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탄금대

by 한국의산천 2007. 5. 6.

중원 돌아보기  

답사 2007년 5월 5~6일.날씨 흐림 [한국의산천 ]  

 

강물 따라 떠나는 충주 남한강

역사를 품고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  

우리 국토의 한가운데라고 말하는 중원(中原) , 중원문화권의 중심을 돌아보겠습니다

 

답사코스

목계나루터 - 봉황리 마애석불 - 장미산성 - 고구려비 - 중앙탑 - 누암리 고분군 - 창동 5층석탑 - 창동마애불 - 탄금대.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탄금대 (彈琴臺)   

 

 

▲ 입구에 있는 탄금대 유래비 ⓒ 2007. 한국의산천 

 

충주 탄금대
소재지 충주시 칠금동 산 1번지
소유자 사유
지 정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1976년 12월 21일 지정) 

 

충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 옆에 대문산 (大門山 또는 犬門山)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그 아래로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되는 곳이며 산세가 평탄하면서도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좋은 곳으로, 지금부터 1400여 년 전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항상 이곳 산상 바위에 앉아서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 해서 탄금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 3대 악성 가야국 사람 우륵이 신라로 귀화한 것은 신라 진흥왕 때 536년경이라 한다. 신라에 귀화해서 이곳 절벽 바위를 집으로 삼아 가야금 타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하는데 그 오묘한 소리에 젖어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했다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都巡邊使 申砬 장군과 從士官 金汝, 忠州牧使 李宗長 등이 8,000 병사를 문경새재를 내주고 이곳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와를 맞아 분전하였으나 참패하자 천추의 한을 품고 투신 자결한  전적지이다.

 

탄금대에는 현재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 노래비, 탄금정, 탄금대비, 악성 우륵선생 추도비, 신립장군 순절비, 백기당 조웅장군 기적비, 탄금사정, 대흥사, 탄금대 토성 등이 있다. 

 

충주호의 건설로 많은 곳이 물속에 잠겼지만 이곳은 오히려 경치가 좋아져 특히 탄금대입구~탄금대의 구간은 벚꽃계절이 되면 많은 사람이 봄을 느끼러 찾는 곳이다.  

 

 

 

▲ 주차장에서 탄금대로 가는 풍경 좋은 길 ⓒ 2007. 한국의산천 

 

 

▲ 감자꽃 노래비 ⓒ 2007 한국의산천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새싹회가 세운 노래비이다. 이 비에는 항일시인 권태응시인이 쓴 동요 <감자꽃>이 새겨져 있다.

 

자주꽃 핀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 권태응-  

 

 

▲ 팔천고혼 위령탑 ⓒ 2007. 한국의산천

 

임진왜란때 신립장군과 함께 순국한 8천여 병사들을 기리는 팔천고혼 위령탑으로 그간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관한 사적이 패전이었기 때문에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뒤늦게나마 기념물이 세워졌다. 

 

 

▲ 탄금대 사연 노래비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대 야외음악당 앞에 서있는 탄금대 사연 노래비 ⓒ 2007. 한국의산천  

 
1968년 당시 KBS 충주방송국에 근무하던 이병환씨가 글을 쓰고 향토작곡가 백봉씨가 곡을 붙인 <탄금대 사연>은 충주 지역의 대표적 관광지인 탄금대를 소재로 한 노래로 40년 가까이 대표적인 향토가요로 애창되는 곡이다.

  

 

▲ 탄금정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정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대記 비 ⓒ 2007. 한국의산천 

 

 

▲ 신립 장군이 활을 씻으러 오르내린 열두대 ⓒ 2007. 한국의산천 

 

열두대
탄금대 북쪽에 있는 절벽을 ‘열두대’라하는데, 이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순별사 신립장군이 휘하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배수진을 쳐 왜적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군대를 맞아 분전했으나 참패, 달래강에 투신 자살한 곳이기도 하다. 


열두대는 그 당시 신립이 왜적과 격전을 벌리면서 휘하 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해(또는 열을 받은 활을 강물에 식히기 위해) 30여 미터나 되는 절벽을 무려 열두번이나 오르내렸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신립장군이 순국한 자리의 표석 ⓒ 2007. 한국의산천 

 

신립 (申砬, 1546~1592) 

조선 중기의 무장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별칭자 입지(立之), 시호 충장(忠壯) 

 

1567년(선조 즉위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경력(經歷)을 지내고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1583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온 이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군사를 인솔,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159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북상해오는 적군과 대결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패배, 부하 장수인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왼쪽의 절벽이 탄금대이다.ⓒ 2007. 한국의산천 

 

  

▲ 탄금정의 詩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정의 詩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정의 詩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정의 詩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대 표석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대 內에 있는 대흥사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대를 한바퀴 따라 돌면 대흥사를 지나게 된다. ⓒ 2007. 한국의산천 

 

탄금대 토성

탄금대 토성은 대문산에서 가장 동북쪽으로 치우치고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이 곳은 강물을 바라보고 대문산 전체를 감제할 수 있는 곳이다.

이성은 흙으로 쌓았지만 많은 강돌을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축성할 때 가까운 강의 돌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보여진다. 

 

전체 둘레는 약 400m이나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120여m이며 삼국시대 토기편들도 보이고 있다. 이 성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大東地志>를 살펴보면 진흥왕이 娘城에 들러 河臨宮에서 우륵과 그 제자들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므로 낭성은 탄금대에 있었거나 아니면 충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주변 유적지 둘러보기

 

목계나루 http://blog.daum.net/koreasan/11441424
중앙탑.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http://blog.daum.net/koreasan/11441421
탄금대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32
고구려비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27
창동 5층석탑 창동 미륵 중원 청명주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18
누암리 고분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12
장미산성 http://blog.daum.net/koreasan/11441193
봉황리 마애불 http://blog.daum.net/koreasan/11441186 


 

'MTB등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택리지를 읽으며 '안성'편  (0) 2007.05.09
중앙탑.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0) 2007.05.06
고구려비  (0) 2007.05.06
창동 5층석탑 창동 미륵 중원 청명주  (0) 2007.05.06
누암리 고분  (0) 2007.05.06