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봉수산 봉곡사 정약용

by 한국의산천 2007. 11. 5.

봉곡사와 봉수산  

 

▲ 봉곡사로 올라가는 멋진 송림길 ⓒ 2007 한국의산천

송림을 지나 봉곡사를 둘러 본후 산으로 약 1km 정도 오르면 알바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봉곡사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봉수산 기슭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 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887년 (진성여왕)에 도선이 석가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조선시대 (1419년 세종 1)에 함허가 중창하였으며, 산 이름을 봉수산이라 하였다.
  

 

충남 아산 봉곡사와 다산 정약용의 인연

1795년 겨울,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다산은 온양 서암(봉곡사)에서 목재 이삼환등 13명의 실학자들과 10일동안 봉곡사에서 강학회를 열었다.다산은 그때의 일을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 남겨두었다. 

※ 여기서 금정이란 충청도 홍주에 소속된 역원(驛院)을 말한다.
 

성호 이익 학술 추모대회 (지금으로부터 212년전의 일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호선생님  

금정으로 좌천된 다산 정약용은 오랫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가질수있었기에 오랫만에 얻은 시간을 성호이익의 문집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마침 부근 예산의 감사(坎舍)에 이익의 증손자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이 살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호 선생님 (郁郁星湖子)이라고 성호의 호에다 '자(子)' 자를 붙일 정도로 사숙했던 정약용은 이삼환에게 편지를 보냈다.

 

" 연전에 선생님이 서울로 오셨을 때 너무 바뻐서 가슴속에 쌓여 있는 의심을 토로해서 대군자의 넓고 깊은 지식을 이끌어 내지 못한것이 늘 한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부임하여 머무른 곳이 마침 이곳이어서 선생님이 계신곳과 거리가 몇십리에 지나지 않아서 댁에 찾아가서 가르침을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평소에 품었던 아름다운 회포를 풀 수 있을지 위로 됩니다. -목재 이삼환 선생님께 올림니다-  "

  

그리고 성호를 기리는 강학회를 열자고 제안도 했다.

" 아아, 우리 성호 선생님 (星湖夫子)은 하늘이 내신 영걸스러운 인재로서 도(道)가 망하고 교화가 해이해진 뒤에 나셔서 회재(晦齋 : 이언적) 와 퇴계(이황)를 사숙하여 심성의 학문과 경제의 사업을 경위로 삼아 수백여편의 저서를 써서 후학들에게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성호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에대해 이가환형과 상의 하시는지요?

 

정약용의 편지는 '가까운 절간에서 화합해' 성호의 사상과 문집을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정서하기 위한 종이를 비롯한 모든 경비 또한 자신이 대겠다는 것이었다.

종조부의 문집을 정리한다는데에 이삼환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정해진 가까운 절간이 온양의 석암사(石岩寺: 봉곡사) 였다.

석암산에 있어서 석암사라고 부르지만 원래 봉곡사(鳳谷寺)였다.

 

정약용은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서 봉곡사는 온양의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광덕산이요 서쪽은 천방산이다. 산이 높은데다 첩첩이 쌓인 봉우리에 우거진 숲, 깊은 골짜기가 그윽하고 오묘해서 구경할만했다"라고 적고 있다  

  

정약용이 눈 덮힌 봉곡사에 도착한 것은 1795년 (정조19년) 음력 10월 26일 이었다

이튿날 예순살에 접어든 이삼환이 도착하고 내포지역의 남인학자들이 차례차례 모여들었다. 이명환(이삼환의 아우),이재위(이삼환의 조카), 이광교, 권기, 강이오, 강이인, 강이중(강이인의 재종 동생),이유석, 심로, 오국진, 등으로 모두 열세명이 모였다. 

 

강학회는 11월 5일까지 열흘동안 계속되었는데, 참석자들은 새벽마다 개울로 나가서 얼음물로 씻고 양치질을 했다. 저녁이 되면 산등성이를 산보하며 주변경치를 감상했다.

 

정약용은 윤진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 때마침 첫눈이 내려서 서남쪽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빼어나게 높고 엄숙해 석양을 우러러보니 마음이 황홀해서 북계(北溪)를 달려 올라갔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북계 윤취협 진사에게 보낸 편지>   

 

낮에는 성호의 유고를 정리하고 밤에는 학문에 대해 강론했는데, 이삼환이 좌장으로 질문하면 다른 선비들이 답하고 다른 선비가 모르는 것을 물으면 이삼환이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성호의 많은 저서중 <가례질서(家禮疾書)>를 표준으로 삼아 이삼환이 교정을 보고 디른 선비들이 이를 베꼈다. 정약용은 이때의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날 여기 모였던 선생의 문하가 이 절문을 나가 한번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막연히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고.....혹은 선가(禪家)나 도가(道家)의 교리를 가지고 참된 길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여기 동요되어 스스로 게을러지거나 현혹되어 성호의 학문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식견과 취향이 거칠어 징뿐 아니라 도리어 진취에 방해가 될 것이다. 마침내는 본원(本源)이 혼탁하여 점차 밝음을 잃고 끝내는 유용한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요순의 경지에 들어가게 어렵게 될것이니어찌 주자(朱子)의 무리가 될 수 있겠으며, 또한 성호의 후학이 될 수 있겠는가. 책을 베끼는 여가와 이와 같이 서로 경계하고, 마침내 그 뜻을 말하고 그 일을 읊어서 각기 아래와 같이 시를 짓는다. <봉곡사시서문> 

     

정약용이 굳이 주자를 강조한것은 천주교 신자라는 혐의로 사실상 유배(좌천)온데 대한 자기 방어였다. 이때 모인 선비들이 시를 지었다.  

