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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봉암결사

by 한국의산천 2007. 10. 20.

봉암결사 (鳳巖結社) 60주년.

 

1947년 가을에 성철, 청담, 자운, 보문, 우봉 스님이 문경의 봉암사에 모였다.

이들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가풍을 되살리자"고 결의했다.성철 스님은 '부처님 법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다 정리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등 '비불교적 요소'는 모두 절에서 몰아냈다. 비단 가사와 장삼도 모아서 태워버렸다. 그리고 승복을 검소하게 바꾸었다.스님에게 '삼배(옷)'를 올리는 것도 이때 생겼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정신도 따랐다. 스님들이 직접 나무하고, 농사짓고, 밥하고, 물을 길었다. 소작료를 거부하고, 신도들의 보시도 받지 않았다.

 

한국불교 본래의 화두선풍(話頭禪風)을 재정립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봉암결사였다. 봉암결사는 천주교, 개신교 등등 모든 성직에서 봉사하시는 성직자와 판검사, 교육자(교수,교사)가 본받아야 할 마음가짐이라 생각합니다.

 

정치하는 자슥들과 일부 공무원은 봉암결사를 본받을 필요가 없다. 이미 �어 문드러져서 회복불능이라 생각하기에...

 

 수행은 뒷전이고 물욕에만 눈이 어두워, 연예인도 아닌 주제에 대형 고급차에 비단가사를 걸치고, 운동부족으로 인해 비만걸린... 스님 흉내만 내는 돌중들은 봉암결사의 정신을 깊이 깊이 새겨야 한다. -한국의산천-   

 ▲서산대사 휴정스님의 시로서 근래 일각에서는 조선후기 문신인 이양연의 시라는 설도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1948년 남북협상 길에 나선 백범 김구 선생님이 38선을 넘을 때  이 시를 읊으며 자신의 의지와 각오를 다졌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님은 이 구절을 즐겨 쓰셨다고 합니다.  

 

희양산 

 

▲ 봉암사가 자리잡은 문경 희양산 (998m) ⓒ 2007 한국의산천

현재 전면코스로는 희양산에 오를수가 없습니다. 수도 정진에 방해가 되기에 모든 길을 폐쇄했습니다.몰래 입장하다가 스님들께 발각되면 아주 혼줄납니다. 
 

희양산(998m)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맥 줄기 중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산이다. 
백화산을 일으켰던 소백산 줄기가 서쪽으로 휘어지면서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그 산들 중 하나가 희양산으로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산이다.  
희양산은 산 중턱에서 정상쪽으로 암벽을 두르고 솟은 모습이  특이하며 옛날 사람들은 장엄한 암벽을 보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 했다. 
지증대사가 희양산의 지세를 보고 '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고 감탄했다.   
산행은 봉암사를 거치지 않는 등산로를 택해야 한다. 은티마을을 들머리로 정상에 오를 수 있고, 홍문정을 들머리로 골짜기를 따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등산로는 은티마을 - 지름티재 - 정상 - 홍문정 코스가 3~4시간 정도 걸린다.  
 

 

 

경북 문경 봉암사

봉암사(鳳巖寺). 1년 중 사월초파일 딱 하루만 개방하는 사찰이다.

1982년 조계종에서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한 까닭에 산문(山門)을 닫았다. 이곳 선원은 수행자들이 법맥을 이어가고 참선하는 곳. 해탈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외지인은 불심을 흐트러뜨리는 대상이다. 하지만 ‘득도’하지 못한 속인들은 감춰진 곳에 더욱 미련이 남고 마음이 가게 마련. 때마침 사월초파일이 다가오니 사찰을 엿볼 기회다.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가득한 문경 나들이를 핑계 삼아 산사의 하루를 만끽할 수 있다. 이날만큼은 외지인의 산사체험이 불경스럽지 않을 듯 싶다.

경북 문경의 희양산을 등지고 골짜기에 터를 잡은 봉암사는 조계종 8교구의 말사다. 

 

봉암사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5년 (서기 879년)에 지증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지증대사가 심충이란 사람의 권유로 현봉암사 자리를 결정하고 그 자리에 있던 큰 못을 매몰하려 하는데 큰 용이 서식하고 있는지라 지증 대사는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으로 좇고 매몰하여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백운대에 계암 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봉암사를 창건할 당시 날마다 그 바위위에서 닭 한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한다. 그후 지증국사의 문손들이 국사의 뒤를 이어 중수하였는데 웅장하고 예술의 극치를 다한 건물이 즐비했다고 한다.

 

중창 80년후에 극락전 한동만 남기고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고려초에 정진국사가 주석하게 되어 중창하여 옛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극락전은 목탑형으로 건조된 건물로서 경순왕이 피난때 원당으로 세운 유서깊은 전각이라고 한다.

