를 완성(1844년)한곳도 바로 유배지 제주도에서였다.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귀양살이 유배지에서 문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우리가 오늘날 추사체라고 부르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가 완성되었으니 아픈 마음속에서 잉태한 위대한 예술이 오늘날 더욱 돋보여지며 추앙받는가보다.

 

▲ 성준경 가옥에서 나와서 추사고택으로 이동 ⓒ 2007 한국의산천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위치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일대( 추사고택 관리사무소 041 - 330 - 2553 )

 

신례원에서 당진으로 가는 길가인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조선조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였던 추사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후기의 학자, 서화가, 금석학자로 이름을 날린 이가 추사 김정희다. 추사의 본관은 경주(慶州)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박제가의 문하생으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추사가 관심을 가진분야는 참으로 방대했다. 한 예로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연구하기도하고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태조가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것이 아니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도 밝혀내고, 북경에 다녀오며 불경 400여권과 불상을 가지고 와서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다. 당시만 해도 충청도 53현에서 한 칸씩 지은 53칸 집이었으나 행랑채 19칸이 손실되어 현재 34칸만 남아있다. 추사고택은 앞으로는 예당평야가 펼쳐지고 뒤로는 얕은 동산이 있는 명당 터에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안채와 안채 뒤쪽에 사당이 있다. 

 

 

▲ 추사고택 왼쪽에 자리한 추사 김정희선생 묘역 ⓒ 2007 한국의산천   

▼ 지난해 (2006년 12월 10일) 촬영한 사진 ⓒ 2007 한국의산천

 ▲ 지난 해 12월 10일 촬영한 추사 김정희선생 묘 ⓒ 2007 한국의산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은 누구나 알 듯이 추사체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이다. 또한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기반으로 하였던 금석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제학자이기도 하고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정희 선생은 경주 김씨 집안에서 정조 10년인 1786년에 태어났다.  병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뒤에 큰아버지 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어 경주 김씨는 훈척가문에 되었으니, 그의 가문은 그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도가였다.

 

추사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갈 기회를 가졌고, 이 때 중국의 유수한 학자들과 사귈 수 있게 된다. 특히 당대 제일의 학자였던 옹방강(翁方綱)과 깊이 사귀게 되었으며 귀국후에도 서신왕래가 잦았다. 옹방강의 호가 완원이어서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강했던 추사는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지어서 썼으며, 이외에도 예당(禮堂), 시암(時菴), 과파(果坡), 노과(老果)등등 수 백개의 아호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재질은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등이 경술문장이 바다건너 동쪽에서 제일이라고 찬사를 하였고 이들로부터 고증학의 세계와 실사구시론을 배웠다.  

 

▲ 민묘처럼 특별한 장식이 없는 소담한 추사의 묘 ⓒ 2007 한국의산천  

 

진흥왕의 북한순수비의 발견과 금석학에 대한 책자를 내는등 병조판서의 자리에도 오르는 등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렸으나 그의 아버지가 옥사의 배후조종자로 연루됨에 따라 그도 관직에서 밀렸다가 순조의 배려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9년에 걸친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는등 파란만장한 삶이 이어졌다.

추사는 제주도, 그후 북청등에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대략 그 기간이 13년이었다고 하며, 귀양살이 하는 동안 허송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과 서도(書道)를 대성시키는 수련의 시간으로 삼아 일세를 대표 할만 한, 대학자로 서예가로 이름을 남겼다.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귀양살이에서 우리가 오늘날 추사체라고 부르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가 완성되었으니 아픈 마음속에서 잉태한 위대한 예술이 오늘날 더욱 돋보여진다.

그는 글씨와 그림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니 글씨나 그림이 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르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하였다.

1851년에 다시 영의정이었던 친구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이번에는 북청에 2년간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그는 파란 많았던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71세인 185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 민묘처럼 특별한 장식이 없는 소담한 추사의 묘 ⓒ 2007 한국의산천  

명문대가의 후예로 벼슬을 지냈으면서도 상석이나 망두석이 특별나지 않으며 단촐하다. 