 

비 내리는 옛절에 밤은 깊은데 

산 구름 첩첩하고 땅 또한 궁벽하네 

술잔 기울이며 열흘동안 모여서 

기름 부어가며 새벽까지 불 밝혔네 -이삼환-

 

선비들이 절에 모여서

성호의 남긴 글 교정했네

천질은 사람마다 있는 것

밤마다 지세워 유학을 담론했네

좋은 인연으로 금정에 와서 

좋은 가르침 목재(이삼환)께 들었네

절의 부처는 풍경 소리 남겨주고

산신은 흰구름 남겨왔네    -이광교 - 

 

도의 타락하니 세월의 흉흉함을 한탄하다가

저녁나절 벗을 맞아 노경에 기뻐하네

교서하는 보람은 벗과 잠 못자는 일이나

책궤를 지고 이 고생 달게 여기네

아직도 명적(冥謫)을 편안히 여겨

헛되이 몸단장 하려 드네

힘썼음이여! 여러 친구들

교정으로 조석을 보냈네.   -정약용 -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1979) 이래 16년만의 성대한 학회였다. 마지막으로 이 삼환이 의의를 정리했다.

성호가 80년 동안 도학을 강론하신 저서가 집에 가득하다.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분변과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교를 물리친 말씀과 극기복례하여 인을 행하는 가르침은 땅을 지고 바다를 담는 경지였다. 또 육경과 사서등의 서적에 모두 질서를 저술해서 고금의 성현들의 은미한 말씀과 심오한 뜻을 다시 찬란학 밝혀 털끝만큼도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더 할 수 없이 위대하다.

그러나 그 편질이 너무 많고 아직 탈고를 못했는데 그 당시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분들은 모두 떠났고 , 후학들이 학문이 얕아서 끝내 그 책임을 감당 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나의 친구 다산이 마침 은대(銀臺:승정원의 별칭)로 부터 금정의 역승(驛丞) 직임을 맡아 개연이 이 서적의 수정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이 모임은 금정에 있었던 다산의 발상으로 이루어졌고, 봉곡사로 모이게 된것도 다산의 뜻이었다. 유교 집회가 불교사원에서 이루어진것도 다산이 아니고는 할 수없는 일아었다. - 봉곡사교서기 -   

 

강학회는 오랫동안 벼르던 보람있는 일이었고 성대하게 마쳤다. 

 

▲ 만공스님의 世界一花 (세상은 하나의 예쁜 꽃)  친필이 새겨진 만공탑 ⓒ 2007 한국의산천

  

또한 봉곡사는 절입구의 송림길과 탱화와 만공탑이 유명한 곳이다. 이 절에는 만공스님이 계셨다. 저 유명한 수덕사의 만공스님이 이곳에서 득도를 하셨다고 한다. 그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이 만공탑이다.

주차장 위에 바로 서 있는 만공탑.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에 다 통하던가! 짐작이 가나 가늠할 수 없는 만공탑. 가득찬 것이면서도 빈 것이라 하던가! 또한 짐작이 가나 그 뜻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만공. 절은 아담하다.   

세계일화(世界一花)는 만공스님의 친필이라 전한다.  세상은 하나의 예쁜 꽃?
 

▲ 봉곡사를 지난 후 봉수산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알바위 ⓒ 2007 한국의산천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알은 곧 세계다.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한 나래를 펼친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 한다.' - 데미안에서-

 

지금으로 부터 212년 전 당대의 남인 학자들이 모여 성호학을 강론했던 봉곡사, 이제는 다산의 흔적은 찾아 볼 수도 없고 억새만이 가을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존경하는 대학자 정약용 선생님

쉬지 않고 이어진 유배와 귀향살이에도 굴하지 않고 살다간 위대한 학자 정약용 선생. 오늘의 위대한 학자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역경 속에서도 정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역사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새삼 반추하게 된다.  -한국의산천-

 

봉곡사, 봉수산 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 - 아산 - 온양 온천역 - 공주방향 39번 국도 - 유구방면 - 데이콤 기지국,송악 외암마을 앞을 지나 - 송악 저수지 - 송악 저수지 휴계소를 지나 약 300m 가면 봉곡사로 들어가는 이정표(우회전) - 500m 더 가서 커다란 느티나무를 지나서 좌회전(전통사찰이라는 작은 이정표 있음) - 마을을 지나 봉곡사 주차장. 주차장에서 봉곡사 까지 300m.(송림길 전 주차장에 차를 세우시고 송림길을 걸으시는것이 좋습니다)

'문화문학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구든 떠나갈 때는  (0) 2007.11.23
한자락의 가을  (0) 2007.11.15
산 그리고 사랑은 그리움  (0) 2007.10.24
교목 (喬木) [이육사]  (0) 2007.10.22
봉암결사  (0) 2007.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