중간사적은 기록을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여러번 증수를 거듭 하였다. 순종 원년에도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었으며 1956년 4월 7일에도 큰화재로 소실되었다.

 

봉암사는 신라 선문구산 중의 하나로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유서깊은 사찰인 덕분으로 한때 폐사 위기에 까지 이르렀으나 이제는 증창을 거듭해 옛모습을 되찾고 많은 수도승이 운집하여 수도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대가람 증수 불사가 수삼년째 계속되어 1992년 6월 4일에 대웅전이 완성되었다. 대웅전은 108평의 웅장한 건물이며 삼존불을 모시고 목각형 또한 뛰어난 솜씨의 수작으로 매우 장엄하다. 희양산 일대는 경관이 수려하여 고운 최치원선생의 유적이 여러곳에 전한다. 또한 희양산문이라 하면 당나라에 까지 그실력과 수준이 인정된 선지식의 교단이라고 높이 평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봉암사는 조계종 스님들의 선수련장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특별히 매년 부처님오신 날만 개방한다.
먹물옷을 입은 중이라고 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니, 우리 땅에서 가장 문턱이 높은 절이다. 들리는 얘기론 그동안 봉암사에서 퇴짜를 맞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희양산 뒷자락이 백두대간길이라 산꾼도 많고, 희고 미끈한 화강암 절벽까지 갖추고 있으니 바위꾼들도 앞다퉈 봉암사를 기웃거렸지만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천년을 물려온 봉암의 탑과 부도, 법당을 보고 싶어하는 답사객들도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문턱이 높은가?
한국 불교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는 달마조사의 선맥을 이어왔는데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구산선문이 근간이 된다. 그 구산선문중 하나가 희양산문의 종찰인 봉암사다.


해방 직후인 1947년에는 성철을 비롯해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등이 봉암사에서 한국 불교를 바로잡자고 다짐을 하고 수행에 들어갔다. 이것을 봉암결사라고 한다.(여름과 겨울 3개월 안거에 들어가는 것을 결제라 하고, 9개월 이상을 결사라고 한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희양산 봉암사(鳳巖寺)로 가는 길에는 이정표가 없다.


1982년 조계종 종립 특별선원(禪院)으로 지정되면서 산문을 닫아 걸었기 때문이다. 일반 신도나 향화객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일년 중 하루 사월 초파일 뿐이다. 곧 봉쇄된 성역(聖域)이다.
 

 

1947년 한국 불교의 새 장을 연 봉암사 결사를 주도했던 성철 스님(右)과 청담 스님.
사진은 65년 무렵 북한산 비봉 부근에서 찍은 것이다. [해인사 백련암 원택 스님 제공]
 

올해가 '봉암사 결사' 60주년의 해이다.
'봉암사 결사'란 1947년 성철.자운 스님 등 20, 30대 비구승들이 모임을 만들어 불교 쇄신운동을 벌인 것을 말한다. 이들은 "출가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자"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화두참선에 진력하는 기풍을 일으켰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의 규칙에 따라 스님들이 직접 밭을 매고 곡식을 찧어먹고는 했다. 

 

봉암(鳳巖)이라! 산그늘에 들어서면 일단 그 잘 생긴 바위벼랑이 눈을 잡는다. 879년 신라 때 창건자인 지증대사는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 하여, 스님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하기야 봉암이란 이름 자체만 풀어보면 보통바위가 아니라 봉황바위란 뜻 아닌가? 인수봉 못지 않게 미끈하고 잘 생겼으니 산꾼들이 입맛을 다실만하다. 

 

신라 최치원도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입이 딱 벌어진다. 늦은 아침, 봄햇살은 하얀 바위벽에 부서져 벼랑 아래 크고 작은 법당에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으니 명당은 명당이다.계곡도 수려하다. 봉암사를 빠져나와 10분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애불이 서있는 백운대다.

축제가 열릴 때면 얼음물처럼 찬 계곡수가 쏟아지는 암반 옆에 자리를 펴고 차공양을 하는데, 올해는 28일에 선다공양이 있을 예정이다. 아쉽게도 백운대는 초파일에도 개방불가다. 

 

봉암결사
불교 위상 찾자` 성철·청담 스님 60년 전 결의 [중앙일보]  

 

봉암사 결사 60주년 1만여 승려, 신도 자성의 법회. 법회 시작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다. 대웅전 앞마당에 선 1000여 스님의 가사가 흠뻑 젖었다. 우산이 없는 신도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그 빗줄기를 뚫고 선원 수좌들의 '외침'이 터졌다. 