완당선생 김정희 묘라고 쓰여진 비석앞에는  행사시 천막 끈을 잡아매는 말뚝 대신에 사용되는 주먹크기의 작은 예쁜 돌이 상석을 중심으로 네군데 박혀있다.

 

양택과 음택이 조화롭게 자리한 추사고택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가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선생의 고택이 있다.
충청도에 산재한 많은 명택 가운데서 제일 먼저 추사 고택을 찾은 이유는 그가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를 통하여 조선 후기 예술의 정수를 국제사회에 보여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추사 김정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영, 정조시대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이른바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이끌던 세력 중심에 서있던 추사라는 인물이 이곳 예산에 자리잡고 있다.

 

집터는 양택의 복지로 선택하고 음택은 명당설로 터전을 잡는다고 말한다. 즉 각각의 형국이 있다는데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양택)은 묘소(음택)와 바로 가까이에 이웃하고 있다. 

▲ 담장의 문을 나오면 우물가에 이른다.ⓒ 2007 한국의산천 

이 샘을 보며 이 우물물을 마시고 이 샘의 맑은을 사용하여 힘차게 한획 한획 힘차게 서예를 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본다.

 

▲  추사 김정희 고택 대문 전경 ⓒ 2007 한국의산천    

계절에 맞지 않게 겨울 비가 내려도 가족단위의 답사 방문자는 꾸준히 몰려든다.  

▲ 대문칸부터 대문간채, 사랑채, 안대문채가 한 단씩 높아지도록 설계된 가옥구조  ⓒ 2007 한국의산천 

추사고택은 아흔 아홉칸처럼 조성된 대규모 살림집은 아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조화롭게 건물이 구성되어있다. 

 

▲ 고택 앞의 안내소에서 구입한 세한도 복사본 ⓒ 2007 한국의산천 

늘 가까이 두고 보는 책 '유배지 역사기행'의 표지(위 오른쪽 책)에도 세한도가 그려져 있다. 나는 이 세한도라는 그림이 그렇게 명성만큼 아름답거나 수작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볼수있는 눈을 못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처해있는 귀향살이의 황량함과 송백(松柏)과 같은 추사의 마음. 알듯 모를듯한 쓸쓸함과 고독, 독야청정함이 깃들어있음은 느낄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사랑채 문위에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인 세한도(국보 제180호) 복사본이 걸려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뜻하는 세한도는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린 스승을 찾아온 역관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빳빳한 털로 만든 그림붓으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없는 선비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추사체로 쓴 발문이 그림의 격을 높여준다. 

비록 복사본이지만 김정희 선생께서 유배지에서 힘들던 시절의 작품이기에 나 역시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자 표구해서 걸어놓기로 했다.  

 

세한도

세한도(歲寒圖) 종이에 수묵 109.0cm x 23.7cm. 1844년作 (국보 180호)

어떤 역경에 처해도 변함없는 선비의 지조를 비유해서 사용되는 말이다. 간일한 구도, 대담한 생략, 갈필로 이루어진 까슬한 필치 등에 김정희의 농축된 문기가 넘친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소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골로 유배가 된 것은 1840년. 그는 그 후 이곳에서 가시 울타리를 두른 집안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형 생활을 하며 9년을 견뎌야 했다.