 

봉암사 주지 함현(涵玄) 스님은 "봉암 대중은 크나큰 책임감을 통감한다. 한 사발의 맑은 죽이 씀바귀처럼 쓰고, 한 가닥 얇은 가사(袈裟)는 태산처럼 무겁다" 최근 수좌들의 침통한 심정을 밝혔다.  

종정 법전스님 도 법회에서 법어(法語)를 내렸다. "곧은 것과 굽은 것을 모두 놓아 버리면 시방의 종지가 한 곳으로 모일 것이요, 정(正)과 사(邪)의 시비가 원융(圓融.모든 법의 이치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구별이 없어짐)을 이룰 것이다."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기념사에서 "60년은 세속에서 환갑의 세월에 해당한다. 그 세월 속에 우리가 봉암사 결사의 뜻을 쇠잔하게 만들었다면 선사(禪師)들에게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관 스님은 또 "추상 같은 계율과 수행 가풍을 이어가는 조계종단을 만들자"고 강조했다.

 

 

늦가을 차가운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용맹정진을 다짐하는 스님의 얼굴에 참회의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중앙일보 김성룡 기자]

조선 500년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불교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승려의 신분은 천민이었고, 절집은 대부분 결혼한 대처승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경북 문경의 대승사에서 함께 수행하던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이 뜻을 모았다.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1947년 가을에 성철.청담.자운.보문.우봉 스님이 문경의 봉암사에 모였다. 이들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가풍을 되살리자"고 결의했다.

 

성철 스님은 '부처님 법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다 정리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등 '비불교적 요소'는 모두 절에서 몰아냈다. 비단 가사와 장삼도 모아서 태워버렸다.그리고 승복을 검소하게 바꾸었다.스님에게 '삼배'를 올리는 것도 이때 생겼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정신도 따랐다. 스님들이 직접 나무하고, 농사짓고, 밥하고, 물을 길었다. 소작료를 거부하고, 신도들의 보시도 받지 않았다. 이 소문은 전국으로 퍼졌다. 전국의 수좌들이 몰려와 선방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사는 오래 가지 못했다.

봉암사가 있는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줄기다. 49년부터 빨치산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결국 50년 3월 동안거 해제 후 봉암사 스님들은 고성 문수암으로 수행처를 옮겨야만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결사 대중은 흩어졌다. 그러나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를 다시 일으킨 역사적.상징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봉암사 결사 스님 중 그동안 종정 4명, 총무원장 7명이 배출됐다. 현재 봉암사는 조계종 종립특별선원으로 선승들의 수행환경을 지키기 위해 25년간 산문을 폐쇄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조용헌 살롱] 결사(結社)의 역사

 

 

▲ 조용헌
 

올해는 1947년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시작되었던 결사(結社)의 60주년 되는 해이다.

이 ‘봉암결사’가 지니는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조선불교는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왜색(倭色)에 많이 물들어 있었다. 이 왜색을 벗겨내고 한국불교 본래의 화두선풍(話頭禪風)을 재정립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봉암결사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결사(結社)는 ‘뜻을 같이하는 스님들이 모인 수행모임’을 말한다. 대개는 불교쇄신의 취지하에 모인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결사를 찾아보면 고려후기에 이루어졌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백련결사(白蓮結社)’가 있다. 정혜결사는 정(定)과 혜(慧)를 같이 닦아야 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1188년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주도하에 시작된 결사이다.

당시 고려불교는 세속화되면서 승려들이 도는 닦지 않고 돈과 권력을 좋아하는 흐름이 있었다. 여기에 염증을 느낀 보조지눌은 당시 승과(僧科)에 합격한 엘리트였지만, 사찰의 주지로 나가지 않는다.

 

제도권 편입을 거부하면서 재야로 나가 기존 불교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운동을 한 셈이다. 그래서 개성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외딴 지역으로 내려가 결사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 선언문의 첫 내용이 “인인지이도자(人因地而到者·사람이 땅에서 넘어진 자는) 인지이기(因地而起·땅으로 인해서 일어서고), 이지구기(離地求起·땅을 떠나서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은) 무유시처야(無有是處也·있을 수 없다).” 그 정혜결사 도량은 순천 송광사(松廣寺)였다. 송광사에서 이후로 16명의 국사가 배출된 배경에는 이 정혜결사의 저력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련결사는 염불수행을 강조한 결사이다. 

 

1216년 원묘요세(圓妙了世)의 주도하에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이루어졌다.

강진은 배가 드나드는 물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인을 비롯한 많은 재가자들도 참여했던 불교결사였다. 고려 이후 조선조로 들어오면 불교는 억불정책의 영향으로 승려들이 도성출입도 할 수 없는 천민으로 500년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일제 36년이었다. ‘봉암결사’는 이 500년의 탄압과 일제 36년의 왜곡을 떨어내고, 본지풍광(本地風光)으로 되돌아가는 역사적 계기였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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