  

세한도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대표적인 산수화로서,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중이던 1844년(헌종 10)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는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꼽힌다. 이러한 사연은 그림의 왼편에 쓰여있는 추사의 발문(跋文)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추사는 발문에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의 글귀를 인용하여 권력과 이익에 좌우되는 세상인심과, 그 가운데서도 스승을 잊지 않고 중국에서 구한 귀한 서책을 멀리 귀양간 스승에게 보낸 이상적의 마음 씀씀이를 칭찬하였다. 또한 논어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는 구절은 특히‘세한(歲寒)’이라는 시기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고적하고 어려운 자신의 유배생활을 세한(歲寒)에 비유하고, 송백(松柏)과 같은 기상을 잃지 않으려는 자신의 굳센 의지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넓은 공간에 자그마한 집과 아름드리 송백만이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 추운 시절의 황량한 느낌이 잘 나타나 있다.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 속에 꼿꼿하고 굳센 필치와 메마르고 차가운 먹색이 어우러져 고고한 문기(文氣)를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으로 십 여차례 중국을 드나들며, 스승의 소개로 중국의 명망있는 문사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추사에게서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이듬해 다시 중국 북경에 가게 되었고 옛 친구인 오찬(吳贊)의 잔치에서 세한도를 내보였다. 이 때 자리를 함께 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간의 깊은 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詩文)을 남겼다.

현재 세한도의 두루마리에는 그림 뒤쪽에 이들의 시문이 모두 붙어 있으며, 이외에도 김준학(金準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정인보(鄭寅普, 1892∼?)의 찬문(讚文)도 포함되어 있다.

 

세한도(歲寒圖)가 여러사람의 손으로 전전하다가 일제시대 경성제국 대학교수였던 후지쓰가(藤塚)씨 손에 들어가 그만 일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해방후 우리나라 원로 서예가인 손재형 (1902-1981)씨가 우여곡절끝에 겨우 입수하여 한국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한국인 김정희가 그렸고 중국인들이 그 신기에 놀라 감탄하였으며 일본인들이 탐냈던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 안채 둘러보기 ⓒ 2007 한국의산천 

추사선생이 사용하였던 도장은 추사,완당,예당,담재,시암,등 200여개가 되었으며 붓은 평생에 1,000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부 남아있는 도장과 붓, 벼루등 유물 56점(보물 547호)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  안채에서 우물로 나가는 문 ⓒ 2007 한국의산천 

고택 안채에는 나무가 많지 않다.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가 시집와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ㅁ자 모양의 집안에 나무(木)가 있으면 괴로울, 부족할 곤(困)자가 되어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고 전한다. 또 안채에는 난방용 부엌만 있다. 이것도 왕실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고 전해진다.

 ▲  사당으로 올라 가는 길과 사당(정면) ⓒ 2007 한국의산천  

 

추사체의 골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완당은 55세때인 1840년 10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속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형벌)되는 유배의 형을 받게 된다. 유배가던 길에 있었던 일로 두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전주를 지날 때 그곳의 이름난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창암은 전형적인 시골 서생으로 요즘으로 치면 지방작가였다. 원교의 글씨를 본뜬 창암의 글씨는 속칭 유수체라 하여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영락없이 시골 개울물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꾸밈없고, 스스럼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 창암이 완당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한 것이다. 완당은 이때까지만 해도 배 갑판 밑에 모여사는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 등 최고의 붓과 종이로 글씨를 쓴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창암의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일순 당황했을 성 싶다. 그때 창암은 완당보다 열여섯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었다. 현장엔 그의 제자들이 쭉 배석해 있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창암은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저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전주를 떠난 완당은 해남 대둔사로 향했다.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대웅보전(大雄寶殿)' 네글자가 원교의 글씨였다. 완당은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하고 지필묵을 가져오게 해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글자를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참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이 두가지 전설은 완당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원교의 글씨를 낮추어 보는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골격은 힘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9년뒤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당은 대둔사에 다시 들러 떼어내리게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게 했으며, 전주에 들러 창암 이삼만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3년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그래서 그의 묘비명을 써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 사당에서 내려본 고택지붕ⓒ 2007 한국의산천   

 ▲ 한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사랑채 아궁이 위에 눈썹지붕 ⓒ 2007 한국의산천

눈썹지붕이란 아궁이 위에 작은 지붕을 달아 부엌일을 보는 이에게 눈,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한 배려   

 

▲  정원의 모란을 배경으로 석년이 새겨진 돌기둥 ⓒ  2007 한국의산천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이 돌기둥은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으며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선생의 아들인 상우(商佑)가 추사체로 쓴것을 각자한것이다.   

 

▲ 기둥마다 주련이 있다.ⓒ 2007 한국의산천 

기둥이나 벽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좋은 글귀나 명문장을 따서 붙인 판으로 주련(柱聯)이라고 한다.ⓒ 2006 한국의산천

 

▲  고희부처아녀손ⓒ 2007 한국의산천

주련은 2개의 글귀가 모아져 하나가 되고, 추사고택 42개의 기둥에 추사가 쓴 글씨들을 붙여 놓은 주련 21개가 걸려있는데 그 중에서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글씨가 너무나 유명하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희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세상에서 제일가는 반찬은 오이와 새앙과 나물이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들의 모임이라.
 

▲ 대문 안쪽에 붙어 있는 주련 ⓒ 2007 한국의산천  

 

 ▲ 주차장. 이 돌비석 뒤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  고택에서 백송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한 화순옹주 정려문ⓒ 2007 한국의산천  

 

열려문 솟을 대문에 쓰여진 홍패

"열려 수록대부 월성위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정효공 김한신 배화순옹주지문"

 

추사선생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영조의 차녀)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명정한 열녀문이다.

영조는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이 죽은 후 딸인 화순옹주가 곡기를 끊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히 이곳까지 내려온 영조가 딸에게 밥을 먹으라고 명했지만 뜻을 거스르고 굶어 죽는다.

그 당시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게 큰 죄이므로 정려문을 하사하지 않았는데 화순옹주의 조카인 정조가 정려문을 하사해 임금의 핏줄로는 유일한 정려문이 이곳에 생겼다. 정려문 옆으로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다. 월성위 묘의 비석이 어필이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 열려문 안의 풍경 ⓒ 2007 한국의산천  

현재는 솟을 대문의 행랑채만 남았으며 안에 있던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터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  추사가 손수 심었다는 백송ⓒ 2007 한국의산천 

신기할 정도로 하얀 분가루를 칠을 한 듯 나무 몸통이 하얗다.

천연기념물 106호인 백송은 180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수행했던 추사가 연경에서 돌아오며 가지고 와 고조부 김홍경의 묘 입구에 심어놓은 것으로 옆에 있는 키 큰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수령이 약 200년이 되고 높이는 약 10m인 백송은 지상 50cm쯤에서 세 줄기로 갈라져 자랐지만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 남아있다. 전국에 5개 밖에 없다는 백송 천연기념물 중 영조가 하사해 서울 추사의 본집에서 자라고 있는 백송과 함께 추사 가문의 상징이 되었다. 

▲ 몸통이 하얀 백송 천연기념물 106호 ⓒ 2007 한국의산천  

 

추사 고택 가는 길  
1) 서울 - 경부고속도로 - 천안IC - 예산 - 덕산방면 - 수덕사방향
2) 서울 - 서해안고속도로 - 서해대교 - 송악I·C - 국도32호선(신암) - 군도5호선(2㎞) - 군도7호선(2㎞)

 

추사 고택가는 길은 서울과 경인 지역에서라면 두 길이 있다. 일단 예산까지 가야하는데,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천안~온양~예산 잇는 길이 있고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면 당진 IC 와 해미IC에서 예산방향으로 접근한다 경부고속도로 천안IC에서 예산까지는 온양을 거쳐 신례원에 이르게 된다. 이 곳 신례원 사거리를 놓치면 않된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1.5km를 가면 계촌리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4.1km쯤 들어가면 추사 고택이다. 주차장은 넓은 편이다.

 

관람시간은 9시부터 6시까지, 입장료는 어른 500원. 청소년300원. 어린이200원
주변명소 : 현충사, 윤의사고택, 면천읍성, 수덕사, 고건축박물관, 해미읍성,온양온천, 덕산온천, 도고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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